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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 질병의 의미-
여럿의 하나
아래 그림은 두 종류의 조직시스템을 보여주고 있다.a는 "계층구조"(hierarchical system)라 불리는 것이다.여기서 정보는 "위에서 아래로"(up-down)로 흐른다.명령이 위에서 아래로 일사불란하게 흘러내려온다는 점에서 그 대표적 사례가 군대조직이다.이것은 기계의 작동방식이기도 하다.
일사불란하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b보다 능률적이지만 위기에 직면할 때 유연성이 부족하다.이것은 항상 중심에서 주변으로 움직이는데 중심이 있다는 것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중심이 파괴되면 주변이 즉각 무력화된다는 점에서 단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상하관계는 있지만 상호관계는 없다.상호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상하관계에 의해서 조율된 것일 뿐이다.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호관계는 아니다.시계의 태엽들이 상호맞물리면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전체의 설계에 따라 일어나는 상하관계의 변형일 뿐이다.
반면 b는 "다층구조"(multilevel system)라 불리는 것으로 정보는 "아래에서 위로"(down-up) 흐른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호관계가 아니라 동류들간의 상호관계이다.여기서는 명령하는 주체도 없고 중심도 없다.저마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저자거리와 닮았다.이것은 그만큼 비능률적이지만 특별한 중심이 없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손상되어도 치명적 피해를 입지 않는다.그만큼 유연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부분과 전체간의 관계가 있지만 전체는 부분이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일 뿐이다.그러므로 여기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하관계는 없으며 그것이 있다면 상호관계가 만들어내는 자발적 조직화일 뿐이다.그 장은 군의 사령관 보다는 시장 번영회의 회장에 가깝다.
이 두 모델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a는 하나의 차원 밖에 없다.거기에는 하나의 "이야기"만이 있다.반면 b는 여러 차원들이 중첩되어 있다.성원들간의 "이야기"도 있고,그 성원들이 결성한 전체 조직과 그 성원들간의 "이야기"도 있고,조직들간의 "이야기"도 있다.장군은 장군일 뿐 사병이 될 수 없지만 번영회 회장은 회장이면서 자기 점포를 갖고 있는 그 시장의 한 상인이기도 하다.
여기서 조직은 따로 존재하는 다른 존재자는 아니지만 마치 그러한 것처럼 다른 조직과 관계를 맺는다.이 다층구조에서 성원들은 여러 매개를 통해서 여러 차원들과 관계하고 있다.전자는 본질상 "하나"이지만 후자는 "여럿의 하나"이다.여럿의 하나란 여럿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로서의 성격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런면에서 이것은 단순한 "여럿"과는 구분된다.그것은 여럿의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실재성을 갖는 "하나"이다.그것은 여럿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여럿을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여기에 대한 가장 비근한 비유는 패션의 유행일 것이다.패션을 만들어 내는 고차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은 그것을 유도하지만 그것의 성공여부는 자신도 알 수없다. 먼저 임의의 소수가 그 패션에 매력을 느끼고-그 패션이 자기의 체형에 어울렸을지 모른다-입기 시작한다. 이것이 유행을 탈 경우는 자기되먹임이 성공하는 경우다. 갑자기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증가하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자기되먹임이 시작되면서 그 유행은 발산적으로 퍼져나간다. 이제 이 패션은 개별적 사람들에게 선호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의 옷의 양식을 구속하는 강제성을 가진다. 이것은 전체가 요소들에 가하는 되먹임이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패션이 마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닮아간다. 요소들의 교란은 항상 있지만 그것은 신속하게 저지되고 계의 평형상태는 유지된다. 예컨대 이 유행에 못마땅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럴 경우 그는 "촌스럽다"는 눈총을 받게된다. 그는 촌스러움을 면하기 위해 그 강제에 복종한다. 그는 자기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울며 겨자 먹기로 입게된다. 또는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도 기성복 시장에 그 스타일의 옷외에는 구할 수없어 그 옷을 입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그 계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부지불식중에 하고 있다.
실재하는 것은 항상 여럿의 하나이며 여럿 자체나 하나 자체는 없다.하나라고 생각되는 것도 깊히 들어가 보면 여럿으로 되어 있고 여럿이라 생각되는 것도 시야를 넓혀 보면 하나로 수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 여럿의 하나를 케슬러는 홀론(holon)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리이스어로 전체라는 의미를 가진 "홀로스"(holos)와 조각이나 부분을 나타내는 접미사 "온"(on)의 합성어이다. 실재는 전체이면서 부분이고,부분이면서 전체인 홀론적 속성을 갖고 있다.
위계구조의 각 구성요소들은 각개의 차원에서 그 고유한 권리를 지닌 아전체,즉 홀론이라는 것이다.그것은 자기규제적인 장치를 갖추고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 혹은 자기통제능력을 누리고 있는 안정되고 통합적인 구조로 되어있다.세포,근육,신경,기관 등의 모든 부분들은 자기의 고유한 리듬과 활동양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들은 종종 외부의 자극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그것들은 부분으로서 위계구조상의 더 높은 중앙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준자율적인 전체로서 작용하기도 한다.그들은 야누스(Janus)다.더 높은 차원을 향해 위로 보고 있는 얼굴은 종속적인 부분의 얼굴이고 자신의 구성요소를 향해 아래로 보고 있는 얼굴은 놀랄만큼 자기충만성을 지닌 전체의 얼굴이다.1)
화이트헤드는 하나이면서 여럿인 존재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나 여럿은 잘못된 추상화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그는 이 여럿의 하나를 "현실적 존재"라고 부른다.
궁극적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출해내는,이접(離接,disjunction)에서 연접(連接,conjunction)에로의 전진이다.이 새로운 존재는 그것이 찾아내는 '다자'(多者)의 공재성(共在性,togetherness)인 동시에,또한 그것이 뒤에 남겨놓은 이접적인 다자속의 '일자'(一者)이기도 하다.즉 그것은 그 자신이 조합하는 많은 존재 가운데 이접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다자가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만큼 증가된다.존재들은 그 본성상 접합적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접적인 다자인 것이다.2)
이 여럿의 하나를 우리는 화엄철학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법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이미 一이라고 말한 것이 어찌 一속에 十을 지닐 수가 있다는 말인가.
답:이른바 일이라는 것은 자성으로서의 일이 아니고 연을 이루기 때문이다.그런고로 일속에 십이 있다는 것은 이것이 연을 이루는 일인 것이다.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자성이 있으므로 연기됨이 없을 것이며,일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을 것이다.나아가 10이라는 것도 모두 자성의 십이 아니고 연을 이룸으로 인한 까닭으로 이 때문에 십속에 일을 지니는 것은 이것이 연을 이루는 자성이 없는 10인 것이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성인 것으로 연기를 이루지 않으니 십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다.그런고로 모든 연기는 다 자성이 아닌 것이다.무슨 까닭인가 하면 하나의 연이 사라짐에 따라 바로 일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런 이유로 一속에 바로 多를 갖춘 것을 그대로 연기의 一이라고 할 따름이다.3)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앞의 그림을 다시 보자.그림a는 기계의 모델이며 그림b는 생명의 모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근대 기계론의 철학 이후 생물학과 의학은 a의 모델에 의거해서 생명체를 보아왔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질병"을 보는 눈이다.a의 모델에 의하면 질병은 몸에 발생하는 고장이고 그것은 어떤 경우이든 제거해야할 "악"이다.b의 모델에 의하면 질병은 다자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이다.전자에 의하면 질병은 일자속에 다른 일자의 침입이라는 예외적 현상이지만 후자에 의하면 그것자체가 생명의 본래의 모습이다.말하자면 질병은 생명이 근거하고 있는 삶의 양상이다.아니 질병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질병이란 바로 다자들의 관계맺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천에 있어서 차이를 낳는다.전자의 모델에서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신속히 제거하는가이지만 후자의 문제는 새로운 하나로 이행해가기 위해서 여럿이 만들어내는 이 소란스러움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질병은 가능한한 피해가야할 불행한 사건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내는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창조는 각기 개성이 다른 다자들간의 만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질병은 새로운 진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그 한 사건으로서 원핵세포의 생물체에서 진핵세포의 생물체로의 이행이라는 생명의 진화에서 획을 그은 한 사건을 살펴 보자.
적과의 동침 1
1920년대 알렉산더 오파린(A.Oparin)은 최초의 생명체 -코아세르베이트라 불리는 것-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막을 만들어냄으로써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이 막을 통해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고,불필요한 것을 방출함으로써 최초의 생명의 대사(代謝)가 시작되었다.이것이 안과 밖,자기와 비자기의 차별화를 만들어내었다.이 막이 붕괴되고 바깥과의 차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죽음이 따라온다.
이 과정을 통해 오늘날 박테리아라고 부르는 원핵세포(prokaryote)가 최초로 지상에 출현했다.이것은 우리몸을 이루는 진핵세포(eukaryote)와는 달리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가 핵속에 따로 보관되어 있지 않다.그것은 다른 세포기관들과 함께 세포질내에 산포되어 있다.
1960년대 후반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진핵세포의 기원』(Origin of Eukaryotic Cells)이라는 책에서 당시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가설을 제시했는데 진핵세포는 한 원핵세포 박테리아내에 다른 원핵세포 박테리아의 기생의 결과라는 것이다.그러나 그후 여러 가지 증거가 축적됨에 따라 학계에 널리 공인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4)
이 이론은 자기와 비자기에 대한 아주 흥미있는 함축을 담고 있다.숙주생물체를 A,기생물체를 a라고 하자.사건은 a가 A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시작된다.이것은 A가 a를 포식한 결과이든 아니면 a가 A에 기생한 결과이든 상관없다.전자를 우리는 소화라고 부르고 후자를 감염이라고 부른다.정상적인 경우라면 a의 자기동일성이 와해되면서 A로 바뀔 것이고 후자라면 그 역으로 될 것이다.아직은 자기와 비자기간에 아무런 불분명한 문제가 없다.
중요한 사건은 A가 a를 소화시키지 못해 소화불량상태에 빠졌을 때이다.또는 A의 완강한 저항에 걸려 a가 A내에 증식하는데 제동이 걸렸을 때이다.여기서 어느 일방의 자기화의 시도도 여의치않게 된다.여기서 a는 A에게 불편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는 만성질환으로 바뀐다.이 시점이 대타협으로 전환되어 진화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 전환점이다.이제 A는 a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게 되고 a는 A안에 둥지를 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a는 위험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a는 A에 대한 공격을 멈출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전 재능을 A이 생존을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그것이 자기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이다.이제 자기와 비자기가 통합되면서 더 큰 울타리속의 자기가 출현한다.증오는 연민으로 바뀐다. "미운 정"이라는 우리말 만큼 이 아이러니를 잘 표현해주는 말도 없는 것 같다.
린 마굴리스에 의하면 이것이 진핵세포의 기원이다.진핵세포는 태고에 일어났던 원핵세포들의 합종과 연횡의 산물이며 우리의 몸속에 그 태고사는 각인되어 있다.진핵세포의 핵은 핵막에 둘러싸여 있다.그 막은 태고의 전쟁의 치열했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그것은 침입자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키려고 둘러친 목책이다.이제 그 전투는 끝났지만 이 침입자에게 이 핵안은 여전히 출입금지구역이다.그리고 이제 a는 순치되어 세포내 부속기관외의 다른 것으로 보이지 않아 그 원형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숙주세포와 독립적인 유전기구와 단백질 합성기구를 갖고 있다는 점,그리고 숙주세포에게는 사라진 2분법적 체세포분열을 통해서 증식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 태고에 별도의 독립개체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기생원핵세포 a는 누구인가? 세포내의 에너지 발전기관인 미토콘드리아와 에너지 합성기관인 엽록체가 그 주인공이다.그것들은 태초에 숙주세포로 침투해 들어온 말하자면 병원성 박테리아였다.그러나 이제 이것들 없이는 숙주세포는 생존할 수 없다.마찬가지로 이 기생성 박테리아들도 세포환경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능력을 상실했다.여기에 이르면 이제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된다.이제 이것들은 하나이다.이 철저한 다자간의 합병을 린 마굴리스는 "내공생"(endosymbiosis)라고 부른다.이것은 여전히 다자의 독립성이 유지되고 있는 낮은 정도의 연합인 공생과는 다르다.
이것은 태고에 일어났던 1회적 사건인가? 그렇지 않다.테네시 대학의 전광우 교수는 실험실에서 이 놀라운 사실을 목도했다.1966년 거의 20년간 계대배양해온 아메바가 거의 전멸하는 사고가 그의 실험실에서 발생했다.배양접시가 박테리아에 의해 감염된 것이었다.그러나 다행히 감염되었지만 살아남은 소수의 아메바들이 있었고 그는 이것만을 골라 다시 계대배양했다.세대가 지남에 따라 감염된 아메바들은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아메바내의 박테리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독성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5년후 그는 아메바내의 박테리아를 제거했더니 그 아메바도 죽고 말았다.그야말로 이 박테리아가 아메바의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오랜 세월이 지나면 이제 이 둘을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이즈에 현혹되지 말고 그 사건의 본질을 본다면 숙주세포에 미토콘드리아의 침투나 아메바에 박테리아의 침투는 영화 "에얼리언"(Aliens)에 보인 그 혐오스러운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그 영화는 현대의학의 질병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생사를 건 정면대결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그러나 진화는 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내용과는 좀 동떨어져 있지만 여기에 붙일 수 있는 적당한 제목은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이 아닐까 한다.
이제 우리 몸속에 진행되고 있는 적과의 동침 장면을 보기로 하자.
적과의 동침 2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은 우리의 면역계내에서 정교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역학에서 자기와 비자기의 개념은 버넷(Frank.M.Burnet)이 1940년 『감염병의 생물학적 양상』(Biological Aspects of Infectious Diseases)이라는 책에서 면역에 있어서 관용의 현상을 설명하기위해서 도입한 것이다.5)
생물에 있어서 자기를 아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렇다면 면역계가 인간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자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인간의 자기의식은 "나는 -이다"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직접적 규정성에서 행해지지만 의식이 꼭 이런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탐지하는데는 또 다른 수준이 있다. 자기아닌 것의 인식을 통해 반사적으로 자기를 인식하는방식이다. 이 경우 자기를 알기 위해서 자기를 전면적으로 통찰할 필요는 없다. 자기아닌 것의 표식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자기란 자기아닌 것을 뺀 모두이다. 전자는 헤겔의 용어를 빌리면 즉자.대자적 의식에 해당하고 후자는 즉자적 의식에 해당한다.즉자적 의식의 자기규정은 다음과 같다.
나는 B가 아니다.
나는 C가 아니다.
나는 D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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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로는 무한히 되풀이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나는 -이다'는 적극적(positive)인 자기의식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극적인(negative)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이러한 자기의식의 가장 원형적 형태는 면역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체내가 이물질에 의해서 감염되었을 때 몸은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항체(antibody)를 만들어 그것을 침입자와 화학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상대를 무효화시켜 버린다.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전면적으로 통찰하는 '나는 -이다'의 의미가 아니고 타자의 표식을 인지한데 지나지 않는다.말하자면 항체는 비자기에 대한 총체적 목록이고 그 항체의 반사면이 바로 자기이다.
그러나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여기서 비자기를 자기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기를 비자기로 착각하기도 한다.전자와 같은 착각이 일어나면 암세포가 창궐하게 된다.그러나 후자의 착각도 흔하며 사실 불치병의 대부분은 이러한 류의 것이다.예컨대 당뇨가 그렇고 류마치스성 관절염이 그렇다.심지어는 특정 음식에 대해서 면역계가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음식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비자기인 이물질이 아닌가? 이러한 것이 알레르기성 질병으로 무시해버리면 좋을 것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일어나는 병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는 착오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에 엄격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관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보다 엄격해야 할 경우는 몸내부의 영역에서이다.거기로 들어오는 이물질은 대부분 해로운 비자기로 보아도 무방하다.혈관내는 이 원칙이 지켜진다.여기서는 자기를 나타내는 특별한 ID를 갖고 있지 않는한 비자기로 간주한다.혈관에 바로 놓는 주사가 급작스러운 쇼크사를 낳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해서이다.반면 장의 경우는 음식을 비롯한 온갖 이물질들이 드나드는 곳이다.이곳에서는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엄격해서는 안될 것이다.여기서는 말하자면 특별한 수배자 명단에 들어있지 않는한 자기로 간주한다.
이러한 차이로 해서 혈관에 분포해 있는 항체와 소화계에 분포해 있는 항체는 서로 달라야 하는데 실제 다르다.6)가차없는 반응은 주로 면역글로블린 G와 M에 의해서 일어나고 보다 관용적인 면역반응은 A에 의해서 일어난다.이 A의 80%가 소화관에 분포되어 있다.이 A는 G나 M처럼 항원의 파괴,백혈구의 이동,염증 등 어느 작용도 가지고 있지 않다.염증도 일으키지 않고 파괴하지도 않는다.다만 분비액중에 다량 존재함으로 유해한 항원을 중화하고 세균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을 억제할 뿐이다.A의 역할은 소화관내부에 늘 존재하는 세균등과 공존하기 위해 낮은 장벽을 쌓고 있을 뿐이다.
우유 1l를 마시면 이질물인 소의 알부민 단백질이 상당한 농도로 혈액안으로 들어온다.이것은 입을 통하지 않고 정맥주사로 직접 혈액안으로 들어오거나 했다면 틀림없이 아나필락시 쇼크를 일으킬 양이다. 그러면 입을 통해서 들어온 항원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쥐에게 달걀흰자에서 추출한 알부민을 1000분의1 mg정도의 적당한 조건으로 주입하면 앨러지를 일으키는 면역글로불린 E항체가 생산된다.그러나 미리 달걀흰자의 알부민을 입으로 섭취하게 해두면 항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작 몇 mg의 달걀흰자 알부민을 섭취하였을 뿐인데도 같은 알부민에 대해서 몸은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이미 입으로 섭취한 뒤여서 쥐는 닭의 단백질을 이물질로 인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이 방식이 앨러지에 대한 식이요법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자기와 비자기를 학습하는 곳이 우리의 장이다.장내에서는 자기와 비자기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그것은 끊임없이 유동한다.그 구분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면 우리는 모든 음식에 대해서 조차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그렇다고 너무 느슨하다면 온갖 병원균들이 체내로 침투해 들어오는 낭패를 당할 것이다.그것은 가장 적절한 자기에 대한 정의를 끊임없이 학습해가야 한다.
이 장은 몸의 안일까,바깥일까? 해부학적으로 보아 위안이나 장안은 어디까지나 몸 바깥이다.사람은 피부와 감각기관을 통해 외계와 접할 뿐 아니라 소화관 내강의 점막을 통해서도 외계와 접하고 있다.위와 장은 안과 밖이 만나는 장소이며 자기와 비자기가 충돌하고 타협하는 장소이다. 합종과 연횡이 수시로 행해지는 장터이다.자기와 자기 아닌 것이 만나서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가는 실험장이다.특히 대장은 인간의 몸과 낮은 울타리를 치고 공존의 틀을 만들고 있는 장소이다.여기가 바로 "적과의 동침"이라는 간통(?)의 현장이다.
이것이 유연성을 잃을 때 우리 몸은 병들게 된다. 결국 안과 밖의 유동적 균형을 어떻게 잘 맞추느냐가 몸의 건강의 핵심이라고 본다.그런 의미에서 병이 없다는 것 자체도 병이다.실제로 무균사육된 동물의 경우 면역계의 발달이 두드러지게 저해되고 면역글로불린 농도도 낮다.뿐만아니라 소화관의 해부학적 구조도 박테리아가 없으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무균사육된 동물의 경우 소화관의 벽의 점막층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다.바깥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만들어지고 그 안과 밖의 유동적 균형속에 있을 때만 내가 존재한다.
병은 다자들이 관계맺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다자들의 관계맺음이 바로 생명의 과정이기 때문에 병도 삶의 한 부분이다.이것은 앞의 모델 b가 보여주는 모습이다.그러나 모델a라는 다른 그림이 있다.여기에는 결코 융합할 수 없는 일자들이 있을 뿐이다.건강과 병은 양립할 수 없으며 삶과 죽음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이제 우리는 에얼리언의 전사 시고니 위버를 만나볼 차례이다.
에얼리언
필자는 데카르트의 철학과 화엄철학을 비교하다가 세계를 보는 눈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다를 수도 있구나 하고 새삼 놀랐다. 실체는 연장성(延長性,extension)을 가지며 이 연장성으로해서 불가입성(不可入性,impenetration)을 갖는다.이것이 데카르트의 기계론의 철학을 성립시키는 기본축이다.반면 화엄의 존재론의 기본축은 상입(interpenetration)이다.모든 만상은 동시에 발생하고 발현하며(동시돈기,同時頓起),각각이 서로에 침투해 들어가 있으며(동시호입,同時互入),타자를 자신속에 포섭하고 있다.(동시호섭,同時互攝) 전자는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 그 존재론의 축이고 후자는 그 반대로 서로가 서로속에 포섭되는 것이 존재론의 축이다.전자는 "상호불가입성"이며 후자는 "상호가입성"이다.
상호불가입성이란 데카르트의 존재론에 의거한 질병관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이것은 에얼리언의 시고니 위버의 정신이며 그녀의 가공할만한 무기는 항생제이다.
항생제는 본래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고 균류가 박테리아에 대항하기 위해서 진화시킨 무기이다.1929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우연히 배양접시안의 세균이 페니실린균류의 주변에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7)
아주 많은 균류와 세균들이 만들어내는 물질들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안전하게 결핵,폐염,그리고 그 밖의 많은 다른 감염들을 유발하는 세균들을 근절시킬 수 있었다.지난 몇십년 동안 이들 항생물질 덕분에 세균성질병을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황금기를 누려왔다.공중보건기구와 항생물질의 만남은 감염성질환에 의한 사망률을 급격히 떨어뜨려 1969년 미국의 공중위생국 장관이 "이제 감염성의 시대는 끝났다."고 거리낌없이 선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우리의 몸이 30억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에 걸쳐서 합종과 연횡을 통해서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임을 간과하고 있다.우리의 몸은 6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10배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나 기타 원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거대한 생태계이다.말하자면 인간은 이 모두를 실어나르고 있는 거대한 숙주이다.이 균총들은 우리의 몸을 영양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 가운데 장내균총은 우리 몸속에 거주하고 있는 상주균들이다.이것들은 과거 어느 때인가 인간의 몸에 침입해 치명적 질병을 일으켜겠지만 오랜 세월의 합종과 연횡을 통해서 그 독성을 순화시키고 우리몸의 생태계의 일부가 된 박테리아들이다.장내에 기생하는 대장균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이것들은 더 이상 병원성 박테리아가 아니다.말하자면 그것은 숙주에게 큰 손상을 주지 않는 "만성질환"이다.
병원성 박테리아들은 외부에서 침투해들어온 최근의 신참자들을 일컽는 말이다.아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숙주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다.인간은 여기에 대한 효과적인 대항수단을 만들어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항생제이다.항생제는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뚫어버림으로써 그것을 무력화시킨다.그런데 다세포 생물체의 세포는 세포벽이 없다.그러므로 항생제는 우리 몸의 세포에 대해서는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이 선택적 파괴력으로 해서 항생제는 박테리아를 다스리는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런데 항생제가 몸안으로 투입되면 외래 침입자만 선택적으로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정확한 타켓을 향해 작동하는 우리의 면역계와는 달리 무차별 투하되는 폭격과 같다.외래 침입자도 죽이지만 몸안의 토박이 박테리아도 죽이게 된다.그것 역시 세포벽을 갖는 박테리아이기 때문이다.
외래의 병원성 박테리아와 함께 상주 박테리아도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된다.그게 어쨌단 말인가?덕분에 식객들도 함께 몰아내게 되었으니 꿩먹고 알먹는 격이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그러나 앞서의 전광우 박사의 실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아메바에 침입한 박테리아가 상주균으로 바뀌었을 때 그것을 제거하니 이제 아메바가 죽고 말았다.질병이던 것이 이제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대장에 서식하는 박테리아는 이제 우리몸의 건강의 핵심이 되었다.활력있는 장내균총을 갖고 있을 때만 우리는 건강한 삶을 향유할 수 있다.장내균총이 붕괴됨으로써 숙주는 곧 소화불량과 변비에 시달리게 된다.
상주균의 붕괴가 외래 병원균에 대한 우리몸의 방어계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앞서 보았듯이 우리몸의 외부 기생자들에 대한 방어는 우리의 면역계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그러나 충분히 인식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방어에는 장내균총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의학에서는 이것을 몸의 1차 방어계라고 한다.그것은 선점권이다.즉 몸속의 박테리아는 자신의 거주영역을 지키려 할 것이고 이것이 외래의 신참자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몸을 영양으로 이용할려고 하는 박테리아들인데 기득권을 갖고 있는 토박이든 신참자든 우리몸으로서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그러나 그렇지 않다.토박이 균총들은 우리몸과 장구한 기간의 진화를 통해서 숙주의 일방적인 공격,기생자의 일방적인 착취는 서로간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말하자면 몸안의 균총들은 자신의 숙주에 대해서 상당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다.숙주의 몰락은 곧 자신의 몰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신참자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다.일단 몸을 장악하면 가능한한 모든 수법을 동원해서 숙주를 착취할려고 할 것이다.거기서 번식한 다음 다른 숙주를 찾아 이동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우리의 병원성 질병들은 대부분 이 외래 침입자들이 일으키는 전쟁이다.이들의 침입을 막고 있는 1차방어계가 바로 우리 몸속의 박테리아들이다.항생제가 그 방어선을 붕괴시키는 것이다.오랫동안 약제내성을 경고해온 마크 라페(Marc Lappe)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임상의들은 치료에 항생제를 투여할 때 마다 타겟이 되고 있는 병원균 뿐만 아니라 우리몸의 자연균총에 대해서도 엄청난 선택압을 부과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통상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박테리아와 효모균들은 균형속에 존재하며 비교적 일정한 상태와 조성비로 되어 있다.이 공생관계에 있는 미생물들의 대사활동은 병원미생물들이 입,목,장관등에 집락을 형성하는 것을 막아준다.이 장내균총들은 영양과 장소를 두고 병원미생물들과 경쟁한다.휘발성 지방산과 같은 항균물질을 분비함으로써 이 불청객 박테리아들의 수를 제어한다.8)
항생제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몸의 생태계를 붕괴시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성의 병원균을 진화시켜주는 결과를 야기한다.이것은 농약의 남용이 더 저항성 강한 잡초를 진화시켜온 아이러니한 결과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약이 뿌려지면 저항성이 약한 잡초들은 다 죽는다.그러나 그 가운데 독성에 견디어낼 수 있는 소수의 잡초는 그럭저럭 살아남는다.다음해 이 잡초는 다른 경쟁자가 사라진 무주공산의 노다지를 발견한다.그것은 더 왕성하게 번식하고 우리는 더 독한 농약을 개발해서 이에 대응한다.결과적으로 농약이 독초를 선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현상은 항생제에서도 똑같이 재현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항생제의 약제내성의 문제이다.항생물질들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박테리아세포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많은 경우 박테리아가 이미 갖고 있는 수송계를 이용해서 그렇게 한다.따라서 박테리아는 이러한 성장저해물질들에 수송계를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페니실린에 대한 최초의 저항성 메카니즘은 이 약물의 수송을 방해하는 플라스미드의 출현이었다.또 다른 방식으로는 항생물질이 들어오는대로 세포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이것은 테트라사이클린 저항성 박테리아가 개발한 방식이다.이것은 아주 효율적이어서 치사량의 100배나 되는 농도에서도 박테리아는 살아남을 수 있다.또 다른 방식은 항생물질의 독성을 화학적 변형을 통해서 중화시키는 것이다.이 방법은 스트렙토마이신과 같은 아미노배당체(amminoglycoside)와 같은 항생물질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진화한 것이다.그외에 공격표적을 속인다든지 자신을 변형시켜 그 항생물질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 저항방식이 알려지고 있다.이러한 진화가 항생제의 개발이후 최근 몇십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다.
항생제에 대한 새로운 저항성 메카니즘은 플라스미드(plasmid)9)의 교환을 통해서 박테리아 전체로 신속하게 퍼져나가기 때문에 새로운 약물도 조만간 그 효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게다가 이 교환이 계속되다가 보면 모든 병원성 박테리아들이 기존의 모든 항생제에 대한 저항 메카니즘을 플라스미드상에 내장하고 있는 사태가 생겨난다.이것이 요사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복합약물 저항성이다.항생제 가운데 어떤 것은 않듣고 어떤 것은 듣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의 항생제가 더 이상 듣지 않는 것이다.
아직 더 큰 문제가 남아있고 사실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그것은 우리의 몸과 장내균총간의 장구한 시간에 걸친 타협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항생제의 위기에 직면한 장내균총들은 침입박테리아들로부터 저항성 플라스미드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독성을 획득해 가고 있다.우리에게 지금까지 무해한 것으로 알려져 왔던 장내의 대장균들이 독성의 병원균으로 변한 사례들이 보고 되고 있는데 O-157 대장균과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질병"은 없다.
항생제는 왜 문제가 되는가?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지나치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데모를 단기간에 진압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탱크를 동원해서 시위군중을 향해서 발포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반면 효과나 약발이 훨씬 떨어지는 최루탄을 사용한다.왜 그럴까?무기가 치명적이면 치명적일수록 거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생사를 건 싸움으로 돌입할 수 밖에 없다.그것은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니고 더 복잡하게 꼬이게 하는 방법이다.
에이즈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더 강력한 약제의 개발이 아니고 콘돔을 사용하는 것이다.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에이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한다.여성의 질은 그 기능상 감염되기 쉬운 부위이다.매독이나 임질은 이 경로를 이용한다.그러나 진화는 여기에 대해 잘 대비되어 있고 그래서 감염에 대한 방어메카니즘을 진화시켜 왔다.월경도 이 감염을 막는 중요한 기능중의 하나이다.그러나 질을 통과하지 않는 항문의 점막접촉을 통한 성교는 우리의 몸이 전혀 예상하고 있지 못한 경로이다.오히려 직장과 결장과 같은 대장은 장내 박테리아들이 집락을 이루어 살도록 주어진 면역의 치외법권 지역이다.에이즈는 이 새로운 통로를 찾아내었다.그 결과 에이즈 바이러스는 면역계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전파될 수 있는 루트를 개발한 것이다.
전파가 용이하면 용이할수록 균은 독성을 띄게 된다.균의 독성은 숙주를 죽일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단지 급속히 번식하는 과정에서 숙주에 대한 착취의 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숙주가 치명적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숙주가 죽으면 그 착취도 끝나고 공멸할 수 밖에 없다.그러나 그것은 다른 숙주가 없을 때 이야기다.다른 숙주로 신속하게 옮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다른 숙주에로의 전파가 어려워지면 숙주를 신속하게 파괴하는 강한 독성을 가진 균은 자멸할 수 밖에 없다.이 경우 조금씩 착취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유리하다.이 과정에서 독성이 약한 균이 선택되게 되고 약한 쪽으로 진화한다.반대로 전파가 용이할 경우 독성을 가진 균이 유리해지고 자연선택은 그 쪽을 선호하게 된다.변태적 항문접촉을 통한 성행위는 그 자체가 위험한데다 변태적 성행위가 급속히 증가됨으로써 에이즈 바이러스의 전파경로를 용이하게 했고 이것이 독성균의 진화를 가속화시킨 것이다.
독성이 강한 약을 통해서 에이즈를 전멸시키려는 시도는 또 다른 강한 내성을 가진 에이즈 바이러스를 진화시킬 뿐이다.그 보다는 그 전파경로를 어렵게 하거나 차단시킴으로써 독성을 순화시키는 방법이 장기적으로 더 효율적이다.
말라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말라리아라는 이 치명적 질병은 모기를 통해 전염된다.말라리아와의 싸움에서 인간은 60년대의 반짝 성공을 경험했을 뿐 계속해서 패퇴해 왔다.인체에 이미 들어와 있는 말라리아 자체를 죽이는 약제의 개발은 과잉진압이 되어 우리의 면역계가 우리를 공격하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보다는 그 경로를 차단함으로써 말라리아를 순치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그것은 모기가 서식하는 웅덩이를 메우고 모기장을 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다.이 방법은 에이즈 자체를 괴멸시키려거나 말라리아 자체를 괴멸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그것들도 삶의 일부이다.그것과 공존의 낮은 목책을 세우는 것 그것이다.이것은 우리몸의 진화의 과정이 그러했고 우리의 면역계가 그렇다.
진화의 넓은 맥락에서 볼 때 "질병"은 실체가 아니다.그것은 다자들이 관계맺는 그 역동적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길항적 또는 보완적 관계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고 이 과정에서 "자기"는 끊임없이 유동한다.진화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바로 질병의 역사이다.
이 우주에 순수한 "나"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다.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고 의미를 가질 뿐이다.불교에서는 이것을 "모든 존재자의 연기성(緣起性)의 원칙"이라고 한다.
이것은 또한 동양의 음양오행설의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원리"이기도 하다.a와 b가 상극관계에 있을 때 a가 살기위해서 b를 괴멸시키면 a의 번성이 보장된다고 볼 수 없다.그것은 또 b와 상극관계에 있으면서 b를 견제하고 있던 c의 번성을 가져와 그것이 결국 a의 괴멸로 이끌수가 있다.다음 그림은 이것을 도식화한 것이다.
왼쪽 그림에서 보듯이 목을 강화하기 위해서 토를 억제하면 그것과 상극관계에 있는 수가 강화되어 결과적으로 목이 강화된다.그러나 무조건 토를 억제한다고 목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오른쪽 그림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수는 그것과 상극관계에 있는 화를 억제시키고 이것을 금을 강화시켜 그것과 상극관계에 있는 목을 약화시킨다.좋은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항상 나쁜 것이 아니다.그것은 전후의 문맥에 의존하는 고도의 비선형적 현상이다.
몸을 생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서양의학의 몸의 기계적 사고방식은 질병은 근절시킬 대상으로 받아들여 왔다.감히 암의 정복 등 "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암은 분명히 치명적 질병이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일부이다.생물체가 복잡화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진화의 음영이다.그것은 근절되지 않으며 근절될 수도 없다.그것 역시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등 병원성 세균들도 역시 자연의 이상현상(異常現象)이 아니고 자연의 엄연한 일부이다.그것은 다스림의 대상일 뿐 근절의 대상이 아니다.그것을 근절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자신의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오늘날의 항생제로 인한 의료위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글로서 논의의 결론으로 삼고자한다.생태운동가 장일순 선생에 관한 이현주씨의 회상 한 토막.
병이야기 하니까 생각납니다만 장일순 선생님이 암으로 진단받았습니다.제가 병원으로 찾아가 '투병'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그랬더니 아주 정색하시면서 "자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다니,암세포는 내세포가 아닌가?잘 모시고 가야지."그러시더라구요.그리고 "지구가 지금 암을 앓고 있는데,지구 땅덩어리가 앓고 있는데 나는 '아프다'고 소리나 지르지.나 좀
아프니까 후배들이고 뭐 사람들이 와가지고 이렇게 여럿 와주는데 땅덩어리가 아프다고 누구 좀 울어주지도 않고 땅은 신음도 하고 있지 않지 않은가?"그러시면서 우시더라구요.그런 식으로 자기몸의 병을 모시고 사셨다가 암하고 같이 가셨지요.투병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생태적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단어가 아닌가?뭐하고 싸우자는 건가?생태적 삶이란 다 내 몸인데 모든 것이 내 몸인데 내 몸하고 내가 어떻게 싸운다는 것인가?나에게 이익을 준다고 판정되는 것들만 내 친구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주는 것 같이 판단되어도 결국 내 몸이다는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투병이란 말이 점차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병과 함께 병을 잘 다루면서 병을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내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을 잘 간직할 수 있을까,오히려 이걸 생각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 아닌가,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10)
1) A.Kostler,『야누스』,최효선 옮김(범양사,1993), 40-41면
2).A.N.Whitehead,『과정과 실재』,오영환 옮김(민음사,1991) 78-79면
3)法藏,『華嚴學體系(華嚴五敎章)』,金無碍 譯註(우리출판사,1998),379면
4) L.Margulis & D.Sagan,『마이크로 코스모스』,홍욱희 옮김(범양사,1987)
내공생에 관한 논문 모음집으로 L.Margulis&R. Fester(ed),Symbiosis as a Source of Evolutionary Innovation,MIT Press,1991가 있다.또 현대생물학신서 간행회에서 간행한 『세포내 공생』(대광문화사,1993)이 있다.
5) A.I.Tauber,The Immune Self,(Cambridge Univ.Press,1994),3장
6) 타다 토미오,『면역의 의미론』,황상익 옮김(한울,1998),8장 참조.
7) 항생제의 약제 내성과 내성 메카니즘에 대한 좋은 해설서로서 S.Levy,『항생물질 이야기』,남두현 옮김(전파과학사,1995) 참조.
8)M.Lappe,Breakout-The Evolving Threat of Drug-Resistant Disease,Sierra Club,1995,83면
9) 박테리아 게놈의 DNA와는 별도로 박테리아내에 존재하는 자기복제능력을 가진 DNA. 박테리아에 기생하는 유전자 조각으로 박테리아에 항생물질에 대한 저항성 메카니즘을 부여한다.
10) 이현주 외,『나락 한알속의 우주』(내일을 여는 책,2000),137-1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