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우린 정말 개보다 못한 걸까요?
사람들이 종종 쓰는 욕 중에 '개 같은 놈'이 있습니다. 개가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빠할 욕입니다. 그런데 이 욕보다 더한 욕이 있습니다. 그건 '개 보다 못한 놈''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 (所致)입니다. 개는 우리가 욕으로 사용할 만큼 못된 동물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이화여대 명예교수인 이근후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갤리온)를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개들도 배우는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평생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바빠'와 '급해'를 입에 달고 정신없이 달려간다. 가꿈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은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175쪽)
'개들도 배우는 이것'은 '쉼'입니다. 이근후는 '잘 쉬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매트 와인스타인의 <우리는 개보다 행복할까?>를 소개합니다. 매트 와인스타인은 앞의 책에서 가장 먼저 "앉아!" 와 "가만있어!"부터 가르친다고 합니다.
근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한가한 민족이었습니다. 농한기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대부분의 경우 농한기는 농사가 끝난 겨울을 뜻하기도 하지만, 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이고, 효율 높은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 되돌아보면 빠른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좀더 여유를 두고 천천히 가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확실히 개보다 못합니다.
개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매트 와인스타인의 책의 목차를 들여다보면 개의 습성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줍니다. 몇 개만 가져와 봅니다. 숫자는 쪽수입니다.
“쉽게 용서한다 19,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는다 33,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51, 놓아버려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안다 61,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 77, 표면 아래를 볼 줄 안다 88, 자신이 누구인지를 파악한다 105, 주어진 삶에 행복해한다 122,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려 애쓴다 136, 열린 마음으로 인사를 나눈다 150,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 162,지금 곁에 있는 존재를 사랑한다 166, 진정으로 축하할 줄 안다 217, 변함없이 용감하다 280, 상황을 헤아리는 섬세함이 있다 285, 인정이 많다 289, 삶과 죽음을 모두 소중히 여길 줄 안다 299.”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한 개의 습성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연구했는지 저자도 대단한 분입니다. 저는 개와 고양이 중 고양이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개와 고양이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저는 ‘고양이 같은 사람’보다 ‘개 같은 사람’을 더 좋아할 겁니다. 개는 충성스럽습니다. 주인을 위해 죽은 개는 많지만, 주인을 위해 죽은 고양이는 없습니다. 금정구 회동동에서 철마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개좌고개’ 전설만 보더라도 개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동물인지 모릅니다. 잠든 주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주인의 목숨을 던졌습니다.
개는 자신의 뜻보다 주인의 뜻을 먼저 헤아립니다. 포악한 개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개는 주인에게 맞아도 끙끙거리며 아파할지언정 주인을 물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주인 의존적 존재로서 개는 그 어떤 인간상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와인스타인이 <우리는 개보다 행복할까?>에서 개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앉아’와 ‘가만있어’라는 명령어는 욕망에 사로잡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스러운 현대교회들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토퍼는 <슬로처치>(새물결플러스)에서 ‘효율’과 ‘성장’에 함몰되어 ‘분주’한 교회들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효율과 성장에 함몰된 교회의 특징은 전문가들에의해 보여주는(show) 예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켜주는 은혜로운 설교가 있고, 헌신자들과 일반교인들이 구별됩니다. 치밀하게 짜여진 목회일정과 프로그램이 교회를 지배합니다. 사역자들은 교인이 아니라 소모되는 부품처럼 더이상 쓸모가 없거나 병들면 과감하게 버려집니다. ‘영양이 아닌 열량만 채우는 주유소’(슬로처치, 65쪽) 같은 교회는 영적 비만에 빠진 교인들만을 양성합니다. 참을성도 없고, 용서도 없고,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비관용적 교인이 되고 맙니다. 이웃은 없고, 타자로서만 삶을 영위하는 현대교인들은 외롭고 고독합니다.
윤득형 목사님은 <슬픔학 개론>(샘솟는기쁨)에서 한국 사회의 자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의 편지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편지의 수신자는 주인아주머니였지만 사실 그들의 심정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파하고 함께 해줄 사람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누군가 옆에서 아픔을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윤득형, 148쪽)
사도바울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장과 효율에 함몰되면 ‘이웃’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과 정면으로 배치(背馳)됩니다. 교회는 비효율적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속도보다 방향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개는 ‘앉아!’라는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부터 배웁니다. 개는 ‘가만있어!’라는 주님의 명령을 먼저 배웁니다. 인간들은 창조된 직후 ‘안식’하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자 최초의 명령이었습니다. 죄는 안식하지 않는 것이고, 이웃을 수단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순종해야할 명령은 ‘안식하라’입니다. 그 다음 일하십시오. 저는 잠들지 않는 현대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린 어쩌면 개보다 못한 인간들입니다.
첫댓글 "우린 어쩌면 개보다 못한 인간들입니다." 참 와 닿는 문장이네요.
'안식후에 일. .' 깊이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