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계동 120
진우는 박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박양의 얼굴에 긴장이 서린다.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지만 그래도 해
야 하는지에 대해서 갈등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정했는지
-너도 이제 낼 모래면 서른이야. 그리고 아직까지 오빠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찾지 못했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아니 오빠를 찾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명보원님을 남자 친구로 가까이 지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아니, 이 말은 내 생각일 뿐 명보원님의 생각은 아니야. 다만 내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명보원님도
동생을 찾는다고 애를 쓰지만 생각만큼 잘 안 되는 모양이야. 지난번에는 술 한 잔 마시면서 말하는데 무척 외
로워 보이더라. 하긴 남자 나이 서른이 넘으면 마누라, 애하고 한참 재미있게 살아야 할 때 아닌가?
진우가 박양의 말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자 박양도 뜸을 들이려는지 술을 한 잔 마시고 고기 한 점을 상치에 쌓
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한다.
-언니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그래 알면 됐어.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일도 아니니 그렇게 알고 생각을
해 보라는 말이야. 나도 네 눈치를 대강 꿴다만 너도 명보원님을 싫어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 고 생각하기 때문
이야.
-그래 알았어! 언니 생각해 볼게. 그건 그렇고 언니!
-왜?
-난희좀 살펴봤으면 좋겠어.
-난희를 왜?
-며칠 전 그 불야성의 매니저있지?
-그래 그 매니저!
-난희가 국수를 말아주는데 느낌이 묘하던데.
-무슨 느낌?
-난희가 그 매니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이 보여서.
-잠간만 언니
진우는 핸드폰을 열어 난희에게 전화를 걸더니 잠시 다녀가라고 부른다.
-난희는 왜?
-언니 내 생각은 말야, 말이 나온 김에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한번 물어나 보려고
-왜 쓸데없이 조금 천천히 살펴보고 말해도 되지
-아니, 이제는 걔들도 조금씩 자리가 잡히니 기회가 되면 하나씩 풀어 줘야할 것 같아. 지금 그대로가 좋을 것
같지만 조금 더 자리 잡히면 게네들 사이에 금이 생길 수도 있거든.
-하긴 그렇네.
-손님 율동 공원 앞에 다 왔습니다.
오십대 중반의 사내는 깊이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다. 진철은 율동공원 앞에서 서현역까지 걸어갈 생
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한데 손님은 차에 오르자마자 계속 자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이런 경우에는 손님이 차를 타
고 진철이 핸들을 잡으면 먼저 네비부터 찍어달라고 하는데 오늘 이 손님은 자기가 알아서 알려 줄 테니 그냥
가자고 하였던 것인데, 진철은 은근히 속이 상해온다.
그러니까 인계동에서 서성거리며 콜을 기다리다가 분당 콜이 올라오기에 선 듯 잡은 것이다, 진철이 분당 코스
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분당은 일단 나오면 돌아갈 콜을 잡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분당 안쪽으로 들어간
다 해도 십 분에서 이십 분 안쪽이면 야탑역이나 서현역, 수내역이나 정자역에 도착할 수가 있는 거리이기 때문
에 잘 모르는 지역으로 가서 고생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다른 콜을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지역인 분당을 선
호하는 것이다,
콜을 잡고 손님에게 가니 차에 오르면서
-율동공원 아시지요?
하고 묻는다. 진철은 속으로 ‘거기는 조금 멀군’ 하면서도 잡은 콜이기 때문이
-예, 압니다. 그리로 모실까요? 그럼 손님 네비를 찍어주시고 주무시면 댁까지 편안하게 모셔 드리겠습니다.
했던 것인데, 알려 준다는 손님은 거의 코를 고는 수준으로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진철은 손님을 깨우느
라 한 참이나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는데,
-저, 저 고개를 넘어갑시다.
하는 것이 아닌가. 태제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경기도 광주 땅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고개를 넘으면 돌아올 방
법은 오직 하나 걷는 것뿐인 곳이었다. 셔틀도 없으며 택시도 콜택시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니 결국 진철
이 할 수 있는 일은 걸어 넘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손님 제가 콜을 잡을 때는 분당이라고 올라와서 잡은 것인데, 저 고개를 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자 손님의 눈이 힘겹게 떠지더니
-그래요! 그럼 집으로 전화해서 사람 불러야 하겠네.
하는 것이 아닌가.
진철은 잠시 생각을 하는데 손님이 주머니를 뒤지는 것을 보니 핸드폰을 찾는 모양이었다.
-손님! 놔두세요. 그냥 제가 모셔 드릴게요.
차마, 손님이 전화를 해서 누구를 부른다는 것이 상당히 불편해 보인다. 지금 이 시간에 부인을 부르던지 아니
면 자식을 부르더라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이 늦은 새벽 시간에 술에 취하여 한참 잠
자는 사람을 불러낸다는 것, 더구나 태제고개 넘어 에서 콜택시를 불러서 넘어온다는 것은 누구라도 짜증스러
울 수밖에는 없는 일인 것이다.
진철은 ‘참 이거 원. 오늘 내 밥이 여기까진가 보군’ 속으로 생각하면서 핸들을 꺾어 차선으로 들어간다.
-고맙습니다.
태제고개를 넘어 오 분여 더 가자 다 왔다면서 차를 세우라 하더니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 주는데 정해진 요금
의 배를 주면서 택시라도 타고 가라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차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팁을 안 주는 것 보다는 좋군. 이 정도면 걸어가도 시간상 손해는 아니지.’
진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기 시작하였으나 막상 걸을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차들이 어쩌다가 한 대 지나갔
고 손을 들어서 태워주기를 바래보지만 마냥 달려갈 뿐 속도를 줄이려는 차는 없었다.
‘야! 내가 지난 번 광주 퇴촌 쪽으로 들어갔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글쎄 거기는 택시도 없지 피시방도 없지 어
디 바람 피할 만한 곳도 없지, 하여간 거기서부터 걸어 나오는데 죽을 지경이더군.’
언젠가 셔틀을 기다리면서 떠들던 어느 기사들의 대화가 생각난다.
‘말도 마라, 나는 용인이라 그래서 가기는 했는데 얼마나 구석으로 들어가던지, 어쨌든 내려주고 한 참을 걸어
나오니 고속도로 진입로가 있더군. 지나가는 차들이 세워주나? 할 수 없이 표를 빼는 곳에서 표를 빼주면서 서
울 가는 차를 하나 얻어 타고 빠져 나오기는 했는데, 그것도 자가용들은 꿈쩍도 안하더군. 마침 용달이 있어서
그 차로 남부 터미널까지 갔다는 거 아냐.’
‘하긴 요새 누가 지나가는 사람 태워주나. 하도 험한 세상이 돼서.’
‘그거야 대리 기사들도 그래. 누구 말을 들으니 술 취한 손님이 대리를 불러서 집에 갔는데 다음 날 일어나서 보
니 지갑의 돈이 적지 않게 없어졌더라는 거야. 그러니 그 손님이 다시 대리기사 부르겠어.’
진철은 한 참이나 걷다가 눈에 뜨이는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마시면서 걷기 시작한다. 가로등은 드믄 있
었지만 시내 같지는 않다. 하지만 도로 주변의 공장들과 건물에서 새나오는 불빛 때문인지 도로는 그렇게 어둡
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