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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이 여진(女眞)의 경계로부터 일어나서 남으로 조선국 해변 수천 리에 뻗어 있다. 그 산 가운데 큰 것으로는 영안도(永安道)에 있는 것이 오도산(五道山)이고, 강원도에 있는 것이 금강산이고, 경상도에 있는 것이 지리산인데, 천석(泉石)이 가장 빼어나고도 기이하기는 금강산이 으뜸이다.
산 이름이 여섯 개이다. 개골(皆骨)이라 하고 풍악(楓岳)이라 하고 열반(涅槃)이라 하는 것은 방언(方言)이다. 지달(枳怛)이라 하고 금강이라 하는 것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왔고, 중향성(衆香城)이라는 것은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에서 나왔으니, 신라 법흥왕(法興王) 이후의 명칭이다.
내가 삼가 살펴보건대, 부처는 본래 서융(西戎)의 태자이다. 그 나라는 중국 함양(咸陽)과의 거리가 9천여 리나 되고 유사(流沙)ㆍ흑수(黑水)의 오지와 용퇴(龍堆)ㆍ총령(蔥嶺)의 험지(險地)로 막혀 있어 중국과도 통하지 않거늘 어찌 중국을 넘어 동국(東國)에 이 산이 있음을 알았겠는가. 이 산이 있음을 몰랐을 뿐 아니라 또한 조선국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역사로써 상고해 보건대, 주(周)나라 소왕(昭王)의 시대는 우리나라 기자조선(箕子朝鮮) 중엽에 해당하며, 실제로 부처는 서방(西方)의 사위국(舍衛國)에서 태어났다. 부처가 설법한 천 상자 만 축(軸)의 글 속에는 한량없는 세계가 얘기되고 있지만, 일찍이 조선국이라고 일컬은 한마디 말도 없으니, 이 나라와 이 산을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어찌 부처가 설법할 때에 그 일을 과장하여 “바다 가운데에 금강ㆍ지달ㆍ중향 등의 여러 산이 있는데, 억만 명의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그 권속(眷屬)을 거느린다.”고 말하여 어리석은 속인을 놀라게 하기를 마치 장주(莊周.장자)의 곤붕(鯤鵬)ㆍ천지(天池)의 설과 고야(姑射)ㆍ구자(具茨)의 의논과 같이 함으로써 어둡고 아득한 가운데에 말을 빌려 높고 큰 지경에서 세속을 놀라게 하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백성을 진동시키고 무식한 사람을 겁주어 유도하려는 데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참으로 이처럼 괴이한 금강ㆍ지달이 있겠는가.
부처가 말을 빌린 것이 이와 같기에 부처를 배우던 신라 승려 또한 자기 나라를 스스로 높이느라 풍악을 금강산이라 지목하고 추후에 담무갈의 형상을 만들어 망녕된 말을 실증했던 것인가. 또 부처가 ‘바다 가운데’라고 말한 곳이 어찌 동해를 가리키는 줄 알겠는가. 동서남북이 바다 아닌 것이 없거늘 어찌 유독 동해만이 ‘바다 가운데’가 되어 풍악을 금강으로 단정한단 말인가. 또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비록 해외(海外)라고 하지만, 서북쪽은 육지로 요동과 이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다만 압록강 하나만 가로막혔을 뿐이다. 압록강은 진실로 바다가 아니니,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바다 가운데’라고 함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금강산이라는 명칭은 지나온 세대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변경하기 어려우므로 나 또한 금강산이라 지칭한다.
대개 그 산은 하늘의 남북에 걸쳐 우뚝 솟아 아득한 대지를 누르고 있다. 큰 봉우리가 36개이고, 작은 봉우리가 1만 3천 개이다. 한 줄기가 남쪽으로 200여 리를 뻗어 가다가 산 모양이 우뚝 솟고 험준함이 대략 금강산과 같은 것이 설악산(雪岳山)이다. 그 남쪽에 소솔령(所率嶺)이 있다. 설악산 동쪽 한 줄기가 또 하나의 작은 악(岳)을 이룬 것이 천보산(天寶山)이니, 하늘이 눈을 내리려고 하면 산이 저절로 울기 때문에 혹 명산(鳴山)이라고도 한다. 명산이 또 양양부(襄陽府) 뒤를 감돌아서 바닷가로 달려가다가 다섯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이 낙산(洛山)이다.
금강산 한 줄기가 또 북쪽으로 100여 리 뻗어 간 곳에 한 고개가 있으니, 이름이 추지령(楸池嶺)이다. 추지령의 산이 또 통천(通川) 치소(治所) 뒤에서 야산을 두루 에워싸며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다가 북으로 돌아서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 총석정(叢石亭)이다. 산의 동쪽은 통천군(通川郡)ㆍ고성군(高城郡)ㆍ간성군(杆城郡)이고, 서쪽은 금성현(金城縣)ㆍ회양부(淮陽府)이다. 산 아래에 늘어서 위치한 것이 모두 1부(府)와 3군(郡)과 1현(縣)이다.
을사년(1485) 4월 보름. 나는 서울을 출발하여 보제원(普濟院)에서 묵었다.
정묘일(16일) 90리를 가서 입암(笠巖)에서 묵었다.
무진일(17일) 소요산(逍遙山)을 지나고 큰 여울을 건너며 60리를 가서 연천(漣川) 거인(居仁)의 집에서 묵었다.
기사일(18일) 보개산(寶蓋山)을 지나고 또 철원(鐵原)의 옛 동주야(東州野) 남쪽 머리를 지나며 100여 리를 가서 김화(金化) 갑사(甲士) 정시성(鄭時成)의 집에서 묵었다.
경오일(19일) 김화현을 지나며 60리를 가서 금성(金城) 향교에서 묵었다.
신미일(20일) 창도역(昌道驛)을 지나고 보리진(菩提津)을 건너며 78리를 가서 신안역(新安驛)에서 묵었다.
임신일(21일) 비에 막혀 신안(新安) 후동(後洞)의 백성 심달중(沈達中)의 집에서 묵었다.
계유일(22일) 우독현(牛犢峴)을 건너 화천현(花川縣)을 지나고 보리진 상류를 건너 추지동(湫池洞)으로 나아갔다. 시내를 따라 오를 때에 날씨가 매우 추웠다. 산의 나무는 바람을 피하여 나직이 드리운 채로 부드러운 잎이 겨우 돋아났고, 산앵두나무 꽃이 만발하고 진달래가 아직 시들지 않았으니, 날씨가 서울보다 두세 배 더 춥게 느껴졌다.
추지(湫池)는 보리진이 발원하는 곳이다. 보리진이 금강산 외도솔(外兜率)에 이르러 금성진(金城津)과 합하고, 또 산기슭을 차례로 다 지나서 만폭천(萬瀑川)과 합하고, 또 춘천(春川)에 이르러 병항진(甁項津) 하류와 합하여 소양강(昭陽江)이 된다. 옛날에 어떤 나무꾼이 우연히 그곳에 이르렀다가 다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산 아래 사람들이 선경(仙境)이라고 서로 전한다.
고개 위에 추지원(湫池院)이 있고, 추지원을 지나면 동쪽 하늘빛이 매우 푸르다. 운산(雲山)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아니라 바로 바닷물이오.” 하거늘 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본 뒤에야 하늘과 바닷물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 물이 해안과 점점 멀어질수록 점점 높아져서 멀리 하늘과 서로 맞닿았으니, 평소에 보았던 물은 모두 아이들 장난이었다.
고개로부터 동쪽으로 내려가니,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철쭉꽃이 한창 피었고 나뭇잎이 그늘을 이루어 비로소 여름 기운을 느꼈다. 종종 나무를 베어 길을 보조하였으니, 이른바 잔도(棧道)라는 것이다. 때때로 말 위에서 산 살구를 따 먹었다. 고개로부터 20리를 가니, 중대원(中臺院)이 있었다. 또 5리를 가서 냇가에서 도시락을 먹고 비로소 평지를 밟았다. 또 15리를 가서 통천군(通川郡)에 이르렀다. 이날 산길을 걸은 것이 모두 90리이고, 평지를 걸은 것이 15리였다. 군수 자달(子達)을 뵈니 자달이 나를 관아의 별실에 묵게 하였고, 자달의 춘부장도 매우 정답게 대해 주었다.
갑술일(23일) 자달과 작별하고 15리를 가서 총석정(叢石亭)에 이르렀다. 그 아래 이르러 보니, 과연 바위산이 바다 굽이로 들어가며 뱀 모양으로 구불구불하였다. 바위산이 바다에 들어간 끝머리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정자에 다다르기 3, 4십 보 앞에서 북쪽으로 한 줄기 길을 넘으니, 바다 속에서 일어나 돌기둥을 묶어 놓은 듯이 깎아지른 네 개의 바위가 있었다. 총석이란 이름을 얻음은 이 때문이다.
바다 서쪽 해안은 모두 총석의 형태를 이루어 1리쯤 뻗었다. 총석의 곁에 평평한 바위 하나가 또한 수중에 있고, 작은 바위가 뒤섞여 쌓여 육지로 연결되었다. 내가 운산(雲山)과 더불어 발을 벗고 해안으로 내려가서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노복으로 하여금 석결명(石決明)ㆍ소라ㆍ홍합ㆍ미역 등의 해물을 따 오게 하였다. 운산과 더불어 물을 움켜서 서로 장난치다가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하늘 끝과 땅 끝이 탁 트이고 끝이 없어 마치 유리(瑠璃)와 명경(明鏡)이 서로 비추고 위언(韋偃)과 곽희(郭熙)가 재주를 바치는 듯하여 황홀히 꿈속의 풍경인가 의심스럽다가 오랜 뒤에야 분명해졌다. 내가 아쉬워하며 나가려고 하지 않자 운산이 말하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소.” 하였다.
비로소 해안을 나와서 사선정에 오르니, 정자에는 손순효(孫舜孝) 공의 현판시(懸板詩)가 있고, 또 승려와 불자(佛子)의 이름과 호가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앉아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니, 네 개의 총석이 더욱 기이하였다. 보이는 것은 평평한 바위에 내려서 보던 것과 대략 같았으나 안계(眼界)는 더욱 넓었다.
정자 남쪽에 비석이 있지만, 기울어지고 글자가 마멸되어 어느 때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자 동쪽으로 약 4, 5십 리쯤에는 바다 속에 섬 하나가 있어 완연히 서로 마주 대한 듯하였다. 정자의 암벽 아래에는 두 척의 배가 오고가며 고기를 낚고, 암벽 남쪽에는 어점(漁店)이 있어 어부들이 그 사이에서 그물을 말렸다. 수중의 온갖 새가 좌우에서 날며 우니, 혹은 몸이 희고 혹은 몸이 검으며, 혹은 부리가 길고 혹은 부리가 짧으며, 혹은 부리가 붉고 혹은 부리가 푸르며, 혹은 꼬리가 길고 혹은 꼬리가 짧으며, 혹은 날개가 검고 혹은 날개가 푸르러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내가 사언시(四言詩) 4장(章)을 정자 기둥에 적었다.
조금 뒤에 풍랑이 일어났다. 내가 내려와서 해변의 백사장을 따라가니, 모래가 허하여 말발굽이 쉽게 빠졌고, 오직 물가의 물결 흔적이 있는 곳만이 단단하여 말발굽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의 파도가 간혹 해안에 부딪쳐서 말안장에까지 이르면 말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해안을 뛰쳐나오므로, 노복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다잡고 가게 하니, 풍경이 더욱 기이하였다.
종종 사취(砂嘴.모래톱)가 산을 이루었으니, 바다가 사나울 때에 파도에 의해 쌓인 것이다. 또 바닷물이 모래 가에 혹 고였다가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 있고, 혹 고였다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또 희고 작은 바위가 섞여서 해안을 이룬 것도 있고, 또 여러 바위가 바닷가에 높고 험하게 서 있으니, 송곳 같은 것, 채찍 같은 것, 사람 같은 것, 짐승 같은 것, 새 같은 것, 끝은 크나 뿌리가 날카로운 것, 뿌리는 크나 끝이 날카로운 것이 있었다. 모래와 바위 가에는 해당화가 서로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 혹은 꽃이 피고 혹은 망울이 맺혔으며, 혹은 붉고 혹은 희며, 혹은 외겹으로 핀 꽃도 있고, 혹은 천 겹으로 핀 꽃도 있었다.
중도에 도시락을 먹고 60리를 가서 동자원(童子院)을 지나 등도역(登道驛)에서 묵었다. 밤에 큰바람이 불어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뽑혔다.
을해일(24일) 등도역을 출발하여 만안역(萬安驛)을 지나갔다. 지나는 곳에 저수지가 매우 많았고, 바닷가의 풍경은 전날과 같았다. 옹천(瓮遷)에 이르렀다. 쌓인 바위가 해안을 이룬 것이 대략 총석정의 백분의 일 정도였다. 옹천을 다 지났을 지점에 푸른 옥을 갈아 놓은 듯한 작은 바위 벼랑이 있고, 서쪽으로부터 바다로 들어가다가 바위 아래를 감도는 명경(明鏡)처럼 맑은 냇물이 있었다. 노복으로 하여금 미역을 따다 국을 끓이게 하고 석결명(石決明)을 캐어 소금에 굽게 하여 점심 반찬으로 삼았다. 장정(長井)의 해변을 지나 고성(高城)의 온정(溫井)에 이르렀으니, 온정은 바로 금강산의 북동(北洞)이다. 이날 60리를 갔다. 이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두견새 소리를 들었다.
병자일(25일) 바람이 불어 온정에 머물렀다.
정축일(26일) 금강산에 들어갔다. 5, 6리를 가서 한 고개를 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신계사(新戒寺) 터에 들어갔다. 고개의 동쪽은 관음봉(觀音峰)이고 북쪽은 미륵봉(彌勒峰)이다. 미륵봉 서쪽에 한 봉우리가 있다. 미륵봉에 비하면 더욱 빼어났지만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또 그 서쪽에 한 봉우리가 멀리 구름 밖에 있으니, 비로봉(毗盧峰)의 북쪽 줄기이다.
신계사는 곧 신라의 구왕(九王)이 창건한 것으로, 승려 지료(智了)가 고쳐 지으려고 재목을 모으고 있었다. 절 앞에 지공백천동(指空百川洞)이 있고 그 남쪽에 큰 봉우리가 있으니 보문봉(普門峰)이다. 보문봉 앞에 세존백천동(世尊百川洞)이 있고 동쪽에 향로봉(香罏峰)이 있다. 향로봉 동쪽에는 일곱 개의 큰 봉우리가 있어 서로 이어져 하나의 큰 산을 이루니, 관음봉과 미륵봉에 비하면 몇백 배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첫 번째는 비로봉의 한 줄기이고, 두 번째는 원적봉(元寂峰)의 한 줄기이고, 세 번째로 위가 평평한 것은 안문봉(雁門峰)의 한 줄기이고, 네 번째는 계조봉(繼祖峰)의 한 줄기이고, 다섯 번째는 상불사의(上不思議)이고, 여섯 번째는 중불사의(中不思議)이고, 일곱 번째는 하불사의(下不思議)이다. 불사의(不思議)라는 것은 암자 이름으로, 신라의 승려 율사(律師)가 창건한 것이다. 일곱 봉우리 아래에는 세존천(世尊川) 곁으로 대명(大明)ㆍ대평(大平)ㆍ길상(吉祥)ㆍ도솔(兜率) 등의 암자가 있다.
내가 지공천(指空川)을 건너고 보문암(普門庵)을 넘어 산길로 5, 6리 가니, 솜대[綿竹]가 오솔길을 이루었다. 암자 아래에 도착해 보니 절의 주지 조은(祖恩)은 바로 운산(雲山)의 친구라서 나를 대우함에 자못 은의(恩意)가 있었다. 암자 위에 앉자, 동북쪽은 바다가 바라보이고 동남쪽은 고성포(高城浦)가 보였다. 암자 앞에는 나옹(懶翁) 혜근 선사(惠勤禪師) 자조탑(自照塔)이 있다. 좌정하자 조은이 싱싱한 배와 잣을 대접하였고 다 먹은 뒤에 밥을 올렸다. 향심(香蕈 단풍나무에 자생하는 버섯)과 석심(石蕈)을 삶아서 반찬을 만들었고 산나물도 지극히 갖추었다. 이때에 두견새가 낮에 우니, 산이 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밥을 먹은 뒤에 조은과 작별하고 산길로 약 5, 6리를 가서 세존백천수(世尊百川水)를 건너고, 또 1, 2리를 가서 왼쪽으로 도솔암(兜率庵)을 보며 동쪽으로 갔다. 또 5, 6리를 가서 큰 시냇물을 하나 건너 시냇물 동쪽을 따라 올라갔다. 5, 6리를 가서 발연(鉢淵)을 지났고, 또 반 리를 가서 발연암(鉢淵庵)에 이르렀다. 승려가 전하기를 “신라 시대의 율사(律師) 스님이 이 산에 들어오니, 발연의 용왕이 살 만한 땅을 바쳤습니다. 이에 절을 지어 발연암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하였다.
암자 뒤에 봉우리 하나가 있다. 보문암에서 바라보이던 일곱 봉우리 중의 끝 봉우리이다. 암자 위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수십 길[丈]을 가로로 드리운 폭포가 있다. 좌우는 모두 흰 바위로, 옥을 갈아놓은 것처럼 매끈하여 앉기에도 좋고 눕기에도 좋았다. 내가 행장을 풀고 물을 움켜서 입을 헹구고 꿀물을 마셨다.
발연의 고사(故事)에 불자(佛子)의 유희(遊戱)라는 것이 있다. 이는 곧 폭포 위에서 나무를 갈라 그 위에 앉고 물 위로 띄워서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 재주 있는 자는 순조롭게 내려가고 재주 없는 자는 거꾸러져 내려간다. 거꾸러져 내려가면 머리와 눈이 물에 빠졌다가 한참 뒤에 도로 나오게 되니, 곁의 사람들이 모두 깔깔대고 웃는다. 그러나 바위가 매끄럽고 윤택하여 비록 거꾸러져 내려가더라도 몸이 손상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난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내가 운산으로 하여금 먼저 시험하게 하고 이어서 뒤따라갔더니, 운산은 여덟 번 출발하여 여덟 번 물에 맞았고, 나는 여덟 번 출발하여 여섯 번 물에 맞았다. 바위 위로 나와서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이에 책을 베고 바위에 누웠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주지(住持) 축명(竺明)이 와서 나를 이끌고 절로 들어가 절 뒤의 비석을 보게 하였다. 이는 바로 율사(律師)의 유골을 간직한 비석으로, 고려 승려 형잠(瑩岑)이 지은 것이고, 건립 시기는 승안(承安) 5년 기미년(1199) 5월이다. 비석 곁에 마른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율사의 비석이 건립된 때부터 500여 년 사이에 세 번 마르고 세 번 번성하다가 지금 다시 말랐다고 한다. 다 구경하고 다시 암자로 내려오니, 축명이 밥을 대접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또 폭포에 이르렀다가 밤이 깊고 날씨가 차가워져서야 들어왔다.
무인일(27일) 발연을 출발하여 폭포의 하류를 건너고 소인령(小人嶺)에 올랐다. 고갯길이 험악하고 높아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쳐다보고 올라가야 하니, 소인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참으로 헛되지 않다. 내가 열 걸음에 아홉 번 쉬어 바야흐로 첫 번째 고개에 올랐다. 유점산(楡岾山)이 왼쪽에 있고 불사의봉(不思議峰)이 오른쪽에 있고 동해가 뒤에 있고 환희재(歡喜岾)가 앞에 있었다. 소인령은 모두 여덟 고개이다. 점점 나아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일곱 번째 고개에 이르니, 상불사의봉과 나란하고 여러 산들이 모두 눈 아래 있었다.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杆城) 세 고을이 산 밑에 늘어서 있고, 바다를 바라보면 하늘과 더불어 끝이 닿아 있었다. 여덟 번째 고개에 오르니, 불사의봉이 까마득히 발아래에 있었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돌아서 산의 북쪽을 따라 가니 길이 매우 험준하였다. 측백(側柏)이 길에 비껴 있고 사철나무가 섞여 자라며, 쌓인 눈이 골짜기에 가득하고 송라(松蘿)가 나무에 붙어 있었다. 나는 호표(虎豹) 모양의 바위에 걸터앉고 규룡(虯龍) 모양의 나무에 오르며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나아갔다. 피로가 심하여 눈[雪]을 녹여 꿀을 타서 마시자 갈증이 문득 가셨으니, 자미(子美.두보)가 이른 “영롱한 것은 태초로부터 쌓인 눈이네.”라는 것이다. 조금 뒤에 다시 갈증이 생겼다. 엉금엉금 기어서 환희재(歡喜岾)에 오르니, 소인령의 여덟 번째 봉우리보다 또 한두 등급이 더 높았다.
재(岾)의 동쪽은 토봉(土峰)이 하나이고, 재의 서쪽은 석봉(石峰)이 셋이다. 환희재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니, 철쭉이 숲을 이루었으나 날씨가 차가워서 망울만 맺고 꽃은 피지 않았다. 작은 시내에 이르러 손과 얼굴을 씻었고, 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도솔암(兜率庵)에 이르렀다. 암자의 다른 이름은 백전암(柏田庵)이다. 발연으로부터 여기까지는 30여 리이다. 암자에 들어가서 앉아 오래도록 있다가 다시 나왔다. 길에 올라 1리쯤 가서 적멸암(寂滅庵)에 들어가니, 한 승려가 가사(袈裟)를 입고 입정(入定)하고 있었다.
암자 뒤의 토산(土山)은 적멸봉(寂滅峰)이고, 암자 앞 길 동쪽 석산(石山)은 성불봉(成佛峰)이다. 암자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서북쪽으로 가다가 곧바로 한 골짜기로 내려가니, 두 냇물이 어울려 흐르고 물과 바위가 밝고 시원하였다. 바로 십이폭포의 원류이다. 냇물을 건너 올라가니 개심암(開心庵)이 있었다. 암자에 들어가 보니 납의(衲衣)를 입은 한 승려만 있을 뿐이었다. 또 개심암의 전대(前臺)에 올라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앞에는 적멸봉 하나가 있고 뒤에는 개심암 뒤로 봉우리 둘이 있다. 왼쪽에는 백석봉(白石峰)이 있으니 그 봉우리가 스물다섯이고 그 아래에는 운서굴(雲栖窟)이 있다. 오른쪽은 골짜기이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서 도시락을 먹었다. 서울에서 온 거사(居士) 송 생(宋生)이란 자를 만났는데, 그 말이 매우 거짓되었다. 운산이 말하기를 “지금 해가 아직 남았으니, 이 암자에서 유숙할 것이 아니라 더 가는 것이 좋겠소.” 하기에 그 의견을 따랐다. 개심암 뒤 재를 넘으니, 이 재는 환희재보다 또 한두 등급이 더 높았다. 이곳에서부터는 돌과 나무가 모두 흰색이었다.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높은 봉우리를 왼쪽으로 지나고, 송곳 끝처럼 뾰족한 석봉 하나를 오른쪽으로 지났다. 그 아래에 계조굴(繼祖窟)이 있다. 남쪽 가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창한 두 봉우리가 있다. 두 봉우리가 만나는 곳에 오르니, 개심암 뒤의 재보다 또 한두 등급이 더 높았다.
재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자, 측백나무가 길을 메우고 두견화가 간간이 피어 좋은 향기가 코를 감쌌다. 골짜기는 바로 대장동(大藏洞)이다. 시내와 바위가 밝고 시원하여 지나온 곳 중에 이것과 견줄 것이 없다. 골짜기는 또 그윽하고 깊어 냇물의 근원을 따라가면 3, 4일 후에야 바야흐로 비로봉에 당도한다고 한다. 우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면, 냇물의 북쪽에 석봉이 다섯이고 남쪽에 석봉이 둘이니, 그 하나는 흰 바위가 포개져서 서책을 쌓아 놓은 듯하다. 호승(胡僧) 지공(指空)이 이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바위 안에 대장경(大藏經)이 있다.” 하였다. 이로 인해 대장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행장을 풀고 앉아 오래도록 구경하다가 암석에서 노숙하려고 계획하니, 운산이 말하기를 “이곳은 비록 나쁜 짐승은 없지만 안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할까 두렵소. 지금 날이 비록 저물었지만 그래도 원적암(元寂庵)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하기에 그 말을 따랐다. 대장봉(大藏峰)을 따라 서쪽으로 가자, 다섯 개의 석봉이 오른쪽에 있고, 아홉 개의 토봉이 왼쪽에 있고, 골짜기 물이 남쪽으로 흘러갔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오른쪽 산허리를 끼고 큰 재에 올라갔다. 이름이 안문재(雁門岾)로, 안문봉(雁門峰)의 남쪽 줄기이다. 재는 대장봉 뒤 재보다 또 한두 등급 더 높았다. 재를 내려와서 남쪽으로 가다가 시냇물을 따라 갔다. 왼쪽에 있는 산은 모두 소나무와 잣나무여서 그 봉우리를 분별할 수 없고, 오른쪽에 있는 다섯 개의 큰 봉우리는 모두 내산(內山)의 남쪽 줄기이다. 냇물 남쪽과 토산(土山)의 서쪽에 있는 세 개의 가파른 봉우리가 그 머리를 드러내었으니, 그중 하나가 관음봉이다. 관음봉 아래에 부처 형상과 같은 돌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아래의 원적천(元寂川)은 안문천(雁門川)과 서로 합쳐지는데, 맑고 넓은 것이 대략 대장동 물과 같다. 앉아서 잠깐 구경하다가 물줄기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니, 밟히는 것이 모두 시냇가의 흰 바위이고, 좌우 산의 수십여 봉우리가 흰 구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이윽고 원적암에 이르렀다. 암자 뒤에 있는 큰 봉우리는 여러 봉우리보다 몇백 배 더 높은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원적봉(元寂峰)이다. 원적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는 원적봉에 비해 매우 낮지만, 여러 봉우리에 비하면 또한 큰 차이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원적향로봉(元寂香爐峰)이다. 암자의 동남쪽으로 바라보이는 토봉 하나는 높이가 원적봉과 같고 그 위는 오목하니, 이것이 이른바 안문봉이다. 승려가 이르기를 “사자가 그 위에서 새끼를 기릅니다.” 하였다. 백전(柏田)에서 여기까지는 또 30리이다. 암자에 있는 계능(戒能) 승려는 문자를 조금 알았다.
기묘일(28일) 원적암을 출발하여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갔고 안문천이 교류하는 시냇가에 이르러 손을 씻고 입을 헹구었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묘길상암(妙吉祥庵)에 이르니, 암자가 시냇가에 있고 물과 바위가 매우 선명하였다. 여기서부터 철쭉이 비로소 피었다. 냇물 남쪽에 봉우리 넷이 있고 냇물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석벽 하나가 있다. 시냇가 바위 위에 앉아 양치하고 암자에 들어가서 제명(題名)하였다. 암자에는 도봉(道逢)이라는 노승이 있었다. 용문사(龍門寺)의 사승(邪僧) 처안(處安)과 회암사(檜巖寺)의 사승 책변(策卞)이 모두 예우하여 스승으로 섬기니, 이 때문에 여러 산에 이름이 높아 재물을 모은 것이 가장 많았다. 나를 볼 때 예법이 매우 거만하여 나는 말하지 않고 나왔다.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절터가 있고, 절터 위에는 석벽 사이에 새겨진 돌부처가 있었다. 절터 아래에는 위가 평평한 큰 바위가 냇가에 임해 있어 그 위에 앉아 잠깐 쉬었다. 절터 북쪽에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있고, 남쪽에는 관음봉 이하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북쪽 여덟 개 봉우리 뒤에 머리를 드러낸 두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하나는 원적봉의 서쪽 면이고 하나는 월출봉(月出峰)의 남쪽 면이다. 그 아래에 불지암(佛知庵)과 계빈굴(罽賓窟)이 있다. 이 두 암자를 지나 마하연암(摩訶衍庵) 전대(前臺)에 이르니 담무갈(曇無竭)의 석상이 있었다. 대(臺)는 바로 이 산의 한가운데이고, 담무갈은 바로 이 산의 주불(主佛)이다. 승속(僧俗) 간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손을 모아 절하고 지나거늘 운산이 지팡이로 그 이마를 두드렸다.
절 가운데로 들어가니, 절에 있던 노승 나융(懶融)이 나와서 나와 함께 얘기하며 마하연암의 사적(事跡)을 보여주었다. 이때에 뜰 아래로 유순하게 다니는 산비둘기가 있었으니, 산인(山人)에게 기심(機心)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뜰 가운데에 있는 풀은 형상이 부추와 같고 꽃이 조금 붉었다. 나융이 말하기를 “옛날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서 말하기를 ‘이 산의 흙과 돌은 모두 부처이고, 유독 여기만 빈 땅이다.’ 하며, 여기에 서서 산정(山頂)의 석관음(石觀音)에게 예배하였소. 그가 섰던 땅에 이 풀이 나서 지금까지 100여 년 동안 시들지 않으니, 산인(山人)들이 지공초(指空草)라고 부른다오. 지공은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술사(術士)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그 도술로써 불법을 널리 펼쳤소.” 하였다. 내가 만경대(萬景臺)의 길 안내를 나융에게 청하니, 나융은 자못 꺼리며 비로봉의 정상은 밟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나융과 작별하고 만회암(萬灰庵)에 이르러 노복으로 하여금 밥을 지어 싸게 하고 만경대에 오르기로 하였다. 만회암의 승려 또한 꺼리며 만류하기를 “길이 없어 갈 수 없소.” 하였고, 운산 또한 원하지 않았으나 내가 강행하였다. 산꼭대기 하나를 넘어 골짜기 하나를 내려갔고, 또 한 꼭대기에 올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내려갔다. 쌓인 낙엽에 무릎이 빠지고 썩은 나무가 이리저리 가로놓여 동쪽 서쪽이 모두 헷갈리고 새도 한 마리 울지 않았다. 다만 폭포 두어 길만이 숲 밖에서 날아 울릴 뿐이었다. 운산이 바위를 타고 올라가 보니 폭포 위에 또 앞의 것과 같은 폭포가 있는지라 몸이 떨려서 간신히 내려오며 말하기를 “산길을 이미 잃었으니 멋대로 추측해서는 안 되오. 나무 아래에서 사람 흔적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은 돌아가는 것만 못하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따라 왔던 길을 도로 돌아왔다. 만회암에 이르러 도시락을 먹은 뒤에 다시 마하연암을 지나고 또 묘봉암(妙峰庵)과 사자암(獅子庵)을 지나 사자항(獅子項)에 이르렀다. 그 바위에는 아래로 드리워진 쇠줄이 있어 사람이 더위잡고 올라가는 도구로 삼게 하였다. 민지(閔漬)의 〈유점기(楡岾記)〉에 이르기를 “호종단(胡宗旦.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와서 산의 혈맥을 끊는 악행을 저질렀다)이 이 산에 들어와서 기세를 누르려 하였으나 사자가 길목에서 막아 호종단이 들어갈 수 없었다.” 하였다. 운산이 산꼭대기의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사자 형상이오.” 하였다. 내가 자세히 보건대, 전혀 사자 같지 않고 그냥 투박한 하나의 둥근 바위였다.
냇물이 여기에 이르면 더욱 신기하고 아름답다. 10여 리에 걸쳐서 하나의 흰 바위가 끊어지지 않고 곳곳이 폭포이다. 그 아래는 깊은 못이고, 못 아래에 또한 폭포가 있기 때문에 골짜기 이름을 만폭동(萬瀑洞)이라 하였으니, 폭포가 하나뿐이 아님을 표시한 것이다.
나는 서쪽을 따라 내려갔다. 사자항에서 내려올 때에 서쪽에 네 개의 봉우리가 있으니, 첫째는 윤필봉(潤筆峰)이고, 둘째는 비로봉의 향로봉(香爐峰)이고, 셋째는 이름이 없고, 넷째는 금강대(金剛臺)이다. 동쪽에 있는 세 개의 봉우리는 모두 이름이 없다. 이 세 봉우리를 다 지나면 보덕굴(普德窟)이 있고, 굴 앞의 냇가에 희고 큰 바위가 있으니 평평하여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위아래가 모두 폭포이고 폭포 아래는 모두 깊은 못이다.
바위 위에 앉아 암자를 올려다보니 매우 기이하였다.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와서 이 산을 구경할 때, 어떤 두목이 하늘에 맹세하기를 “이는 참으로 부처의 경계(境界)이다. 원컨대 여기서 죽어 조선인이 되어 이 부처의 세계를 영원히 보려 한다.” 하고는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니, 지금 저 위의 못이 바로 그곳이다.
금방 바위 측면에 이름을 적고 굴로 올라가니, 바위를 쌓아 구름사다리를 만든 것이 높이가 수백여 길은 됨 직하였다. 사다리를 다 올라가니 절벽 사이에 암자가 걸려 있었다. 대략 몇 길 되는 두 개의 구리 기둥으로 암자를 지탱시키고 기둥 위에 집 하나를 지었다. 쇠줄 하나를 만들어 한끝은 기둥에 고정시키고 한끝은 바위에 고정시켰다. 또 쇠줄 하나를 만들어 그 집을 둘러 묶어 두 끝을 바위에 고정시키고 관음소상(觀音塑像)을 안치하였다. 그 위에 또 한 개의 사(社)를 지어 승려가 거처하는 곳으로 삼고, 또 그 곁에 방 하나를 만들어 주방으로 삼았다. 승사(僧舍)의 서쪽과 관음굴의 위에 대 하나를 쌓아 보덕대(普德臺)라 했으니, 보덕이라는 것은 관음이 화신한 이름이다. 먼저 승사(僧社)에 들어갔더니 친구 동봉(東峰.김시습) 청한자(淸寒子)가 지은 벽기(壁記)와 허주(虛舟) 신지정(申持正)이 채색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조금 있다가 승사(僧社)에서 굴로 내려오니 쇠줄 두 개가 있었다. 더위잡고 내려올 때에 판자 소리가 삐걱삐걱하여 두려워할 만하였다. 이른바 관음 앞에는 원장(願狀)이 자못 많았다.
나와서 대(臺) 위를 둘러보고 도로 승사(僧舍)로 들어가서 밥을 먹은 뒤에 보덕굴을 내려왔다. 다시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니, 흰 바위가 매끄럽고 윤택하여 발을 벗고 걸어도 물집이 생기지 않았다. 이윽고 앞으로 나아가서 수건암(手巾巖)에 이르렀다. 동봉의 기(記)에 이르기를 “관음보살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화신하여 이 바위에서 수건을 빨다가 승려 회정(懷靜)에게 쫓겨서 바위 아래로 들어갔다.” 하였다. 바윗돌이 비스듬히 비켜 있어 혹 깊은 못을 이루기도 하고 혹 폭포를 이루기도 하였다. 바위 가로는 만 명의 사람이 앉을 만하여 바라보면 심신(心神)이 시원해졌다. 내가 앉았다 누웠다 하며 물로 장난치면서 기이하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느라 떠나지 못하니, 운산이 가자고 재촉하여 표훈사(表訓寺)로 내려왔다. 서쪽으로는 금강대 이하로 지나온 봉우리가 열한 개이고, 동쪽으로는 보덕굴 이하로 지나온 봉우리가 일곱 개이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모두 30리이다.
주지 지희(智熙)는 운산의 친구로,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등불을 밝혀 차를 대접하고 차가 나간 뒤에 밥을 대접하였다. 절에는 지원(至元) 4년 무인년(1338) 2월에 세운 비석이 있다. 바로 원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봉명신(奉命臣) 양재(梁載)가 글을 짓고, 고려 우정승(右政丞) 권한공(權漢功)이 글씨를 썼다. 이는 황제가 표훈사의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만인(萬人)의 결연(結緣)을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태황태후(太皇太后)가 출연(出捐)한 은(銀)과 포(布)의 분량과 영종황제(英宗皇帝), 황후(皇后), 관자불화태자(觀者不花太子) 및 두 낭자(娘子)가 출연한 분량과 완택독(完澤禿) 심왕(瀋王) 등 대소 신료가 출연한 분량을 기재하였으니, 이는 곧 시주를 기록한 것이다. 이날 밤에 나를 작은 침실에서 묵게 하였으니, 친근하게 여긴 것이다.
경진일(29일) 지희가 아침밥을 대접하였다. 산중의 음식을 극진하게 장만하였고 나의 노복들에게도 후하게 대접하였다. 작별할 때에 부채 하나와 신발 하나를 나에게 선사하고 운산에게도 똑같이 선사하였다.
냇가를 따라 5리쯤 가다가 동남쪽으로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 나무 밑으로 갈 때에 올려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아서 지나친 산봉우리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5, 6리쯤 갔을 때에 옛날 성(城)이 있었다. 아마 왜적의 난리를 피했을 때에 쌓은 것인 듯하다. 성터를 지나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니 동쪽에 두 암자가 있었다. 대송라암(大松蘿庵)과 소송라암(小松蘿庵)이다. 여기서부터 내 발에 물집이 생겨서 걷기가 매우 어려웠다.
대송라암에 이르러 누워서 쉬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깬 뒤에 그 절의 승려 성호(性浩)에게 산행의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암자 뒤로부터 측백나무 가지를 더위잡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한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또 곧바로 산허리의 절반을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서 북쪽으로 올라가며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흰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높이가 몇천 길이나 되고 드리운 듯도 하며 떨어질 듯도 하였다. 군데군데 쇠줄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어 손으로 당기고 올라가서 승상봉(僧床峰)과 응암봉(鷹巖峰)의 사이를 나갔다. 승상이라고 이름한 것은 봉우리 아래에 승려의 상(床)과 같은 바위가 있기 때문이고, 응암이라고 이름한 것은 봉우리 위에 매의 형상과 같은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응암 북쪽에서 절벽을 오를 때에 혹은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혹은 돌부리를 더위잡았다. 암석을 걸어온 거리를 모두 합하여 약 10여 리쯤 되는 지점에서 망고대(望高臺)에 오르니, 사통오달(四通五達)하여 승상봉과 응암봉이 도리어 산 밑에 있었다. 전날 만폭동에서 지나온 여러 봉우리는 낮은 언덕과 같아 구별할 수 없고, 단지 진견성봉(眞見性峰)만 북쪽에 보였다. 그 봉우리 뒤에 비로봉이 하늘을 지탱하는 듯한 형세여서 여러 봉우리에 비해 몇백 배나 되게 높으니, 이에 평지에서 올려다본 것은 바로 그 지엽이었고 상봉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봉우리 서남쪽에는 만경대(萬景臺)와 백운대(白雲臺)와 중향성(衆香城)이 있고, 그 다음에 마하연암(摩訶衍庵) 뒤의 봉우리가 있어 비로봉과 서로 이어져 하나의 산악을 이룬 듯하다. 동북쪽에는 안문봉(雁門峰)이 비로봉 다음에 있고, 안문봉 뒤에 있는 대장봉(大藏峰)과 상개심봉(上開心峰) 등 여러 봉우리는 단지 붓끝처럼 뾰족한 머리만 보일 뿐이다. 여러 뾰족한 봉우리 남쪽에 있는 두 봉우리는 여러 뾰족한 봉우리보다 2, 3등급이 낮다. 이름이 시왕봉(十王峰)이다. 봉우리 뒤에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이 있고, 냇가에 영원암(寧原庵)이 있다. 운산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또 시왕수(十王水)가 아래에서 만폭동과 합류하여 장안사(長安寺) 앞의 시내가 된다. 시왕봉 뒤쪽 백천동 동쪽에 위가 평평하며 시왕봉보다 약간 높은 토봉 하나가 있으니, 천등봉(天燈峰)이다. 그 남쪽에 천등봉보다 한두 등급 높은 가파른 봉우리가 있으니, 미륵봉이다. 천등봉과 미륵봉 사이에 머리를 드러낸 두 봉우리가 있으니, 관음봉(觀音峰)과 지장봉(地藏峰)이다. 미륵봉 남쪽에 미륵봉보다 한두 등급 낮은 토봉이 있으니, 달마봉(達磨峰)이다. 달마봉 서쪽에 또한 몹시 낮은 토산 하나가 있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 봉우리의 남쪽이 바로 금장면(金藏面)과 은장면(銀藏面)이다.
장안사 서북쪽에 신림사(新林寺)가 있고, 신림사 서북쪽에 정양사(正陽寺)가 있고, 정양사 서북쪽에 개심대(開心臺)가 있고, 개심대 서쪽에 개심암(開心庵)이 있다. 그 산은 기슭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흙이어서 무성한 수목이 한 방면을 휘감고 있다. 그러나 봉우리는 매우 낮아 여러 봉우리에 견줄 것은 아니다. 개심대 북쪽에는 매우 높은 토산이 미륵봉과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이름이 서수정봉(西水精峰)이다. 봉우리 남쪽에 웅호암(熊虎庵)이 있고, 봉우리 뒤쪽에 수정암(水精庵)이 있다. 이는 곧 비로봉 북면의 물이 흘러드는 골짜기이다. 개심대 뒤쪽 서수정봉 남쪽에 개심대 뒷산보다 조금 높은 토산이 하나 있으니, 이름이 발령(髮嶺)이다. 승려가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다가 이 고개에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며 수없이 예배드리고, 머리카락을 끊어 나뭇가지에 걸어 사문(沙門)에 들어가려는 뜻을 보였기 때문에 이 고개를 발령이라고 이름합니다.” 하였다.
대석(臺石) 위에 앉아 봉우리 이름을 다 물은 뒤에 사방을 둘러보니, 신기(神氣)가 기뻐져서 호호(浩浩)히 내 몸이 높은 곳에 있음을 느꼈다. 한참을 보내고 내려가려 할 때에 안변(安邊)의 승려 네 사람이 뒤이어 올라왔기에 네 명의 승려와 함께 내려왔다. 네 명의 승려는 상운재(上雲岾)로 돌아가고, 나는 승상석(僧床石)에 올랐더니 심신이 오싹해지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도로 내려와서 송라암에 이르러서는 벽 위에 있는 친구 대유(大猷.한훤당 김굉필)의 명자(名字) 및 절구(絶句) 한 수를 보았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모두 25, 6리쯤이다.
윤4월 신사일(1일) 송라암을 출발하여 옛 성터를 지나 남쪽으로 한 골짜기를 내려갔다. 왼쪽으로 두 봉우리를 지나고 오른쪽으로 네 봉우리를 지나 안양암(安養庵)에 이르렀다. 암자 뒤에 있는 나한전(羅漢殿)은 트이고 밝아 앉을 만하기에 그 위에 앉아 일과(日課)를 적었다.
암자 앞에 깊은 못이 있다. 이름이 울연(鬱淵)으로, 김동(金同)이 빠진 곳이다. 김동은 고려 시대의 부자이다. 평소에 부처를 신봉하여 울연 가에 암자를 짓고는 여러 바위 면에 모두 불상을 조각했고, 부처를 공양하고 승려에게 보시하는 쌀 바리가 개경(開京)에서 이어졌다. 지공이 이 산에 들어와서 김동을 외도(外道)라고 하니, 김동이 승복하지 않았다. 지공이 맹세하기를 “네가 옳고 내가 그르다면 오늘 내가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고,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면 오늘 네가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다.” 하니, 김동이 “좋다.” 하였다. 지공이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묵으니, 밤에 과연 뇌성이 일고 비가 퍼부어 김동의 절이 물과 바위에 어지러이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자 김동이 절의 불상과 종(鍾)과 승려들과 함께 동시에 울연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한다.
울연 가 1리쯤에 김동의 절터가 있다. 안양암을 지나 동쪽으로 산허리를 돌아가니, 철쭉과 솜대가 붉고 푸르게 오솔길에 가득하였다. 미륵암(彌勒庵)에 이르렀다. 암자 뒤에 일곱 봉우리가 늘어서 있고, 암자 앞에 물이 있으니, 바로 울연의 하류이다. 주승(主僧) 해봉(解逢)에게 청하여 차 한 잔을 마시고, 식사 후에 왼쪽으로 명수(明水)ㆍ지장(地藏)ㆍ관음(觀音) 세 암자를 지나고, 오른쪽으로 양심(養心)ㆍ영쇄(靈碎) 두 암자를 지났다. 시왕백천동의 물이 여기에서 만폭동과 합류한다. 이곳을 지나면 냇가 바위가 더 이상 흰색이 아니다.
미타암(彌陀庵)으로부터 10여 리를 가서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렀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창건한 것이고, 원나라 순제(順帝)가 기 황후(奇皇后)와 함께 중창(重創)한 것이다. 문 밖에 천왕(天王) 두 개가 있고, 법당에 대불(大佛) 세 개와 중불(中佛) 두 개가 있었다. 부처 앞에는 ‘황제만만세(皇帝萬萬世)’라고 금으로 쓴 편액이 있다. 법당의 사면에 작은 부처 1만 5천 개가 있으니, 모두 원나라 황제가 만든 것이다. 그 동쪽 측면에 무진등(無盡燈)이 있다. 등(燈) 안의 사면은 모두 구리거울이다. 가운데에 촛불 하나를 두고 그 곁에 여러 승려의 형상을 세워두니, 촛불을 사를 때면 여러 승려가 모두 촛불을 잡는 듯하다. 이 또한 원나라 황제가 만든 것이다.
다섯 왕불(王佛) 위에 또 다섯 중불(中佛)이 있으니, 복성정(福城正)이 만든 것이다. 법당의 서쪽 당에 달마(達磨)의 진영(眞影)이 있고, 동북쪽 모퉁이에 나한전(羅漢殿)이 있고, 당좌(堂坐)에 금불(金佛) 다섯 개가 있고, 좌우로 토나한(土羅漢) 열여섯 개가 있다. 나한의 곁에는 각각 시봉승(侍奉僧) 두 개가 있으니,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다. 나한전의 남쪽에 하나의 방이 있다. 방 안에 대장경함(大藏經函)이 있으니, 나무를 새겨 3층을 이루었다. 집 가운데에 철구(鐵臼)가 있다. 철주(鐵柱)를 그 위에 두어 위로 집 대들보와 연속시키고, 함(函)을 그 가운데에 두어 집 한 모퉁이를 잡고 흔들면 3층이 저절로 돌게 하여 구경할 만하다. 이 또한 원나라 황제가 만든 것이다.
구경이 끝나자 주지 조징(祖澄)이 차와 밥을 대접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앞서 지나온 냇가를 따라 올라갔다. 울연과 보현암(普賢庵)을 지나 신림사(新林寺)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장안사로부터 지나온 여러 봉우리와 아침나절에 지나온 일곱 봉우리와 시왕동(十王洞) 어귀에서 바라본 여러 봉우리를 아울러 헤아려보면, 시내 동쪽에 29개 봉우리가 있고, 시내 서쪽에 18개 봉우리가 있다. 북쪽의 봉우리는 앞의 기록에 실려 있다.
신림사로부터 천친암(天親庵)에 올랐다. 천친암으로부터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니 배재(拜岾)가 오른쪽에 있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이 산에 들어왔을 때에 5만의 담무갈이 이 재에서 현신(現身)하여 태조가 무수히 예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배재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양사로부터 또 비를 무릅쓰고 수목 밑으로 약 10리쯤 서쪽으로 올라가서 보현령(普賢嶺)에 올랐다. 또 서쪽으로 3, 4리쯤 올라가서 개심암에 이르니, 옷이 다 젖었고 또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모두 40리쯤이다.
임오일(2일) 비가 갰다. 개심대에 올라 여러 봉을 바라보니, 망고대와 대동소이하였다. 비로봉과 중향성이 동쪽에 있고, 선암(禪庵) 뒤의 봉우리가 서북쪽에 걸터앉았으니, 곧 비로봉이 서쪽 줄기이다. 마하연암 뒤의 봉우리가 바로 선암봉 앞에 있고, 영랑현(永郞峴)이 선암봉 뒤에 있다. 서수정봉(西水精峰)이 영랑현 서쪽에 있고, 월출봉이 비로봉 동남쪽에 있다. 일출봉이 월출봉 남쪽에 있고, 원적봉이 일출봉 남쪽에 있으니, 망고대에서는 볼 수 없는 봉우리들이다. 원적향로봉이 원적봉 남쪽에 있고, 안문봉이 또 그 남쪽에 있다. 안문봉 북쪽에 멀리 보이는 한두 봉우리가 있으니, 보문봉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던 것이다. 진견성봉(眞見性峰)이 또 안문봉의 남쪽에 있다. 망고대가 또 그 남쪽에 있고, 시왕봉이 망고대 위에 머리를 드러내고, 천등ㆍ관음ㆍ지장ㆍ미륵ㆍ달마 등 여러 봉우리가 그 동남쪽에 늘어섰으니, 이것이 그 대략의 모습이다.
대의 남쪽에 안심대(安心臺)가 있고, 대의 측면에 개심태자(開心太子)의 석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신라국의 태자입니다. 태자가 안심태자(安心太子), 양심태자(養心太子), 돈대부인(頓臺夫人)과 함께 여기에 이르러 수도하였으니, 모두 법흥왕의 자녀입니다.” 하였다. 지금 있는 네 개의 암자가 옛 이름을 그대로 쓴다고 하니,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 식사 후에 개심암으로부터 서쪽으로 묘덕암(妙德庵)에 내려가서 극선암(克禪庵)에 들어가 보았다. 뒤쪽에 느린목[緩項]이라고 이름한 곳이 있으니, 지공(指空)이 산에 들어올 때의 길이다.
천덕암(天德庵)을 들렀다. 암자에는 수원부(水原府) 사족(士族)의 과부가 도산재(都山齋)를 베풀고 있었다. 승려 500여 명이 산허리에 늘어앉아 떠드는 소리가 골짜기 안에 진동하였고, 과부가 뭇 승려 가운데서 얼굴을 드러낸 채 결연(結緣)을 맺고 있었다. 또 원통암(元通庵)을 찾았다. 암자의 좌우에 있는 두 시내가 암자 앞에서 합류하니, 또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을 지나 원통암 뒤 고개 영랑현(永郞峴)에 올랐다. 앞서 지나온 여러 봉우리는 일곱이다. 또 윤필암(潤筆庵) 고개를 넘어 윤필암을 들렀다. 또 사자령(獅子嶺)을 넘어 동으로 가니, 곧 지난번에 보았던 사자암(獅子庵)이다.
여기서부터 보는 산봉우리는 또한 앞의 기록에 실려 있다. 산과 냇물이 차이가 없고, 흰 바위도 이전과 같다. 다만 냇물 양쪽의 철쭉꽃이 지난밤 비에 활짝 피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지다가 혹 하나의 밭을 이루기도 하니, 구경할 만하다. 나는 이전 길을 따라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안문재에 이르기 전에 동남쪽으로 한 골짜기에 들어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수재(水岾)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와서 왼쪽으로 흐르는 냇물을 보고 오른쪽으로 남산을 끼고서 나무 그늘 속을 걸어갔다. 왼쪽으로 봉우리 일곱 개를 지나고 오른쪽으로 봉우리 네 개를 지나 북쪽으로 냇물을 건너고 높은 산 하나에 올랐다. 내려와서 성불암(成佛庵)에 이르러 암자 위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니, 비가 내린 뒤에 더욱 분명하여 전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객승(客僧) 죽희(竹熙)라는 자가 나를 위하여 밥을 지었다. 밥을 먹은 뒤에 죽희ㆍ성통(性通) 등과 함께 돌아가서 불정암(佛頂庵)을 구경하니, 암자는 지난해에 화재를 당하였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랐다. 대 가운데 있는 구멍은 산 아래의 깊은 못과 연결되어 바람이 그 가운데서 나온다. 승려가 이르기를 “옛날 용녀(龍女)가 이 구멍에서 나와 불정조사(佛頂祖師)에게 차(茶)를 바쳤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황당하였다. 불정대 아래에 청학(靑鶴)이 있어 해마다 그 가운데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내가 대 위에 앉아 동남쪽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서쪽에 안문(雁門)이 있고 북쪽에 개심사(開心寺)ㆍ적멸사(寂滅寺)ㆍ백전사(柏田寺) 등이 있다. 그 아래에 흰 바위가 벼랑 하나를 이루었고 폭포가 12층을 드리워서 내려간다. 반은 나무숲 끝으로 들어가 있어 내가 바라본 것은 6층일 뿐이다. 황혼에 돌아와서 성불암(成佛庵)에 투숙하였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60리이다.
계미일(3일) 성불암에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여명 때부터 하늘 동쪽이 붉은 빛을 띠더니 잠깐 사이에 둥근 해가 솟아올라 바다 빛이 모두 붉어졌고, 해가 3간(竿) 정도 올라오자 바다 빛이 맑고 희어졌다. 나는 단편(短篇)을 지어 기록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작은 고개 하나를 넘고 10리를 가서 유점사(楡岾寺)에 이르렀다. 구연동(九淵洞)의 수원(水源)이 미륵봉에서 나와 절 앞에 이르러 수재천(水岾川)과 합류한다. 절에는 시내의 남북을 걸터앉은 수각(水閣)이 있다. 노니는 물고기가 앞에서 날아서 뛰고, 큰물이 지면 연어(連魚)ㆍ송어(松魚)ㆍ방어(魴魚)가 모두 수각 아래에 이른다. 절의 바깥문이 해탈문(解脫門)이니 천왕(天王) 두 개가 있고, 다음은 반야문(般若門)이니 천왕 네 개가 있다. 다음은 범종루(泛鍾樓)이다. 누 곁의 한 방에 노춘(盧偆)의 상(像)이 있다. 가장 안쪽에 능인보전(能仁寶殿)이 있다. 전 안에 나무를 새겨서 산 모양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늘어선 오십삼불(五十三佛)이 있다. 전 뒤에 우물 하나가 있다. 이름이 오탁(烏啄)이니, 까마귀가 부리로 쪼아 우물물을 처음 얻었기 때문이다.
절에 있는 명(明) 사주(社主)가 묵헌(默軒) 민지(閔漬)의 〈유점기(楡岾記)〉를 내보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오십삼불은 본래 서역 사위국(舍衛國)에서 세존(世尊)을 보지 못한 삼만가(三萬家)가 문수사니(文殊師尼)의 말을 받들어 석가의 상을 주조한 뒤에 쇠북 속에 담아 바다에 띄워서 가는 대로 내맡겨 두었던 것이다. 불상이 월지국(月氏國)에 이르니, 그 나라 왕이 집을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다. 그 집에 큰불이 나자 부처가 왕에게 현몽(現夢)하여 다른 나라로 떠가고자 하니, 왕이 불상을 쇠북 속에 넣어 또 바다에 띄웠다. 불상이 신라국 고성강(高城江)에 다다랐다. 태수 노춘이 불상에게 머무를 곳을 청하자 불상이 금강산으로 들어가므로 노춘이 뒤를 따라 찾아갔다. 바위 위에 앉아 길을 인도하는 비구니가 있었으니 그 땅 이름이 이대(尼臺)이고, 고개 위에서 길을 인도하는 개가 있었으니 그 땅 이름이 구재(狗岾)이고, 산골짜기 입구에서 길을 인도한 노루가 있었으니 그 땅 이름이 장항(獐項)이고, 불상이 머물 곳에 이르러 쇠북 소리를 듣고 기뻐한 것이 있으니 그 땅 이름이 환희재(歡喜岾)이다. 노춘이 남해왕(南解王)에게 아뢰어 큰 절을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으니 이름이 유점사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민지의 기문은 일곱 개의 큰 망설(妄說)만 있고,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쇠가 물에 뜨는 이치가 없으니, ‘사위국에서 주조한 쇠북과 불상이 바다 가운데에 떠서 월지국을 지나 신라에 이르렀다.’는 것이 첫 번째 큰 망설이다.
쇠가 스스로 걸어갈 이치가 없으니, ‘고성강에 다다라 금불이 스스로 금강산 유점으로 들어갔고, 또 끓는 물을 피하여 구연동(九淵洞)의 바위 위로 날아서 들어갔다.’는 것이 두 번째 큰 망설이다.
불교는 본래 서융의 종교로, 후한 명제(明帝) 시대에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다. 또 수백여 년 뒤 남북조 시대인 신라 중엽이 되어서야 우리나라로 유입되어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그 법을 이룬 사실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전한(前漢) 평제(平帝)의 시대와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조정 때에 이러한 일이 있어 비로소 유점사를 창건했다.’는 것이 세 번째 큰 망설이다.
가령 민지의 설처럼 부처가 비록 한나라 명제 시대에 비로소 중국으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 부처가 있었던 것은 남해왕 때부터 비롯되어 실로 중국보다 앞섰다면 어찌 사적(史籍)에 실리지 않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은 무지하여 군부처럼 부처를 받든다. 태조 왕건(王建)처럼 고명한 사람도 속습을 벗어나지 못하여 오히려 말하기를 “내가 나라를 차지한 것은 실로 불력(佛力)에 힘입은 것이다.” 하였으니, 당시에 가령 이런 사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사실을 자랑하고 말을 부풀려 역사에 실었을 것이다. 역사에도 오히려 실리지 않았거늘 민지가 근거 없는 야인(野人)의 말을 믿고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큰 망설이다.
가령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 비구승도 있고 비구니도 있게 된 것이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되었을 터이므로 이전에 이러한 법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노춘이 부처를 찾아갈 때에 비구니가 길을 인도했다.” 했으니, 불법이 있기 전에 어찌 비구승과 비구니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다섯 번째 큰 망설이다.
불상이 날아서 골짜기에 들어갔다는 것은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이다. 승려가 불상을 안치하자 불상이 노여움이 걷혀서 다시 날아가지 않았다고 하니, 이 어찌 앞은 신령스럽고 뒤는 어리석은 것인가. 어린아이의 노여움도 오히려 위엄으로 멈추게 할 수 없거늘 부처의 신령스러움을 찬미하는 것이 도리어 어린아이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여섯 번째 큰 망설이다.
게다가 많이 듣고 널리 본 중국의 인물들로서도 오히려 서역의 범서(梵書)에 통하지 못하여 호승(胡僧)과 더불어 번역한 뒤에야 그 글이 세상에 밝혀졌거늘 사위국과 월지국에서 기록한 쇠북의 글자를 노춘이 또 어찌 해석할 수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그 당시에는 문적(文籍)이 드물어 사람들이 문자를 알지 못했거늘 서역의 사적을 말한 것이 명백하니, 이것이 일곱 번째 큰 망설이다.
심하도다! 민지의 황당무계함이여. 일곱 개의 큰 망설만 있고 명교(名敎)에 보탬이 될 한마디 말도 없으니, 이 기록은 없애 버려도 괜찮은 줄을 알겠다. 더구나 삼국(三國)의 초기에는 사람에게 일정한 성이 없었고 이름자도 사람에게 걸맞지 않았으니, 노춘이라는 이름은 의심컨대 또한 후세 사람이 지은 것인 듯하다. 어찌 신라 말엽에 학술 있는 승려 원효(元曉)ㆍ의상(義相)ㆍ율사(律師)의 무리들이 애당초 이 산의 사적을 자랑하려고 추후에 기술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릇됨이 이와 같단 말인가.
기문을 다 보았을 때에 명(明)이 나를 앉히고 차를 대접하였고, 나와서 수각(水閣)에 앉았을 때에 또 떡을 대접하였다. 다 먹은 뒤에 명이 냇가에서 전송하였다.
개복대(改服臺)를 지났다. 이 대는 곧 병술년 유점사의 불사 때에 거가(車駕)가 옷을 바꿔 입었던 곳이다. 또 단풍교(丹楓橋)를 지나 다리 근처에서 잠깐 쉬었고, 또 장항(獐項)을 지나다가 온정(溫井)에서 말을 가지고 나를 맞으러 온 자를 만났다. 말을 타고 구재(狗岾)를 넘었다. 고갯길이 험악하여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이대석(尼臺石)을 지나 고개로부터 평지에 이르렀다. 건천(乾川) 가에서 도시락을 먹고 준방(蹲房)을 지나 고성군(高城郡)에 닿았다. 유점사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60리이다.
태수 조공(趙公)은 나의 선조와 친한 사이여서 나를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이때 마침 양양 군수(襄陽郡守) 유자한(柳自漢)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었고, 반찬이 매우 잘 차려져 있었다.
갑신일(4일) 태수가 유 양양(柳襄陽)을 위해 삼일포(三日浦) 유람을 마련하여 나도 따라갔다. 삼일포는 신라 때의 화랑(花郞) 안상(安祥)과 영랑(永郞)의 무리가 3일 동안 놀고 파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포구의 암벽 사이에 여섯 자의 붉은 글씨가 있으니, 화랑의 무리가 쓴 것이다. 수면으로 4, 5리 거리의 중간에 바위섬 하나가 있다. 장송(長松) 몇 그루가 있기 때문에 송도(松島)라 이름한다. 동남쪽 모퉁이는 바라보면 바위가 거북 같기 때문에 구암(龜巖)이라 이름한다. 구암의 뒤쪽에 바닷가에 우뚝 솟은 흰 바위가 있으니, 설암(雪巖)이라 이름한다. 물 북쪽에 몽천사(夢泉寺)의 옛터가 있으니, 참으로 절경이다.
훈도(訓導) 김대륜(金大倫) 및 유 양양을 따라 배를 타고 송도에 다다랐다. 또 배를 저어 붉은 글씨가 적힌 암벽 아래 이르렀더니, 과연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는 여섯 글자가 있고, 그 글자는 돌에 의해 마구 공격당한 흔적이 있었다. 대륜(大倫)이 말하기를 “이전에 손님을 싫어하는 태수가 있었습니다. 군(郡)에 손님으로 오는 사람은 반드시 붉은 글씨를 보려 하기 때문에 태수가 그 비용을 싫어하여 돌로 쳐서 부수려 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글자의 획이 민멸(泯滅)되지 않아 해독할 수 있었다. 내가 이어서 그 글 뜻을 물으니, 대륜이 말하기를 “영랑은 신라 사선(四仙) 중의 하나이고, 남석(南石)은 이 바위를 가리키고, 행(行)은 바위로 가는 것이니, 세상의 문인들이 모두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 바위는 고성(高城)에서 보면 북쪽에 있고, 금강산에서 보면 동북쪽에 있고, 동해에서 보면 서쪽에 있거늘 남석이라고 일컫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또 여섯 글자로 문장을 이룬 것이 문리가 너무 엉성하여 아이들 솜씨와 같으니, 옛사람의 문법이 응당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좋아하는 어린애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영랑의 무리 중에 성명이 남석행(南石行)인 자가 이름을 적은 것이 아니겠는가. 배를 묶어 놓고 바위 위에 올랐다. 그 꼭대기에 미륵불을 위하여 향나무를 묻은 사적을 기록한 매향비(埋香碑)가 있으니, 고려 때에 세운 것이다.
배를 타고 송도로 돌아와서 종일 주연을 벌였는데, 안주와 음식이 매우 성대하였다. 혹은 어부로 하여금 고기를 그물질하여 회를 치게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지어 창화(唱和)하기도 했다. 오후에 큰바람이 일어나니 태수가 두려워서 배로 돌아가고, 나는 온정(溫井)으로 돌아왔다.
을유일(5일) 온정에 들어가서 목욕하였다.
병술일(6일) 목욕하였다.
정해일(7일) 목욕하였다.
무자일(8일) 목욕하고 나가서 쉬었다.
기축일(9일), 경인일(10일) 쉬었다. 가서(家書)를 받으니, 자당께서 안온하다고 하였다.
신묘일(11일) 노정을 돌려서 온정을 출발하였고, 가면서 또 고사리를 캐었다. 고성군을 지나고 또 만호도(萬戶渡)를 지났다. 배를 타고 고성포(高城浦)를 건너 강가에서 밥을 지었다. 영동의 민간 풍속은 매년 3ㆍ4ㆍ5월 중에 날을 받아 무당을 맞이하고 산해진미를 극진히 마련하여 산신에게 제사 지낸다. 부유한 사람은 바리에 실어 오고 가난한 사람은 지거나 이고 와서 귀신의 자리에다 차려 놓고 생황을 불고 비파를 타며 즐겁게 사흘을 연이어 취하고 배불리 먹은 연후에야 집으로 내려와서 비로소 남들과 물건을 매매하니, 제사 지내지 않으면 한 자의 베도 남에게 줄 수 없다. 고성의 민속제(民俗祭)가 바로 이날이어서 길거리 곳곳마다 단장한 남녀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종종 성시(城市)처럼 빽빽하기도 하였다.
설암을 지났다. 설암 이남에는 기묘한 바위가 매우 많다. 안창역(安昌驛)을 지나 안석도(安石島)에 올랐다. 자그마한 돌이 육지와 연결되었고, 화살대가 숲을 이루었다. 화살대 아래에 해당화가 있고, 해당화 아래에 있는 흰 바위는 평평하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쌓여 있기도 하고 부서져 있기도 하였다. 섬 아래를 두루 돌아본 뒤에 앉거나 누워서 즐겁게 구경하다가 도로 나와서 구장천(仇莊遷)을 지났다. 이 또한 빼어난 경치이지만 옹천(瓮遷)보다는 조금 못하였다.
사천(蛇川)을 건너고 명파역(明波驛)을 지나 냇가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술산(戌山)을 넘어 다시 바닷가를 따라 무송정(茂松亭)에 이르렀다. 정자는 바로 바다굽이에 있고, 또한 육로와 연결되었다. 장송(長松)이 그 꼭대기에서 자랐고 흰 바위가 기슭을 이루었는데, 안석도에 비해 몇 배나 높은지 알 수 없다. 열산(烈山)을 지나고 간성(杆城) 땅에 들어가서 포남(浦南)의 민가에서 묵었다. 이날 바다를 따라 간 거리가 모두 120리이다.
임진일(12일) 비를 무릅쓰고 포남을 출발하여 반암(盤巖)을 지나 19리를 가다가 비가 심하여 간성의 객사에 멈추어 묵었다. 태수 원보곤(元輔昆)이 술과 밥을 대접하였는데, 운산이 술에 취하여 넘어졌다.
계사일(13일) 비가 갰다. 출발하여 문암(門巖)을 지나고 바다를 따라 45리를 가서 청간역(淸澗驛)에 이르니, 물가에 임한 누각이 있었다. 누각 뒤에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누각 앞에는 많은 바위가 높고 험하였다. 내가 누각 뒤쪽 절벽 위에 오르니, 바라보이는 것이 더욱 넓었다. 서쪽으로 보이는 설악(雪岳)에는 빗줄기가 쏟아지는 듯하고, 하늘 남쪽에는 정오의 해가 하늘 가운데에 있었다. 바다는 앞에서 어둑하고 꽃은 뒤에서 환하여 기묘한 구경거리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절벽 위에서 밥을 물에 말아먹고 또 바닷가를 가서 모래 언덕과 바다굽이를 지났다. 이때에 동남풍이 급하게 불어 파도가 해안을 때리는 것이 마치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몰아치는 듯했다. 바닷물이 부딪치는 곳에 붉은 무지개가 즉시 생겨났다가 생기는 대로 곧바로 없어지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죽도(竹島)를 바라보니 흰 대나무가 연기와 같다. 대나무 아래 바위 위에는 해달(海獺)이 줄을 이루어 무리들이 함께 우니, 그 울음소리가 물소리와 어우러져서 바다굽이를 진동시킨다. 또 부석(腐石)에 이르니, 청간(淸澗)에서 여기까지는 20리이다.
또 오른쪽으로 천보산(天寶山)을 지나 송정(松亭)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낙산(洛山)을 바라보며 20리를 가서 낙산동(洛山洞)에 들어갔고, 또 10리를 가서 낙산사(洛山寺)에 닿았다. 지나온 저수지는 크기가 10여 리 혹은 20여 리인 것이 여섯이다. 두 개의 큰 개[浦]와 두 개의 큰 냇물을 건너고 세 개의 죽도를 지났는데, 기암(奇巖)과 괴석(怪石)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낙산사는 신라 승려 의상(義相)이 창건한 것이다. 절의 승려가 그 사적(事跡)을 전하기를 “의상이 관음보살의 친신(親身)을 해변 굴속에서 보았을 때에 관음보살이 친히 보주(寶珠)를 주었고, 용왕이 또 여의주(如意珠)를 바쳐서 의상이 두 개의 구슬을 받았습니다. 이에 절을 창건하고, 전단토(旃檀土)를 가져다 손수 관음상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해변의 작은 굴이 바로 관음보살이 머문 곳이고, 뜰 가운데의 석탑이 바로 두 구슬을 갈무리한 탑이고, 관음소상(觀音塑像)이 바로 의상이 손수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무자년(1468)에 요승(妖僧) 학열(學悅)이 건의하여 절터에 큰 가람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주변 백성의 전답을 다 빼앗아 자기 소유로 삼았다. 지금 학열이 죽은 지 1년이 되었으나 그의 무리 지생(智生)이 일찍이 학열에게 잘 보였기 때문에 학열이 죽자 노비와 전답과 재물을 다 얻어 그 이익을 관리하고 있다.
절 앞에는 바다에 임한 정자 하나가 있다. 감나무 숲이 둘러쳐 있고, 대나무와 나무가 산에 가득하다. 정자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가 정자를 내려와서 언덕 아래를 지나 큰 대숲에 이르렀다. 도로 주사(廚舍)를 지나 곡구(谷口)로 내려가서 왼편으로 암석을 거쳐 작은 대나무를 헤치며 반 리쯤 가서 이른바 관음굴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작은 동불(銅佛)이 굴 아래 작은 방에 있었으나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였고, 방 아래의 바다 물결이 바위를 부딪쳐서 산 모양이 흔들리는 듯하고 지붕 판자가 길게 울렸다. 내가 내려가서 동구에 이르니 운산과 승려 계천(繼千)이 와서 나를 맞이하였다. 절에 이르자 지생(智生)이 나와서 맞이하여 묵을 곳을 마련해 주고 대접하였다.
갑오일(14일) 동틀 무렵에 정자 위에 앉아 뜨는 해를 바라보았다. 지생이 아침밥을 대접한 뒤에 나를 인도하여 관음전을 보게 하였다. 이른바 관음상이라는 것은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혼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관음전 앞에 정취전(正趣殿)이 있고, 정취전 안에 금불 세 개가 있다.
남로(南路)로 길을 나와서 서쪽으로 돌아서 갔다. 20리쯤 가서 양양부(襄陽府) 앞의 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또 10리를 가서 설악에 들어가 소어령(所於嶺) 아래 재에 오르니, 냇물은 왼쪽에 있고 산봉우리는 오른쪽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 냇물을 건너 왼쪽으로 가니, 산은 맑고 물은 빼어나며 흰 바위가 서로 포개진 것이 대략 금강산 대장동(大藏洞)과 같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오색역(五色驛)에 이르니 산의 달이 이미 흰빛이었다. 이날 육지로 간 것이 30리이고, 산길로 간 것이 40리이다.
을미일(15일) 오색역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건너니, 설악의 어지러운 봉우리가 무려 수십여 개였다. 산봉우리는 모두 머리가 희고 시냇가의 바위와 나무 또한 흰색이니, 세상에서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운산이 말하기를 “매년 8월이면 여러 산에는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아도 이 산에는 먼저 눈이 내리기 때문에 설악이라 하오.” 하였다. 고개 위의 바위 사이에 팔분체(八分體)로 쓴 절구 한 수가 있었다.
단군이 나라 세운 무진년보다 먼저 나서 / 生先檀帝戊辰歲
기왕이 마한이라 일컬음을 직접 보았네 / 眼及箕王號馬韓
영랑과 함께 머물며 바다에 노닐다가 / 留與永郞遊水府
또 춘주에 이끌려서 인간에 체류하네 / 又牽春酒滯人間
묵적이 아직도 새로우니, 글씨를 적은 것이 필시 오래지 않다. 세상에 신선이란 것은 없으니, 어찌 일 좋아하는 자가 우연히 적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자(程子)께서 국가의 운명을 하늘에 빌어 길게 만들거나 보통 사람을 성인의 경지에 도달시키는 것을 정기를 단련하여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깊은 산과 큰 못 가운데에 또한 이러한 사람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註: 정자(程子.程伊川) 가 말하기를 “수양이 수명을 연장시킴과 국운이 하늘의 영원한 명을 기원함과 보통 사람이 성현에 이르는 것은 모두 공부가 이 안에 지극하면 이러한 응험(應驗)이 있는 것이다[修養之所以引年 國祚之所以祈天永命 常人之至於聖賢 皆工夫到這裏 則有此應]” 하였다.>
그 시를 읽어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를 벗어날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고개 위에서 동해 바다를 하직하고, 고개를 내려와서 서남쪽으로 나무 밑을 걸어가니, 길이 매우 험하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었다. 정향(丁香) 꽃을 꺾어 말안장에 꽂아 향기를 맡았고, 면암(眠巖)을 지나 30리를 가서 말을 쉬게 하였다. 신원(新院)을 지나 또 15리를 가니 설악의 서면(西面)으로부터 오는 냇물이 있었다. 소솔천(所率川)과 합류하여 원통역(元通驛) 아래에 이르러 큰 강이 된다. 앞으로 나아가서 원통에 이르니, 산천이 넓고 크며 매우 아름다웠다. 원통부터는 평지를 밟았다. 또 25리를 가서 원통천(元通川)을 건넜다. 기린현(麒麟縣)의 물이 여기에서 합류한다. 강을 따라 5리를 가서 인제현(麟蹄縣)에서 묵었다. 이날 산길로 간 것이 60리이고, 육지로 간 것이 30리이다.
병신일(16일) 배를 타고 병항진(甁項津)을 건넌 뒤에 서남쪽으로 가서 선천(船遷)을 지났고, 또 서남쪽으로 가서 만의역(萬義驛)을 지났다. 또 산길로 가서 홍천(洪川) 경계에 들어갔고 천감역(泉甘驛)에서 묵었다. 모두 간 거리가 80리이다.
정유일(17일) 또 서남쪽으로 가서 마령(馬嶺)을 넘었고, 또 서남쪽으로 가서 큰 강을 따라 내려갔다. 구질천(仇叱遷)과 영봉역(迎逢驛)을 지나 60리를 가서 홍천현(洪川縣)에 이르렀다. 현감 백기(伯起)를 만나 보고 함께 묵었다.
무술일(18일) 배를 타고 앞강을 건넜고, 괘전령(掛牋嶺)을 넘어 백동역(百同驛) 뒷산을 거쳐 지평현(砥平縣)을 지났다. 또 천곡원(天谷院)을 지나 서남쪽으로 돌길에 들어갔다. 이날 간 거리는 모두 90리이다.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의 집에서 묵었다.
기해일(19일) 가랑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가서 천곡천(天谷川) 하류를 건넜고, 오빈역(娛賓驛)과 양근군(楊根郡)을 지나갔다. 또 월계천(月溪遷)ㆍ우원(隅院)ㆍ요원(腰院)ㆍ말원(末院)을 지나고 용진(龍津)을 건너서 봉안역(奉安驛)에서 묵었다. 이날 간 거리는 모두 80여 리이다.
경자일(20일) 두미천(豆尾遷)과 평구역(平丘驛)을 지나고 중녕포(中寧浦)를 건너 70리를 가서 서울에 들어왔다. 모두 계산해 보면, 산길로 간 것이 485리이고, 바닷길로 간 것이 274리이고, 육지로 간 것이 937리이다.
을사년(1485) 윤4월 21일 신축에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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