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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한국의 美_온돌 / 따뜻한 온돌, 찬 겨울을 녹이다 , 아랫목에 깃든 따스한 정
ysoo 추천 0 조회 99 15.11.29 2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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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_온돌

 

따뜻한 돌, 찬 겨울을 녹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돌을 달구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겨울 난방방식인 온돌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조화를 중요시 여긴 우리 선조의 지혜가 담긴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절절 끓는 아랫목에 모여 앉아 아궁이에서 구워낸 고구마를 먹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아랫목은 가족 간의 소통의 자리였습니다.
부뚜막 아궁이는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김이 오른 가마솥에 밥을 짓던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로 가득한 사랑의 공간이었습니다.


 

<GOLD&WISE>는 찬 바람에 마음까지 움츠러드는 12월을 맞아, 차가워진 몸과 마음을 녹여줄 온돌 문화를 엿보겠습니다.

KB고객 여러분, 따뜻한 겨울 보내십시오.
에디터 조민진 캘리그래피 강병인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스타일리스트 양은숙 어시스턴트 김소혜, 주민영

소품협찬 이불(담연, 02-546-6464ㆍwww.damyeon.com) 촬영장소 청송 송소고택(054-874-6556, www.송소고택.kr)

 

 

 

 

어머니와 아궁이 / 나상국


어머니는
요즘같이 시계가 흔치 않던
시절에도
전깃불 하나 없고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눈물 콧물로 얼룩진
고즈넉한 부엌의
어두컴컴한 빛을 등지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둠을 태우며
화가 잔뜩 난 듯한
아궁이 속 성난 듯한 불을
시커멓게 타다가 그을린
부지깽이 하나로
아기를 어르고 달래듯
엎었다 뒤집었다 하시며
배곯고 있는 식구들의
허기짐과
가마솥 안에서 밥 익어가는
소리와 냄새에 귀 기울여
시간의 맥을 잘 짚어내시곤 했다

 

 

 

 

 

온돌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찬 공기와의 밀도 차이 때문이다. 과학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거나 가장 발전된, 위로 올라가는 더운 기운의 성질을 이용한 온돌 문화에 담겨 있을 법한 우리네 정신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불길이 곧장 굴뚝을 향해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래를 따라서 사방을 돌며 구들돌을 덥힌 뒤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이 온돌의 원리다. 그래서 구들을 잘 놓는다는 건 불길이 방 안 곳곳을 빠트리지 않고 돌아 냉골이 없도록 함을 말한다. 가정이나 사회나 공동체 생활에서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두루 보살피면
그 또한 좋은 온돌과 같은 것이리라.

 

데워진 온돌의 열기는 아래에서 위로 서서히 올라간다. 만약 벽 가운데나 천장에서 더운 기운을 내려보내 실내를 덥힌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경우 맨 아래 방바닥에까지 더운 기운이 미치려면 훨씬 더 많은 열량이 필요할 것이고, 어떤 경우든 방바닥이 온돌의 경우처럼 따뜻하게 데워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치에 빗대어 말하자면 지도층이 먼저 자신부터 챙기고 아랫사람을 보살피려 든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다수의 평안과 행복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고대 중국 요(堯) 임금 시절에 불렸다는 ‘격양가(擊壤歌)’는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자주 회자된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 무위(無爲)의 정치를 말하는 노래지만 본질은 등 따시고 배부른 것, 백성에게는 그게 제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정치란 없었다. 특히 전제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렴주구’, ‘헐벗고 굶주린…’ 등의 말이 실감되지 않는 때가 거의 없다. 그러면 국민이 주인이라는 현대 민주 사회가 뿌리내린 오늘날은 어떨까. 단언컨대, 나아졌다.


아래를 데워 맨 위까지 따뜻하기. 아주 쉽다! 위에 있거나 서 있는 사람이 구들을 점검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영역인 위쪽보다는 아래쪽이 훨씬 더 따뜻해 보여 손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터이다. 그런데 그 쉬운 일을 못한다.

옆구리에서 더운 바람 쏟아내는 서양 문화 탓인가 생각도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지나친 무고일 것 같다.

방 안에 침대 들여놓고도 여전히 방바닥은 따뜻해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찜질방까지 찾아가는 우리네이니 말이다.


바람이 더 차진다. 해를 바꾸자니 해가 짧아지기도 한다. 서러운 사람들의 냉골은 더욱 얼음장이 될 터이다. 구들 점검은 일단 위정자에게 맡겨두고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이들이 나서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면 어떨까.

비슷하게 방바닥에 등 붙인 이들도 쏘시개 보태는 건 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먼저 방바닥이 데워지면 불길 닿지 않는 구석도 알게 되어 구들 점검하기도 수월할 텐데….


글 김정현(소설가)

 

 

 

김준근 ‘명쥬실뽑고?(23.2x16cm, 조선 후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가마솥에 고치를 삶아 내어 명주실을 뽑는 아낙네의 모습이다. 밥을 지어 먹고 옷을 해 입는 등 온돌은 우리의 의식주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겨울, 날씨는 춥고 바람은 거세고 차는 오지 않는다.

이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따끈따끈한 방바닥.


한국인이라면 어떤 감기에도 약보다 앞서 ‘방구들에 지지는’ 처방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데우는 정서가 있다. 온돌은 수천 년째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고 있다.

 

때로 단순한 행복을 설명할 때 ‘등 따시고 배 부르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저 뜨끈한 데서 몸을 녹이며 여유를 즐기는 것은 바쁠 때면 간절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도 그 의미가 온전히 전해질까.

 

등이 뜨거운 것과 행복한 것의 상관관계를 다른 문화권이 이해할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뜨거운 방바닥에 몸을 데우는, 아니 거의 데는 수준의 열 감각은 오직 한국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겨울철에 한국 가정에 초대받으면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놀라운 밤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외국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어머니의 된장찌개만큼이나 아랫목을 그리워한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최고급 호텔의 구스 다운 침구도 성에 차지 않는단다. 언제나 가까이 있어 모르다가 멀리 떠나보면 그리워지는 것이 문화의 힘이라고 본다면 구들은 음식만큼이나 오래되고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최자 <보한집>(고려 후기,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소장).

고려 후기에 최자가 엮은 시화집으로,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충한다는 의미로 썼다. <보한집> 하권에 동관 이윤보라는 관리가 말하는 부분에 구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보통 사람들은 추우면 구들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한다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구들은 흔한 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문헌에 기록된 구들 문화


우리의 바닥 난방 문화는 한자어 ‘온돌’과 순 우리말 ‘구들’(‘구운 돌’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구들의 역사는 집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전문가들은 구들이 한반도 북부에서 기원전 3세기 또는 그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구들의 역사가 이렇게 긴 데는 구들이 취사를 하기 위해 불을 때면 난방도 되는 일석이조의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흙과 돌, 나무 세 가지만 가지고 만들 수 있어 가난한 서민에게 널리 퍼진 점도 주요인이다.

온돌은 집 한가운데의 노지에서 부뚜막형으로, 그리고 부뚜막을 더 연장해 직선형 구들로, 기역자 구들로, 다음에는 여러 줄의 구들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의 삶과 가까웠던 만큼 많은 옛 문헌에 구들에 대한 설명이 자주 등장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는 집을 반드시 산골짜기를 의지하여 짓고, 모두 띠풀로 지붕을 덮는다. (중략)

그들의 백성은 가난한 자가 많다. 겨울철에 모두 긴 갱도를 만들고 갱도 아래에 불을 지펴서 따뜻함을 취한다. - <구당서> 제149 ‘고려전’"

 

 

장소원이 945년에 완성한 <구당서>에 나온 기록이다. 가난한 백성도 겨울이면 갱도를 만들고 불을 때서 겨울을 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구들은 재산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허름한 초가집에도, 화려한 기와집에도, 머슴방이든 안채든 상관없이 구들이 있었다.

 

 

" 관계수 동쪽에 관계사가 있고 절 내에 큰 건물을 지었으니, 매우 높고 넓어서 승려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바닥은 모두 돌을 결집해서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발랐으며, 그 안을 여러 갈래로 소통시키고 줄기가 기초 옆의 방 밖으로 나오게 하여 밥 짓는 불이 사방으로 나오고 뜨거운 열은 안으로 흘러서 건물 전체가 따뜻해진다. 이 지역은 추위가 혹독하고 찬기운이 맹렬하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이 모두 가난해 도업을 닦지 않을까 염려한 시주자가 이런 구조를 숭상했다. 이 때문에 도에 뜻을 둔 많은 사람이 의탁해 거처했다."
- <수경주> 권 14

 

 

후위 사람인 역도원이 500~513년에 쓴 <수경주>의 일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관계사라는 절 안에 난방 시설이 잘되어 있어 도에 뜻을 둔 많은 사람이 거처했다고 한다. 관계사가 현재 위치상 중국 국경 내에 있어 이것이 중국의 문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곳은 고구려 영토일 가능성이 높고, 중국에는 <수경주> 이후 600여 년 동안 난방 시설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연구가들은 구들 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돼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이 지었다는 <삼국유사>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사비 언덕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했다. 백제 왕이 왕흥사에 가 부처님에게 예를 드리려고 하면서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 이로 인해 이름을 돌석( 石: 구들)이라 했다."
- <삼국유사>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들 돌(火+突)’이라는 한자다. 한글 창제 이전에 구들 방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구들 돌’ 자를 사용했고, 이는 누구나 아는 말이었을거라 추측된다. 여기에 나온 왕흥사는 현재 부여읍에 터만 남아 있다.

 

"임금님 침실의 온돌은 침상 아래에 으레 화기를 넣어 온기를 취한다.

반드시 네모난 벽돌을 침상 아래에 먼저 깔아놓은 다음 화기를 넣어둔다. 그런데 내관이 초 4일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지 않은 채 화기에 불을 담아 넣어두고는 다시 살펴보지 않았다. 불이 한창 성할 적에 화기를 빼내었으나 상판이 타서 구멍이 나더니 밤이 이경에 이르러 불꽃과 연기가 활활 일어나는 것을 겨우 껐다.

만약 밤이 깊어서 미처 끄지 못했더라면 불이 크게 일어났을 것이다. "

- <명종실록> 제29권 제5장, 18년 계해년 2월 4일

 

궁궐에 불이 날 뻔한 상황은 아찔하지만 부주의한 내관 덕에 우리는 왕의 침실을 데우는 온돌 시설이 어땠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경은 밤 9시에서 11시 사이인데, 잠에 들 때 가장 뜨겁게 타올랐다는 것도 눈에 띈다. 이후 1700년대로 넘어오면 온돌로 인해 환경이 파괴될까 걱정하는 의견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 학자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의 한 대목을 보자.

이 책은 이익이 평소에 기록해둔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가 태평하여 40~50년을 지나는 사이 사치와 검약이 완전히 갈라졌다. 내가 어렸을 때에 사람들의 집에서 말똥을 동그랗게 쌓아 방구들에 불을 때 미지근하게 하는 것을 늘 보아왔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이전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마루에서 잠을 자고 오직 늙고 병든 자만 실내에 거처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방의 산이 벌거숭이가 되어 서울에서는 계수나무 같은 귀한 땔감을 때는데 천한 종들까지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지 않는 자가 없고, 또 말똥을 땔감으로 하는 것도 보지를 못했으니, 산에 나무가 어찌 고갈되지 않을 수 있으랴!

황산곡은 말하기를 “장중모가 나를 위해 겨울을 날 계책을 마련해 기린원의 말똥 300섬을 보내왔으므로 보향 20병으로써 갚았다”고 했으니, 말똥을 땔감으로 한 것이 옛적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 <성호사설> 중 ‘마통신’

 

 

여기서 ‘마통신’은 말똥을 말려 만든 땔감을 뜻한다.

이익의 말처럼 조선부터 근대까지, 온돌은 산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권석영 교수가 쓴 <온돌의 근대사>를 보면 온돌을 대하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나무가 땔감인 시절에 온돌은 민둥산의 원흉이라 불렸고, 일본 침략 시기에는 나태의 원인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서양인 선교사는 화상을 입을 정도로 데워진 방에서 자는 것이 악몽 같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점차 온돌의 매력에 빠졌고, 일본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온돌을 그을음도 연기도 없는 우수한 난방법으로 인정하며 가정에 설치했다.

 

 

 

아차산 제4보루 복원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자리한 아차산 유적은 고구려 군사 시설로,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진다. 아차산 제4보루의 7개의 건물 자리 속에서 모두 12기나 되는 고구려 구들이 발굴되었다.

 

 

구들은 인류 최초의 바닥 난방법


후대에 등장한 일부 비난에도 불구하고 구들은 인류 최초의 바닥 난방법으로 알려졌으며, 우리 민족은 구들이 생긴 이래 한 번도 이를 떠난 적이 없다. 다만 연료가 변했을 뿐이다. 구들은 1900년 초·중반까지 주로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했다. 탈곡하고 버려지는 콩깍지나 볏짚도 쓰였지만 가장 좋은 건 언제나 소나무나 참나무 장작이었다. 그래서 겨우내 쓸 땔감을 마련하는 것은 김장만큼 중요한 월동 준비였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 산이 헐벗기 시작하고 도시로 땔감을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아지면서 주원료는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었다.

 

1920년대 처음 등장한 연탄은 벽돌 크기에 구멍이 2개 뚫린 2공탄이었다. 구멍 9개의 구공탄이 나온 것은 몇 년 뒤로, 처음에는 주로 보약을 달이는 데 쓰다가 50년대 후반에 크게 확산됐다. 땔감이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면서 고래의 크기는 축소되고 아궁이도 연탄에 맞춰 개조되었다. 그러나 연탄가스 문제 등으로 보일러로 대체됐다. 이때 고래가 사라지고 취사와 난방도 분리됐다.

재미있는 것은 50년대 이후 서구식 주거 공간으로 변했으나 온돌 방식만은 그대로였다. 연탄의 등장으로 집은 복층 구조를 가질 수 있었는데, 아궁이는 고래보다 낮게 있어야 하므로 당시 아파트는 아랫집 천장으로 튀어나가는 함실 아궁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연료나 기술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난방이 되는 원리는 달라진 게 없다. 한 가지 문화가 이토록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분명 답은 그 우수성에 있을 것이다. 구들에 대해 폭넓은 연구를 한 전문가들은 구들장이도 건축가라고 말한다. 특히 한국의 난방법을 연구한 故 김남응 교수는 전통 구들이 바닥 난방으로 세계 최초인 동시에 연기 없는 난방법으로도 최초라고 밝혔다.

서양의 경우 10세기경까지는 모닥불 형태로 취사와 난방을 했고, 이후 등장한 벽난로도 연기와 열기가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중세까지 연기 때문에 고통받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열기를 얻으려면 괴로워도 함께해야 하는 것이 연기였던 셈이다.

반대로 구들은 불에서 연기는 배제하고 열기만 취하는 방식이었다. 연기가 바닥 밑에서 흐르며 바닥을 데우고 집 밖으로 빠져나간다. 김 교수는 이를 두고 ‘사람이 궁둥이 밑에 깔고 앉는 형상은 불을 지배하고, 길들이고 복종시킨 형상이라 흥미롭다’고 표현했다.

 

구들은 또한 최초의 축열 난방이기도 하다. 구들 난방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이 구들장에 저장돼 장시간 방이 데워지고, 열기가 식을 때쯤이면 취사를 하면서 구들장이 다시 가열돼 온기가 지속된다. 구들의 우수성은 이뿐이 아니다. 벽난로나 라디에이터는 무릎 아래까지 따뜻하게 할 수 없지만, 바닥 난방은 바닥에서부터 열기가 상승하므로 바닥과 바닥 근처의 온도가 올라가 하반신을 따뜻하게 한다. 이는 자연 법칙에도 맞아떨어지는데, 찬 공기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고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므로 아래를 데우는 것이 전체 온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구들을 알면 알수록 구들에 수사를 붙이는 데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 서적을 처음 펼쳤을 때는 그저 아무 때나 누울 수 있는 방바닥, 겨울이면 으레 따뜻해지는 방바닥에 너무 과한 찬사를 붙이는 것 같았는데, 알수록 그 찬사가 마땅하게 느껴진다.

구한말 외교관으로 활동한 호러스 앨런은 하루 두 번 밥을 짓기 위해 때는 불만으로도 방이 따뜻해지는 것에 놀라며 ‘조선 사람은 이 점에서는 이웃 나라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가옥은 해로울 정도로 춥고 화로가 손을 쬐는 유일한 재래식 난방 장치일 뿐이며, 그 반면에 중국인은 겨울의 혹한에도 결코 따뜻함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중앙 난방, 가장 이상적인 실내 온도 형성 방식, 자연 법칙에 가장 충실한 난방법, 난방과 취사를 이상적으로 겸한 세계 유일의 방식 등 우리가 알지 못한 구들의 우수성은 이렇게 많다.

 

 

전통 구들의 구조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방이 따뜻해지고 굴뚝으로 연기가 나온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어떻게 화기가 온기가 되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기술은 이방인의 눈에 더욱 신기했는데, 전통 구들은 볼품없는 생김새와 달리 연기나 그을음도 나지않고 방 안으로 열기를 전달해 신비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구들은 크게 아궁이, 부뚜막, 고래, 부넘기, 굴뚝 등으로 구성된다.

구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 고래는 연기가 구들장을 데우며 지나가는 통로다. 모양에 따라 줄고래, 허튼고래, 맞선고래 등으로 나뉘며, 고래 바닥은 보통 방 끝 쪽으로 약간 경사져 올라가게 만드는데, 이는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이용해 연기가 순조롭게 이동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궁이 속 안쪽에는 고래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 불이 넘어가는 고개라고 부넘기 또는 불고개라고 한다. 이 부분이 연기의 역류를 방지하고 열기가 고래 속으로 잘 빨려 들어가게 한다.
그래서 밥을 하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면 방이 절로 따뜻해진다. 여름에는 마당에 아궁이를 두고 밖에서 조리했다.

 

부뚜막은 솥을 걸어 취사할 수 있는 시설이다. 주로 부뚜막에 아궁이 두어 개를 두고 위에 가마솥을 올렸다.

 

 

김홍도 ‘주막?(39.7×26.7cm, 조선 시대,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행 중에 중년 부부가 간이주막에서 요기하는 광경을 그렸다. 국자로 막걸리를 떠내는 주모의 모습이나 부뚜막 위의 밥양푼과 술사발이 당시 주막의 풍경을 잘 전해준다. 하루 종일 걷느라 지친 여행자들은 뜨끈한 온돌방에서 온몸을 녹이며 여독을 풀곤 했다.

 

 

성협 ‘야연?(33.2×33.4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좌식 생활을 해오던 우리 선조는 식어가는 온돌방의 따뜻함을 화로로 이어갔다.바깥 바람이 아무리 차갑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쳐도 화로만 있으면 끄떡없었다. 아궁이 속에 잘 익은 숯불을 화로로 옮겨와 집 바깥에서도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온돌에서 자란 다정하고 훈훈한 정서


논밭이 넓게 펼쳐진 시골길에 가면 해 지기 전 어김없이 연기가 피어오른다. 집집마다 툭탁툭탁 밥 짓는 소리와 함께 굴뚝으로 연기가 올라오고 아이들은 집으로 뛰어간다.

필자는 온돌이 과학적인 우수성 외에도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해 방향을 알 수 없는 향수 속에 살아야 하는 지금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온돌 문화는 손님이 오면 땀이 나도록 따뜻하게 대접하고 식은 음식은 절대 주지 않는 우리의 배려심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 문화에서 열기는 무척 중요하다.

옛날에는 새집을 지은 후 화로를 앞세워 들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여기에는 불이 번지는 것처럼 가문이 융성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집에 온기가 없으면 사람이 관리하지 않는 폐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을 담은 온돌은 우리 정서를 형성한 유산이다.

민속학자 손진태 선생이 도쿄에 머물며 쓴 <온돌예찬>에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밖은 눈이 차고 방에는 바람이 차다. 어디로 가도 차고 쓸쓸할 따름이다. 일본의 겨울은 단조롭다. 조선의 겨울은 눈과 바람은 밖에서 콧머리를 떼어갈 듯 하더라도 방 안에서는 훈훈한 온돌 기운이 다정한 어머니의 가슴과 같이 점잖게 기다리고 앉았다.


이러함으로 인함인지 일본인의 문화나 기질에는 우리 온돌 민족, 온돌 문화처럼 훈훈하고 깊숙한 맛이 적은 것 같다. 그들의 문화는 봄날과 같이 화려하나 너머 깊이가 없고 발칵 뒤집어놓은 표면적인 문화 같다. 그들의 기질은 벚꽃과 같이 다정하나 좋으면 형제 같고 틀리면 원수 같아서 마치 한 다정한 신경질인 미인과 교제하는 것같이 응대할 교제술을 정하기에 고통스럽다.

조선 문화와 조선 민족의 기질은 에누리 없이 찬 바람 솔솔 나게 된 늦은 가을 달밤에 싸여 있는 농촌 양 삼가의 온돌방 같다. 경박하고 화려하지도 않고 은자같이 초탈하지도 않고 잔칫집이나 뇌성벽력, 폭풍우의 날과 같이 벅적대지도 아니하여 표면으로는 우민과 비애를 가졌으면서도 내적에는 한없는 인정미를 속 깊이 가진 그것이 조선 문화이며 조선 사람의 민족성이 아닌가 한다.

 

- 손진태 <온돌예찬>

 

 

손진태 선생이 말한 것처럼 온돌은 우리 정서와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바닥으로 붙는 좌식 문화, 즉 사물을 낮은 시선으로 보고 자연을 집 안으로 받아들이고 내 집과 몸을 비비며 살아가는 문화를 만들었다.

 

흔히 일본과 한국이 같은 좌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온돌에서 둘의 형태는 크게 갈린다. 이를 설명할 좋은 예가 있다. 미국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914년 일본에 호텔을 짓기 위해 도쿄에 머물렀다. 지인의 초대로 일본식 주택에 가게 되었는데, 일본 집이 추운 것을 알기에 초대에 망설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택 내에 온돌을 깐 ‘한국식방’에 들어서자 ‘마치 봄이 온 듯한’ 경험을 했다.

온돌을 처음 경험한 라이트는 ‘그냥 방을 따뜻하게 함이 아니라 먼지도 날리지 않고 조용하며 건강에도 이로운 하나의 기후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이것이 우리 좌식의 매력이자, 내 집과 가족과 자연의 촉감을 만끽하게 하는 온돌의 능력이다.


12월, 하루하루 온도가 내려가고 온돌에 대한 간절함도 커진다. 단지 추워서가 아니다.

온돌에는 어릴 적 추억과 함께 엄마와 할머니의 체온도 들어 있다. 그래서 온돌은 언제나 ‘온도’가 아니라 ‘온기’를 이야기한다.

 

 

같이 태어나 운명을 달리한 난방법,하이퍼코스트와 구들

 

우리는 바닥을, 서양은 공기를 달군다고 생각하지만 화기가 방바닥 밑을 경유해 굴뚝으로 배출되는 구들의 난방 방식이 서양에도 있었다. 이 난방법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온탕을 위한 것으로, 여기에 사용된 기법을 하이퍼코스트(Hypocaust)라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폼페이 유적이 발견될 때까지 유럽인도 잘 모를 만큼 하이퍼코스트 문화는 로마 시대 이후 1,400여 년이나 잊혀졌다.

 

이를 연구한 故 김남응 박사는 하이퍼코스트가 주거용이 아닌 목욕탕 난방 시설로 시작해 비싼 재료와 어려운 기술로 완성된 데 반해, 구들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흔한 재료와 간단한 설계, 그리고 취사를 겸할 수 있다는 기능성 덕분에 오랜 역사를 이어 내려 왔다고 분석했다.

더욱이 구들은 서민이 이웃과 함께 만들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지만, 하이퍼코스트는 석공이나 건축 기술자가 필요했으며 지배층의 수요를 중심으로 생겼다. 그 결과 하이퍼코스트는 공중 욕장과 함께 사라지고, 구들은 여전히 우리의 집 안에 자리하고 있다.

 

 

 

 

고향의 온기와
훈훈한 정을 추억하다

 

굴뚝 연기 모락모락, 정겨운 고향집 겨울 풍경

 

우리의 온돌 문화에서 굴뚝은 아궁이에 바람이 들지 못하도록 막거나, 연소된 물질을 외부로 내보내는 기능에 충실했지만,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아궁이와 구들 형태에 반해, 지역과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한옥의
건축미를 살려주었다.

 

민가에서는 흙과 돌을 쌓아 만들었고, 반가의 굴뚝은 검은 벽돌을 쌓고 기와를 덮고 굴뚝 맨 위에 설치한 연가(煙家)로 완성했다. 연가는 장식성의 성격도 강하지만 굴뚝에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하고, 연기 배출을 원활하게 돕는 역할도 했으며, 처마 위까지 솟은 굴뚝은 그 집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이런 반가에 비해 궁궐, 사찰의 굴뚝은 훨씬 화려했다. 그중 경복궁의 아미산, 창덕궁의 낙선재, 창덕궁 대조전 후원, 경복궁 자경전의 굴뚝은 공예품에 가깝다.

 

우리의 옛집을 떠올리면 가장 또렷한 풍경이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이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산등성이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무렵 집집마다 지붕 위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하얀 연기를 보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들, 부뚜막 가마솥에 저녁을 짓던 어머니….

어머니가 정성껏 지어주신 하얀 밥이 연상되는 시골집 굴뚝 연기에는 고향의 따스함이 담겨 있다.

 

 

 

 

 

 

온기 가득, 아랫목에 깃든 따스한 정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그건 온 집안의 훈기가 되었다.

밥 짓고 군불 때는 것으로 아궁이가 제구실을 다하고 마는 건 아니었다. 그 온기가 만들어낸 아랫목에 시루를 두고 콩나물을 길러 먹고, 청국장도 띄웠다. 또 거기에는 집안 식구들의 체온, 가족이 서로 손 잡고 느끼는 다사로움이 어리기도 했다. 소한 대한으로 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아랫목은 제 몫을 단단히 해냈다.

가족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두툼한 목화솜 이불이 깔린 아랫목에 엉덩이를 포개다시피 모여 앉는다.

 

군불 기운이 훈훈하게 살아 있기도 하고, 더운 기가 절절 끓기도 하는 아랫목에서 식구들은 다리를 디밀거나, 나란히 뻗기도 하고 첩첩으로 포개기도 하며, 아랫목의 온기를 빨아들였다.

 

덩달아서 몸이 녹고 마음도 녹았다. 그러고는 화롯불에 구운 밤이나 고구마, 가래떡으로 군것질을 하고 김 나는 따뜻한 감주로 목을 축이기도 했다. 오순도순 옛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새삼 가족이 하나라는 것, 피붙이가 곧 정임을 거듭거듭 다짐하곤 했다. 바람이 매서울수록 누렇게 그을린 장판의 뜨끈함이 간절하고, 구수한 장작 냄새가 그리운 것은 정(情)이 흐르는 아랫목이 몸과 마음을 녹이는 데 으뜸이기 때문이 아닐까.

 

 

 

 

두한족열, 온돌보감에 담긴 건강 지혜

 

찬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계절, 설설 끓는 아랫목에서 사각거리는 솜이불을 덮고 마음껏 ‘지지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

 

이는 아랫목은 따뜻하고 윗목은 차며, 방바닥은 따뜻하고, 방 안 공기는 시원한 온돌방 구조에 두한족열(頭寒足熱), 즉 ‘발은 따뜻하게 하고 머리는 차게 하라’는 우리의 전통 건강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인체 하부는 따뜻하게 하고 머리 쪽은 서늘하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뜨끈한 온돌방은 원적외선을 체내에 흡수해 체내 온도를 상승시키고, 땀과 각종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해 다양한 병 치료에 도움을 준다. 그뿐 아니라 딱딱한 바닥은 허리 자세를 교정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주어 척추 건강에도 좋다.

 

‘만병에 구들장’ 이라는 말이 있듯이 온돌방은 옛날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고, 온돌방에서 며칠 산후조리를 하고 나면 기운을 되찾았을 정도로 원기 회복에도 그만이다.

 

돌과 불, 나무의 조화로 거주하는 사람의 건강을 지켜온 온돌방. 우리 선조는 방 한 칸에도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하며 지혜롭게 건강을 지켜왔던 것이다.

 

 

 

에디터 김선미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대학교 박물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참고도서 <문헌과 유적으로 본 구들이야기 온돌이야기>(김남응 지음, 단국대학교출판부 펴냄),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임석재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온돌의 근대사>(권석영 지음, 일조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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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1 Decembe 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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