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믹스” 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사건을 시작으로 벌어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2022년 2월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1000일을 넘어가고 있는 가운데 10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장 최전선에서 숨진 러시아 청년들의 막대한 보상금으로 일부 지역에서 경제 호황을 누리는 “죽음의 경제학”(데스노믹스)이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서늘한 분석이 나왔습니다. 숨진 러시아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은 주로 러시아에서 가장 빈곤한 계층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유입되고 있는데 이 자금으로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러시아 경제학자 블라디슬라프 이노젬체프는 1년간 전장에서 싸우다 숨지는 러시아 군인 가족이 받는 돈이 1500만 루블(2억 205만원)에 이른다고 분석하고, 이는 노동 정년인 60세까지 일하면서 버는 금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돈이라고 했습니다. 유족이 이토록 많은 돈을 쥐게 된 건 전쟁 장기화로 병력 동원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병사들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늘렸기 때문인데 러시아는 병사 월급으로 최소 21만 루블(280만원)을 지급하는데 이는 전국 평균임금 7만 5000루블(101만원)보다 3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이노젬체프는 전선에 나가서 1년 후에 죽는 것이 오래 사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 되는 이 비극적인 현상을 “죽음의 경제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시베리아 남쪽 투바 공화국에서는 은행 예금이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2022년 1월 이후 151%나 증가했고, 러시아 남부 알타이 지역에서는 올해 식당과 술집 매출이 지난해 대비 56% 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스노믹스는 결국 “남편과 아들의 피로 벌어들인 돈”이라며, 장기적으로는 러시아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러시아 연구단체 리러시아는 올해 6월까지 러시아 정부가 지급한 유족 보상금이 300억 달러(42조 1650억원)로 정부 지출의 8%를 차지한다고 분석하며, 재정 적자는 러시아의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남성들이 전장으로 떠난 러시아의 산업 현장은 만성적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의 죽음으로 손에 쥐어진 돈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어릴 때 저도 돈이 많은 부자가 되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 어릴 때는 행복의 기준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전부인 것 같아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면 다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또한 복음(福音)을 잘 모르고 그냥 신앙생활 할 때에는 하나님 밖에도 행복이 많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는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돈에는 편리함과 편안이 있을 뿐이지 참된 행복과 평강은 없습니다. 흔히 빈자와 부자는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돈이 없어도 부자가 있는가 하면, 돈이 많아도 곧 가난해질 사람이 있습니다. 로또 당첨자들이 일확천금을 하고도 얼마 못 가 다시 가난해지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부자의 사고와 삶의 방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돈보다 우선하는 삶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전도서10:19) 그러나 그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도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6:10)
성경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눈에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것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참된 행복의 우선순위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1:2) 모든 만물에는 창조원리가 있습니다. 돈 역시 인간이 만들게 된 분명한 이유와 원리가 있겠지요? 물고기는 물속에 살아야 생명이 유지되고, 새는 하늘을 날 때 비로소 자유를 누리며,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릴 때 생명과 더불어 열매를 맺듯이,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진정 행복한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런 축복된 인간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을 떠난 후 불행과 멸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원치 않는 죽음과 불행과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과 육신적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종교, 윤리, 도덕, 선행, 철학, 우상이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족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그 말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당신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 멸망의 근원인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인간의 모든 죄와 저주를 대속(代贖)해 주셨습니다.(요한일서3:8, 마가복음10:45)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이 되어주셨습니다.(요한복음14:6)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영원한 하나님 자녀의 축복을 얻게 됩니다.(요한복음1:12)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돈의 노예가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돈을 다스릴 줄 아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 원하십니다. 이 선택이 바로 최고 행복의 시작입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의 범사도, 강건함도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당신의 영원한 행복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시면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당신이 바로 최고 행복자요, 최고 부자의 인생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가정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세기2:18,21-23)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설립하신 첫 번째 제도는 바로 부부와 가정입니다. 실제로 축복도 가정에서 시작되었고(창세기1:28), 문제도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창세기3장)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는 먼저 부부가 한 몸 된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세기1:27) 그 둘을 부부로 짝지어 주심으로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세기2:22-24) 가정생활의 행복은 바람직한 부부 관계로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대부분의 가정문제는 부부문제에서 시작됩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오면 반드시 자녀문제로 전이됩니다. 부부의 한 몸 된 사귐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주시는 은혜를 누릴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행복이 가득해질 때, 서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서로의 욕구를 채워줄지라도 뭔가가 부족한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가 받고자 할 때 점점 더 궁핍해지지만 사랑은 서로가 주고자 할 때 더욱 더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랑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출애굽기20:12, 에베소서6:1-3)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면 권위를 존중히 여길 줄 모르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잘 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가정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면 직장생활도 바로 할 수 없고 결혼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부모들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에베소서6:4)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에게 축복의 유산을 남겨야 합니다. 후대에게 가장 소중한 복음을 전달해 주고 네 가지 면의 균형 있는 성장을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지적 성장, 육체적 성장, 신앙적 성장, 사회적 성장이 잘 이루어지도록 키워야 합니다.(누가복음2:40, 52) 부부와 자녀가 행복한 복음의 증인으로 세워질 때 가정과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행복한 부부 밑에서 행복한 자녀가 자라는 법입니다. 그런 행복한 복음의 명문가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모두 함께의 다인종, 다문화
최근 들어 대한민국 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자꾸 뉴스를 타고 흘러 나온다. 우리나라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외국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먼저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우리도 실감하고 있는 것이 고령화 저출산이 실제화되면서 주변에서 유치원이 문을 닫고 매물로 나오는 것이 많아졌고 지방의 초등학교가 폐교되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 확인된다. 드디어 올해 들어 청년들보다 노령인구가 많아졌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우리나라가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베이비부머(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이후부터 1965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 세대들에게 산아제한을 가족계획으로 강조하던 결과가 오늘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경제개발이 절실하던 시기에 인구가 많은 것이 국가적으로 부담이 되어 인구 조절하는 표어가 그 시대에는 중요한 일이었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하더니 “딸 ·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하였다. 그리고는 둘도 많다면서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사랑으로 낳은 자식, 아들 딸로 판단 말자”하였는데 교육의 결과는 한시대를 두고 정확히 나타나는데 그것이 지나쳐 이제 한가정에 한명도 출생이 안되므로 인구가 줄다못해 소멸이라는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가난한 시대였지만 대가족으로 삶을 부대끼면서 자녀들이 성장하였고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그 풍요를 맛보면서 자란 핵가족이 이제는 저출산과 맞물려 1인가구가 보편화되는 추세이다. 그 반증이 식당을 가도 요즘은 1인 밥상이 많아졌고 커피샾도 1인 위주로 배치되어 있다. 한국사회의 인구감소는 다른 선진국들이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의 문화적 특성상 그 강도가 높고 원체 단일민족이라는 낮은 인종 다양성 때문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는 기업에서의 인력부족으로 인해 해외에서 인력을 수입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우리나라 다인종들이 대거 들어오게 되고 그로 인한 다문화의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결국 문화를 표현하는 방식이 기능을 따른 인구수와 함께 행동을 결정짓는 구성원의 수가 따라야 하는데 최근 들어 저출산이 산업구조에 맞추어지면서 다인종의 유입은 당연한 귀결인 듯 싶다. 국가가 생존하려면 개인의 생존확률과 국가 경제의 세금 확보를 위해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감당 못하는 산업인력 부분에서 다인종의 유입은 당연하며 환영할 만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도 이제 다인종이 국민 인구 대비 5%가 넘어가므로 다인종, 다문화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다양한 피부색깔의 인구들이 생길 것이고 함께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따른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이 피할 수 없이 우리가 만나야 되는 현실이 되었다.
이것을 위해 사회도 교육도 준비가 되어야 하고 종교단체도 다양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의 국적이 한국인이라도 출신국은 다양한 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확인된다. 아직은 이런 현상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문화는 벌써 우리 곁에 와있다. 한국어 학습과 표현방식의 어눌함을 받아들이며 차별과 차등을 하지 않는 모두 함께 행복한 다문화의 시대를 우리는 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민사를 통해서 확인되듯이 외국에서 겪었던 모멸과 인종차별을 우리도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고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민족고유의 품성을 이주민들도 받아들여 멋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유를 누리게 해줘야 한다. 결국은 그 자녀들이 군인이 되어 우리나라의 적들에게서 국방을 지키는 자들이 될 것이고 우리의 가족으로 살게 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