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의 격전지 해남 우수영에서 출가를 결심한 법정 스님 |
박 종 섭(전 목포대학교 강사, 전남지역 중. 고교 교사 |
법정 스님의 고향 해남 우수영과 명량대첩
법정 스님은 1932년 10월 8일 명량해협이 내려다보이는 한반도의 서남단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우수영 마을에서 박근배의 아들(박재철)로 태어나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세수 79세(법랍 56세)로 입적하기까지 맑고 향기로운 삶 ‘무소유’를 실천적으로 보여 주고 떠난 우리 시대의 청빈한 스승이었다.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울돌목 벽파진에서 정유재란을 맞아 선조 30년(1597년 9월 16일) 판옥선 13척으로 진을 쳤다. 왜군이 서해를 통과 한양에 입성하려는 길목을 원천 봉쇄하고자 일본 수군의 전진기지가 된 해남 어란진에서 출전한 왜선 133척에 대해 일자진 전술로 수군 선봉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울돌목의 좁은 해협(300m)으로 유인해 왜선 31척을 침몰시키고 왜군 3,100여 명(왜선 세키부네 승선 수군 100명 추산)을 수장시킨 역사적 사건이 명량해전이다.
명량대첩 승리로 남원과 전주를 점령한 왜군은 천안에서 명과 대치하면서 수군이 서해를 통과해 보급과 협공을 기대했던 육군의 계획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고 조선에서 철군을 단행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가장 빠른 곳으로 ‘울면서 돌아가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흐르는 물이 바닥의 암초와 충돌하면서 들리는 소리가 마치 ‘바다가 우는 것 같이 들린다고’ 하여 울돌목이라고도 부른다.
우수영 마을은 서남해의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라우수영이 설치되었다. 현재도 수륙을 잇는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제주에 오가는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강강술래는 임란 당시 군사적 전술로 이용되었다는 구비 전승 설화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등록 우수영의 향토적 브랜드가 되어 지역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해남군에서도 법정 스님의 생가를 찾는 탐방객이 늘면서 부지를 조성 관광수요에 대비하고 있다.
박재철의 부친 박근배는 폐결핵으로 임종을 기다리는 위급함 속에서 조모 김금옥과 어머니 김인엽은 가장이 세상을 뜨면 네 식구 생활고를 어찌할까를 고민하는 처지였다. 박근배는 곧은 성품으로 당시 일본인 선주들의 조선인에 대한 착취와 횡포가 심하면 주재소나 면사무소를 항의 방문하여 문제점을 제기하거나 그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는 항의문을 설득력 있게 작성하여 마을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기지를 발휘한 분이셨다.
숙부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진학한 재철은 우수영초등 재학 중 작문 시간에 글 쓰는 게 자랑이었고 이를 본 선생님은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는 내용을 할머니께 전하면 집에서 계란 꾸러미를 챙겨 보내는 것으로 화답했다. 자취 하던 선생님은 할머니를 찾아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재철이가 글을 잘 씁니다. 앞으로 좋은 글을 쓰겠어요.”라는 칭찬에 재철은 기분이 날아갈 듯하였다.
등대지기 꿈에서 외로움을 먹고 사는 출가의 길
재철은 글쓰기에 고무되어 밤이면 할머니에게 옛이야기를 조르게 되었고 할머니는 소금 장수, 반딧불 이야기 등으로 훗날 손자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언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마을 앞에서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처럼 등대지기를 꿈꾸며 목포상고에 진학해서도 그 결심은 여전하였다. 집안은 어머니가 남의 집 일을 해야 생계가 가능할 정도로 궁핍했고, 숙부로부터 육성회비 지출이 늦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은 눈물이 쏟아졌지만, 책을 보려고 학교 도서관만은 꾸준히 오갔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숙부의 권유에 따라 목포에 있는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했다.
동족 간에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삶에 대한 회의에 대해 책을 읽고 고민해도 현명한 대답을 찾기가 힘들어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는 겨울날 남의 집 일을 하고 피곤한 잠에서도 잔기침으로 콜록거리는 죽창에 비친 초롱불의 어머니를 향해 섬돌 앞에서 절을 올리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잠든 집을 뒤로한 채 눈물을 훔치며 “어머니, 언젠가는 돌아오리다. 이 방황이 끝나는 날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다.”를 다짐하며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 위해 밤 열차에 올라 출가의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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