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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형태가 소꼬리처럼 생겼다고해서 우미산(牛尾山·747m)으로 불린다.
우두산(牛頭山)이나 우각봉(牛角峰 쇠뿔바위봉),우복동천(牛腹洞川) 등등 소와 관련한 산이름이 많이 있다.
이는 농경사회를 영위하던 우리 민족에게 소는 아주 친근한 가축이기 때문이리라.
비슬지맥이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길목에 배웅을 하듯 비켜선 우미산은 얼마 전까지 만하여도 변변한 정상석하나 없었다.
그나마 대구의 판떼기맨이라고 불리는 한 산꾼이 단 정상판엔 산높이에 에러가 나있었고...
욕심 같아서는 우록환종주가 구미가 당겼지만 단체산행에선 욕심에만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회에 팔조령에서 봉화산 삼성산찍고 청도쪽 홍두깨산을 이어탄다면 오늘 못다한 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드날머리에 있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은 임진왜란 때 왜장으로 와 조선에 귀화한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1571~1642,일본명 사야가 沙也可)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조 18년(1794)에 건립,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5년에 재건되었으며 1971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현 위치로 옮겼다.
경내에는 정면 5간 팔작지붕의 강당과 정면 3간 맞배지붕의 녹동사,정면 3간의 향양문이 있다.
일본인이였던 모하당은 선조25년(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臣秀吉)가 30만 대병으로 조선을 침공하자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加藤淸正)’의
우선봉장(右先鋒將)이 되어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인륜의 대의에 어긋난다며 조선에 귀화,조총도약법을 전수하는 등 임란에 공을 세우고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성(姓)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또한 조정으로부터 벼슬과 논밭을 하사받았으나 마다하고 우록리(友鹿里)에 내려와 사슴과 벗하며 여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후손들한테 귀감이 되고 있다..
인조 20년(임오1642) 72세로 세상을 떠나 삼정산(三頂山)임좌원(壬坐原)에서 장례를 치렀다.
대의명분을 좇았지만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그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배여 있다.
그가 남긴 詩로 그 슬픔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述懷歌(술회가)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
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
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
상당부분의 산길을 비슬지맥을 걷는다.
네비엔 녹동서원을 입력하여 녹동서원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녹동서원과 부속시설.
주차장 한 켠의 안내판
충절관.
충절관(忠節館)
솟을삼문과 녹동서원
잠긴 솟을삼문엔 향양문(向陽門)편액이 걸려있고...
담너머 녹동서원은 정면5칸 팔작지붕의 와가(瓦家)로서...
녹동서원(鹿洞書院)과 숭의당(崇義堂) 현판이 걸려있다. 멀리서 봐도 문살무늬가 곱다.
한일우호관 위로 올랐다가...
아래로 내려서서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일행들은 산길이 바빠 입산을 서둘렀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명나라가 동요되고 이웃한 여러 민족들이 자주적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본은 16세기 전반에는 상공업 발달이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권력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 정권이 전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국내의 상권과 국제 무역권의
통일을 강화해갔다.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한 뒤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토지 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그는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 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중국 침입을 구상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부의 불만과 국제 교역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귀화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엽이며, 그때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宋)나라 사람을 비롯하여
여진(女眞), 거란(契丹), 안남(安南:베트남), 몽골, 위구르, 아랍 사람들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명(明)나라와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귀화하였다.
이들이 한국에 귀화하게 된 동기는 대체로 정치적 망명, 표착(漂着), 상사(商事), 투항(投降), 구원(救援), 범법도피(犯法逃避), 전란피란, 정략결혼(政略結婚),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귀화인들은 대개 당시의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이 주인장((朱印狀)은 도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
주인장에 날인하는 도장은 도요도미 히데요시만 가지고 있는데다 문서에 빨간 도장을 찍기 때문에 주인장(朱印狀)으로 불린다.
임진왜란이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야망으로 침략한 전쟁임을 밝히는 자료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 역사를 배우지 않아, 고대 한일 간에 있었던 왕성한 문화 교류를 알지 못했던 탓이다.
유 교수는 “문명의 빛을 일본에 전해준 것은 우리의 자랑이지만 일본 고대문화를 모두 한국에서 만들어준 것은 아니다.
도래인이 만든 일본문화는 일본문화”라며, “일본인들은 고대사에서 한반도에 신세 진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일본서기』와 근대 황국사관의 역사 왜곡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ㅡ일본편>
유홍준 교수는 한일 문명 교류사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본인 학자들도 많지만, 이들조차도 역사적 실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한 단계
굴절시켜 서술한다고 말했다.
한반도로부터 받은 영향을 꼭 ‘한반도를 거쳐’ 대륙문화가 들어왔다고 밝힌다는 것.
반대로 일본의 역사왜곡이 한국인에게는 역으로 작용해,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유홍준 교수는 “일본의 문화가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획득하고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성장한 것을 한국인은 액면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선진문화를 일본이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조선으로서는, 조선에게 침략을 자행한 일본민족에게 성의를 다한 것으로 보여진다.
학자들은 조선정부가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여 그 후 200여년간 한‧일간의 평화가 유지된 것은 일본의 침략 즉,
武에 대해 조선이 선진적인 文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고 조선민족의 아량과 우수성이 입증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활발한 사절의 왕래와 물적교류
36년간 강제합병된 불편한 진실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작금의 한일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한다.
한 미 일의 삼각공조는 현대 국제사회에서의 절대적인 외교와 국방의 선택이다.
독도영유권 문제와 종군위안부 문제가 덜미를 잡고 있는 한일관계가 어서 빨리 정상화되길 바란다.
그를 보면서 조선에 忠을 다한 인간적 고뇌를 엿본다.
사야가의 출신에 대해선 불분명하다. 몰락한 일본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설부터 총포부대를 이끄는 부대장이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일본 무사였던 사야가(沙也加)는 평소에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흠모해왔다고 한다.
가토오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이었던 사야가는 경상도를 통해 조선을 침략했다가 그가 거느린 30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조선에 귀순하게 된다.
귀순장수에게는 칼을 들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긴 하나 임진왜란당시 군대가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조정에서는 귀순장수 사야가에게 가선대부의 벼슬을
하사하고 자신의 조국인 일본과 맞서 싸울것을 주문했다.
참으로 잔인한 짓이었지만 당시의 전황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괄의 난을 진압했으며 병자호란때는 광주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병자호란때는 곤경에 처한 임금을 구하고자 남한산성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임금은 삼전도에서 용골대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크게
실망하여 낙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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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된 김충선 장군은 경주, 울산등지에서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자청하여 북쭉의 변방을 방어하다가 다시 사슴과 벗하러 우록리로 돌아온 김충선.
삼란공신(三亂功臣, 임진왜란,이괄의 난,병자호란) 김충선과 조총 화약의 제조법 전수.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우다.
병자호란 때도 공을 세우다.
귀화하려 했을 때 김충선과 함께한 3,000병사들의 의견은 어떠했을까,는 이 자리에서 논외(論外)다.
일본인 '사야가'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조선의 문화를 흠모하였으니 그는 무인(武人)이기 전에 문인(文人)이였다.
김충선은 무인이자 문인이요,또한 忠孝를 겸비한 도덕군자로서 백성들을 교화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대구 달성에 정착한 김충선은 두 명의 아내와 열 명의 자식을 두었다.
조선 시대의 다문화 가정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귀화인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김충선 일가는 소수자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을 것이다.
왜놈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쓰고 따돌림당했을 자식들을 앞에 두고 김충선은 이렇게 가르쳤다.
“남의 허물을 보려 하지 말고 좋은 점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칭찬해주어라.
거센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법이다.
너희를 해치려 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품지 말고 웃어주어라.
그들의 말이 맞다면 너희 행실을 고치면 될 것이고, 그들이 잘못했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 욕설을 퍼붓는 이들이 있어도 말없이 참고 자신을 다스리거라.
순간의 분노는 더 큰 화를 부르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잠잠해질 것이다.
명심하거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김충선의 가계와 후손
일제 강점기엔 김충선의 후손들은 심한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가와미 히로타미' 같은 이는 "적혀 있는 글은 위서이며,사야가 같은 매국노가 우리 동포라는 것이 유감의 극치라고 할수있다."라고 하였으며,
역사학자 '세데하라 탄'은 "사야가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라며 허구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에이코'는 현지조사를 실시하고 1차 자료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를 통해 청구학총에 논문 '모하당 김충선의 자료에 대해서'를 쓰면서 사야가가 실존했던 인물임을 증명하여 그 학설이 정당성을 얻고있다.
아사히 신문에서는 "양식있는 무사의 의로운 결단" 등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기도 했지만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에서는
'출병에 대의 없다, 히데요시를 등진 사나이'라는 다큐멘타리를 내보낸 바있다.
일본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등으로 묘사되어 실리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에서도 김충선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려 있다.
한일우호관에 있는 고지도이다.
'모하당복지산수도'는 지금의 산행개념도와 똑 같다.
오늘 우리가 걸은 산길과,굵은 비슬지맥 능선과,삼정산 삼성산까지 우째 이리도 흡사할까?
녹동서원과 한일우호관 사이의 김충선묘소로 올라가는 길이 산행들머리.
모하당김공유적비와...
담너머로 김 공의 위패를 모신 녹동사(鹿洞祠)가 보인다.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니 먼저 '자은처사김해김공지묘'가 나온다. (맨 아래에 있으니 후손쯤 되나보다.)
김충선 공의 묘지이다.
아래 등로에서 그냥 카메라를 조금 당겨서 석주와 문인석(文人石)을 잡는다.
우측으론 무인석(武人石)도 잡아본다.
김 공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증공조참판김해김공휘경신지묘.가 조금 아래에 세워져 있다.
천성산님은 일일이 눈으로 확인을 마다하지 않는데...
나는 게을러 그냥 아래에서 당겨 잡는다.
'증정헌대부병조판서김해김공휘충선지묘'가 묘지 제일 위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는 산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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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산이 이 길로도 올라간다. 예전에 가창저수지에서 올랐던 적이 있다.
가창저수지를 드날머리로 하는 주암산 최정산의 '산&산' 개념도
돌탑봉에 올랐다. 처음으로 전망이 트이는 곳.
능선 우측으론 경산쪽 산줄기들이 하늘금을 기린다.
가야할 능선이 굵은 선을 좌로 긋고 있고 그 아래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남지장사가 보인다.
당겨본 남지장사(南地藏寺)는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棟華寺)의 말사이다. 1263년(원종 4)에 일연(一然)이 중창하고 1653년(효종 4) 인혜(印惠)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만나는 탈출로.
첫 탈출로의 이정표.
곳곳에 최정산의 안내판이 서있다.
최정산은 군사시설 등으로 좋은 기억이 없는데...
돌아본 능선
740 삼각점.
최정산의 시설물이 올려다 보인다.
당겨본 최정산의 시설물.
역시 당겨보면 최정산 아래엔 목장시설이...
주리 갈림길.
주리에는 먹거리촌이 형성되어 있능갑다.
이정표
육각정자가 있는 억새밭
앞서간 일행들이 막 점심자리를 펴고 있다.
육각정자에서 보는 최정산과 목장.
서쪽으론 비슬산이 잡히는데...
당겨보니 시설물(강우레이더 관측소)이 있는 조화봉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어가는 산길에서 우측으로...
헐티재와 최정산 목장 갈림길이다.
안내판
억새가 나풀거리는 헬기장에 청산(802m) 표석이 섰다.
오늘 걷는 산길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청산에서의 이정표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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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줄을 치곤 완곡하게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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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탑이 있는 이 지점이 마지막 탈출로로서 탈출 길안내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철탑탈출로의 이정표.
철탑에서 20여 분만에 우미산 갈림길에 섰다.
비슬지맥(밤티재,삼성산,팔조령)은 오른쪽 산사면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왼쪽 가파른 오름길인 우미산으로 향한다.
우미산 갈림길의 이정표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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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분간 가파르게 치고 올라와 능선에 올라섰는데,우측으로 밤티재로 내려서는 능선길이 잡목으로 엉켜있다.
우미산.
최군 새로 자연석 우미산 정상석이 섰다.
하산은 작은 무명봉하나를 더 거쳐 내려서는데,우측으로 비슬지맥 팔조령으로 이어지는 삼성산이 보인다.
삼성산에서 내려설 생각으로 많이 망설였지만...
삼성산에서 팔조령으로 조금 더 진행하다 좌측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길은 좀 묵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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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임도를 따라...
우미산장식당에 닿고...
돌아본 우미산장의 왼쪽으로 내려왔다.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오면 정각정 식당에서도 등산로 입구이정표가 붙어있다.
아마도 많은 탈출로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산행기를 쓰면서 모하당 김충선 공의 인간적인 면이 많이 떠오른다.
지금으로 치면 탈북자에 비견될까?
타계한 황장엽의 심정이였을까?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조상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
구름을 보며 고향 생각하고/
봄풀을 봐도 고향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땐들 없겠는가/
일가친척은 살아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하직했을까/
고향산천 그리움 끊일 날 없도다/
나라엔 불충이요 집에는 불행 불러왔으니/
세상 제일 큰 죄인 나 말고 또 뉘 있으랴/
아마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무의미한 전쟁을 반대하였던 평화주의자 사야카.
조국을 위하여 육순 노구를 이끌고 여진족과 맞서 싸운 애국주의자 김충선.
새로 정착한 우록동에서 가훈과 향약 등으로 백성교화에 진력한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성 (賜姓) 김해 김씨의 시조 김충선.
그런 김충선도 끝내 고향산천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는 없었다.
낳고 길러준 부모와 나라를 버리고 적국의 장수로 동족을 무찌르는 일에 앞장서야 했던 사야카의 인간적인 번뇌가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해마다 천여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우록동을 찾고 있으며 십여 년 전에는 일본에 사야카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임란 이후 400여년만에 사야카는 평화주의자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 읽고 싶은 책: 조선을 사랑한 사무라이 "사야가 김충선" (유광남 장편소설)
첫댓글 궁금했던 주암산 최정산 예전에 갔었군요. 그러고보니 궁금한 곳이 또 생겼네요,
홍두깨산 삼성산 봉화산이라 우씨`` 이땅에는 내가 안가본 산이 또 가야할 산이 너무너무 않아
자꾸 체력은 떨어지고 갖다버릴 나이는 되어가고... 허허 유익하게 잘 보고 나갑니다.
천성산님의 끊임없는 탐구욕구가 뒷심을 받쳐주고 있네요.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아름답죠?
박완서님의 마지막 수필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못 가본 길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거 아닐까요.
입산만 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로 氣가 펄펄 살아나는 당신의 정열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