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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곧 지복이다. 진아와 지복은 똑같은 하나다. 그리고 그것만이 실체다. 이 현상계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에서 벗어날때, 우리는 진아의 지복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이 진아와 함께 한다
진아의 본질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 우주 삼라만상에 내재하는 유일한 실체에 대한 것이다. 그 실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고 본체이며 누구라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여러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렀는데 각 명칭은 결국 하나인 그 실체의 여러가지 다른 측면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그 실체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였던 명칭들과 각 명칭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진아
이는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하였던 명칭이다. 그는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 체험하는 자기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것들을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앎이 "진정한 나" 진아라고 하였다. 이 진아는 개아 즉 개체적 자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개체적 자아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짓되게 만들어 낸 것이 진정한 나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진아는 항상 실재하며 우리가 늘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때는 오직 스스로를 한계짓는 경향을 가진 마음이 사라졌을때 분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음이 영원히 사라져서 진아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난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
2. 실재-의식-지복
이는 진아의 세가지 측면이다. 라마나는 실재하는것은 오직 진아뿐이며 이 진아는 단순히 보이는 대상과 분리된 보는자가 아니라 이 둘을 함께 포함한 순수의식이라고 하였다. 또 이 진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상태는 지극한 행복의 상태이기때문에 이를 지복이라고 한다. 실재-의식-지복이라는 이 세가지 측면이 따로따로 분리된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 셋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축축함과 투명함과 유동성이라는 물의 세가지 속성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3. 신
라마나는 우주는 진아의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하였다. 유신론자들은 보통 이 힘이 신에게서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신이라는 단어를 진아와 동의어로 가끔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힌두교에서의 지고의 존재인 브라흐만이나 시바를 진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라마나가 말하는 신이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을 가진 신이 아니라 우주를 유지하는 무형의 존재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며 우주는 신의 본래적인 힘이 나타난 형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주로부터 신을 분리할 수는 없지만, 우주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신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4. 가슴
라마나는 진아에 대해 이야기할때 흐리다얌이라는 산스크리트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것은 보통 가슴이라고 번역되지만 좀더 글자그대로 번역한다면 "이것이 중심이다"가 될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라마나는 평소 제자들을 가르칠때 각자의 영적수준에 따라 그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였는데, 이 가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서 그의 그와같은 태도가 잘 나타나있다. 즉 진아를 직접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진아와 동일한 의미로 가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진아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아무런 형태도 위치도없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육체가 나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사람에게는 육체에 있어서 특정부위 즉 가슴의 중심으로부터 3.75센티미터 오른쪽이 이 가슴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이 인간의 모든 영적체험의 중심이라고 가르쳤다.
5. 즈나나(지혜) -즈나니(지혜로운 사람)
라마나는 진아를 체험하고 있는 상태를 때로 즈나나(지혜)로 표현하였다. 이 상태에서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나뉘어 있지 않으며, 이 둘이 진아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 진정한 지혜, 즉 즈나나란 주관적인"아는 자"가 그것과는 분리된 어떤 객관적인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함께 사라진 상태에서 하나의 실체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 뿌리내린 사람을 즈나니라고 한다.
6. 투리야와 투리야티타
힌두철학에서는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의 교대로 나타나는 세가지 상대적 의식상태를 말하고 있다. 라마나는이 세가지 일시적인 상태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이면의 실체가 바로 진아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때때로 진아를 투리야 아바스타, 즉 네번째 상태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사실은 이 상대적인 네개의 상태가 모두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 진정한 초월상태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가종하기 위하여 네번째를 넘어서라는 의미의 투리야타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7. 그밖의 용어들
진아를 나타내는 세개의 다른 용어들도 주목할 만하다. 라마나는 진아는 인간 존재의 본연적 상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본연적 상태라는 의미인 "샤하자 스티티'라는 용어와 진정한 형태 또는 진정한 본성이라는 의미인 스와루파라는 용어를 가끔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진아는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평화로움이고 완전한 고요함이며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침묵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침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질문과 응답
무엇이 실체입니까?
항상 실재하는 것만이 실체다 그것은 형태도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제한되어 있는 것들의 근간을 이루지지만 스스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의 근간을 이루면서 스스로는 실재한다. 실체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으며 "존재, 비존재" 등의 표현조차 넘어서 있다. 실체란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무지가 사라진 뒤에 남아있는 단순한 의식이며 그것이 바로 진아이다. 실체는 현상계에 구애받지 않으며 아무런 체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안에서 불행이란 찾아볼 수 없다. 이 실체가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이 바로 침묵인데,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진정한 지혜의 최종적 상태이며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고 선언하고 있다.
순수한 앎이란 무엇입니까? 또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얻어서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합니까?
그대가 바로 순수한 앎이다. 순수한 앎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바로 순수한 앎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는 단지 진아가 아닌 것들을 진아로 오인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때에 순수한 앎만이 남으며 그것이 바로 진아다.
제가 바로 순수한 앎이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진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원성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앎은 에고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적인 것이다. 그 상대적인 앎에서는 주체과 객체가 나누어져 있지만 진아의 앎은 절대적이며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초월해 있다. 기억이란 것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며 기억되는 객체와 기억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이원성이 사라진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하겠는가?
진아는 항상 존재한다. 누구나 진아를 알고자 하는데,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하여 무슨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들은 진아를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하지만 그것은 영원하며 항상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진아를 마치 번개불과 같은 걸로 보고자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그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며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가장 훌륭한 정의가 있다면 "나는 나로서의 나"라는 정의일 것이다. 어떤 경전에는 진아가 사람의 엄지손가락만 하다는 등, 머리털 의 끄트머리만하다는 둥, 전깃불의 번쩍임과 같다는 둥, 굉장히 크다는 둥, 가장 작은 것보다 작다는 둥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기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진아는 그냥 실재할뿐이며, 실재한다, 실재하지 않는다 라는 등의 분별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지혜이지만 지혜다, 무지다 하는 분별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지혜이지만 지혜다, 무지다 하는 분별과는 다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냥 실재할뿐.....
진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보게됩니까?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이 그냥 존재할뿐이다. 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것이 아니라, 그대가 지금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하여 왔던 그 상태로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다만 진실 아닌 것을 진실로 고집하지 않으면 된다. 그때 그대는 그토록 분명한 진아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그대 자신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깨달음의 상태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을 초월해 있다. 지금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그 '보는 자"가 사라지고 진아만이 남게 된다.
어떻게 하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진아에 대해서 안다는 표현을 쓸때 거기에는 두개의 진아 즉 "아는 진아와 알려지는 진아"가 있게 되며 또한 아는 과정이 있게된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그냥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이지 무엇을 안다거나 무엇이 되는 상태가 아니다. 깨닫게 되면 항상 하나인 채로 있고, 항상 하나인채로 있어왔던 바로 그것이 된다. 그 상태를 묘사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 상태로 될 수 있을 뿐이다.
선생님께서는 때때로 진아는 곧 침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각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침묵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침묵입니까?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이며 존재 그 자체가 침묵이다. 어떻게 언어로써 침묵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생각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진아만이 존재하는 상태가 침묵이라고 성인들은 말씀하셨다. 침묵만이 진실하고 완전한 앎이며 그 외의 모든 앎들은 보잘것 없고 하찮은 앎에 불과하다. 기억하라. 현상계의 수많은 차별상들은 진실되지 않다. 그것들은 진아의 표면에 나타난 허상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아들의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인정하면 무수한 자아들이 있게 되지만, 이 생각이 사라졌을때 진아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상태에는 진아와 분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하는 것이다. 진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육체는 결코 실재하지 않으며, 착각의 힘에 의해 왜곡된 마음의 외향적인 측면에서 볼때만 육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진아가 육체의 주인이라고 보는 것은 그릇된 견해다. 이 세상은 육체를 통해 존재하고 육체는 마음을 통해 존재하며, 마음은 의식으로 인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실체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진아를 간파해 버린 깨달은 사람에게서는 진아 외에는 더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 왜? 육체를 나와 동일시하던 에고가 사라져 버리고, 그는 형태없는 존재, 즉 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곧 진아라는 사실을 알며 진아 외에는 육체나 그밖의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이와같은 사람에게 육체가 있고 없음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깨닫는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진아는 항상 있는 그대로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우물을 파면 구멍이 생기는데 그 구멍속의 공간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간을 채우고 있던 흙을 옮겼을 뿐이다. 그 공간은 그때, 거기에 있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곳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들의 내면에 쌓여있는 오래되고 낡은 축적물을 밖으로 던져내기만 하면 된다. 그것들이 모두 떨어져 나갓을때 진아만이 홀로 빛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자유는 바로 우리들의 본성이다. 우리가 곧 자유다. 우리가 자유를 희구하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란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구속되어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없애기만 하면 되며, 그렇게 할때 거기에는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생각도 없게 되지만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한은 스스로 구속하게 된다.
진아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의 세가지 상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까?
그들에게 세가지 상태가 없다고 그대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지금 깨어있다라는 말들을 함에 있어서 그대는 그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그렇게 볼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대는지금 깨어 있는 상태에있으며, 꿈꾸는 상태에서는지금의 이상태가 가려지고 깊은 잠을 잘때는 꿈꾸는 상태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존재한다. 세가지 상태는 나타낫다가 사라져 가지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와 같다. 스크린은 항상 존재하지만 여러가지 화면들은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스크린은 스크린으로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는다. 그대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스크린 위에 나타났던 화면들이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버리듯이 그 세가지 상태들은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스크린 위에는 때로 수많은 파도가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어떤 때는 큰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스크린은 어느 경우에나 그냥 거기에 남아있다. 스크린은 결코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 않는다. 어떤 화면도 스크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동안, 꿈꾸는 동안, 잠자는 동안에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며 그대는 자신의 진아로서 남아있다.
그 세가지 상태가 그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들에게 세가지 상태가 없다고 그대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지금 깨어있다라는 말들을 함에 있어서 그대는 그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그렇게 볼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대는 지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꿈꾸는 상태에서는 지금의 상태가 가려지고, 깊은잠을 잘때는 꿈꾸는 상태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존재한다. 세가지 상태는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지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영화와 같다. 스크린은 항상 존재하지만 여러가지 화면들은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스크린은 스크린으로서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는다. 그대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스크린 위에 나타났던 화면들이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듯이, 그 세가지상태들은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스크린 위에는 때로 수많은 파도가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또 어떤 때는 큰불이 났다가 사라지지만, 스크린은 어느 경우에나 그냥 거기에 남이있다. 스크린은 결코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 않는다.어떤 화면도 스크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동안, 꿈꾸는 동안, 잠자는 동안에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며 그대는 항상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아있다.
그 세가지 상태가 그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렇다. 그 상태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며 진아는 결코 그것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진아에게는 한가지 상태만 있다.
그럼 진아를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속에서 단순히 한 주시자로서 남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다른 예로 무대위에 켜 있는 등불의 예를 들어보자.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등불은 항상 그곳에 켜져 있으면서 모든 배우와 모든 관객들을 차별하지 않고 고루 비추어 준다. 또한 그 등불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이고, 연극이 시작되기 전이나 연극이 끝난 뒤에도 항상 그곳에 켜져 있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등불인 진아도 그 자신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면서 에고에게나 지성에게나 기억-마음에게도 빛을 보내주고 있다. 깊은 잠든 상태에서는 에고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는데, 이때에도 진아는 어디에도 치우침없이 계속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사실 진아가 주시자라는 생각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생각일뿐이며 그것은 진아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주시자는 주시되는 대상에 대해서 상대적이다. 주시자나 주시되는 대상은 모두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이 세가지 상태들 중, 어느 상태가 네번째 상태 투리야에 가장 가깝습니까? 또 세가지 상태와 네번째 상태와의 실질적인 관계는 어떻습니까?
사실은 단 한가지 상태만이 실재하며 다른 세가지 상태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냥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것이 어느 정도로 실체에 더 가깝다는 말은 할수가 없다. 아미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이 유일한 실체이며, 의식에 깨어있음이 더해지면 깨어있는 상태이고, 의식에 잠이 더해지면 자는 상태이며, 의식에 꿈이 더해지면 꿈꾸는상태이다. 의식은 바로 그위에 화면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버리는 스크린과 같으며, 스크린이 실체이고 화면들은 스크린 위에 나타난 그림자에 불과하다. 오랜 습관으로 인하여 세가지 상태를 실재적인 상태로 생각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상태를 네번째라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네번째 상태란 있을 수 없고 한가지 상태만 있을 뿐이다. 꿈꾸는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의 차이점은 전자는 짧고, 후자는 길다는 점뿐이다. 둘은 모두 마음의 산물이다. 깨어있는 상태가 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태가 우리의 실재적인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의 본질적인 상태는 항상 그냥 그대로 존재하면서 세가지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번째 상태, 투리야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네번째 상태라는 표현도 상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으며 투리야티타즉 초월적인 상태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왜 이 세가지 상태들은 본질적인 상태, 즉 진아라는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것입니까?
그 질문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 상태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진아가 말하고 있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는 보는자이며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이 마음을 구성한다.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 그러면 마음은 지아속으로 사라져버리고, 거기에는 보는자와보이는 대상도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나타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대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 될 것이다. 진아만이 항상 그대로 남아있다. 세가지 상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아에 대한 탐구가 없었기 때문에 올바른 탐구가 이루어질때 그 세가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설명을 많이 해주어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자신이 명백한 진실에 너무도 눈멀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기 전에는 분명하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과 진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무런 차이도 없다. 마음이 내부로 향하면 곧 진아요.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모든 현상계가 된다. 같은 솜으로 만들어진 여러가지옷들을 우리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가지 장신구들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것들은 결국 같은 솜이며, 같은 금이다. 마찬가지로 실체는 오직 하나이며, 그외에는 다만 이름이고 모습일 뿐이다. 마음은 진아와 따로 떨어져존재하지 않는다. 즉 마음에는 독립되어 있는 실체가 없다. 진아는 마음없이 존재하지만 마음은 결코 진아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