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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피가 가져온 은혜
히브리서 9:11~14
찬송가 259장(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오늘 본문 말씀은 과거 옛 언약 시대 구약 성전에서 소와 양과 염소를 제물로 드려 백성들의 죄를 씻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였던 것이 불완전하였음과 달리 새 언약 시대를 맞이하여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세워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사 그의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이루시고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참 성전으로 이끌어가시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기업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피가 가져온 은혜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그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리스도 곧 예수 그리스도는 첫 장막 시대 곧 구약 성전 시대의 아론의 혈통을 받은 대제사장들과 달리 장래 좋은 일 곧 신약 시대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의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사역했습니다. 광야 시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 개월에 걸쳐서 만들어서 출애굽한 다음 해에 완성된 성막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직임을 감당했습니다. 그 후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도 돌과 보석과 커튼으로 지어졌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칠 년이 걸려서 수많은 사람들과 많은 물품들이 오랜 시간을 걸려서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도 지어진 지 400년만에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헤롯 성전은 무려 80년에 걸려서 엄청난 재물과 인력이 투자되어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주후 63년, 완공 된 후에 7년 후에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졌고 불태워졌습니다. 이것들은 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세우신다고 예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4:58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고발하는 자들이 증언한 말에 나옵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 바깥 뜰에서 제물들을 사고 파는 일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내쫓으신 후에 대제사장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무슨 표적을 보여주겠느냐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과 이르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그 때 하신 말씀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육신적이고 가시적인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물 성전 대신에 결코 무너지지 아니하는 완전한 영적 성전, 영원한 성전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사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영광스러운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고 말씀하신 바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영적 성전 개념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성전입니다. 히브리서 2:6 말씀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고 하신 말씀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고 있는 그의 백성들이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2장에서 동일한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은 보이는 건물이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의 기초는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가 보내신 선지자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곧 참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장차 천국의 건물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 성도 사실은 이러한 성도의 영광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1:1~2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분명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이 구체적인 공간적 개념을 가지고 실재로 존재하겠지만, 그것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은 동시에 주님의 몸된 교회 곧 그의 신부된 교회인 성도 공동체의 영광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 때에 가장 아름답고 화사하게 꾸미고 가장 행복한 존재인 신랑의 신부처럼,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의 백성과 거주하시는 곳인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나님의 하늘 성전은 그의 백성 공동체 자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지상 세계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인 교회와 성도들이 비록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존재감 없는 존재요 심지어 천덕꾸러기와 조롱꺼리와 노리갯감과 같은 핍박받는 존재가 될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가 본질상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피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터 위에 지음을 받아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요 영원히 영광스러운 영적 성전이라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장차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인 지극히 영광스러운 저 천국 새 예루살렘의 상속자임을 기억하며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를 불러내어 심문하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공주와 천부장 등 고위 관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들이 거부하자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그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던 말씀을 기억합시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사도행전 26:29)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 없고 알아주는 이 없고 세상에서 하는 일이 비록 적으나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의 값을 지불하여 자기의 몸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순례 길을 걸어갈 때 세상 누구도 부러워할 것 없이 사도 바울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당당한 마음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이제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더 좋은 대제사장이신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창조에 속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지성소에 단 하루 들어간 아론의 후손인 대제사장과 달리 예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인 하늘 성전에 단번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단번에 들어가셨는가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9장 전반절에서 논한 바와 같이 구약의 대제사장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속죄일에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기의 죄와 백성의 죄를 씻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죄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다음 해에 그 지성소에 들어갈 때 또 다시 송아지와 염소를 잡아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속죄일 외에 다른 날이 들어가면 대제사장이라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송아지와 염소의 피가 죄를 다 씻어내는 것도 아니요 다만 성전의 의식법적인 부정함을 잠시 덜어내는 정도에 불과하지, 그 죄를 완전히 도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물의 피는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구약의 제물들의 피는 잠시 잠깐의 효력만 있는 제한적인 속죄효력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흠없는 피, 거룩한 피를 가지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거룩하고 흠없는 완전한 피로써 그의 백성들이 다시는 죄에 대하여 기억조차 할 수 없이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본인도 죄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죄를 다 사하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에 단 한번 그것도 대제사장이 그 속죄일에 두세번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단번에 영원히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하늘 장막 성전에 들어가셨고 거기서 속죄를 다 마치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힘입는 자들은 다시는 죄를 기억조차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를 힘입는 자는 누구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성전에 아무런 장애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 성전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던 백성들처럼 늘 주눅들어 양심의 거리낌을 가진 채 섬기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그들의 양심은 새로워졌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구원의 즐거움을 가지고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13절과 14절이 그것을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의 속죄 제사와 대속죄일의 속죄 제사 그리고 부정한 자들에게 뿌려 그 의식법적인 부정함을 씻는 정결케 하는 물들을 언급합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위임을 받을 때나 속죄 제사를 드릴 때에 보면 늘 그 잡아 드린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또 그 위임받는 제사장들에게 뿌리고 속죄 제사를 드린 사람에게 뿌렸습니다. 그러면 그 피로 인하여 그 사람의 죄가 속해진다는 약속이 구약 율법에 주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태워 그 재를 모아 물에다가 담궈놓고 보관해놓았는데, 율법의 규례를 어긴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물을 그 몸에 뿌려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물로 뿌림을 받을 때에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지고 경수난 자리에 앉아 부정해지는 등의 죄를 범한 자들이 다시 의식법적 정결함을 입고서 성전에 나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물로 뿌림을 받지 않은 상태로 성전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면 그 사람의 제사는 받지 못하고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물과 피는 구약 시대 하나님 백성들이 그 양심상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중요한 도구로 쓰임받았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제물의 피와 암송아지 재의 물로써도 불완전하게나마 그들의 양심에 위로를 얻고 용서받은 은혜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9절에서 밝힌 바대로 “그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한 대로, 어디까지나 그것은 장차 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를 상징하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래도 그 그림자요 예표요 모형이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잠시라도 그 육체가 정결해지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짐승의 피와 정결하게 하는 물로써도 마음의 죄의 가책감을 덜어내고 하나님을 섬길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면 그 물과 짐승의 피의 본체요 실상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피의 뿌림을 입은 자들은 얼마나 더 큰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힘입은 자는 그 양심이 죄에서 온전히 자유케 함을 얻을 수 있게 되며 용서의 확신을 가지고 더 자유롭고 확신있게 다시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4절 말씀대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완전한 자기의 몸의 피를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께 자기를 드렸으니, 그 피는 당연하게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며, 우리의 눌리고 더럽혀진 양심도 다시 살아나게 하기에 능하며 죄의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너끈히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양심과 영혼이 새로워져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온전히 섬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시대를 살게 된 우리는 구약 성도들보다 얼마나 더 복이 있는 자들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피를 인하여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상속한 자요 영원한 속죄함을 입고서 그 영원한 영광의 장막에 담대히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또 영원하신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비록 우리도 아직 죄와 더러움에 종종 노출되어 우리 양심이 눌리고 죄의 중압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요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할진대 우리는 다시 죄의 결박에서 놓여나고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부정에서 깨끗함을 입고 우리 양심이 새로워져서 능히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다시금 담대히 나아가 열렬히 섬기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구약 시대 성령의 사람 다윗이 죄를 범한 후 참회할 때에 이렇게 기도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편 51:11~13)
여기서 다윗은 참회하면서 하나님께 다시금 돌아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며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간절하게 소망했던 바가 오늘날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거듭남과 내주하심을 입은 새 언약 백성인 우리에게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다윗과 같이 깊이 미끄러졌고 크게 넘어진 자가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입을 수 있으며 그 양심이 어떻게 다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아주 조건없는 용서해주심과 긍휼히 여겨주심과 새 힘을 주시는 전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지금 우리가 바로 그 놀라운 은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은택을 입은 우리는 이렇게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흠없는 자기 피로써 완전한 속죄를 이루시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장막 성전에 단번에 들어가셔서 성령을 보내사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그 자비하심을 입어서 양심이 새로워져서 죄를 늘 이기며 하나님을 너끈히 섬길 수 있게 하신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구주 예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며 충성하며, 그의 고귀한 피의 은혜와 능력을 증거하며 사람들을 살려내는 열렬한 복음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