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병철 교수가 <관조하는 삶>이라는 책으로 돌아왔다. 늘 우리 사회가 생각하지 못하는 문화 내러티브를 잘 드러내주는 통찰을 보여준다.
활동및 성과사회에서 무위는 사라진다. 쉬는 것도 단순한 쉼이 아니라 다음의 활동을 위한 에너지 비축에 불과하다. 노동이 더 중요하고 쉼은 노동을 위한 쉼이 될 때, 노동과 생산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은 사라진다.
2.
자본주의 사회에서 끝없이 성과를 위해 쫓아가는 삶은 쉼이 없다. 쉼이 없으면 새로운 야만이 발생하고, 작동하기만 한다면 기계와 다를바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삶에서 감사와 기쁨이 있으려면 먼저 시간이 있어야 한다. 잠시 멈춤을 통해 하루를 돌아보고, 일주일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관조와 성찰과 묵상의 시간이 없을 때 안식이 없는 애굽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3.
감사, 기쁨은 영적인 바로미터이다. 안식이 없을 때 관조가 없고 쉼이 없으며 마음은 분주해지고 무언가 쫓기듯이 살아가게 된다. 무위의 시간이 없을 때 행복은 파괴된다. 쉼이 없는 행복은 늘 생산을 통해 또는 소비를 통해서만 만족하는 이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물질적 행복이다.
솔로몬은 해 아래서 쾌락과 지식과 사업등 다양한 것으로 행복을 추구했지만 인생의 참된 행복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해 아래서' 그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인생의 참된 만족은 '해 바깥'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Extra nos'는 우리 바깥에서 시작되는 무엇이다.
4.
유진 피터슨은 안식을 누리는 산책이란 걸으면서, 자연을 그대로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라 표현했다. 바람을, 해를, 자연을, 꽃을,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걷는 과정을 안식이라 표현했다. 뛰면서까지 무엇을 들어야 하는 목표지향적인 운동이 아니라 쉼과 누림과 안식은 멈추고 느끼는 것이다.
생산성의 시대에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아가는 부속품처럼 살아갈 때가 있다. 이런 반복적인 무의한 세상에서 참된 의미를 찾으려면 '우리 바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 작은 내 인생으로 해석되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계와 연결될 때만 비로소 해석이 된다.
5.
요셉은 형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억울한 일이고, 복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악인의 악을 하나님은 선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난의 창시자가 아니시지만, 고난의 해결자이시다. 어떤 억울한 일들을 당해도 하나님의 관점과 연결되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때문에 우리의 실패는 더이상 실패로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 반복적인 삶 속에서 잠시 멈추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관조의 시간, 묵상의 시간,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또 의도하지 않아도 이 무위의 시간이 결국 더 많은 생산을 가져오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 머무는 안정감이 더 많은 생산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을 바라지도 목표로 하지도 않지만 그것을 바라고 목표를 하는 삶보다 더 많은 생산을 누릴 때가 있다.
6.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생산과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무위와 관조의 시간이다. 머무는 것, 멈추는 것, 그 정도의 시간이 확보될 때 하나님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 팀 켈러는 고독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공적인 환경에서도 일어난다고 말했다.
홀로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정기적으로 놀라고 은혜를 누릴 때, 그것이 공적인 설교 시간에도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설교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말고 설교자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야 한다. 그 무위의 시간, 관조의 시간, 묵상과 기도의 시간의 충만함이 더 많은 생산과 능률로 나타난다.
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산의 시간이 아니라 기도의 시간이다. 멈춤의 시간이며 돌아봄의 시간이다. 내가 아둥바둥 일하는 삶은 결국 베드로의 고백처럼 "밤이 새도록 일했지만 잡은 것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끝날 수 있다.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고 내가 그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먼저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주님의 일을 뒤 따라가야 한다.
한병철 교수는 대안이 없는 관조를 이야기하지만, 그의 통찰은 오늘 다시금 우리를 안식와 기도의 시간으로, 머무름의 시간으로 초대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