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은 1966년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이병렬과 배은심의 2남 3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배은심은 동자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고 한다.[1]
그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전남 화순에서 지냈으며,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 동산국민학교와 동성중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벌어진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게 됐다. 그뒤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입 시험에서 낙방하였다. 그뒤 1년간 종로학원에서 재수후, 1986년연세대학교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하였다.
1987년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22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일부 전경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2] 해 중앙일보,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장례
87년 7월 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 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이후 고조된 학생운동의 분위기는 6.10 항쟁과 사실상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護憲) 조치(후임 대통령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의 헌법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으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한 특별선언)와, 경찰에 의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954.6.9. 청문회에서 육군을 거칠게 공격했다가 대대적인 망신을 당하다
1954년 6월 9일,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육군-매카시 청문회’라고 불리게 되는 청문회장에서 평소처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청문회가 열린지 30일째였던 그날, 그는 육군 내부에 ‘빨갱이’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육군의 법률 고문인 조셉 웰치를 걸고 넘어졌다. 웰치는 프레드 피셔라는 젊은 변호사의 후원자인데, 피셔가 대학생이던 때 ‘좌파적인’ 법률인 조합에 잠깐 몸담았다는 것이다. 매카시는 이처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야기로 웰치를 보기 좋게 낚았다고 믿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때 웰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빨갱이 때려잡는'싸움꾼,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망신을 당하다
육군 청문회에서 질문하는 메카시. 들고 있는 사진의 오른쪽이 조셉 웰치다.
“의원님, 저는 이제껏 꿈에도 몰랐습니다. 한 무고한 젊은이를 그렇게 갈가리 찢을 정도로 당신이 그토록 잔인하고, 그렇게나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 저는 스스로를 신사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누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얼굴이 벌개진 매카시가 뭐라고 반박하려 하자, 웰치는 무시해 버리고 말을 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살해하려는 짓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의원님, 그만하면 충분히 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의도 모르십니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겁니까?” 매카시는 다시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웰치는 청문회 의장에게 고개를 돌리고 그만 퇴장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의장이 허락하고 휴회를 선언하자 웰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매카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나갔다. 그 때 박수 소리가 터졌다. 몇 년 동안이나 미국을 의심과 불안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장본인, 그의 면전에 대고 마침내 속 시원한 소리를 내뱉은 사람에게 보내는 열렬한 환영과 지지의 박수였다.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던 청문회 현장을 지켜보던 미국 국민들도 그 박수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조셉 매카시는 그 때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토록 무지한 사람만 아니었다면.
위스콘신에서 온 풋내기 정치인
조셉 레이먼드 매카시는 1908년 11월 14일, 미국 위스콘신 주의 북동부에 있는 작은 농장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으나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보낼 만큼도 아니었다. 매카시는 채소 장사를 하며 돈을 벌어서 학비를 마련했고, 23세에 밀워키의 마케트 대학교에 입학했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변호사 일을 하면서 차차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매카시는 처음에 민주당을 택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에 자원 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전후로 성향이 바뀌어, 1944년에는 공화당으로 상원의원 선거에 나선다. 여기서는 고배를 마셨지만, 다시 1946년 선거에서 본래 공화당이었다가 진보당을 만들어 나갔던 거물 라폴레트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 때 매카시는 훗날 ‘매카시즘’을 불러오게 될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라폴레트가 자원 입대하지 않은 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그의 ‘비애국적’인 면과 자신의 ‘뛰어난 공로(전쟁에서 세운 수훈을 마구 부풀렸다)’를 대비시켰고, 또 다른 경쟁자인 민주당의 맥머레이에 대해서는 ‘빨갱이 냄새가 난다’며 색깔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마침내 매카시는 꿈에 그리던 상원의원이 되어 워싱턴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쟁쟁한 정치 거물들의 눈에 그는 먼 시골에서 갓 올라온 ‘듣보잡’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야심적이기 마련이지만, 이 위스콘신의 풋내기만큼 어마어마한 야심을 가진 사람은 또 없음을 그 때는 아무도 몰랐다. 출신도 경력도 시원찮은 그가 얼마 안 가서 미국 정치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리라는 것도.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잘 알려져 있듯 ‘매카시즘’은 미국 정부의 구석구석에 사회주의자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매카시의 폭로로 불어 닥친 회오리바람이다. 그러면 실제로 당시의 미국 정부에 사회주의자들이 있었을까? 있었다. 매카시즘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930년대부터, 미국 정부와 부속 기관에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워싱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주의자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 공무원이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했느냐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사상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포함하며, 미국은 누가 뭐래도 민주주의 국가였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고 그 주장에 공감한 사람들이 있다고 근본적으로 문제될 일은 없었고, 그런 사람이 행정부에서 근무한다고 큰 일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모스크바의 하수인이 되어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으나, 미 연방수사국(FBI)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수사를 해도 이렇다 할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메카시 청문회를 시청 중인 미국 가정주부
해리 덱스터 화이트나 앨저 히스, 로젠버그 부부 등은 실제로 소련의 사주를 받고 스파이 활동을 벌이다 발각된 드문 예였다. 하지만 그들도 냉전에서 미국의 입장을 크게 불리하게 만들 만큼 큰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고, 그나마 수사 과정에서 왜곡과 과장이 이루어졌다는 의심이 없지 않다. 1950년대로 들어서던 때는 ‘정부 안의 공산주의자 문제’는 거의 종결되어가던 참이었다. 그러나 1950년 2월 9일, 매카시가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치다
“여기 바로, 내 손에! 205명의 공산당원의 명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국무부에서 미국의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매카시는 종이뭉치를 공중에 확 뿌리면서 이렇게 외쳤다. 국무부가 ‘빨갱이 소굴’이라는 매카시의 선언은 정치인들에게는 새로울 게 없었으나, 대중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더구나 매카시의 선동이 쉽게 먹힐 조건이 있었다. 선언이 있기 직전에는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선언 직후에는 한국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이렇게 자유진영이 극동에서 계속 밀리는 것은 국무부를 중심으로 붉은 늑대들이 양의 탈을 쓴 채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그럴듯하게 먹혀들 만했다.
과장되고 왜곡된 자료를 근거로 전세계적인 반공산주의 선풍을 일으킨 메카시
그러나 매카시가 공중에 뿌린 종이를 집어 든 사람이 있었다면,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것은 공산당원의 명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매카시의 머릿속에조차 그런 명단은 없었다. 매카시는 얼마 후 205명에서 57명이라고 공산당원의 숫자를 바꾸었고, 마침내 발표한 명단에는 국무부에 시험만 쳤을 뿐 직원이 되지 못한 사람, 퇴직한 사람, 국무부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정책 수립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 등이 수두룩했다. 매카시는 또한 과장과 왜곡도 즐겨 썼다. 사실 그가 발표한 명단은 예전에 FBI에서 조사한 명단을 토대로 한 것이었는데, 원래 명단에서 ‘사회주의자’라고 기록한 것을 ‘공산당원’으로, ‘러시아계’는 ‘러시아인’으로, ‘가능성이 있다’는 ‘확실하다’로 바꿔 놓았다.
매카시는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매카시즘은 쉽게 죽지 않았다
대중의 초미의 관심 속에서 여러 차례 청문회가 열리고, 굵직굵직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빨갱이라는 혐의를 받고 불려 나왔다. 그 중에는 전후 서유럽의 부흥을 가져온 ‘마셜 플랜’의 주인공인 조지 마셜 전 국무장관과 미국 원자폭탄 개발의 주역이었던 오펜하이머도 있었다. 매카시즘의 대상도 국무부를 넘어 연방정부 전체, 그리고 여러 기업이나 사회단체까지 뻗어나갔다. 불안과 의심의 문화가 사회 구석구석에 젖어 들면서, 자유국가 미국의 국민은 마음 놓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저런 말을 하다니, 빨갱이 아냐?”하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에. 빨갱이 노이로제가 심해지면서 심지어 이웃조차 못 믿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전부터 어딘가 수상했어, 혹시 저 놈도?”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이 가까워지며 매카시즘은 수그러들었다. 매카시의 폭로가 주로 알맹이가 없는 억측임이 뚜렷해지기도 했고, 이를 민주당 정부를 공격하는 호재로 삼았던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오히려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자신이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서 자신과 함께 싸웠던 전우들을 매카시가 마구 공격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마침내 육군-매카시 청문회를 고비로 매카시의 영향력은 급락했으며, 개인적으로 저지른 비리가 폭로되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사망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술로 나날을 보내다 간염에 걸려 1957년 5월 2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빠른 부상만큼 빠른 몰락이었다.
매카시는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매카시즘은 쉽게 죽지 않았다. “우리 내부의 빨갱이들을 조심하라”는 것은 이후 배리 골드워터,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등 중요한 보수 정치인들의 모토였으며 냉전 시대 내내 다른 자유진영 국가에서도 광풍을 초래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일 것이다.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한국은 “설령 이적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를 따르는 자체가 범죄다”라는 매카시즘의 강령을 너무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국민의 기본권에서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는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공염불이 되었으며, 지금 이 시간까지도 “누구누구는 좌파라더라”는 말은 치명적인 공격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의심과 야심과 증오심이 어우러져 매카시즘을 불러왔다.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은 불안과 불만을 안고 살아간다. 그 불안과 불만이 어떤 악의 세력이 꾸민 음모가 아닌가 하는 상상이 일고,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 세력이 있을 때, 매카시는 몇 번이고 지옥에서 돌아오는 것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매카시즘을 전문적으로 다룬 책에는 로버트 그리피스의 <마녀사냥>(백산서당, 하재룡 역)이 유일하다. 이 책은 조셉 매카시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다룬 전기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매카시라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밝히는 것보다 ‘매카시즘은 어떻게 나타나서 어떻게 만연되었는가?’라는 문제를 풀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폴 존슨이 지은 <모던타임스>(살림, 조윤정 역)는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과 흐름을 짜임새 있게 엮어낸 걸작인데, 매카시즘에 대해서는 2권, 제13장에서 다루고 있다.
<마녀사냥>에 비해 매카시즘을 다루는 분량은 절대적으로 적지만, 매카시즘의 배경과 미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짚어 주는 면에서는 <마녀사냥>보다 낫다. 또한 생동감 있는 문체와 짜임새 있는 글솜씨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매카시즘을 현대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로, 특히 1950년대를 대표하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시각에서도 <모던타임스>는 탁월하다.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