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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인생의 가시 속에서
고린도후서 12:1-10
기독교 역사상 사도 바울을 따를만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절반인 13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한 사람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나사렛파라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았는데 바울의 노력을 통하여 유대교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적인 선교사였습니다.
3차에 걸쳐 세계선교여행을 다녔고 마지막에는 로마에 가서 순교를 당하므로 그의 일생을 장엄하게 마치게 됩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실 외에도 오늘 본문에서 영적인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체험한 것은 크게 3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첫째가 많은 환상과 계시입니다.
둘째가 14년 전에 셋째하늘에 올라가 낙원 즉 천국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낙원에서 사람에게 이를 수 없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반대자들에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만
어째든 이러한 체험은 적대세력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놀라운 체험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아서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그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의 삶은 평안하고 행복하기보다는 어려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일생동안 몸의 가시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절하게 여러 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시를 없애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그 가시를 몸에 달고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괴롭힌 그 가시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해석을 제시해보면
1. 캘빈은 영적인 유혹이라고 진단합니다.
의심에의 유혹, 사도로서의 의무를 회피하고자 하는 유혹, 그 유혹에 빠졌을 때 양심의 고통을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2. 루터는 사도 바울을 반대했던 세력과 박해라고 이야기합니다.
3.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결혼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육체적 유혹, 성적인 유혹이라고 진단합니다.
4. 그 가시가 질병이라고 보면서 간질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5. 지독한 두통이라는 진단도 있습니다.
6. 안질이라는 것인데 사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밝은 빛을 받아 눈을 뜨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로 인해 눈을 보게 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눈이 좋지 않아서 편지도 대필을 시킬 때가 많았습니다.
7. 당시 지중해에 만연했던 말라리아 열병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당사자가 밝히지 않아서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많은 해석을 말씀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사도 바울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로 인하여 고통 속에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사도 바울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산 것이 아니라 누구 못지않은 고통가운데 살았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기가 힘들어서 사도 바울도 세 번 하나님께 가시를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가시를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구했던 사도 바울은 가시가 없어지는 응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놀라운 역사를 깨닫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구한 것은 응답받지 못하였지만 또 다른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먼저는, 육체의 가시가 자기를 교만하지 않게 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의 영적인 체험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낙원에 올라갔던 일도 있었고 낙원에서 사람이 가히 이를 수 없는 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 체험이 너무나 놀라웠기에 하나님은 그를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몸에 가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체험이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는 지금부터 14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14년 전의 체험을 이제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있으며 며칠을 참지 못하고 이야기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랑을 쏟아놓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입니다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엄청난 체험을 하고서도 14년 동안이나 자랑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모습이고 훌륭한 모습입니까?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바로 가시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가시가 다 있게 마련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의 가시가 있을 수 있고 가족의 가시, 자녀의 가시, 정신의 가시, 물질의 가시, 마음의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시를 위해 열심히 믿음을 가지고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해결해주지 않으시고 그냥 평생의 가시로 갖고 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충성도 하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칫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가시를 주시고 치료하지 않으셨다는 사도 바울의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깨달음을 갖는 것이 정말 놀라운 축복인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은 왕이 되기 전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고 짐짝 뒤에 숨어있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겸손함 때문에 선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후 그는 교만하기 시작합니다.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기가 직접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말씀에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며 자기를 높이는 일에 신경을 씁니다.
결국 그는 그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비극적인 인생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교만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교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겸손하다가도 갑자기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육체의 가시가 없어서 교만에 빠지고 교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육체의 가시 때문에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이 좋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그 교만을 물리치고 항상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육체의 가시입니다.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육체의 가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깨달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육체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기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보통은 왜 나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의심도 생기고 짜증이 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사도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2)
내가 바라는 대로 해 주지 않고 나의 기도대로 응답해주지 않고 그래서 내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 같아도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깨달음입니다.
일본에 미즈노 겐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 고열로 뇌성소아마비에 걸려서 보고 듣고 깨닫는 것과 내장 기능 외에는 전신불구가 된 사람입니다.
손가락하나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그가 예수님을 알고 쓴 작품가운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시집이 있습니다.
이 시집은 아들이 원하는 철자를 알기 위해서 어머니가 문자판을 일일이 가리키면서 아들의 눈을 봅니다.
아들이 눈짓으로 ‘맞다’고 하면 그것을 기록해서 글자를 만들고 문자를 만들어서 쓴 시집입니다.
아들이 무슨 글자를 알기 위해서 아들의 눈을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문자판을 짚어 가면서 아들이 원하는 글자를 찾습니다.
그렇게 해서 ‘ㄱ’자를 씁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일을 반복하여 ‘ㅏ’자를 찾아 쓰고 또 반복하여 ‘ㅁ’자를 찾아내면 그때 비로소 ‘감’자가 완성되는 거예요.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쓴 시집제목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입니다.
이런 아들이 무슨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아니 무슨 은혜를 논할만한 것이 있다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을 했을까요?
미즈노 겐죠는 그 시집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내가 괴롭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괴로웠기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구원받았기에 그는 전신마비의 육체 속에도 감사하며 그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 고백이 오늘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응답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없어지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평생 가시를 몸에 지니면서 살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는 족한 줄 믿습니다. 충분한 줄 믿습니다.
응답받지 못한 것 때문에 나에게는 은혜가 없다가 아니라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이 충만하다는 신앙고백이 여러분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여러분들이 처한 형편과 환경을 불문하고 충분한 은혜인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은 그런 가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체의 가시 속에서 그는 육체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강함을 나타낼 수는 없었습니다.
병약한 인간이 어떻게 힘차게 강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은 우리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약하십니다.
내가 지혜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미련합니다.
내가 능력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무능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내가 미련할 때 하나님은 지혜 있습니다.
내가 무능할 때 하나님은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할 수 없다고 할 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한 젊은 병사가 결혼을 해서 캘리포니아의 사막에 있는 자기의 임지로 새 색시를 데려왔습니다.
그 여자는 그 생활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남편이 근무할 때는 오래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으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에게 불평 섞인 편지를 쓰는데 어머니는 딸에게 두 문장의 답장을 보냅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철장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어머니의 뜻을 간파한 이 새댁은 그때부터 별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활용하여 사막의 꽃과 선인장에 대해 최대한으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근처의 인디언들의 말과 풍습과 전통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남편의 복무가 끝날 때 쯤 해서 그녀는 사막에 대해 너무나도 박식해서 책을 쓰기까지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문제로 여겼던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 가정을 찌르는 가시, 사업을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까?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일생의 가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가시를 축복으로 바꿨던 사도 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시를 가시로만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큰 축복과 더 큰 은혜를 깨닫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가시 때문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가시 때문에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가시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성장과 발전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가시로 인하여 평생토록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