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지>를 끝내고 쉬어가기 차원에서 보기 시작한 드라마 <장길산/황석영>이 흥미진진합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에 비해 인지도가 다소 떨어진 도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장길산 사단(활빈도)이야말로 의병의 전신이 아닙니까? 이제부터 나는 민중 운동의 뿌리를 "장길산의 활빈도"로 볼 생각입니다. 토지에서 <미스터 선 싸인>이 나왔고 <임꺽정/홍명희>의 모티브로 <장길산>이 새 창조됐다고 보는데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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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패였던 장길산이 사형을 언도받고 죽는 과정을 거친 후 임춘삼으로 새로 태어나는 설정은 토지의 김길상이나 임꺽정을 능가하는 새 창조 패러다임입니다. "창조-타락-회복"이 기존의 창조의 패턴이었다면 '창조-타락-구속(새 창조)"은 현대 신학의 새로운 관점입니다. <바울 복음의 새 관점/김세윤>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 뛰는 심장을 장길산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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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1b)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42a)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42b)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43a)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43b)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44a)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4b)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45a)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4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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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세계는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이성은 진리를 포착할 수 있고, 세계는 질서정연한 법칙 속에 움직인다는 믿음이었어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그 확신의 선언이었고, 뉴턴의 물리학은 그 확신을 자연의 언어로 증명했습니다. 세계는 마치 정교한 시계처럼, 원인과 결과의 바퀴가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간다고 본 것입니다. 칸트는 그 시계의 작동 원리를 철학의 언어로 해명합니다. 그에게 자연의 질서는 인간 이성의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연속적 체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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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은 인식의 무대이며, 인과는 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보편적 연극의 규칙입니다. 근대는 이 연속의 신화를 통해 “진리”와 “주체”를 세웁니다. 그러나 20세기, 그 시계는 멈추지 않았으나 분해되기 시작했어요, 양자역학은 입자가 연속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존재는 도약(quantum jump)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고, 관측자는 더 이상 중립적 증인이 아니라 사건의 공범이 됩니다. 이 과학적 전환은 철학과 예술의 사유에도 균열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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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의 사상가들은 더 이상 “하나의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세계는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수많은 파편들의 병렬적 공존이며, 의미는 연속적 흐름이 아니라, 단절과 충돌 속에서 새로 생성된다는 것 아닙니까? 주체는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 다중적 맥락 속에서 잠시 형성되는 흔적에 불과합니다. 이제 진리는 흐름이 아니라 사건(event)이며,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relation)이고 인식은 확신이 아니라 해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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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연속의 철학”이었다면, 포스트모던은 “불연속의 철학”입니다. 근대의 주체가 “전체를 파악하려는 눈”이었다면, 포스트모던의 주체는 “틈새를 응시하는 눈”입니다. 그러나 이 단절은 절망이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끊어진 선들 사이의 빈틈에서 새로운 의미가 태어나고, 확정되지 않은 세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시선을 새로이 측정합니다. 진리는 더 이상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관측의 순간마다 새로 생성되는 살아 있는 패턴입니다. 연속의 시대가 진리를 ‘발견’했다면, 불연속의 시대는 진리를 ‘창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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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데카르트와 뉴턴의 세계에서 시간은 매끄럽게 이어지는 강물이었고, 그 강 위에 모든 사건은 인과의 배를 띄웠습니다. ‘지금’은 ‘조금 전’의 결과이며, 동시에 ‘조금 후’의 원인입니다. 시간은 흘렀고, 세계는 질서정연하게 따라 흘갑니다. 칸트는 이 흐름에 이성의 구조를 부여했고 우리는 시간을 연속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세계도 필연적으로 연속적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에게 존재란 시간과 공간의 연속적 직물 위에 수놓인 경험의 무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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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는 0.999초와 1.001초를 잇는 실처럼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실이 끊어진다면, 세계는 사라진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현대는 그 믿음이 깨어진 세계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입자는 흐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여기’에 있다가, 갑자기 ‘저기’에 있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연속적 이동이 아니라, 도약(quantum jump)입니다. 이 한순간의 ‘깜박임’ 속에서 세계는 더 이상 부드러운 선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점들의 패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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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는 더 이상 1초가 아니다. 그 안에는 수십억 번의 생성과 소멸이 있습니다. 존재는 순간마다 새롭게 ‘관측’되어야만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던의 철학자들은 이 과학적 사실을 사유의 차원으로 가져왔습니다. 진리는 이제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각기 다른 순간들 속에서 번쩍이는 사건(event)입니다. 의미는 이어지는 줄이 아니라, 단절된 점들 사이를 해석이 건너뛰며 만들어내는 도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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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의 시대, 1초는 지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속에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어요, 불연속의 시대, 1초는 폭발하는 지금입니다. 그 속에 전체가 순간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겁니다. 연속의 세계에서는 ‘이유’가 중요했고, 불연속의 세계에서는 ‘관측’이 중요합니다. 연속은 확신의 시간이고, 불연속은 관심의 시간, 즉 관측자가 참여하는 세계가 아닙니까?
2.
황석영의 <장길산>은 단순히 도적의 이야기로 읽히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고, 또 너무도 철학적이다. 홍길동이나 임꺽정의 반역 서사가 사회적 정의의 회복을 상징한다면, 장길산의 여정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변형을 그린다. 광대패 출신의 장길산이 사형과 죽음을 거쳐 임춘삼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단순한 혁명가의 탄생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의 새 창조에 가깝다. 그것은 김길상의 회심이나 임꺽정의 각성과도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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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타락 이후의 구속’, 곧 창조–타락–구속(새 창조)라는 구원의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이 구조는 신약성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부활의 신비와 닮아 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고전 15:41-45)" 부활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성장’이 아니라 ‘단절을 통과한 변형’이다. 이때 죽음은 파국이 아니라 전환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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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말한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 된 것처럼, 장길산은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존재로 재현된다. 이 불연속의 서사는 철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근대의 세계가 데카르트와 뉴턴, 칸트를 거치며 “연속의 신화” 위에 세워졌다면, <장길산>은 그 신화를 해체하는 불연속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대의 시간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진 강물이었지만, 장길산의 세계는 도약(quantum jump)처럼 단절과 변형의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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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도적 세계의 인과율을 끊어내고, 도약의 존재로서 다시 태어난 민중이다. 장길산의 부활은 근대적 주체의 ‘연속적 발전’이 아니라, 포스트모던적 존재의 ‘단속적 창조’이다. 이때 활빈단은 단순한 의적 집단이 아니라, 민중 의식의 부활 체이며, 근대 민족운동의 영적 원형으로 읽힌다. <토지>가 민족의 서사를 통해 ‘연속의 거대 서사’를 완성했다면, <장길산>은 그 서사 뒤편에서 ‘불연속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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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상과 장길산은 모두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나지만, 전자가 회복의 인간이라면, 후자는 변형의 인간이다. 그는 세계의 질서에 다시 편입되지 않고, 질서 자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의 씨앗이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민중의 역사는 단절 속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의 ‘도약’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장길산의 재탄생 서사는 근대적 연속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불연속의 부활’을 보여주는 새로운 민중 서사로 읽을 수 있을까?
2025.11.14.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