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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길 18km
동서남북 18km를 연결해 주는 성문(城門)은 성안과 성밖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평안함과 복을 주는 중요한 곳이다.
두 발로 한강 아랫동네인 하삼도(下三道) 길을 걸어서 부산에서 문경새재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 영남 천리길이나
땅끝에서 전남 장성의 노령을 지나 충청도 차령고개를 넘어 천안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가던 삼남 천리길
지방에서 서울로 몇 날 며칠 동안 발품 팔아가며 올라간다는 건 한 번은 몰라도 두번 세번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생각이 드는데 예전에는 성문을 통해서 물자가 오가며 각 지역의 물자와 생활이 교류되는 곳이었다.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8개의 숨구멍(성문)이 있었으니 유교의 인의예지(정)신(仁義禮志信)을 상징하는 4大門과 4小門으로
나라의 전란 때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사활(死㓉)이 걸린 구멍(성문)으로 살고자 할 때는 숨구멍이었으나
전란때는 죽음의 구멍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지켰던 구멍이건만 두 번의 전란(임란, 병자)을 통해서 뭐 하나 지켜내지도 못한 사방팔방 문(門)이기도 하다
어라!~~ 4대문에 유교 근본 가르침인 인의예지신이라 했는데 북대문인 숙정문에는 왜 지(志)자가 안 들어가고 비슷한 느낌의 정(靖)자가 들어가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발음상으로 숙지문이라는 느낌이 별로이고 결론은 풍수로 별로라고 보면 될 듯하다
그리고 왜 신(信)이 없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줄로 알고 신(信)은 보신각(普信閣)을 의미한다.
궁금한 건 서울 한양 도성길 18km 걸어보시면 답을 쉽게 찾을듯하니 보따리 사서 올라가 보시기 바라고
예나 지금이나 한양에 산다는 건 좋은 일이다, 전국 228개 시, 군, 구 어디를 막론하고 인구 소멸이라는 블랙홀로 빠져드는데
인구 천만이 살고 있는 한양으로 보따리 싸서 가지 않으면 지방 자치시, 도는 자멸이거나 개인적으로 죽는다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드는 게 현실이다.
이번 하천은 서울의 청계천으로 그 옛날에는 사람이 모여 살았고 양반님네들의 정랑(화장실)을 푸며 내다 버린 더러운 하천인데
세월이 지난 만큼 흐르는 물은 모두가 지하철 속에 고인 물을 퍼내서 다시 흐르게 만든 좁은 하천으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막강 서울시 공무원들의 철저한 관리받는 하천이다.
창의문
서울역에 도착하여 택시로 서북쪽에 있는 창의문으로 옮겨와
청계천 발원지를 미리 찾아보니 인왕산과 북악산 두 곳에서 찾을 수 있었으며 창의문 기슭이라지만 인왕산에 가까운 백운동천이 가장 길다고 나온다.
도심 속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 신선이 거닐었을법한 백운동천을 찾든지 말든지 하지 결국 빗물 꼭짓점이라 할 수 있는 북악산 서쪽 계곡을 찾아 오르려니 탐방로 설치 공사로 막혀있다.
계곡으로 무작정 뚫고 올라갈 수도 없는게 예전 주상전하께서 살고 계셨던 청와대와 군사시설이라며
철조망이 촘촘하게 둘려 쳐져 있어 무작정 마빡부터 들이밀다가는 저 세상으로 가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디론가 잡혀가 고생 좀 할 것 같아 포기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북악산 오르는 길이 어딘지 여쭈어봐도 모두가 모른단다
창의문
한양 성곽길 18km 중 동서남북 4대문(四大門)과 그사이의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서대문과 북대문 그사이에 4소문 중 하나인데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서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며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는 곳이다
사진 한 장 담고 지도를 보니 청운대로 오르는 길이 보여 북악산 산허리를 돌아가는 도로 따라 올라가다가 아델라 베일리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청운대 안내소에서 한양 도성길에 오른다
청운대에서 본 불수사도북의 족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보현봉
한양의 아름다운 산객은 모두 어딜 간 건지 산객이 보이지 않는다.
한양 도성 18km는 조선초기 태조때 만 3년에 걸쳐 만들었으며 공사 실명제로 관리했던 성이다
(무너지면 그곳을 쌓은 석공을 불러다가 얼반 죽이는 그런 용도의 실명제를 한듯)
실제적인 공사기간은 봄, 가을 농번기와 한겨울 추위와 한여름 더위를 피해 가며 98일 만에 빨리빨리 병으로 완성했는데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한 국책 사업이면서도 작업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땡전 한 푼 주지않고 일을 시킨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다.
한양을 지키고 궁궐 속에 사시는 임금을 지키기에 너무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어 힘들었을테지만,정작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전란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현실이 마음 아프게 한다
청운대에 올라왔으나 산객은 없고
북악산이 저짝에 있건만 공사 중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금줄로 막아 두었다.
오늘 발원지는 창의문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해는 하늘 가운데 떠있고...
경복궁은 북한산을 조산(祖山)으로 하고 북한산에서 이어지는 현무격인 백악산(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좌, 청룡격인 동쪽으로 낙산(낙타) 우, 백호격인 서쪽으로 인왕산을 그리고 남쪽으로 주작인 목면산을 바라보게 궁궐을 지었다
그 외 궁궐(경복궁)을 감싸는 여덞산중 내성(內城) 북악산-인왕산 -남산-낙산을 산세 따라 연결하여 성을 쌓고 외곽 4 산(四山)으로는 삼각산(북한산)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 아차산 서쪽으로 덕양산(행주산성)을 포함시켜 수도를 지켰다
청운대에서
한 장 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간다.
아래사진은 예전에 담은 북악산(백악산) 정상
이곳은 서울의 주산이며 경복궁 북쪽에 있는 산이다.
풍수로 본다면 북쪽을 지키는 현무(거북이 몸통에 뱀의 머리와 꼬리를 한 짐승이나 아무도 본적없음)에 해당한다.
참고로 청계천 발원지는 이곳서쪽 계곡에서 시작된다
다시 창의문에 들어와
한양을 지키는 숨구멍 같은 4대문과 4소문
간략하게 사방팔방 방패 역할을 했던 문을 살펴보면
남대문:불의 방패로 지어진 건물로써 조선초기 정도전이 중국의 황제가 살고 있는 궁(宮)이 남쪽으로 있다고 하여 경복궁 문을 남쪽으로 내고자 할 적에 무학대사께서 궁을 남쪽으로 지으면 훗날 200년 후에 불탈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200년 후에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 전소되었다
그 외 우리나라 4대문과 4소문 대부분 일제 때 일본에 의해서 훼손되었다는 점 강조하면서
동대문:일본에 의해 주변의 성곽이 모두 헐어졌지만 문루 자체는 무사했는데 임진왜란 때 고니시가 여주를 거쳐서 한양으로 입성할 때 들어온 문이고, 가토기요마사는 용인을 거쳐 숭례문으로 들어와 훗날 일본의 개선문(凱旋門)으로 여겨 문루가 보존되었다.
숭례문인 남대문은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마지막 종착지점이라 늘 많은 사람들로 붐 빈 곳이다.
서울에서 전국 어디를 가던 기준점이 숭례문이다
참고로 서울에서 대구까지 거리를 잴때...
서대문:조선으로 들어오는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보름만인 4월 30일 선조께서 일단 튀고 보자며
도망 나간 문인데 훗날 일본이 전철을 만들며 철거했으며 지금은 흔적이 없고 남은 건 현판만 어딘가에 존재한다
북대문:일제에 의해 철거되지 않은 문으로 성안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만든 문인데 거의 닫혀 있는 문이다.
북소문: 창의문은 앞에서 이야기를 했기에 생략하고
서소문: 소의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처형장으로 최인을 능지처참 한 곳으로 유명했으며
조선후기 때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동소문:이 문은 강원도나 함경도로 가는 문
남소문:조선시대 때 8개의 문중에서 가장 불길한 문으로 성안의 시체가 밖으로 통과하는 유일한 문으로 불렸고
청계천 생활수와 함께 시구문(屍口門)이나 통곡문(痛哭門)으로 더 많이 불려 산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이 드나들던 문이며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대문이 아닌 이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셨다
얼마나 급했으면 시체가 드나들던 문으로 왕이 나가셨을까?
선조는 서대문으로 냅다 튀었고, 인조는 남소문으로 각각 도망을 가셨는데
선조가 한양에 남아있다가 왜놈에게 잡혔다면 우리가 아는 역사처럼 (이순신과 의병)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고
인조가 시체가 드나들던 남소문으로 빠져나가 남한산성에서 47일 동안 죽치고 있다가 결국 한강변의 삼전도에 잡혀와 청 태종 홍타이에게 무릎을 꿇은 것에 비하면 선조는 매우 잘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이제 하천 따라가 볼까나!~~
하천 195개 누적거리 1만 0,590km
북악산이 보이고
저짝에서 내려와야 했지만 쓸때없이 객기를 부리다가 골로 갈 것 같아 얌전하게 도로길을 따른다.
청계천은 멀리 경기도 양주땅 임꺽정봉 북쪽 경사진 계곡에서 발원하는 중랑천의 지류로써 중랑천을 만나기까지 한양 도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14km의 하천이며
충랑천은 양주 임꺽정봉에서 발원해 양주시-의정부-서울시 도봉구를 지나 동대문구, 성동구 옥수동에서 한강에 합류하는 38km의 강이다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창의문으로 들어오자 교전 끝에 전사한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 경사 순직비가 서있는데
이날 전사자는 이분들 말고 국군 25명, 민간인 7명 전사하였고
횡단보도 건너편 할머니가 앉아 계시는 곳 뒤 대리석 표지석에 청계천 발원지 표시석이 있었지만(청계천 발원지:북악산 정상 50미터 지점이라 쓰임) 지나가는 서울 이쁜 사람들 구경하느라 정신줄 놓은 순간...^^
이제 길은 청운동 인텔빌라를 지나는데 물이 흐른다면 아마도 도로아래 배수 터널로 지나갈 것 같다.
백운동천이 써진 건물 앞에서
백운동천을 찾아 자하문터널 옆길을 따라 올라가서
자하문 터널 바로 옆 인도(人道) 따라 200m 올라가면
인왕산 자락의 백운동천(白雲洞天)
인도가 끝나고 잠시 햇살이 들지 않는 숲길로 들어서면 공터인지 집터인지 대한제국시절에 법무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이 백운장이라는 정자를 세워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지금도 김가진의 정자터와 백운동천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남아 있다.
이제 백운동천을 뒤로하고
물길 여행이 목적이건만 물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마차가 다니는 도로 따라 물길이 땅속으로 스며들었을 것 같은 경사진 곳으로 내려가다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나라 운영하던 청와대로 발걸음을 옮겨간다
북악산 아래 청와대
뒤로 현무를 상징하는 북악산이 보이는데 지금의 대통령은 용을 좋아하는지 용산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후문이다.
경복궁에 들어와
한복을 입은 외국인(중국, 베트남, 미국인)들이 엄청 많았지만
그중에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키 큰 외국인 아주머니의 자태가 너무 고와서
"인증 한 장 담아도 되냐!"니 이렇게 온화한 미소로 답해주셨다.
경회지와 경회루
신선(神仙)이 두는 장기 노름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그곳 삼신산
신선을 본 사람은 나무꾼이 유일한데 그 신선이 살고 거처하는 곳인 삼신산을 생각해서 만든 곳으로
주요 용도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왕이 신하들과 땅까띵까 풍류를 즐기거나, 비가 오지 않으면,
비가 올때까지 비를 내려달라며 천지신명 산천초목에 빌던 장소다
강녕전과 사정전을 지나와 주상전하께서 왕의 업무를 보시던 근정전으로 간다.
근정전에는 왕과 함께 문무백관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사를 봐야 함에도
성밖 주막에 가셨나 텅 비어있다.
이곳에서 높으신 곳에 앉아 계시는 주상 전하의 용안을 감히 올려 뵙기까지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을 비롯한 춘추좌전과 예기까지 47만자의 글자를 밥알 세듯 외우고 외워서 과거시험에 합격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곳에 서면 백성들을 들들볶아 마른 오징어 짜듯 쥐어짜 물이 나오게하는 방법만 연구를 하셨으니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언제나 살기 팍팍한 세상이다.
왕을 비롯한 문무백관들 중에 교만하고,방자하고,잘난척하는 사람은 세상 어떠한 병도 다 고친다는 화타나 편작을 저승에서
소환해 고치게 하더라도 "이런 병은 약도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왔던 곳으로 갈 것 같다
어쨌거나
"주상전하 어디 계시요"
근정전 앞으로 한복 입은 청나라와 비엣남 여인네들로 북적하고
과거 시험 본다고 영남대로나 삼남대로길을 통해서 두 번 왔다가 낙방의 고배(苦杯)를 마시고 다시 발길을 돌린 곳이다
앞으로 동해바다에서 출발하는 영해대로나, 서해바다 보령시 오천항에서 출발하는 수영별로 길도 남아있어 몇 번 더와야
끝날 것 같은 길이 남아 있어 훗날을 기약하고 청계천으로 발길을 옮긴다
광화문
가운데 수문장은 수염도 그럴듯하고
많은 외국 여인네들이 수문장 하고 사진 찍기 바쁜데 양쪽의 수문장들은 영!~~~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나며
청계천이 본격적인 물길 여행을 하는곳으로 찾아와
물은 산에서 흘러온 물이 아니라
지하철 공사하면서 나온 물인데 물은 아주 깨끗하다.
이짝에서 저짝으로 흐르는 청계천
한양이라 다른점이 있다면 물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대신에 책을 본다는 건데
조선시대 때 환경과 무관하던 시절에 아낙네들은 빨래하고
천민들은 양반님네 정랑(화장실)을 퍼서 이곳에 버렸다는데
그 당시 청계천은 온통 똥물이 흘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이렇게 시(市)로부터 철저하게 관리받는 하천이 되었건만
시골의 작은 소하천보다 더 좁은 도랑물이 흐르는 모습이다
조선시대때 청계천으로 얼마나 많은 물이 흘러을까
주위에 산이라고는 인왕산, 북악산, 남산 그외 고만고만한 도토리 키재기하는 산들이 있었을것 같지만
수량이 많을것 같지 않고
비슷한 하천이라고는 성북천과 정릉천이 보이는데 그물이 합류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전태일 기념관 아래로 지나며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 있었더라면...
전태일이 근로 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 글을 변면전체에 꽉 채워 써놓았는데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기반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이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
...
최선을 다했던 전태일 그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 있었더라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까
배오개 고개에서 유래된 청계천의 9번째 다리
청계천의 잉어가족
물은 깨끗하다
1890년대 청계천 수포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모습
어미는 빨래하고 오누이 둘은 마주 앉아 물속에서 다정하게 놀고...
어쩌다 한번 고향집으로 가는 길에 어릴 적 물놀이하던 개울을 보며 예전 초등학교 생각을 하는데...
아련한 추억을 소환해 보는 그림이다
초겨울인데 코스가 핀녀석도 있고 아직 꽃망울만 달고 있는 녀석도 있고
하늘 물터(존치교각)
청계천 고가도로는 서울시 중구 충무로 60번지에서 동대문구 용두동 34번지까지 동-서로 길게 연결하던 고가도로인데
2003년 7월에 철거를 하여 같은 해 8월 말에 모두 철거를 했다.
청계천 복원 의미로 철거 당시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의 교각 3기는 철거하지 않고 서울 미래유산으로 남겨 두었다
서울 코스나 지방 코스나 똑 같이 겨울을 잊고 사는 듯
마장동 축산물 시장 앞을 지나며
서울사람들이 연간 200만 명이 찾는곳이며
서울시내 육류 유통 60% 이상을 담당하는 곳이다
전국 71개 도축장에서 2024년도 기준으로 하루에 약 2천 600마리 가량의 소들이 도축되며
한달에 약 7만 8천마리가 도축된다
닭은 매달 1억 1천 2백만마리 도축되고, 계란은 하루에 약 4천만개가 여러분 배속으로
하천폭이 많이 넓어진 청계천으로
중랑천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청계천도 세력을 조금 더 키운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 다리 위에서 본 청계천
지나온 청계천
인근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있고
중랑천과 만나는 날머리에서 뭐 타고 나가야 집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집 나오면 집 찾아갈 생각뿐이니다
멀리 경기도 양주에서 흘러온 중랑천이 보이고
북악에서 흘러왔던 청계가 중랑천에 안기는 곳이다
한양의 도성사람들에게 없어서 안될 보호받는 청계천은 전국 6대 광역시의 물과 비교해
경남 울산시 동쪽으로 흐르는 동천에는 감히 비할 바 못되지만
그 외 대전 갑천. 대구 신천, 광주 광주천. 부산 수영강, 온천천과 같은 도심으로 흐르는 물에 비하면 아주 맑은 하천이다
단, 청계는 자연 하천이라기보다 폭은 개울 수준이고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퍼올린 물이라 깨끗해 보이는 건 틀림없다
중랑천은 한강으로 향하고
이곳에서 어디로 가야 서울역이나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로 나갈 수 있을까
지하철이던 버스던 택시던 눈에 먼저 보이는 순으로 타고 나가야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몇 발짝 걸어 나오니 1년에 한 번 하는 택시검사 있는 날이라고 택시가 줄줄이 들어온다
맨 앞의 택시를 타고 나오는데
한강을 건널 무렵 기사분께서 어느 아파트를 가리키며 저기 아파트 1억 5천 이란다
엥?~~~ 서울에 아파트가 1억 5천이라니...
평당 가격이란다
지방에 우뚝선 아파트 한 채와 맞먹는 가격
그저 놀랄 뿐이고 하루동안 쏘다닌 서울에서 코 베어가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다음하천은 가까운 구미신 선산읍 대천으로
첫댓글 한양도성길을 걸으셨네요.
알고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편한 길이지만 저는 아직 한양도성길을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방장님 쓰신 역사적 이야기 떠올리며 천천히 둘러보며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 듭니다.
그 방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어디서 찾으시는지 역사선생님 하셔도 잘 하실 듯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알기쉽게 써내려간 지리 역사 사설입니다~
익히 알고있다 지나첫지만 방장님 후기로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좋은 책 한 권 읽고갑니다^^
즐거운시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