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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주석
예루살렘 입성 (마태복음 21:1-11)
네 사람의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5일 전에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신" 이 구절에 유의하고 있다. 유월절은 그 달의 14일 째에 있었는데, 이 사건은 10일에 있었다. 율법은 이 날에 유월절 어린양을 골라(출 12:3) 이 예식을 위해 구별해 둘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날에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던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는 공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그의 고난에 대한 전주곡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촌락의 베다니에 머물고 계셨다. 바로 그 전날밤 저녁 식사 때에 마리아는 "그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요 12:3). 그러나 대사(ambassadors)인 경우에 흔히 반드시 주님은 그가 도착한 후 얼마 동안까지 자신의 공적인 입성을 미루셨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많은 여행을 하셨으며 습관적으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수십 마일을 걸어서 여행을 하셨다. 이것은 그의 겸손과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선행을 베풀면서 다닐" 때 그의 발걸음은 몹시 피로하였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도 큰 불편과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자들이 그들 자신의 안일과 위엄만을 몹시 갈망하게 된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이제 그는 그의 생애에서 단 한 번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셨다. 그것도 마치 그가 스스로 자초한 즐거움인 것처럼 고난을 받아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바로 지금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그는 자신이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였다.
내용 별로 구분하여 살펴본다면,
Ⅰ. 이 예식을 위해 행해졌던 준비. 그것은 매우 초라하고 평범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과 같았다. 여기에는 무장한 전령사가 마련되거나 그의 앞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일이 없었으며 위엄 있는 황금마차도 없었으며 더구나 화려한 제복도 없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현재에 있어서의 그의 겸손하신 신분과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다시 재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훨씬 더 능가하게 될 것이다. 재림 시에는 그의 엄위하신 모습이 그대로 보존될 것이며 나팔소리가 울려날 때 영광스러운 천사들이 그의 전령자와 수행인이 될 것이며 구름들은 그의 마차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공적으로 나타나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1. 그 준비는 즉석에서 급작스럽게 된 것이었다. 저 세상에서의 영광을 위해 또한 그와 함께 할 우리들의 영광을 위해 준비는 이미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이전에 행하여졌다. 왜냐하면 이 영광은 그의 마음이 쏠려있던 영광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광을 전혀 구하지 아니하였으며, 따라서 그가 비록 이러한 영광을 예견했을지라도 그것을 위해 미리 계획하지 않으시고 다음에 온 것을 취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벳바게로 왔는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교외였으며 (유대인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매사에 예루살렘으로 간주되었고, 그 거리는 감람산을 향해 길게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그가 이 곳에 들어갔을 때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가져오게 하였다(어떤 사람들은 이 제자가 베드로와 요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이를 살 만한 현금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 준비는 매우 초라하였다. 그는 단지 나귀와 그 새끼를 위하여 두 제자를 파송 하였다(2절). 나귀들은 이 나라에서 여행을 하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 말들은 단지 귀족들이 타거나 전쟁시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그를 태우고 갈 그룹들을 불러모으실 수도 있으셨다(시 18:10). 그러나 비록 그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야 (jah, 역주;여호와의 약칭)라는 이름으로써" 그는 "하늘에서 타고 다니신다"고 할지라도 비천의 신분을 지니신 현재는 그 뜻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인 예수라는 이름으로써 "나귀를 타고 다니신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는 여기에서 심판자가 흰 나귀를(삿 5:10), 또한 그들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삿 12:14)를 탔던 이스라엘의 관습을 안중에 두었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심판자로서 이와 같이 입성하시려고 하셨다. 그는 "심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3. 그 나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빌려온 것이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집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친구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는 여행자처럼 그는 자신을 태워다 줄 나귀를 가졌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때문에 그는 모든 점에서 가난하게 되었다(고후 8:9). 흔히 말하기를 "빌리면서 사는 사람은 슬퍼하면서 산다"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이 그러나 에서나 또는 다른 일에서 "슬픔의 사람"이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거나 부여된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가진 것이 없었다.
이 나귀를 빌려오도록 보냄을 받았던 제자들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궁핍한 가운데 있는 자들은 자신의 궁핍함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또한 불의한 청지기와 같이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3)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누구든지 궁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걸하거나 빌리려 감으로써 친구의 호의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이 나귀를 빌리는 데 있어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리스도의 지식의 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일은 전혀 우연한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디서 매인 나귀와 그 새끼를 찾을 것인가를 말할 수 있으셨다. 그의 전지성은 아무리 비천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에까지 미치고 있다. 즉 그것이 나귀나 그 새끼이든지 또는 그것들이 묶였는지 또는 풀렸는지를 온전히 아신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9) 물론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소들을 염려하신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아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게 하신다.
(2)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의 영들을 지배하는 그의 능력의 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비천한 국민이나 또는 왕의 마음은 모두 "주님의 수중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귀들을 자기에게 데려올 것을 명하심으로써 그것들을 사용할 권리가 있음을 시위하고 계시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주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이 임무를 수행할 때 직면하게 될 약간의 장해물을 예견하고 계신다. 그들은 이 나귀를 몰래(clam et secreto)가져 와서는 안 되며, 그 주인이 보는 앞에서 강제나 억지(vi et armis)로가 아니라 주인의 승낙을 얻어 가져와야만 한다. 주님은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나귀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계시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것을 우리가 행할 때에 우리를 후원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공격당하게 될지 모르는 반대들에 대해 대답할 것을 갖추도록 해 주시며 또한 그들을 우세하게 해 주신다. 여기에 있는 대로,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그리스도는 나귀로 하여금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명하심으로써 그가 만물의 주인이 되심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또한 주인으로 하여금 나귀를 아무런 담보물도 없이 자기에게로 보낼 맘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가 "모든 육체를 가진 영들의 하나님"이 되심과 또한 사람의 마음을 굽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시다.
(3)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인의 승낙 없이는 비록 그것이 사소한 봉사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 동네나 두 동네 정도의 거리를 지나갈 때에 나귀를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공의와 정직의 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후반절을 다음과 같이 읽음으로써 우리에게 또 다른 공의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즉, "너희는 주가 쓰시겠다고 한다고 말하라. 그리고 그(즉 주님)가 곧 그것들을 돌려보내실 것이며 또한 그것들을 다 쓰고 난 뒤에 즉시로 주인에게 안전하게 넘겨 줄 것임을 유의하라고 말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우리가 빌린 것을 적당한 시기에 순조롭게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는 빌리기는 하되 도로 갚지 않기" 때문이다. 빌린 물건들은 손상되지 않도록 잘 조심해야만 한다. "아 슬프도소이다. 주님이시여, 왜냐하면 그것은 빌린 것이기 때문이다."
Ⅱ. 여기에서 성취된 예언(4, 5절). 우리 주 예수님은 그가 행하시고 당하신 모든 일에 있어서,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구절에 매우 유의를 하셨다. 예언자들이 그를 앞서 내다본 것처럼(그들의 모든 증거는 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메시야에 대해 쓰여진 모든 일들이 틀림없이 그에게서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바라보셨다. 특별히 그에 대하여 쓰여진 이 말씀, 즉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언대한 예언을 알리고 있는 스가랴서 9장 9절, 즉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라는 말씀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이제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떻게 예언되고 있는가? "시온 딸에게," 즉 교회, 거룩한 산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 즉 나라에 법에 의하여 우리들과 같은 우리의 형제들 중 하나이시다(신 17:15). 그는 교회를 지배하시는 왕으로 임명을 받고 계신다(시 2:6). 그는 교회에 의해 왕으로 받아들여진다. 시온의 딸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호 1:11).
(2)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이 낮은 세상에 있는 그의 교회에 오셨다. 그는 당신을 통치하기 위하여, 당신 안에서 통치하기 위하여, 당신을 위해 통치하기 위하여, 당신에게 오신다. 그는 "교회에 대해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머리이시다." "그가 시온에 오신 것은"(롬 11:26)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교회와 또한 교회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3) 교회의 왕이 오시기 전에 주의를 환기하도록 교회에서 촉구되었다. 즉 "시온 딸에게 이르라"고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오심을 참고 기다리도록 하실 것이며 또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기대를 가지도록 하실 것이다. "시온의 딸들에게 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나가서 솔로몬 왕을 볼 수"있을 것이다(아 3:11).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주목(notices)은 "볼지어다"(역주:개역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어 있음)라는 말로 예고되어 있다. 이 말은 주의와 찬미를 명할 때 쓴다. 즉 "볼지어다, 네 왕이 이르느니라." 볼지어다, 그리고 그를 기이히 여기라. 볼지어다, 그리고 그를 환영하라. 여기에 참으로 찬미해야 할 왕의 거동(행차)이 있다. 빌라도는 가야바와 마찬가지로 아무 영문도 모르면서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 19:14)라고 말하였다.
2. 그의 오심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큰 왕이 오실 때에, 특별히 그의 나라를 소유하러 오실 때에 위대하고 웅장한 어떤 것이 기대된다. 만유의 주이신 그 왕은 "높이 들린 보좌"(사 6:1)에 계신 것이 보여졌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볼지어다, 그가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탓도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에 위엄으로서가 아니라 온유함으로 나타나신다.
(1) 그의 성격은 매우 온순하다. 그는 분노함으로 복수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자비함으로 구원을 이루러 오신다. 그는 시온을 인하여 큰 모욕과 경멸을 받는 데 있어서 온유하시며, 시온의 자기 자녀들의 어리석음과 불친절함을 참는 데 있어서 온유하시다. 그는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분이시며, 간구 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선생으로서 온유하실 뿐만 아니라 통치자로서 온유하시다. 그는 사랑으로 통치하신다. 그의 통치는 유순하고 고상하며 또한 그 법칙은 그의 백성들의 피로 쓰여지지 않고 그자신의 피로 쓰여졌다. 그의 멍에는 쉬운 것이다.
(2) 이러한 증거로써 그의 외모는 매우 초라하고 나귀에 타고 계시다. 나귀는 귀족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봉사를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며,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짐을 지기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그 동작은 느리지만 확실하고 안전하고 꾸준하다. 이 말씀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되었고 또한 그것이 정확하게 성취될 것으로 주목된 것은 이 말씀이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곧 가난한 영들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실을 격려하기 위함이다. 시온의 왕은 마음이 약한 탄원자가 감히 접근도 할 수 없는 의기양양한 말을 타시거나 또는 발걸음이 느린 탄원자가 보조를 맞출 수 없는 뛰어가는 말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가난한 백성도 실망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조용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이다. 특히 "나귀 새끼"라는 언급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귀와 함께 있는 그 새끼를 데려오도록 제자를 보내신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Ⅲ. 세상적인 자만심이 없이 영적인 위세를 갖추신, 그 준비와 복합된 진행 그 자체를 살펴 볼 것은,
1. 그의 마차.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하여"(6절), 그들은 나귀와 그 새끼를 데려 오려고 갔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들과 또한 그들에게 그것들을 기꺼이 주려고 하는 주인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은 논란되어져서는 안 되며, 오직 순종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 명령들을 신실하게 순종하는 자들은 그것들을 놓치게 되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다." 그리스도께서 타신 짐승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하고 업신여길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가장 훌륭한 장식으로 치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밖의 것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꾸며졌으니, 곧 그들은 나귀를 위한 안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제자들은 그들이 가진 몇 가지의 옷을 그 위에 올려놓았으며,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그것으로 안장을 대신해야만 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외부적인 설비(형편)에 민감하거나 호기심을 가지거나 정확한 것인 양 가장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들에는 거룩한 무관심이나 무시가 우리에게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그것들에 있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비천한 일에 만족하라"는 사도의 규칙(롬 12:16, 난외주)를 배웠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어떠한 것도 여행자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종류의 부주의, 즉 고상한 무관심에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이 가진 최상의 것으로 나귀를 장식하였으며, "주님이 쓰시려고 할" 때 자신들의 옷이 손상되는 것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는 자신의 입고 있는 옷을 소중히 여긴 나머지 그리스도의 봉사를 위해, 그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옷을 위하여 나누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벗었을 때에 너희가 나에게 옷을 입혔다"(마 25:36).
2. 그의 수행원. 여기에는 당당하거나 웅장한 것이 전혀 없었다. 시온의 왕은 시온에 오셨으며 또한 시온의 딸의 이미 오래 전에 그가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형식대로 그 나라의 귀족과 동행하지 않았고 또한 그 성의 통치자의 영접을 받지도 못하였다. 그는 마땅히 자기에게 주어진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며, 그를 "심판의 보좌" 즉 "다윗 집의 보좌"로 인도함을 받는데 있어서 가능한 모든 편의를 제공받았어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런 대우가 전혀 없다. 그렇지만 그는 "많은 무리"를 수행원으로 거느렸다. 그들은 오직 일반 백성들, 즉 하층민(그들을 "오합지졸"이라고 부르는 편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뿐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개선의 엄숙성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데 그들을 모이게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중의 그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무리에 참가했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그리스도를 따른 자는 "능하거나 문벌 좋은 자"가 아니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다(고전 1:26, 28).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의 훌륭함(magnificence)에 의해서 보다는 다수(multitude)에 의해 영광을 받으신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을 그들의 우선권이나 이름이나 또는 영예의 칭호들에 의해 가치를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들에 의해 가치를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큰 무리에 관하여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애썼다.
[1] "그들은 그 겉옷을 길에 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위로 타고 가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 부하들은 그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자신들의 옷을 그 아래에 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는 자는 자산의 모든 것을 그 발 아래에 두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즉 마음의 표시로써 옷들을 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올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영혼더러 그가 지나가시도록 허리를 굽히라"고 말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옷들은 길을 장식하기 위해 땅 위가 아닌, 울타리나 벽에 펼쳐졌다고 한다. 마치 행렬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발코니에다 융단을 걸어놓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것은 한낮 초라한 위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의 선한 뜻을 받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잘 영접할 수 있는가, 즉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또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잘 영접할 수 있는가를 노력하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있는가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그를 어떻게 하면 영화롭게 하며 존귀케 할 것인가?
[2]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 이는 마치 그들이 초막절에 자유와 승리와 즐거움의 표시로 행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초막절에 자유와 승리와 즐거움의 표시로 행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절기의 신비는 특별히 복음 시대에 속한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슥 14:16).
(2)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는 동일한 보조를 맞추었다. 그의 오심에 유의하고 있던 자들과 칭송을 하면서 그를 따르던 자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지르며 외쳤다(9절). 그들이 초막절에 가지들을 가지고 다닐 때 그들은 곧잘 "호산나"를 불렀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가지를 묶은 단을 "호산나들"이라고 불렀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가 간구하노니 이제 구원하소서"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시편 10편 25, 26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 곳에서 메시야는 비록 "건축자가 버리기는 했지만" "모통이의 머리돌"로써 예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그와 함께 개선하게 되며 또한 그의 모든 기업이 번창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를 뒤따르게 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란 말은 "다윗의 자손을 위하여 우리는 이 일을 합니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에게 부수된 호산나라는 말은 두 가지 일들을 나타내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그들의 환영. "호산나"라는 말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와 동일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 다윗의 자손에 관하여는 미리 예언되어 있으니, 즉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이다. 이것들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전 세대에 걸쳐 모든 참된 신자들은 이 사실에 동조를 했으며 그를 복되다고 하였다. 그것은 신앙의 순수한 언어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 그는 거룩케 되시며, 중재자로서 세상에로 보내심을 받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인치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것은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마땅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를 찬양해야만 하며 또한 그를 기쁘시게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사실이 언급된 것은 우리를 위로하는 데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그의 영과에 대해 즐거운 환호를 보내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가 복되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안에 있을 때 복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축복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그를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가지고 따를 수 있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 잘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원. 이것은 그들이 "호산나"라고 부른 사실에 암시되어 있다. 번영과 성취가 그 왕국에 뒤따를 것과 또한 그 왕국이 승리하는 왕국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이제 그 왕국에 번영을 주시옵소서." 만일 그들이 그 왕국을 일시적인 왕국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으로 그 왕국에 대해 이와 같이 실행하려고 생각하였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큰 오해였으며, 그 오해는 단시일 내에 교정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선의(善意)는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번창하고 성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저를 위해 항상 기도 드려야만"(시 72:15)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행복이 이 세상에 대한 그의 관심사에 수반될 것이며 또한 그가 비록 나귀를 타셨지만, 그는 "온유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실 수"(시 45:4)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덧붙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최고의 번영이 그에게 함께 있도록 하라. 그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도록 하라. 그의 보좌가 모든 보좌 위에 있도록 하라. 숭고한 감정을 가지고 최고의 방법으로 그를 찬양하자. 그의 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가 가장 높은 하늘에까지 이르게 하자. 그래서 거기로부터 평화와 구원을 가져오도록 하자. 시편 20편 6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며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 하시리로다."
3.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그에 대한 환영의 기사가 실려 있다(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였다." 사람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어떤 사람은 그 광경을 보고 그 고상함에 호기심이 끌렸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 초라함에 조소를 던졌으며,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사람은 기뻐하였을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적인 부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시기와 분노로 소동을 피웠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까이 이른 것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여러 갈래로 요동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이 소동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이 성의 주민들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이는 누구뇨?"
[1] 그들은 아마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 많은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을 구별하셨지만 "예루살렘의 딸들은 남의 사랑하는 자"로부터 그를 알지 못하였다(아 5:9). 거룩하신 분이 거룩한 성에 알려지지 않으시다니! 가장 분명한 빛이 비치는 곳에,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이 이루어지는 곳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모르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
[2] 그러나 그들은 그에 관하여 알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환호를 받고 또한 그렇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오신 그분은 과연 누구신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도록 요구하시는 "이 영광의 왕은 누구이신가"(시 24:8; 사 63:1).
(2) 그 무리들은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이는 예수라." 그 무리들은 위대한 자들보다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vox populi ─ 즉 백성의 음성은 때로 vox Dei ─ 즉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1] 그들이 그를 "선지자," 즉 "큰 선지자"라고 부른 것은 옳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가르치며 이적을 행하는 선지자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를 왕으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이 세 직분(선지자, 왕, 제사장) 중에서 맨 나중에 발견되어다.
[2]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인"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확고히 가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영광을 돌리며 또한 그에 대해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오해는 그들이 확실한 정보를 알려고 노력만 한다면 교정될 수 있을 것이다.
성전 청결 (마태복음 21:12-17)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셨을 때 그는 왕으로 오셨지만 왕궁이나 궁궐로 올라가시지 않으시고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왜냐하면 그의 왕국은 영적이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거룩한 것들 안에서 통치하신다. 즉 하나님의 성전에서 권위를 나타내신다. 그러면 그는 거거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Ⅰ. 거기에서 그는 사고 파는 장사꾼들을 내어 쫓으셨다. 올바른 것이 세워지기 전에 악습은 제거되어야만 하며,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혀져야만 한다. 위대한 구속자는 경건치 못한 것을 돌이키시는 위대한 개혁자로 나타나고 계시다(롬 11:26).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는 무엇을 하셨는가(12절). "예수께서는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셨다." 그는 전에 이와 같은 일을 한 번 하신 일이 있으며(요 2:14, 15), 그 일을 또 다시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성전에서 쫓겨난 매매자들은 계속적인 유의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감시가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에 대한 숙청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성전으로 돌아와 거기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1) 그 악습은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돈을 바꾸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율법적인 일들이 시기를 놓치거나 장소가 적합치 않다면 죄악스러운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떤 곳에서 합법적이고 칭찬할 만한 좋은 것이 다른 날에는 "성전을 더럽히며 안식일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사고 파는 것과 돈을 바꾸는 것은 비록 세속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in ordine ad spiritualia─즉 영적인 목적을 구실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제사를 위한 짐승들을 팔았는데, 이는 짐승보다는 돈을 쉽게 가져 올 수 있는 자들의 편리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반 세겔을 원하는 자들을 위해 돈을 바꾸어 주었는데, 반 세겔은 그들이 일년에 한 번씩 내는 인두세 또는 속전이나 반어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하나님의 집에서 행해지는 외적인 직무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것을 허용하시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큰 부패와 악습은 "경건의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 즉 세속적인 이익을 그들의 경건의 목적으로 삼으며 또한 경건을 세속적인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이용하여 속이는 자들의 실행을 교회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다(딤전 6:5). "이러한 자에게서 물러서라."
(2) 이 악습을 제거하심. 그리스도는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셨다." 그는 이전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요 2:15) 내어쫓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불쾌한 표정으로 명령을 하시면서 행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성전을 깨끗이 하시면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조종을 받고 간교한 수법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자들에 의해 아무런 반대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가 행하신 이적들 중에서 그리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으며 또한 그들 자신의 양심에 그가 그들에 대해 지배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한 실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셨을 때에 행하신 법적인 권위와 위압적인 권세의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는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일을 시작하셨으며, 여기에서 그 일을 마치셨다. 전설에 의하면, 이 때에 그의 얼굴은 빛났으며 빛의 광채가 그 눈에서 나와 이 시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의 명령에 굴복케 하였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잠 20:8)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다." 그리스도는 그 돈을 자신이 취하시지 않고 흩으셨으며 그 돈이 있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인 땅으로 던지셨다. 에스더 시대의 유대인들은 "재산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에 9:10).
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13절) "기록된 바"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교회를 개혁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눈을 성경에 두어야만 하며, 그것을 규칙으로 고수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들을 기록된 바"라고 말하는 것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으며 그 이상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 개혁은 부패한 규칙들이 그 본래적인 제도에로 환원되어질 때에 올바르게 되어진다.
(1) 그는 성경의 예언을 인용하여 성전이 어떻게 되어야 하며, 또 어떻게 계획되었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13절).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의식적인 제도는 모두 도덕적인 의무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제사를 드리는 집은 기도하는 집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봉사들의 요지이며 골자가 되기 때문이다. 성전은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의 집이 되도록 성화되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그 예배의 장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매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집(성전) 안에서 또는 그 집을 향하여 드려진 기도는 응답함을 받는다는 특별한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대하 6:21).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모형과 흡사하였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기도 가운데서 그 길을 보았으며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 어떠한 집이나 장소가 기도의 집이 되거나 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종교적인 모임의 지정된 장소가 "기도처"(행 16:13)로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2) 그는 성경적인 반증을 들어 그들이 어떻게 성전을 기만하였는가와 그 의도를 왜곡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7장 11절 말씀, 즉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에서 인용된 것이다. 거짓된 경건이 불의의 옷과 덮개가 되어질 때 "기도하는 집"은 그들이 숨거나 피난하는 "강도의 굴혈"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정은 확실히 그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가장 나쁜 강도들이었기 때문이다(말 3:8). 제사장들은 제단을 의지하여 풍성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백성들에게서 돈을 짜낼 수단과 방법을 궁리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여기에서 "강도"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을 부당하게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Ⅱ. 성전에서 "그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14절). 그는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으신 후에 소경과 저는 자들을 그리고 초대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베고픈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지만 부한 자들은 거저 돌려보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말씀으로 전파하셨으며 또한 그들이 드린 기도에 응답하여 영적으로 소경되고 절름발이가 된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으로 오신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가 성전을 모독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심으로써 그의 성전의 명예를 위해 열심을 보여 주신 것 같이 그를 겸손하게 찾는 자들에게는 긍휼을 보여 주고계시다. "소경과 저는 자들"은 다윗의 궁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삼하 5:8)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도록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성전의 존귀와 명예는 왕궁의 웅장함이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것들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경과 저는 자들은 그들에게서 떨어져 있어야만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사악한 자들과 모독하는 자들이 이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성전은 그것이 시장으로 화하게 될 때 욕되고 나쁜 것이 되지만, 그것이 병원으로 되어질 때 은혜스럽고 영예스러운 것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거기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더욱 영예스럽고 합당한 일이 된다. 그리스도의 병고치심은 "이는 누구뇨?"라는 질문에 대한 참된 대답이었다. 그의 사역은 "호산나"보다 오히려 더욱 그에 대하여 잘 입증해 주었다. 그가 성전에서 병고치신 것은 "나중 집의 영광이 처음 집의 영광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한 것이었다.
역시 그는 거기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를 따르며 환호하는 무리에 대하여 분을 내며 방해한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셨다(15, 6절). 그를 영화롭게 하는 데 맨 앞장을 섰던 자들은 그의 최악의 원수가 되었다.
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들이 참된 이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또한 사도행전 4장 16절과 5장 33절에 있는 것처럼 그들에 대하여 크게 노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만일 그들이 지각을 가졌었다면 그러한 이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만일 그들이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에 대한 긍휼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반대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를 시기하였으며 또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2. 그들은 공공연하게 어린이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에 불평을 토로하였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호산나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그에 합당치 않은 영광이 주어졌으며 그것은 겉치레(과시)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들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을 참지 못하며, 또한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칭송이 돌려지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와 같이 사울은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노래부르는 찬양에 대하여 시기하였다. "시기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최고의 영예를 받을 때 그의 원수들은 가자 불쾌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바로 지금 그리스도께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매매하는 자들보다 더 좋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대항하여 어린아이들의 편을 들고 계신다.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1) 어린아이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놀고 있었던 것 같다. 통치자들이 성전을 "시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들이 그 곳을 놀이터로 삼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린아이들 중의 대부분이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린아이들을 때맞춰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 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 경건의 모양을 유지하도록 가르침 받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경건의 능력에로 인도하는데 더움을 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양떼 중에서 어린양들에 대하여 온유함을 가지고 계신다.
(2) 그들은 거기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찬양을 어른들에게서 배웠다. 어린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쉽게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나쁜 모범을 보여서는 안 된다. Maxima debetur puero reverentia─즉 우리가 어린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매우 신중한 배려로 지도되어야만 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서 저주하거나 맹세하거나 또는 기도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때를 맞추어 그들의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장막절에 가지를 가지고 호산나를 외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칭송을 그리스도에게 할 것을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호사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칭송은 가나안어를 배워야만 하는 어린아이들의 입에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3) 우리 주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셨으며, 또한 그 말씀을 성취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셨거나(시 8:2) 적어도 그 말씀에 적용시키셨을 것이다. 그 말씀은 즉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16절)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말씀은 다윗이 블레셋의 살육자(골리앗)를 쳐부수고 돌아 왔을 때 그를 영예롭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환호하고 여인들이 노래한 것을 어린아이들이 합세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윗의 자손이 여기에서 호산나라고 인사를 받고 있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탄, 즉 골리앗과 싸우려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는 어린 아기들의 봉사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셨으며, 그들에 대해 특별히 유의하셨다(어린 아기들에 대해 사랑을 지니셨다). 또한 그들에 대해 매우 기쁘게 여기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고작해서 희망을 걸 수 있는 어린 아기들에 의해 영광을 받을 수 있으셨다면, 하물며 성숙하게 자라나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린이들에 의해 더 많은 영광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2]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는 온전케 되었다. 어린 아기들이 그의 찬미에 합세한 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에 대한 마음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찬미는 만일 그들이 이에 한몫 끼지 않았다면 결점이 있고 불안전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때를 맞추어 선을 행하며 그 부모들에게 그렇게 되도록 가르칠 것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누구의 수고도 결코 헛된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편에 보면 이것은 "권능을 세우신다"는 말로 되어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으로써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 위대한 일들이 약하고 가망 없는 수단(도구)에 의해 행하여질 때 하나님은 이로 말미암아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 왜냐하면 그의 권능은 연약함 가운데서 완전해지며" 또한 어린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연약성은 신적인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시편에 이어지고 있는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매우 합당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지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 게 적용시키도록 내버려두셨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잠잠케 하시고 나서 그들을 떠나셨다(17절). 그는 현명하게 "그들을 떠나셨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 그를 붙잡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당연히 그들을 떠나셔야만 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 그 은혜를 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우리는 그를 우리에게서 내어쫓고 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떠나셨으며," 물러가 조용하게 유할 수 있는 "베다니로 가셨다." 베다니로 가신 그가 조용히 "잠자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용히 "기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2마일도 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가 여기까지 걸어서 오신 것은, 그가 타신 것이 다만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호산나 찬미에 의해 높이 들리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들을 잊어버리시고 곧 그의 초라하고 괴로운 여행길로 돌이키셨다.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질문 (마태복음 21:23-27)
우리 주 예수님(그 후의 바울도 그러하였다)은 그의 복음을 "많이 논쟁하시면서" 전파하셨다. 그의 처음 출현은 "그가 열두 살 되었을 때 성전에서 선생들과" 논쟁하셨을 때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죽으시기 바로 전에 여기에서 논쟁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논쟁의 사람"인 예레미야와 흡사하였다. 그는 스스로 먼저 논쟁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논쟁을 하셔야만 하였다. 그와 더불어 가장 치열하게 논쟁한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두 개의 다른 법정의 심판자들이었다. 대제사장은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교회의 법전에 앉아 관장하였다. 장로들은 세상적인 일들을 재판하는 세상 법정의 심판자들이었다. 이 둘의 개념을 살펴 보라(대하 19:5, 8, 11). 이들은 한가지로 그리스도가 누구에게든지 미움을 받고 있으며 또한 미움을 받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를 공격하는 데 합세하였다. 메시야의 왕국에 대해 가장 앞장서서 추진해야 할 교회와 국가의 통치자들이 이를 가장 반대하는 자들이 되어버리고만 그 세대는 얼마나 무섭게 타락하였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이 전파하셨을 때 그들은 그를 방해하려고 한 사실을 알 수 있다(23절). 그들은 자신들이 그의 가르치심을 받으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받는 것도 그냥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자마자 전날에 어려움을 당하기는 하셨지만 즉시 성전으로 들어가셨는데, 거기에는 대적하는 원수들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여기로 오신 것은 예루살렘이 어느 곳에서보다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장하신 채로 이 성에 오셨고 또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때문에 조반도 잡수시지 못하셨지만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아마도 "하나님의 입의 말씀," 즉 그것들을 전파하는 것을 "그의 일용한 양식보다" 더 낫게 여기는 자와 같이 성전으로 곧장 들어가신 것 같이 보인다.
Ⅱ. 성전에서 그는 가르치고 계셨다. 그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13절)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서는 그가 이 성전에서 설교하시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독자의 엄숙한 모임에 있어서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은 둘 다 함께 병행해야만 하며, 어떤 것을 침해하거나 또 다른 것을 밀어제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에게 기도함으로써 이야기해야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야만 한다. 사역자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해야"(행 6:4)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심"으로써 이사야서 2장 3절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이다. 옛날의 제사장들은 거거에서 종종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같은 선생을 모신 적이 없었다.
Ⅲ.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계셨을 때 제사장들은 그에게 다가와 그의 성직의 임명장을 제시하도록 시비를 걸었다. 그의 일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손길이 여기에 뻗쳐 있었다. 다음 사실에 유의하라. 어쩔 수 없이 논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 말미암아 분명하고 실제적인 설교로부터 다른 곳으로 화제나 주의를 돌리는 일은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근심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악에서부터 선한 것이 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 임박한 반대를 제거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다 큰 만족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적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잠잠케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자신의 지혜로 그들을 잠잠케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더불어 논쟁한 이 사실에서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1. 그는 그들의 무례한 요구에 의해 어떻게 공격을 받으셨는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과 권세를 충분히 고찰하였으므로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완고한 불신앙을 은폐하기 위해 무엇인가 말할 것을 가져야만 하였다. "당신은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개선하였고, 백성들의 호산나 찬미를 받았다. 그리고 성전을 통제하였고, 또한 성전의 지배자들에게 그곳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그들에게 세를 지불한 자들을 내어쫓았다. 당신은 여기에서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잉 릴을 하도록 누구에게 위임을 받았는가? 가이사로부터냐? 아니면 대제사장이나 하나님으로부터냐? 당신의 보증서나 신임장을 제시하라. 당신은 이러한 일에 대해 너무 무모하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사실에 유의하라. 권세를 행하도록 위임을 맡은 자들이 스스로 "누가 우리에게 이 권세를 주셨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 일에 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떠한 위로나 성공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증서를 갖지 않고 달린 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갖지 않고 달리는 자들이다(렘 23:21, 22).
그리스도는 종종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임을 말씀하셨고 또한 그것을 하등의 모순 없이 입증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도 이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 요지(point)가 완전히 분명하게 되고 결정되었던 바로 이 때에 그들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 대제사장과 장로와 같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면서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를 문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거만하게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라고 물었다. 이 말은 그가 그러한 권세들을 그들에게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22:24; 렘 70:1).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일반적으로 자신의 권세에 대해 엄격히 주장하거나 그것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 대해 자랑하거나 기뻐하는 자들은 그 권세를 함부로 낭비하는 자들이다.
(2) 그것은 그를 닻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Nihil dicit)는 죄목을 붙여 그를 재판하려 들것이다. 또는 그를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정죄 하거나, 백성들에게 그의 침묵이 그 자신이 범법자임을 무언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빗대어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라고 변명했다면, 그들은 이전과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거나 그의 변명을 걸림돌로 삼거나 또는 그를 들어 그것에 대해 모독하는 자로 고소하였을 것이다.
2. 그는 이 요구에 대해 다른 것으로 대답하셨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질문에 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24, 25). "나도 한말을 너희에게 묻겠노라." 주님은 그들이 자신에게 기습을 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시고, 오히려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이들에게 답변하고 계신다.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은" 자들은 "뱀과 같이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지혜 있는 자의 마음은 대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벧전 3:15) "온유와 두려움으로 제시해야만" 한다. 즉 진리가 손상되거나 우리 자신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현명한 신중성을 가지고 제시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질문은 요한의 세례에 관한 것으로써, 세례를 줄뿐만 아니라 전파까지 한 그의 모든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 즉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분명히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머리에서 궁리해낸 것이든지 아니면 그것을 하도록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가말리엘의 변론도 이러한 요점에 근거하여 돌려졌다(행 5:38, 39). 즉 "이 사상이 사람에게로서냐 아니면 하나님에게로서냐?" 명백히 나쁜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없고, 좋게 보이는 것이 사람에게서, 아니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에게세 나올 수도 있다. 이 질문은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술책은 아니었다.
(1) 만일 그들이 이 질문에 대답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양심을 거스리면서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로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답변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이적을 행하지 않았지만"(요 10:41) 그리스도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자신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인 것처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했다면[이 질문은 그에게 보내어 질문했던 "네가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요 1:21)에서 예상된 것이었다], 이는 그들의 요구한 것에 답변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진리는 적절한 순서대로 채택되어질 때 가장 분명한 빛 가운데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적인"(previous)질문, 즉 선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요한"(main) 질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2) 만일 그들이 이 질문에 답하기를 거부하였다면, 강한 확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완고하게 편견을 가졌던 자들에게 자신의 권세에 대하여 증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고전 3:19). 분명한 진리에 대해 확신하지 않으려는 자는 먼저는 요한에게,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에게, 결국 하나님에게 사악한 죄를 짓게 될 것이다.
3.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좌절되었으며 좌초되었다. 그들은 진리를 알았지만 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우리 주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놓았던 그물에 그들 스스로가 걸리고 말았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은 서로가 의논하였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요한의 세례에 대한 신적인 기원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즉 그 원인의 공과(merits)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기편이 유리하게 그리스도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두 가지에 대하여 궁리하고 상의하였는데, 그것은 곧 그들의 체면과 안전이었다. "자신의 일들을 추구하는"자들은 대개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는 법이다.
[1] 그들은 자신의 체면에 대해 생각을 하였는데, 그들이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스스로 위험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러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환영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악 중 가장 사악한 어리석음과 불법이다. 죄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참되고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을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 자는 수치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무시하고 반대하는 것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회피한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말았으며, 변명할 여지없이 버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였는데, 만일 그들이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로서라고 말한다면 백성들의 분노에 자신의 몸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도다." 아마도 그 때에,
첫째, 백성들은 요한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진지했던 것처럼 보여진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들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보다 자유스럽고 신실했던 것 같다. 이 백성들, 즉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의 교만하게 "그들은 율법도 알지 못하며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말한 그들은 복음을 알았고 또한 축복을 받았던 것 같이 보인다.
둘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일반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서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일들이 그들 가운데서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고 또한 서로 간의 질투가 극도에 달하였다는 증거이다. 그 통치는 미워하는 자들에게 밉살스러움을 받았으며 또한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나도 너희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말 2:8, 9)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고결성을 지키고 자신들이 의무를 행하였다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백성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백성들이 두려워한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았던 이유가 된다(요 9:22; 12:42).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두려워하게 만들려고만 애쓰는 자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셋째, 일반 백성들은 통상적으로 그들이 성스럽고 신성하게 여기는 것을 존귀케 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다면," "그의 세례가 사람에게로서라"는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거룩한 것들에 관한 것이었다.
넷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진리에 대해 공공연하게 부인하는 것, 심지어 자기 마음의 확신까지도 회피하려고 했으니,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선한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잠 29:25)하는 것처럼, 종종 악한 자들이 "지나치게 악하게 되는 것"을 방지해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간 전에 죽지 않도록"해 준다(전 7:17). 많은 악인들은 그들이 하려고 작정한다면 본래의 그 자신들보다 더 나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우리 주님에게 어떻게 대답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그 질문을 그만 두었는가? 그들은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on,k ovivdamen ─즉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또한 그들의 직책상 이러한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답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수치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고백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무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할 것은, 그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한 것은 실상 거짓말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거짓말에 대해 "부끄러워" 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이해, 자신들의 감정이나 의도 또는 사물에 대해 기억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에 관하여 그릇된 것인 줄 알면서도 이들을 서슴치 않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이런 일들에 관하여 그들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들이 쳐놓은 함정을 피하셨으며, 또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셨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만일 그들이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비록 그것이 위대한 임무인 회개를 강요하고 또한 위대한 약속인 임박한 하늘나라를 확인시키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이라는 사실을 믿거나 고백하지 않을 만큼 사악하고 비열하였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해 논란을 하는 것은 적합한 일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무지한 자는 무지한 채로 내버려" 두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불의하게(진리를 고백하지 않거나 또는 그것들을 따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폐쇄시키는 자들은 당연히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거부를 당한다는 사실이다(롬 1:18, 19). 묻어버린 달란트를 꺼내어라. 보지 않으려고(will)하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shall) 될 것이다.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마태복음 21:28-3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보다 쉽게 교훈하기 위하여 비유로 가르치셨으며, 또한 이와 같이 대적하는 자들을 보다 완벽하게 반증하시기 위하여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깨닫게 하셨는데, 이를 위하여 사람들을 등장시키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와 같이 나단 선지자도 비유를 사용하여 다윗을 깨닫게 하였고(삼하 12:1), 또한 드고아의 여인이 그와 같이 하여 다윗을 놀라게 하였다(삼하 14:2). 책망하는 비유가 대적하는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의 입으로 심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의도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인데, 첫 번째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28절)
이 구절에는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두 아들"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유의 목적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이것을 알고 인정한 세리나 창기에 의해서까지 창피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두 종류의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 그 자체. 맏아들(역주:한글개역 성경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음)은 자신이 약속한 것보다 더 낫게 실행한 사람으로 표현되었고, 둘째 아들은 실행한 것보다는 약속한 것이 더 나은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1. 그들은 동일하면서 오직 하나인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그에게서 은혜를 받았으며 또한 똑같이 그에게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모두 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냐?"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격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2. 그들은 동일한 명령을 받았다. 즉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고.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게으르게 길러서는 안 된다. 젊은이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즐겁고 그러면서도 귀찮은 것은 없다(애 3:27). 하나님께서는 비록 상속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자녀들을 일하러 보내신다. 이 명령은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가 종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종교적인 일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인데, 이는 믿을 수 있고 유익하며 즐거운 일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황무지에서 일하도록 내쫓김을 당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들의 목초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2) 복음은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고 있으며,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얘, 오늘 가서 일하라." "오늘"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은 게으름을 피우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에게 낮이 주어진 것은 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일찍이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어떤 일을 하기로 작정하였었다면 왜 지금 하지 않는가? 왜 오늘 하지 않았는가?
(3)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권고는 마치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이 말씀되어지고 있다(히 12:5). "얘 가서 일하라." 그것은 권위와 애정을 가진 아버지, 즉 자기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는 아버지의 명령이며 또한 그들의 체질을 알고 과도하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아버지, 즉 "자기를 섬기는 아들"(말 3:17)을 잘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명령이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한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해야만 한다.
3. 그들의 행위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1) 그 아들 중의 하나는 그가 말한 것보다 더 낫게 행동하였으며, 그가 약속한 것보다 더 낫게 실행하였다. 그의 대답은 나빴지만 그의 행동은 좋았다.
[1] 여기에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했던 퉁명스러운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단조롭고 솔직하게 "싫소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싫소이다"라고 말한 것은 실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우리나온 거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아버지의 이러한 명령에 "싫소이다"라고 대답하다니! 굽히지 않으려는 자들은 정녕코 부끄러워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일말의 겸손을 가지고 있었던들 차마 "싫소이다"(렘 2:25)라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명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노골적인 거부는 더욱 나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만한 거부가 종종 복음의 부르심을 얻게 할 수도 있다.
첫째,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안락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물 속에 사는 악어와 같이(시 104:26) 세상에 살며 그 속에서 놀려고 한다.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들판에 너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직무를 사랑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감각의 즐거움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의 직업 때문에 그들이 세상으로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그 큰 일들을 행하지 않으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온 종일을 빈둥거리며 노는 것이다."
[2] 여기에 다시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마음과 길을 바꾼 행복한 변화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처음에는 사악하고 악의적이며 장래성이 없는 사람이 후에 뉘우치고 고쳐 정신을 차리게 될 때가 많이 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어떤 사람이 잠시 동안 함부로 날뛰며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고전 6:11). 이러한 것들을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고"있다(딤전 1:16). "그는 후에 뉘우쳤다." 회개는 metanoi,a─즉 때늦은 지혜(an after-wit)이다. 또한 metamelei,a) ─즉 병 치료후의 몸조리(an after-care)이다. 나중이 오히려 더 좋은 회개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회개하였을 때 즉시로 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전에 항거하던 것에 대해 회개한 오직 유일의 증거는 즉시로 순응하고 일하러 나가는 것이다. 바로 그때에 지나간 것은 사함을 받게 되며 모든 것은 잘 되어질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친절하신가를 살펴 보라. 그는 당연히 우리들이 그의 명령을 거부해버린 무례함에 대하여 분을 내셔야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있다. 아버지 면전에서 자기는 그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 자는 마땅히 문 밖으로 내쫓김을 당하고 또한 상속권을 박탈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기다리시며" 또한 우리가 전에 저지른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회개하여 고치기만 한다면 우리를 호의적으로 영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는 이러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계약 아래에 놓여 있다.
(2) 다른 아들은 그가 행한 것보다 더 잘 말했으며, 그가 실천한 것보다는 오히려 더 잘 약속하였다. 그의 대답은 좋았지만, 그의 행동은 나빴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같이 말하였다"(30절). 복음적인 부르심은 비록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며 또한 대등한 목적을 가지고 수행한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명령과 계약과 격려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어떤 사람에게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향기가 된다.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다른 아들은 얼마나 명백하게 약속하였는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어르신님"(sir, 역주:개역 성경에는 아버지로 되어 있음)이라는 존칭을 붙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녀가 그 부모님께 존경하여 말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가겠소이다"라고 순종할 채비가 다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내가 점차적으로 가려고 합니다"가 아니라 "아버지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나 지금 곧 가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답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또한 그의 말씀의 명령에 대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오도록 해야만 한다(렘 3:22; 시 28:8 을 보라).
[2] 그는 이렇게 이것을 실천하지 아니했는가? "그는 가지 않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많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종교적으로 분명한 약속들을 하며 그 당시에는 몇 가지 좋은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 그냥 머물러 버리고 말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헛일만 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말한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경우는 특별히 바리새인에게 해당된다(마 23:3).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많이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졌지만 때로는 매우 힘든 것을 행해야만 하며 때로는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을 떠나야만 할 때도 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목적 은거의 예상 밖의 것이 될 때가 있다. 새로 돋아나는 싹이나 또는 꽃은 열매가 아니다.
Ⅱ. 이 비유에 대한 평범한 호소.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31절) 그들은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하나는 무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릇된 것이었다. 부모들은 때로 그들의 자녀들의 기질에 따라 이러한 다양한 실천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어느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를 알 수 있는 많은 지식과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둘 중에서 누가 더 낫고 덜 잘못했는가? 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결정되었다. 첫째 아들이 바로 그 사람이다(역주:개역 성경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의 행동이 그의 말보다 더 나았으며 그의 나중 결과가 처음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인간의 상식으로부터 배웠다. 즉 사람이란 자신의 말에 거짓된 자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말에 앞서 실천하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에 대하여 제시하신 규칙에 근거하여 이 사실을 배웠는데(겔 18:21-24), 그것은 곧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난다면," 그는 사함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한다면" 그는 거절당하게 될 것이다. 모든 성경의 취지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즉 비록 그 뜻을 거역했을 지라도 회개하고 더 나은 행동을 하는 자가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Ⅲ. 특별히 이 사실을 가까이 있는 일에 적용하심(31, 32절). 이 비유의 원래적인 목적은, 메시야를 크게 기대하였고 그의 분량에 충분히 이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세례요한을 업신여기고 또한 그의 사명의 목적들에 대하여 반대하였지만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해 결코 이야기된 것이 없는 세리들과 창기들은 어떻게 그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교훈을 환영하였으며, 그 훈련에 복종하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즉 이방인은 "종종 불순종하였으며 맏아들과 같이 오랫동안 불순종의 자녀였다"(딛 3:3, 4). 그러나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믿음에 대해 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여, 가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약속했던 유대인들(출 24:7; 수 24:24)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에게 아첨하였다(시 78:36).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에 대해 적용하신 사실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는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로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만일 너희가 단정하여 말할 수 없더라도 추론해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1) 그의 사역의 목적에 의해. "요한의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요한이 그의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시험의 법칙, 즉 "그들의 열매, 즉 그들이 교훈의 열매, 그들의 행위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의 방법(또는 길)을 살펴보아라. 그리하면 그들의 기원과 그들의 경향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의의 도로" 왔다는 사실은 명백하였다. 세례요한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과 의의 일을 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대화에 있어서 엄격과 진지함 그리고 세상을 멸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에서 큰 본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이 세례에 순종하신 것은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이와 같이 의의 도로 왔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그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겠는가?
(2) 그의 사역의 성공에 의해.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그는 가장 나쁜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선을 행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의 표를 가지고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고 있다(고전 9:2). 만일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보내지 않으셨다면 자신의 수고에 대하여 이러한 놀라운 성공의 면류관을 쓰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영혼을 회개케 하는데 도구로 사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리와 창기들이 그의 설교를 믿었다고 한다면 이는 정녕 하나님의 팔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소득은 사역자들의 최고 기념품이다.
2. 그는 요한의 세례에 대한 그들의 멸시에 대해 어떻게 책망하고 있는가?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이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불신앙과 패역을 더욱 악화시켰던 세리들과 창녀들의 신앙과 회개 그리고 순종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가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 보여 주신 대로 모자란 듯하게 보이는 자가 회개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과 같이 여기에서 모자란 듯하게 보이는 자들이 회개하였다.
(1) 세리들과 창녀들은 이 비유에서 맏아들과 같았는데, 그들에게서는 종교적으로 아무 것도 기대될 수 없었다. 그들은 선한 것에 대해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아는 자들도 그들과 더불어 아무런 선한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사악하였으며, 그들의 대화는 난잡하고 퇴폐 했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던 세례요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었다. 누가복음 7장 29절을 보라.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휘트비 박사가 생각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은 계열에 두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창기나 또는 창기에게서 태어난 자들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요 8:41).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참으로 일반적인 유대국가는 말만 하게 하였던 둘째 아들(역주:개역 성경에는 맏아들)과 같았다. 그들은 특별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정작 메시야의 왕국이 요한의 세례에 의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것을 업신여겼고 등을 돌려댔으며, 아니 "그들에 대항하여 발꿈치를 들어올렸던 것이다. 위선자는 악한 죄인들보다도 죄를 깨닫거나 회개하기가 더 어렵다. 사탄은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그것으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
[1] 요한은 탁월한 사람으로서 "의의 도"로 그들에게 왔다는 사실이 그들의 불신앙을 더욱 짙게 하였다. 수단이 좋으면 좋을수록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가치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2] 그들이 세리들과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을 보고도 그 후에 회개하고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신앙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거룩한 경쟁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아니하였다(롬 11:14). 세리들과 창기들은 은혜와 영광을 가지고 달아나 버릴(go away with) 것인가? 그러면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우리보다 더 거룩하고 행복하게 될 것인가? 그들은 동생 야곱의 본을 따라 그가 행하였던 것보다는 다른 조처를 취하려고 했던 에서의 재치와 매력도 가지지 못하였다(창 28:6). 지도자로 자처했던 이 거만한 제사장들은 그것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리들을 따라가는 것을 업신여기고 말았다. 그들은 거만한 얼굴 때문에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찾지 않으려고 하였다(시 10:4).
악한 농부의 비유 (마태복음 21:33-46)
이 비유는 유대 국가의 죄와 파멸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여기에 나와 있는 농부이다. 그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말해지고 있는 것은 보이는 지상 교회의 특권을 즐기는 자들로 하여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할 것을 경고하기 위하여 말해지고 있다.
Ⅰ. 우리는 여기에서 농부에게 포도원을 맡기는 것으로써 표현된 유대교회의 특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위대한 주인이신 하나님에 의해(by), 하나님으로부터(from), 하나님 아래에(under), 고용된 소작인들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어떻게 이 세상에 교회를 설립하였는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여기에서 포도원과 비교되고 있으며, 이 포도원은 흑자의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경영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1) 그는 이 포도원을 심으셨다. 교회는 "여호와께서 심으신 것"(사 61:3)이다. 교회의 형성은 포도원이 심겨지는 것 같다 독자적인 일로서, 많은 비용과 배려를 요구한다. 그것은 "주의 오른손이 심은"(시 80:15) "극상품 포도나무"(사 5:2)와 "귀한 포도나무"(렘 2:21)로 심은 "포도원"이다. 땅 그 자체는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심기어져야만 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닌 정해진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
(2) 그는 포도원을 산울로 둘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에 두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산울은 욥이 두른 것과 같았으며(욥 1:10), 불로 된 담벽(슥 2:5)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그의 특별한 배려를 받으며 또한 언제나 받게 될 것이다. 할례의 언약과 의식적인 율법은 유대교회에 쳐진 울타리이며 칸막이 벽이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헐리워졌다. 그리스도는 아직도 복음의 명령과 훈련을 그의 교회의 울타리로 정하셨다. 그는 밖에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포도원을 황무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안에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날뛰도록 포도원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이 거룩한 산을 울타리 두르도록 배려하실 것이다.
(3) "그는 거기에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지었다." 번제단은 즙 짜는 구유로써, 모든 번제물이 여기에 드려졌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규칙을 정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적절히 보살피고 그 열매맺는 것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형편이 좋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2. 그는 어떻게 이 가시적인(visibel) 교회의 특권을 유대인의 국가와 백성들에게, 특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위탁하셨는가? 그는 그들을 농부로 임명하여 이 포도원을 맡겼다. 그것은 소작인을 거느린 땅 주인으로서의 그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유대에 하나님이 알려지고 그의 이름이 위대하게 되었을 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며 그의 이름과 칭의가 되게 하려고"(렘 13:11) 했을 때, 그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셨을 때"(시 147:19), "생명과 평강의 언약"(말 2:4, 5)이 레위와 더불어 맺어졌을 때 이 포도원은 임대가 되었다. 임대 계약의 내용을 보라(아 8:11, 12). 포도원의 주인은 "은 일천"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사 7:13 과 비교하라). 주요한 이득은 그의 것이었고, 관리자는 이백을 가지기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적당하고 충분한 장려금이다. 그 후 그는 "타국에 갔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시내산에 유대인교회를 세우신 후 그는 얼마간(in a manner) 물러나셨다. 그들은 더 이상 이러한 현상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말로 기록되어 남겨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모세가 없어진 것으로 상상했듯이 그들은 그가 먼 타국으로 가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때로부터 사악한 나날을 보냈다.
Ⅱ. 하나님께서 이 농부들로부터 세를 받기를 기대하심(34절). 그것은 당연한 기대였다. "포도원을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 즉 사역자들과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은 이에 준한 열매를 찾으신다는 사실이다.
1. 그는 서둘러서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이 포도원에 대해 비용을 많이 들였지만, 미리 세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세례요한이 "하늘 나라가 가까웠다"라 말한 것과 같이 "실과 때가 가까이 이를 때"까지 보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기 위하여 은혜로 기다리신다.
2. 그이 기대는 높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만일 그들이 체불한다면 그 모든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도록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궁들을 그들에게" 보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의무와 세를 바치는 날을 기억하게 하고 또한 그들이 추수하는 것을 거들고 그것을 되돌려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유대백성들에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파송되었다.
3. 그의 기대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실과를 받는 것이었다." 그가 요구한 것은 그들이 만들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었으며, 다만 그 자신이 심은 것에서 딴 약간의 열매였다. 즉 이 열매는 그가 그들에게 부여한 율법과 규례를 준수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적합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은 열매 없는 텅빈 포도나무였다. 아니, 그것은 타락한 이상한 포도나무가 되어 야생의 포도열매를 맺었다.
Ⅲ. 그 농부들은 그들에게 파송된 심부름꾼을 무참히 죽였다.
1. 그가 그들에게 자기의 종들을 보내었을 때, 그 종들은 주인을 대리하였고 또한 그의 이름으로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 종들을 무참히 죽여버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로 부르거나 비난하는 것은 그것들이 호의를 얻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욱 분노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신실한 종에게 돌아갈 다소간의 몫(lot)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고난받은 것이다. "그들 선지자들은 매우 핍박을 받았는데," 잔인한 증오자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때리 고 이사야를 죽였으며,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에서 돌로 쳤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자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한다면 하물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라고 권고하는 자들이랴!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학대하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옛적에 다투신 것이다(대하 36:16).
(2)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은 그들의 주인의 소작인들에게서 고난을 받게 되어있다(역주:그것이 그들의 몫이다). 이와 같이 그들을 취급한 농부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는데,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께 대하여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의 선지자를 가장 비참하게 박해한 원수들이었으며, 그들은 내어 던지고 죽였으며,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지어다"(사 66:5)라고 말하였다. 예레미야 20장 1, 2절, 26장 11절을 보라.
[1]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들에 대하여 선하심으로 참으셨는가? 그는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었다. 첫 번째 보낸 종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지만 주인은 두 번째로 종들을 또다시 보내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그들에게 보내셨지만, 그들은 그를 목베어 죽여버렸다. 하나님은 또다시 그의 제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의 길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오 하나님의 인내와 참으심의 부요함이여,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멸시를 받고 박해받는 사역을 멈추지 아니하시는도다!
[2] 그들은 어떻게 그들의 사악한 행동을 계속하였는가?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하나의 죄는 동일한 다른 죄에 대한 통로를 만들어 준다. 성도의 피에 취한 자들은 더욱 더 목말라 하면서 여전히 "피를 달라, 피를 달라"고 외친다.
2. 마침내 그는 자기의 아들을 보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들을 보내시는 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들을 죽이는 데서 나타난 농부들의 사악함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나중의 예에서 농부들은 그 도를 넘고 있다.
(1) "아들을 보내는 것"보다 더 은혜스러운 은혜가 나타난 일이 없다. 이것은 맨 "나중에" 행해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지막에 보내어졌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그들에게 효력을 주지 못하였다면 이 일 밖에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마지막 수단"(ratio ultima)으로 보류되었다.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를 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땅에 왔을 때는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기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실하고 순종을 하는 능력 있고 효과적인 원리가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아들을 존경만 한다고 할지라도 그 점은 얻은 셈이 된다.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종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위하여 그에게 심판권이 위임되어 있다. 모세의 율법을 경시하는 것보다 그를 거절하는 것이 더 위험스러운 일이다.
(2) 그 아들을 죽인 것보다 더 사악한 죄가 나타난 일이 결코 없다. 이 죄는 이, 삼 일 안에 행하여졌다.
[1] 이 죄는 어떻게 계획되었는가(38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즉 백성들이 메시야로 인정하고 따른 그가 온 것을 보고, 세금을 받거나 또는 압류할 수 있는 그가 온 것을 보고, 이것은 그들의 등본 보유권(cap hold)을 자극시켰으며, 따라서 그들은 담대하게 그를 밀어내고 유일한 장해물이며 경쟁자인 "그를" 길 밖으로 몰아냄으로써 자신들의 부귀와 위엄을 유지하려고 결심하였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이 세상의 군주인 빌라도 와 헤롯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2:8).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사람이 상속자"이며, 적어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 그를 죽이자"고 하였다. 가진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며 두려워한 주요한 이유는 백성들 가운데서의 그의 인기와 호산나 찬미 소리였는데 만일 그가 이를 떼어버리면 그들은 이를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가 백성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죽어야만 하다고 주장하였다(요 11:50). 그러나 실제로 그는 죽어야만 했으니, 이는 메시야의 기대되는 나라가 위선과 폭력을 수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을 혁명적인 기대에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 밖으로 내어쫓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죽이자." 그 토지는 물론 점유자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이 예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교회에서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으며, 어떠한 유권들도 부과할 수 있으며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복종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자"를 "대적하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자"가 그들이 "활을 당기는 것을 보고 비웃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생각하고 그의 유업을 빼앗으려고 하는 동안 그는 십자가를 지고 산꼭대기에까지 걸어 가셨다. 그들은 천장으로 깨뜨려졌고 그들의 유업을 빼앗겼다(시 2:2, 6, 9).
[2] 이 음모는 어떻게 실행되었는가?(39절) 그들이 자신들의 위엄과 세력을 확고히 할 목적으로 그를 죽이려고 하며 또한 그가 사탄을 정복하고 그의 택한 자들을 구원하려고 할 때에, 그의 때가 이르매 그들이 즉시로 그를 잡아죽이려고 할지라도 결코 놀라지 말라. 로마의 권력이 그를 정죄하기는 했지만, 그를 잡아죽인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박해자들뿐만 아니라 주요한 앞잡이들이었으며, "더 큰 죄"를 지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못 박아 죽였도다"(행 2:23). 아니, 그들은 그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자로 여겼으므로 "포도원,"즉 자신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교회로부터 "내어쫓았으며" 또한 거룩한 성으로부터 내어쫓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문 밖에서"(히 13:12)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치와 비난임과 동시에 가장 위대한 영광이었다. 이와 같이 종들을 박해한 자들은 아들을 박해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대하듯이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를 이와 같이 대하려고 하였다
Ⅳ. 여기에는 그들 자신들의 입으로 말한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40,41절). 그는 그들에게 직접 이것을 묻고 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이것을 그들에게 직접 물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인데, 즉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하는데 대하여 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함으로써" 더욱 더 변명할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것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에 죄인들은 다만 자신들을 공평하게 다루도록 간구 할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할 때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 그들은 쉽게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해야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타인의 죄에 대한 비참한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자신들의 죄에 대한 결과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1. 우리 주님은 그의 질문에서 "포도원 주인이 올 것"과 그들과 더불어 청산하실 것을 예상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그 모든 재산은 그의 것이며 지금 그 기업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실 것이다. 포도원의 주인은 장차 오실 것이다. 박해자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그는 "더디 오시며," "보지 않으며,"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오랫동안 그들과 더불어 참으시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며, 심판자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라 오시면 겉으로만 신앙을 고백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 잔인한 박해자들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들은 문책을 당해야만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전성기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날이 이르고 있음을 알고 계시다."
2.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에서 그것이 무서운 보복임을 예상하고 있다. 범죄는 그와 같이 매우 어둡게 나타나지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1) 그는 "악한 자들을 진멸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될" 파멸이다.
kako,j kakw/j avpole,sei-Malos male perdet(역주:사악한 자는 사악하게 멸망한다). 사악한 일을 하지 말라. 그리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질 것이다.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 성취되었는데, 그들은 로마인에 의해 무참히 멸망하였으며 또한 이 일 후의 약 사십 년 되던 해에 성취되었다. 즉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무참한 상황들로 얼룩진 미증유의 파멸이었다. 그것은 사악한 발자취를 밟는 모든 자들에게 성취될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파멸 장소로써, 그것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보람있게 향상시키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가장 비참한 파멸 장소가 될 것이다.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외식가들과 박해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2) 그는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새로 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의 특권을 남용하는 s자들의 멸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교회를 소유하실 것임도 사실이다. 사람의 불신앙과 완고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익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남긴 찌꺼기가 이방인들의 진수성찬이 되었다. 박해자들은 사역자들을 파멸시킬 수 있으나 교회를 파멸시킬 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들은 택한 백성"이며 또한 지혜와 거룩함은 "우리들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기들이 잘리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유지시키려고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가 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도 아니며, 또한 그가 전적으로 그들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황폐하게 되고 놀라운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망한 폐허 위에 번창하는 교회를 세우실 수가 있으시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우리나 우리의 처소나 국가에 어떤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의 위대한 이름을 위해 어떻게 할까를 망설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Ⅴ.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에게 실제로 자신들이 옳게 판단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에 대해 더 설명하시고 적용하신다.
1. 그는 이로 말미암아 성취된 성경 말씀을 언급하심으로써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42절). 즉 "너희가 성경에서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그렇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종종 이 말씀을 읽고 낭송하였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깊이 명상하지 않기 때문에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상실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가 인용하신 성경 구절은 시편 118편 22, 23절인데, 어린아이들이 호산나라고 외친 동일한 본문이다. 동일한 말씀이 확신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두려움이 된 그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찬송과 위로를 가져오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좌우에 날선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성경 말씀은 앞의 비유,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1) 건축자들이 돌을 버리는 것은 농부들이 그들에게 파송된 아들을 버리는 것과 동일하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건축자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대인의 교회를 관할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소로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았으며, 그의 교훈이나 율법들을 그 자신들의 조직 속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마치 깨어진 그릇처럼, 밟고 다니는 계단에 쓰이는 돌처럼 따로 제쳐놓았다.
(2) 이 돌을 모퉁이 돌로 끌어올린 것은 "다른 농부들에게 새로 준 것"과 동일하다. 유대인들에 의해 버림받았던 자는 이방인들에 의해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할레자나 무할레자에게 차별이 없는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시다." 복음적인 교회에 대한 그의 권세, 그것에 대한 영향력, 머리가 되시어 교회를 지배하심. 모퉁이 돌로서 교회를 연합하심 등은 그의 승귀(昇貴)의 위대한 표식이시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록 그들이 자신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했을지라도 "위대한 자와 분깃을 나누셨으며" 또한 "그의 나라"를 받으셨던 것이다.
(3) 하나님의 손길로 이 모든 것 안에 있었다.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비록 유대인의 건축자들에 의해 버림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적인 섭리와 예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허락하셨고 관장하셨다. 더욱이 그가 모퉁이 돌로 끌어올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이 이를 수행하셨다. "그는 높이시고," 또한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의 눈에 기이한 것이다." 그를 버린 유대인들의 사악함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그들 자신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서 29장 9, 10, 14절을 보라. 그는 비록 자기 백성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였지만, 이방인들에 의해 놀라운 영광을 받으셨다. 멸시받고 미움받던 자가 왕들에 의해 찬미를 받아야만 한다(사 49:7). 그러나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2.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적용하고 계시는데, 적용이야말로 설교의 생명이다.
(1) 그는 그들이 인정했던 선고를 적용하고 계시며(41절), 이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농부들의 처참한 멸망에 관한 앞부분이 아니라(그는 차마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으셨다),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준" 후반부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어둡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방인들에게는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살펴보자.
[1] 유대인들은 교회원의 특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게 될 것이다." 농부들을 이와 같이 내어쫓는 것은 그 포도원을 걷어버리고 황무지로 만들게 되는 것과 같다(사 5:5). 유대인들에게는 오랫동안 "양자됨과 양"(롬 9:4)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롬 3:2)이 맡겨졌으며 또한 계시 종교의 성스러운 신뢰와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시 76:1, 2)이 위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사용함에 있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선을 가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든 권리들을 박탈당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 모든 것들이 몰수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특권을 이용하여 범죄한 자들(계 2:4, 5)에게서 그것들을 박탈해버리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서 빼앗김을 받았으니, 이는 그들에게 떨어진 일시적인 심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해있는 영적인 심판과, 또한 마음의 우맹과 마음의 강퍅과 복음에 대한 멸시에 의해서였다(롬 11:8-10; 살전 2:15).
[2] 이방인들은 취함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서 교회를 가지실 것인가의 여부를 우리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으시다. 비록 그의 포도나무가 어떤 곳에서 뽑혀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심을 다른 장소를 물색하실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과를 맺을 수 있는" e;qnei ─즉 이방 세계에 주실 것이다. 택한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이, 긍휼을 입지 못했던 자들이 하늘의 은총을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많은 영향을 받았고(롬 11:30, 33) 유대인들이 많이 대적을 했던(행 22:21, 22) 신비(mystery)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처음 심기워졌을 때 "이방인들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부요함이 되었다"(시 135:10, 11).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제거되었을 때 그들의 멸망은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었다(롬 11:12).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복음의 열매를 맺을 자를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매맺는 것은 그 자신이 손수 하시는 모든 사역이며 "그에게 알려지는 모든 것이 그의 사역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맺었던 것보다 더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교회에서보다는 신약 교회에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바꾸실 때 그것은 그의 손해물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자신이 인용하신 성경 말씀(42절)을 그들의 공포심에 적용시키고 있다(공포심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44절). "건축자들이 버린" 이 "돌'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에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종류의 백성들의 운명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 떨어지도록 하신 것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고 있다.
[1] 어떤 사람은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비천의 신분에 계셨을 때에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고 있다. 이 돌이 건축자들이 던져버린 땅 위에 놓여 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함과 부주의로 말미암아 이것에 걸려 넘어졌으며, 따라서 "그들은 깨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저지른 범죄가 그를 상하게도 하지 못할 것이며, 더욱이 넘어진 자가 넘어지게 한 돌을 깨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 돌이 그들 자신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넘어지고 깨어지게 될 것이며, 덫에 걸리게 될 것이다(사 8:14; 벧전 2:7, 8). 죄인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은 악의를 품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이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는 승귀의 신분에 있을 때의 그를 무시해버리고 만다. 이 돌이 그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소서"라고 외치며 도전했던 것처럼 그 돌을 자신들의 머리 위로 끌어 당겼기 때문이며, "그 돌은 저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전자는 아마도 모든 불신앙자들의 죄와 파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송곳을 발로 차며" 그것을 계속하는 박해자들에게 있어서 큰 죄이며 처참한 파멸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것을 전복시키려하거나 그것을 그 장소에서 들어내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게 무거운 돌이 될 것이다(슥 12:3).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쪼개어진 이 돌은 모든 반대 세력을 산산조각으로 깨어버릴 것이다(단 2; 34, 35). 어떤 사람은 이 표현이 유대인들 가운데 돌로 쳐죽이는 방법을 암시한 것이라고 한다. 악인은 높은 장소에서부터 그들을 크게 상하게 할 큰 돌 위에로 난폭하게 던지움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을 박살내게 될 또 다른 큰 돌 위에로 내던져졌다. 여러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대적하여 싸운 모든 자들을 완전히 파괴시키실 것이다. 만일 그들이 완고한 마음 때문에 이 돌 위에 떨어져 파괴도지 않는다면 이 돌이 그들 위에 떨어져 그들을 파괴해버릴 것이다. 그는 "열광을 쳐서 파하실 것이며," "시체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다"(시 110:5, 6). 하나님께 대하여 강퍅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 번창해진 일은 결코 없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그의 비유를 들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았다."(45절).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말한 것에서(41절) 그들 자신들의 운명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범죄한 양심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종종 사역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역주:나단이 다윗에게 한 말)고 말하는 수고를 덜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즉 단지 이름만을 바꾼 것일 뿐, 그 이야기는 당신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있으며 또한 생각을 분별하고 마음을 의도하기 때문에 사악한 사람이(만일 양심이 완전히 화인맞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깨닫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2. "그들은 그를 잡고자 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책망하는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것이 자신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만일 그 말씀이 그들에게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며 그것은 확실히 그들을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와 같이 죄책과 통회함으로 마음이 찔리지 못한다면, 그들은 사도행전 5장 33절에서와 같이 분노와 성냄으로 마음에 사무치게 될 것이다.
3. 그들이 그를 과감히 붙잡지 못한 것은 "무죄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는데. 무리들은 그를 비록 메시야는 아닐 망정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요한에 대해 나쁘게 말할 수 없었으며(27절),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악행을 할 수 없었다. 마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는 소리를 질러 그를 찬송하게 만드신 것처럼 남아있는 분노를 억제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시 76:10).
첫댓글 지난달 공과금을 못내고 있습니다 통신료와 공과금으로 30만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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