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주식시장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안 정세를 반영하듯 지난 한주 약세를 면치 못했다. 10일부터 잇따라 이어진 미-러, 러-나토, 러-러시아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협상은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는커녕 대결구도를 더욱 고착화한 게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이같은 분위기는 투자심리에 영향을 미치면서 모스크바 거래소는 14일 2% 이상 떨어졌고, 지난 한주간 4% 안팎의 하락세를 보였다. 이로써 모스크바 거래소의 달러화 표시 RTS 지수는 지난해 5월 이후 처음으로 1500포인트 아래로 떨어졌다.
모스크바 거래소 RTS 지수, 지난해 5월 이후 처음으로 1500포인트 아래로/얀덱스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모스크바 거래소의 RTS는 이날 전날 대비 2.05% 하락한 1485.86포인트를 기록했다. 루블화 지수도 2.12% 하락한 3596.98포인트로 마감하면서 3600포인트 선을 내줬다. 주 초반, 서방 측과의 안보협상이 성사되면서 부풀어올랐던 기대감이 한꺼번에 꺼지면서 루블화 지수는 지난 한주 4.16%, RTS는 3.84% 하락했다. 루블화 환율도 달러당 76.39 루블, 유로당 87.23 루블로 올랐다(가치 하락).
프롬스뱌즈방크(뱅크)의 투자전략가 알렉세이 골로비노프는 외국 투자자들이 이날 러시아의 온·오프라인 금융 대표 주식인 스베르방크와 TCS그룹을 내던지면서 시장 상황이 나빠졌다고 분석했다. 골로비노프는 "오늘 아침 발표된 스베르방크의 재무(실적)보고서는 시장에 호재였으나, 지정학적 악재를 넘어서지 못했다"며 "일련의 협상이 끝난 뒤 나온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의 발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TCS그룹은 디지털 뱅킹 '틴코프'(Тинькофф)를 중심으로 한 핀테크 금융그룹으로, 이날 7.06%나 하락했다.
모스크바 거래소 RTS 지수 변화 추이, 오른쪽은 최근 열흘치 주가등락
러시아 증시의 하락은 지정학적 요인 외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인상 가능성과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 등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미 연준이 40년래 고점을 찍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조기에 긴축할(금리인상) 가능성을 시사하자, 글로벌 투자자들은 러시아 증시의 위험 자산에서 손을 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라브로프 장관의 발언은 정례 연초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서방측과의 안보 협상에 관한 질문이 쏟아지자 "러시아는 미국과 나토로부터 러시아의 안전보장 제안에 대한 답을 문서로 기다리고 있으며, 모든 사태 전개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러시아의 인내가 한계에 다달았다"며 "우리는 (협상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제안에 대한 (서방측의) 구체적인 답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러시아 인내는 서방의 움직임에 한계에 도달했다/얀덱스 캡처
그는 협상 결렬에 따른 서방의 강력한 대러 제재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경제 분야를 포함한 어떠한 상황의 전개에도 대응할 준비돼 있다"며 "우리의 제안이 거부당하면, 우리는 상황을 평가한 뒤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대통령이 국가 안보 이익을 고려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전했다. 또 서방의 안보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가 그동안 경고해온 '군사·기술적 조치'는 "군사 장비의 배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 측에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현 조지아)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고 나토가 러시아 접경 국가들에 공격 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서방측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그러나 10일 미-러 협상(제네바)을 시작으로 러-나토(브뤼셀), 러-OSCE(빈) 간에 잇따라 협상이 열렸으나, 위기 해결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상태다.
셔먼 미 국부무 부장관(왼쪽)과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이 안보협상에 앞서 언론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현지 TV NTV캡처
현지 증시 전문가들은 러-서방측 안보협상이 장기전으로 들어갈 조짐이 보이면, 투자자들은 미 연준의 움직임, 세계중앙은행의 보고서,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의 흐름, 원자재 가격, 미국 주요 기업의 실적 등에 따라 투자전략을 조정할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