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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24. 03;00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그중
첫째는 아침 7~8시 까지 늦잠을 자는 일이요,
둘째는 술이 취했을 때 술주정을 하는 일이며,
셋째는 울고 싶을 때 엉엉 소리 내며 우는 것이요,
넷째는 지각을 하는 일이다.
오늘도 새벽 5시 정도에 일어나면 능경봉을 향한 출발시간을 맞출 수 있는데,
새벽 세시에 미리 눈을 떠 부산스럽게 준비를 한다.
산에 가는 날은 몸을 더 청결하게 씻고 칼 면도도 더 세밀하게 하며
내 나름대로 경건한 의식을 미리 치루는 거다.
대자연에 들어가기 전 준비하는 의식치고는 너무 거창한 게 아닌가.
<흰여로꽃>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칼 면도를 하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내가 평생소원이던 늦잠을 자보고, 학교·직장 및 단체 활동을 하며 머리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말고 지각이나 결석·결근을 단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군대에서는 전우들보다 한 시간 일찍 기상을 했고,
은행에선 입사부터 지점장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른 직원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는 게 고칠 수 없는 버릇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마음속으론 울고 있었지만 겉으로 울지를 못해 고모님한테
야단을 맞을 정도로 눈물이 없었고, 뇌종양 수술을 받기 전 수술실에서 마취되며
흘린 몇 방울의 눈물이 내 인생에서 흘린 눈물의 전체로 기억할 정도로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라, 이제 나이 들었으니 울고 싶을 때 엉엉 울었으면 좋겠다.
또한 아버지를 닮았는지 평생 술을 사랑하며 자주 마시는데,
취하도록 마셨어도 그 흔한 술주정 한번 제대로 못했으니 잘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젠 습관이 안 되었어도 가끔 늦잠을 자고, 지각도 하고, 술주정도 해보고,
울어보고도 싶다.
<기린초>
07;00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부터 많은 장맛비가 내린다고 예보가 되었는데 무사히 산행을 할 수
있으려나,
양평을 지나 평창에 들어서니 제법 굵은 비가 차창을 두드린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어디로인가를 향해 질주하는 차량들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출발하기 전 거울을 보며 늦잠, 술주정 등 문해피사(文海披沙)의 노인지반과
전혀 다른 내 나름대로 노인지반(老人之反)을 생각했으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구불구불 대관령 고개를 올라간다.
이 고개를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생고개를 올랐을까.
'배내고개' '출산고개' '삼신할머니 고개'를 넘어 인간세상의 첫울음을 터뜨린 나,
'보릿고개' '병역고개'를 넘고 '삶의 고생고개'를 지나 '황혼고개'에 접어들었다.
친구가 운전하는 차속에서 대관령 고개를 구비 구비 넘으며 내가 넘은 '인생고개'에
대해 잠시 상념에 젖는다.
10;03
대관령에 오르니 안개세상이다.
안개 속에 풍차가 나왔다가 지워지고 돌아가는 회전날개는 괴성을 지른다.
갑자기 쿵쿵대며 거대한 거인이 나타나니 문득 풍차를 향해 돌진했다는
돈키호테가 생각난다.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예상 강우량이 120mm가 넘는다는 비 예보 속에서 해발 1100m가 넘는 산을
오르는 거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이래서 인생은 재미있는가보다.
냉기(冷氣)가 몰려와 팔뚝에 소름이 끼치는 걸 참고 우비와 우산, 스패츠 등
우장(雨裝)을 챙긴다.
신록이 파도쳐야할 산은 안개 속으로 보였다 지워졌다 반복을 한다.
거대한 탑도 슬그머니 사라지고 짙은 안개에 기(氣)를 눌린 새들도 잠잠하다.
본래 대관령은 오솔길이었다.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란 사람이 사재를 들여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수개월에 걸쳐 넓힌 덕분에 한양과 강릉 간에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주문진으로 상륙하여,
고형산이 넓힌 대관령으로 쉽게 한양을 침범 하였기에 이에 노한 인조가 고형산의
묘를 파헤쳤으니 큰일을 하고도 부관참시(副棺斬屍)를 당한 셈이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탈출하고자 오르려는 능경봉,
마음을 쉬려고 떠난 산행 길에서 꼭 무언가 느끼고 배운 게 있어야 하는가.
영동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큰뱀무꽃'에 맺혔던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주로 마비증세를 치유하며 통증을 다스리는 약재로 청초한 미를 자랑하는
꽃에 '뱀'이 들어간 이름을 얻었으니 조금 안타깝다.
차라리 한자어인 수양매(水楊梅)라는 이름이 더 좋아 보인다.
계단 사이에 핀 개돌나물인 '바위채송화'를 밟지 않으려 피한다.
'쥐오줌풀'도 만개하였으니 여름이 절정에 도달한 건가.
이 탑을 지나 주능선으로 들어서면 에델바이스를 만날 수 있겠지.
해발고도 1,000m 가 넘는 산이라 '산솜다리(에델바이스)'를 은근히 기대해본다.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지만 지금 부는 바람은 분명 비바람이다.
초록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팔락거리고 숲은 녹색의 바다가 되어 파도를 친다.
찰나(刹那)의 봄이 사라지고 찾아온 여름,
해 그림자는커녕 숲속의 색깔은 음울(陰鬱)할 정도로 어둡고 답답하며 무겁기에
gloominess하다고 표현하는 게 좋겠다.
'글루미 선데이'는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든 전설적인 영화의
노래로 레코드로 출시된 지 8주 만에 헝가리에서만 이 노래를 들은 이들중 187명이
자살했고 원곡자도 투신자살한 노래이다.
슬프고도 음울한 노래가 풍경과 오버랩되는 산속에서 이정표를 확인한다.
10;33
능경봉이라,
산 이름에서 산(山)과 봉(峰)의 차이는 무엇일까.
군대에서 장군(將軍)과 장수(將帥)의 차이가 주는 의미와 비슷할까.
장교와 병사를 거느리고 전장(戰場)을 누빈다면 장군(將軍)이요,
전쟁을 큰 차원에서 통어(統御)한다면 장수(將帥)급 지휘관으로 불리기에
장군과 장수는 개념적으로 차이가 있는 거다.
항상 산 이름의 기준에 대해서 궁금했기에 능경봉 정상에서 그 차이를 알고자
하는데 정상을 빼곡히 둘러싼 초목과 짙은 안개로 조망이 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겠지.
산은 넓은 의미에서 산(山)의 전체를 말한다.
산의 모양에 뚜렷한 구분이 없고 능선이 물 흐르듯 펼쳐진 산에서 유난히
돋보이고 돌출된 형태를 봉(峰)이라 한다면 대충 맞을 거 같다.
이에 반해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북한산의 백운대, 설악산의 비선대,
천화대 등 돈대 대(臺)자의 이름이 붙은 산도 많다.
천왕봉, 중봉, 반야봉, 형제봉, 연화봉 등 여러 봉우리가 모여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산 이름을 만들었고,
설악산도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끝청봉, 귀떼기청봉 등 여러 봉우리를 합한
산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또한 산의 높이에 관계없이 그 산의 높은 봉우리를 봉(峰)과 대(臺)로 쓰기도
하는데, 산봉우리가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형성되고 전망이 탁 트인 암봉(巖峰)엔
대(臺)자를 붙였다.
북한산은 백운대, 만경대, 의상대, 원효대, 태고대, 소요대, 법왕대, 유선대,
곡룡대, 요초대 등 많은 대(臺)를 거느렸으며,
무등산은 입석대, 서석대를 거느렸고 속리산은 문장대를 거느린 반면,
포천의 국망봉은 다른 산에 속하지 않고 독립된 봉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오르는 능경봉은 대관령 남쪽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제왕산
(帝王山)의 모산이라는데 이름만 가지고는 유추를 할 수가 없다.
모산은 봉(峰)이고 자산(子山)인 제왕산은 산(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잠시 임도로 나왔다가 다시 숲길로 스며든다.
정상까지는 약 1.8~2km로 1시간이 걸린다는데 비가 내려도 느리게 걸어야겠다.
산속에서 느리게 걷는다는 건 삶의 여백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된 첩첩산중에서 신(神)에게 다가가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워졌던 산길이 보인다.
산길이 뚜렷하면 막막하지 않다.
늙은 까마귀가 까악 대는 소리는 좀 능글맞다.
조금 느리고 능청맞게 까악 대는 소리를 타고 산바람이 내려온다.
맞다 산에서 새소리는 길벗이라,
살아있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바로 자연의 소리다.
오름길에 거친 나의 숨소리가 들리고,
산길을 밟는 나의 발자국소리가 또각또각 들린다.
힘들여 산을 오르면서 나만의 환희를 느낀다.
오롯이 나와 숲속에 핀 야생화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이런 행복을 소확행(小確幸)이라 하던가.
10;40
'눈개승마'를 '노루오줌'으로 잠시 착각을 했으니 기억의 왜곡이 일어났다.
나도 그럴 때가 된 모양이다.
산에 오르며 나의 삶이 과연 온전(穩全)했던가 스스로 성찰을 하며
나 스스로의 모습을 관조(觀照)하리라.
누군가 트래킹이란 소달구지 타고 천천히 가는 느림의 미학이라 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순박한 모습을 즐기며
자연의 원시림에 몸을 맡긴 나는 올라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누리는 거다.
이 길을 걸은 사람들이 작은 소원을 빌며 만들어진 돌무더기에 잠시 마음을
담는다.
cairn은 고지대 지역이나 능선 정상부근 등에 사람들이 쌓은 돌무더기이다.
만드는 이유는 무덤의 위치표시 및 위령, 특정 루트를 나타내는 이정표로
볼 수 있는데,
이 cairn은 무덤의 위치표시라 볼 수 없고,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원을
쌓은 돌탑으로 보인다.
'기린초' 한 송이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산길에서 만난 작고 여린 꽃,
길 위에서 바라보이는 숲속의 풍경은 분명 신(神)의 세계다.
쥐오줌풀 등 기화요초(璂花瑤草)가 핀 천상의 길을 걷는다.
고개를 처든 놈, 고개를 숙인 놈, 입을 벌린 놈, 입을 다문 놈 등
자연의 모든 것이 경이로우니 여기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이로구나.
한참을 가도 인적은 없고 자연은 때가 묻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공간의 결을 만든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천상의 소리를 들려준다.
세상의 구성요건 중 소리는 매우 독특하고 존귀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눈을 좌우로 돌리다가 '초롱꽃'과 눈이 마주친다.
난 산에서 무엇을 초조하게 찾기보다는 산길을 걸으며 우연히 마주치는
작은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인생 후반기 내 삶의 쉼터인 산에선 천천히 걸어도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종심(從心)이 다가온다.
인간의 본능 중 가장 충실한 것이 출세에 대한 욕망이다.
그 과정이 지나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은둔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고향의 과수원도 처분한지 10년이 다돼가고 이젠 고향엔 내려갈 명분과 인연이
없다.
내몸에 큰 병이 든 거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파탄이 난 거도 아닌데,
만약에 내가 세상을 등지고 은둔의 생활을 한다면 이곳이 적격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절처봉생(絶處逢生)에 해당되는 인생도 아닌데 이곳에 은둔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명당을 찾는다며
화기(火氣)와 수기(水氣)가 어우러졌던 남해 금산 보리암에 세 번 올랐고,
거대한 바위에서 튀어나오는 화기(火氣)로 가슴이 먹먹했던 대둔산에 두 번,
칼바람 속에 온몸이 휘청대던 지리산 천왕봉에 세 번,
깃대봉을 수없이 거느린 관악산 연주암과
괴이한 주술의 냄새가 도사린 선운산 도솔암에 두 번 올랐고,
강물이 휘감아 도는 영동의 월류봉과
백양이 환생했다는 장성 백양사 약사암에도 한 번씩 올랐다.
성(聖)스런 여승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 설악산 봉정암,
당나라에서도 보였다는 대구 비슬산 대견사지터,
소백산 능선이 일렁이는 영주 부석사,
도솔천의 세계를 그린 달마산 도솔암도 두 번 올랐고,
거대한 사찰인 통도사를 품은 양산 영축산,
후천개벽 사상을 품은 계룡산,
무더위 속에 학(鶴)을 찾아 파주 심학산도 올랐다.
기복(祈福)을 찾아 허우적대던 금오산,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기구하는 장성 축령산에도 올랐지만
내가 은둔하고 싶었던 곳은 영주 부석사였다.
그러나 오늘 이곳을 오르며 내가 은둔하고 싶은 나만의 명당을 찾았으니
바로 대관령과 능경봉이다.
짙은 안개속에 홀로 서있는 비석이 외롭다.
바람을 부르는 기풍비(祈風碑)가 아닌 기풍비(氣風碑) 뒤에 '국태민안' 등이
새겨져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비에 쫓겨 바삐 오르는 나그네의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회나 집단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공통적인 분위기를 뜻하는 기풍비
(氣風碑)가 이곳에 왜 서있는지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를 때 다시 확인하리라.
10;44
정상까지 1.1km가 남았다.
깊고 높은 산에선 누구나 산을 닮아 깊고 넓어진다.
이 깊은 산속에서 모르는 한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다.
아무도 없이 우리만 오롯이 오르는 산,
마음이 열렸기에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저절로 인사가 나오는 법인데,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그냥 자연과 묵언(默言)으로 대화를 하는 수밖에 없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거친 숨과 함께 내 안에 숨었던 악(惡)을 버릴 수 있어 좋다.
산을 오르는 건 선(善)을 행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스스로 마음의 변화를 읽는다.
어쩌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나는 누구인가,
언제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가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산길에서 만난 '박새꽃'을 바라보며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초록이 뚝뚝 떨어지는 숲의 시간에서 느리고 더 비우기 위해 더 가벼워지려고
한다.
요즘은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모호한 세상이다.
한적한 숲에서 숨고르기를 하며 꽃을 바라보는 여행도 괜찮다.
출발 전 비기 많이 내려 산행이 취소되었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상이 된 지옥에서 잠시나마 천국의 선물과 같은 일상의
시간을 찾았으니 오늘은 행복한 날이다.
바람 한 점 꽃 한 송이가 가슴을 뭉클하게 해준다.
자연에 있으면 자연을 닮아가는 법,
일상을 잃었어도 이런 곳에 오르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든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따질 필요도 없는 산속에서
미소가 저절로 나오니 오늘도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거다.
신산(辛酸)한 세월이 이어지는 이 여름에 좋은 날을 만났고
이렇게 자연에서 위로를 받으면 마음에 서러운 티끌 하나도 남지 않는다.
보여줄 것도, 들려줄 것도 많은 산속에서 지금은 거친 내 숨소리만 들린다.
일행은 저만치 앞서올라가고 나는 박새꽃과 거의 닮은 '흰여로꽃'에 집중한다.
참나무에 버섯이 피기 시작한다.
무슨 버섯일까,
식용일까, 독버섯일까 버섯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 그냥 신비로운
모습과 색깔만 기억하기로 한다.
산이 깊고 높이가 1,000m가 넘는 고산이다보니 거대한 나무에 큰구멍도 생겼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있어 동물들이 동면하기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지만
눈비가 심하게 오는 날 잠시 피할 수 있는 장소는 되겠다.
구멍 안에는 동물들의 분변(糞便)이나 털 등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산마루에 앉아 잠시 호흡조절을 한다.
살짝 부는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
산의 냄새가 바로 이 냄새로구나.
몸도 맑아지고 잠시 후 세상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고 풍경은 순식간에 지워진다.
어느 식자(識者)는 목표가 있는 삶이 아름답고, 감사하는 마음이 인생을
바꾼다고 했다.
산행거리가 길지는 않지만 오늘 모처럼 높은 산을 오르며
나이가 들면서 여유를 갖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내가 베픈 거보다
더 많은 것을 받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능경봉을 마음에 둔지 수개월,
1, 2월 이런저런 사유로 오르지 못했고, 3월부터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한 곳을 오르며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는다.
수백년을 산 거대한 나무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나무들은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 중 산의 신(神)인가 보다.
이곳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시공간(時空間)을 초월한 또 다른 세상이 나오겠지.
부드럽기만 한 산길에서 산의 거친 속살을 처음 만난다.
바위절벽을 간신히 돌아 오르는 뜻밖의 풍경이다.
11;30
능경봉 정상(1123.2m)에 올랐다.
정상에 서서 어떤 경지에 오를 필요는 없다.
산행의 즐거움은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산을 오를 때 정상만 보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꽃· 나무와 산의 냄새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정상의 꼭짓점을 찍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원점회귀는 늘 산행의
반복형이라,
얼마나 높이 오르고 얼마나 많이 걸린 산행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정상에 오르면 그냥 마음이 편해진다.
이 순간만큼은 세속의 티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관령의 광활한 초원과 강릉의 맑은 동해바다,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세를
정상에 오르면 볼 수 있다는 안내판은 거짓말일 정도로 사방은 나무들로
빼곡해 조망이 전혀 되지 않는다.
자연을 벗 삼아 먹는 음식은 땀 흘리고 비워서 더 맛있는 모양이다.
막걸리 한잔의 행복이라,
행복을 위한 처방전은 마음에 여유를 가지는 거라 했으니 오늘은 마음마저
편안한 날이 되었다.
장소를 불문하고 잘 먹는다는 것은 행복이다.
또한 잘 먹는다는 것은 모든 활동이 왕성하기에 식색동원(食色同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식(食)과 색(色)이라,
인간이 다른 욕망은 배제할 수는 있지만 식과 색은 불가분(不可分)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음식남녀 인지대욕(飮食男女 人之大慾)이라는 공자의 말을 빌릴 거도 없이
식이 곧 색이고, 색이 곧 식이라고 조용헌 선생은 말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 하산을 서두른다.
사나운 바람도 없이 가볍게 내리는 빗방울은 내 몸에 닿기 무섭게 아래로
흘러내린다.
12;40
안개와 비만 보이는 능경봉,
다시 찾겠노라며 바람결에 마음을 실려 보내고 산행을 마친다.
오늘은 비가 와서 좋은 날이요,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해가 저물고 장맛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은하수와 별빛이 쏟아져야할 밤하늘에 별은커녕 빗줄기가 점점 강해진다.
2020. 6. 25. 05;00
시간이 되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지금도 빗소리가 요란하니 장대비가 내리는 걸까.
창문을 여니 안개비의 습한 기운이 훅 밀려들고, 밤새도록 들리던 빗소리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였던 거다.
카메라를 들고 대관령옛길을 오른다.
산수국꽃 향기를 품은 계곡의 물소리가 귀를 깨끗하게 해주니 세이(洗耳)요,
산딸나무의 순결한 꽃은 눈을 깨끗하게 해주니 세안(洗眼)이로구나.
이곳에선 모든 게 평온하다.
편한 숲길을 거닐며 화엄(華嚴)이란 무엇일까,
내가 여기를 걷고 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를 생각한다.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있기애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여서 우주만물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사상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 된다.
간밤에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물 소리가 요란하다.
나뭇잎 사이로 살짝 보이는 작은 폭포를 품은 바위는 세이암(洗耳岩)인
모양이다.
이곳을 떠나기가 싫다.
비록 최치원 선생의 입일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까지는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어 이곳을 벗어나는 게 싫다.
흐르는 계곡물 한모금을 입에 넣으니 입안이 개운해진다.
대관령 꼭대기에서 흘러 내려오며 산삼(山蔘)을 스쳐 지나왔는지 입안이
청량해지니 구척수(口滌水)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다.
요즘같이 힘든 세상일수록 머리는 차갑게, 손발은 부지런하게,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는데,
산에만 들어오면 분노· 불안· 긴장이 사라지니 신기하다.
어쩌면 불안과 화난 감정으로 반응하는 신체적인 현상이 같은 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없이 나 홀로 걷는 계곡의 물소리는 눈으로 보는 음악을,
나뭇가지 위에 살짝 보이는 꾀꼬리는 귀로 듣는 미술을 가르쳐준다.
2020. 6. 25. 능경봉에 다녀와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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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어요ㅡ
아직 교정중인데 벌써 봤네
아이들 데리고 들어가면
최종 교정볼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