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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추로 가는 버스는 아직도 낭만이 묻어 있다. 송추는 일영, 장흥과 더불어 과거에 엠티를 다니던 대표적인 추억의 장소다. 밤골과 사기막골을 지나 솔고개를 넘자 복잡했던 서울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교현리 우이령길 입구다. 고즈넉한 공간에 발을 딛는 느낌이 여느 곳과는 사뭇 다르다. 문명과 자연, 도시와 농촌, 말과 침묵 그 사이쯤이기 때문이다. 사이는 경계다.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그 경계에서는 곧잘 질문이 인다. 그것은 자기의 현재 위치에 대한 확인이다. 경계가 모호할수록 복잡해지고 급기야 갈등을 빚는다. 따라서 경계에서는 종종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지혜를 필요로 하며 방향 수정을 요구한다.
경계는 대부분 이분법적 대립구도 속에 위치해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인가부터 우리는 한쪽에 치우쳐 살고 있다. ‘나다움’을 유지해 주는 개인의 기질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잃어버린 나다움을 새로 찾아내는 시점이 바로 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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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 상장능선과 일주문 113x69cm 한지에 수묵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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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이령 길목에서 60x94cm 한지에 수묵채색
- 포장도로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흙의 기억은 어슴푸레하다. 우이령길의 첫 번째 매력은 숲 사이로 난 부드러운 흙길에 있다. 흙을 밟는다는 것은 곧 원시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인간의 본성이 자유로웠던 자연의 상태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말한 ‘자연인’으로의 귀환을 뜻한다.
우이령은 1968년 이후 41년 동안이나 굳게 닫혀 있었다. 2009년 7월 10일 개방된 이후 하루 탐방객 수를 일정하게 제한해 왔다. 그 결과 숲과 계곡은 청정하며 어느 곳보다 호젓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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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 오봉과 석굴암 139x69cm 한지에 수묵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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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이동계곡 돌탑 60x93cm 한지에 수묵채색
- 미소의 만다라 석굴암의 나한들
눈이 깊었던 겨울 숲은 군데군데 잔설이 남았다. 계곡의 얇아진 얼음장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지날 것은 다 지나가고, 올 것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있다.
조급증을 버리고 천천히 걷는다. 얼마 가지 않아서 계곡의 한가운데 섬 모양의 커다란 바위 위에 중동이 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붙든다. 태풍과 폭우가 지나갔던 것일까. 아니면 설해를 입었던 것일까. 삶에는 반드시 불어 닥치는 바람이 있다. 생에는 누구도 내려놓을 수 없는 짊어진 무게가 있다. 부러지고 꺾이며 나무는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청음이 “똑 도르르르” 하고 울린다. 북한산의 깃대종인 오색딱따구리가 숲으로 왕진을 나온 것이다. 아픈 나무들의 근심을 이미 한눈에 꿰뚫어보았다. 고통의 근원을 캐내는 부리를 벼린 새의 탁목(啄木) 소리가 목탁소리를 닮았다. 소리는 이내 산을 울리고 내 안의 호수에 둥근 파문으로 내려앉는다.
석굴암으로 향한다. 석굴암은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공민왕시절에 왕사로 3년간 수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봉산 관음봉 중턱에 자리한 석굴암은 앞으로는 수려한 상장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뒤로는 훤칠한 오봉들이 도열해 있다. 하늘로 오르는 활활한 불꽃의 기운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천혜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천년고찰이다.
- 숲 사이로 오르는 비탈길에서 숨이 찰 쯤 중턱의 일주문에 이른다. 너무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수졸하지도 않다. 깊으면서도 고아한 기품을 뿜어내는 빛이 맑아서 더욱 좋다.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이 갖고 있는 그 고유한 존재의 의미에 하나하나 색의(色衣)를 입혀서 색의(色意)를 곱게 드러내어 우리를 장엄한 세계로 인도한다.
산문의 안쪽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주치는 관음봉은 영락없이 가사를 입은 아라한의 모습이다. 천연의 석굴 속에 모셔진 나한전에 든다. 지금까지 사람이 지었던 일체의 미소들이 다 모여 있다. 필시 사람이 지을 수 없는 온갖 미소들이 환하게 꽃피었다. 미소들은 한결같이 빛보다 밝다. 한꺼번에 찌르는 빛으로 눈 속의 어둠들이 황망히 쫓겨 가느라 한바탕 소요가 인다. 이윽고 찾아온 평온 속에 하늘의 성단처럼 돋는 저 환한 미소의 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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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생의 봄 93x60cm 한지에 수묵채색
- 산을 듣는 우이령길
귀 하나만 남는 우이령에서 산의 침묵은 명징하다. 쌓인 눈처럼 맑고 투명하다. 반사하여 되돌려 보내는 설원의 달빛처럼 황홀하다. 그것은 다만 자기 안에 고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기의 말을 버릴 때 ‘자기고요’는 스민다. 스며서 고인다. 샘물로 고이는 그 고요가 마음의 문턱을 넘어서 밖으로 흘러 나갈 때 비로소 이 세계는 열리며 침묵이 숨긴 내밀한 말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은 소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말은 하면 할수록 그 의미가 모호해질 때가 많다. 분명함과 불분명함의 경계가 사라지며 갈등과 혼란이 온다. 인간은 말로써 말 이전의 ‘참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말하지 않고도 소통한다. 나무가 나무와 말하고 바위가 바위와 말을 주고받는다. 또한 봉우리는 봉우리와 화답하며 산은 산끼리 통한다. 밖으로 표출되는 말들은 그 한계가 있음을 미리 간파해 일찌감치 던져버렸다. 자연은 늘 서로를 보고 듣는다. 자기 안에 만들어지는 심상인 이미지 그 순일한 몸말로써 말을 전한다. 몸짓에 몸짓을 더하여 그의 몸짓이 된다. 고요에 고요를 더하여 마침내 침묵하는 산의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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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굴암 일주문의 밤 59x89.5cm 한지에 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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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색딱따구리 70x47cm 한지에 수묵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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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길은 자기의 말 때문에 가려지고 숨어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곳이다. 나는 왜 여기에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봉과 상장능선 그 사이에서 침묵의 좌우를 살피는 길이다. 말을 아끼고 아껴야 한다. 자신의 말을 아껴서 마지막에 가장 뜨거운 불꽃을 피워 올리는 나무들의 침묵이어야 한다. 커다란 황소의 담뱃잎 같은 큰 귀를 세워 들을 때 침묵은 들린다. 찌르르 발목을 타고 올라 고요한 메아리처럼 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모든 말들이 제거된 겨울 숲처럼 마침내 우리는 텅 빈 고요로 앉은 ‘나’라고 하는 산을 발견하게 된다.
오봉 전망대에 선다. 한 마을의 다섯 아들들이 원님의 예쁜 딸에게 장가들기 위해 상장능선의 바위를 던져서 만들어졌다는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저 오봉에는 천변만화의 무궁함이 있다.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이동하면서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정렬에 들어가는 어느 행성들과 같이 변역과 불역의 이치를 드러내고 있다.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정주하지 않는 무주(無住)의 정신만이 모든 절벽과 벼랑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얻을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눈 속에 발목을 묻고 있는 나무들이 그 자리서 천년의 시간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것처럼.
- 숲 사이로 오르는 비탈길에서 숨이 찰 쯤 중턱의 일주문에 이른다. 너무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수졸하지도 않다. 깊으면서도 고아한 기품을 뿜어내는 빛이 맑아서 더욱 좋다.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이 갖고 있는 그 고유한 존재의 의미에 하나하나 색의(色衣)를 입혀서 색의(色意)를 곱게 드러내어 우리를 장엄한 세계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