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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종 수녀회 (상)
황폐해진 본당 공동체 치유하며 설립
마리아의 종 수녀회 창설자인 복자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신부(1821-1893)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인 모데나(Modena) 교구의 레뇨 피날레제(Regno Finalese)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기숙사에서 지냈던 그는 선교사제 성소를 꿈꾸며 예수회에 입회했지만 수련기 때 병을 앓게 돼 선교의 꿈은 물론이고 수도생활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제성소의 꿈을 계속 키워나갔고, 마침내 볼료나(Bologna)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고 신학교 교수이자 영성 지도자로 활동한다. 1851년, 사제가 공석인 갈레아짜(Galeazza)본당에서 사목하게 된 페르디난도 신부. 하지만 그가 부임할 당시 갈레아짜본당은 영성적, 도덕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도 황폐해져 있었고 성당 안에 뱀굴과 두꺼비집이 득실거렸다고 전해진다. 수녀회의 초대 수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같이 증언했다.
그분이 갈레아짜에 오셨을 당시 주민들은 극도로 교활하고 무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겨우 성호를 그을 줄 아는 정도였고 성당은 마치 마구간 같았죠. 나무로 밝히는 등불이며, 찢기고 더러운 성물 등 모든 것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착한 신부님은 조금씩 조금씩 모든 것을 치유하셨습니다.”
지역에서 반그리스도교 사상이 확산됨에 따라 본당 신자들조차 축일을 소홀히 하고 불경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성사를 멀리했다. 하지만 페르디난도 신부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과 잘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본당 신자들의 어려움과 고통에 동참하며, 늘 그들 곁에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사목에 임한다.
그는 교리교육과 설교,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 페르디난도 신부 사목 초기, 627명이었던 본당 신자들은 점차 증가해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소문이 퍼져 인근 본당에서 페르디난도 신부의 강론을 들으러 왔을 정도였고, 그의 자애로운 모습을 본 신자들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를 떠올리게 하는 ‘제2의 아르스의 성자’라고 불렀다. 페르디난도 신부는 잠시 체류하러 갔던 갈레아짜본당에서 41년간 사목하다 자비로운 사목자로서의 생을 마감한다. 이후 1999년 10월 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복자로 선포됐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 수녀회 창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그는 마리아의 종 제3회원이었던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1862년 6월 23일 수녀회를 창설하게 된다. 이 수녀회가 바로 갈레아짜의 마리아의 종 수녀회로서, 1947년 1월 27일 비오 12세 교황으로부터 교황청 설립 수녀회로 승인을 얻었다. 마리아의 종 수녀회는 복자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신부의 영성을 본받아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시며 종이신 마리아를 본받아 그리스도를 따른다”(회헌 109조)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사도직에 앞장서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3월 5일, 민경화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종 수녀회 (중)
하느님과 이웃 섬기며 구원사업에 협력
“태양이 모든 것을 밝혀주고 모든 것을 뜨겁게 하듯이 마리아도 그에게 달려가는 사람이라면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이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마리아의 종 수녀회 창설자인 복자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신부는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성부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깊은 신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신심을 바탕으로 설립된 마리아의 종 수녀회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는 영적인 깨달음과 겸손, 주어진 현실을 포용할 수 있는 용기,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을 위한 봉사에 모든 삶을 바칠 수 있는 헌신,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지니는 믿음, 그리고 깨어있는 자세를 바탕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
수녀회의 영성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마리아의 영성을 본받음, 형제적 공동생활,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다.
수도자들은 첫 서원을 발할 때 주보이신 ‘마리아’의 이름을 받는다. 이를 통해 자신을 성모 마리아에게 의탁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마음에 새기고 수도자의 길을 걸어간다. 마리아의 영성을 본받고자 수녀회는 “피아트(Fiat·당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간직하시어 십자가 밑에까지 실천하신 마리아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행동방식을 본받아 성모님의 활동적인 현존을 역사 안에서 연장시킨다”는 내용을 회헌으로 정해 따르고 있다.
공동생활에 있어서 형제와 같은 우애를 나누는 것도 수녀회가 우선시하는 가치 중 하나다.
1862년 시작해 이탈리아, 독일, 브라질, 한국, 인도네시아 등 세계 곳곳에 파견된 수녀회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왔다. 수녀회 안에서 형제적 우애가 이뤄졌을 때, 이 가치가 세상 밖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녀회의 이름인 ‘마리아의 종’은 이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소속된 신분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수녀회 수도자들은 성모님이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사업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것을 본받아, 하느님과 이웃 사람에게 봉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협력하고자 한다. 이러한 영성을 실천하고자 창립 당시 수녀들은 본당 공동체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특히 젊은이와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썼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 영역이 확장돼 사회복지 특히, 어린이집과 이주민들을 돕는 사명도 수행하고 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하느님 백성의 성화를 위해 한 몸을 바친 창설자를 본받고자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섬김의 사명은 회헌에 담겨 수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인류의 기쁨과 고통과 희망에 참여하면서 역사 안에 성모님의 활동적인 현존을 연장하며, 지역교회 안에 실존하여 모든 형제들에게 정성을 다 한다.”(회헌 6, 7조)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3월 12일, 민경화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종 수녀회 (하)
본당 사도직과 더불어 교육에 초점
이탈리아에서 창립한 마리아의 종 수녀회는 이탈리아, 독일, 브라질,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국에서 카리스마와 영성을 살아간다. 지역교회의 활성화에 참여한다는 설립 목적에 따라 수도자들은 본당 공동체 안에 머무르면서 가능한 한 모든 분야에서 사목자들을 지원한다. 특히 교리교육, 영성훈화, 여성지위 향상을 위한 종교적·사회적인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고등 교육을 포기하는 여자 청소년들을 위해 인도네시아 지부는 여학생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세워 그리스도교 정신에 맞는 인성 교육에도 동참하고 있다.
마리아의 종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81년이다. 한국인 수녀 1명과 독일인 수녀 1명으로 시작한 한국 본부는 1985년이 돼서야 첫 입회자가 나올 수 있었다. 이후로 점차 발전된 수녀회는 1992년 지부로 승격해 다양한 사도직을 펼치고 있다.
본원 안에서 마리아의 종들은 ‘마리아적 영성, 형제적 생활, 이웃에게 봉사’로써 주님의 구속사업에 현존한 마리아의 활동적인 삶을 연장한다. 따라서 본원 내에서의 사도직과 기도는 외부 사도직에 임하는 모든 회원들을 지지, 연대하며 카리스마 및 영성심화로 이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사는 방식은 수녀회 창립 때와 크게 달라졌지만 수도회를 통해 전달되는 교회의 카리스마와 영성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수녀회는 창립 때와 마찬가지로 본당 사도직을 우선으로 삼고 있다.
수녀회의 전교 사도직은 예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신 성모님의 모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이에 수도자들은 청주, 인천, 수원, 서울 등 4개 교구의 본당에서 전교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수도자들은 사목자와 긴밀한 협조를 이루며, 전교, 교리교육, 신심단체 지도, 가정과 환자 방문 등의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교육 사도직도 폭넓게 펼치고 있다. 마리아의 영성으로 형제적 생활을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수녀회. 이러한 정신을 실천코자 마리아 영성연구센터를 세워 마리아 이콘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모임을 운영하고 피정지도를 하는 등 종교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유아들의 전인적 발달을 위한 교육에도 동행하고 있다. 수도자들은 마리아의 종 어린이집을 통해 아이들이 올바른 종교심을 형성해 올바른 자아상을 갖출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밖에 이주민과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마리아 이주민 센터, 여대생들을 위한 원룸형 기숙사인 카사 마리아(Casa Maria)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걷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와 그분의 뜻에 승복하고 자신을 비워 오로지 하느님 백성의 성화를 위해 한 몸을 바친 창설자의 삶을 따라 마리아의 종 수녀회 수도자들은 머무는 곳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오롯이 섬기는 종이 되고자 정진하고 있다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 (상)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한다고 하는 신자는 부조리한 것을 꿈꾸는 셈입니다.”
나자렛 예수님을 유일한 본보기로 삼고 세상 끝까지 그분을 닮아가기 위해 길을 나선 샤를 드 푸코 성인.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영성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이룬 수도회다.
성인은 ‘사하라의 사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성인이 척박한 사막에서 기도하고 관상한 영성가이자 토착민들에게 하느님을 전한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성인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삶을 좇으며 살던 청년이었다. 성인은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5세 무렵 부모님을 잃고 외조부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기숙학교를 다녔지만 학업에도 성실하지 않았고, 엄격한 규율을 싫어해 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또 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이 됐지만, 방탕한 생활로 계급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는 일도 있었다.
성인은 사하라 사막 탐험을 계기로 하느님께 회심하게 된다. 수년에 걸쳐 사막을 탐험하던 성인은 사막에서 만난 무슬림들이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1886년 프랑스로 돌아온 성인은 고해성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살아갔다. 세상과 떨어져 수도원에서 7년, 나자렛에서 긴 침묵과 노동으로 3년을 보낸 성인은 자신의 성소를 깊이 깨달았고, 프랑스로 돌아와 1901년 사제품을 받았다.
성인은 다시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영적인 가난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의 선교는 선함과 우정이라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설교나 자선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보여줬다. 바로 나자렛 예수님이 인간으로 육화해 유다인으로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했듯이, 사막의 무슬림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삶으로 복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성인은 투아레그족의 관습, 전통, 언어를 배우면서 토착민들을 존중했고, 토착민들 역시 성인을 존경했다.
토착민들의 친구로 살아간 성인이지만, 성인은 늘 교회 안에서 활동해나갔다.
성인은 자신이 머무는 은수처를 ‘예수 성심의 형제회’(La Fratermite du Sacre-Coeur de Jesus)라 이름 붙이고, 누구나 함께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성체조배를 했다. 아울러 자신 이후에 다른 선교사들이 복음 선포에 함께할 수 있도록 프랑스-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도 해나갔다.
성인은 1916년, 프랑스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혼란하던 중 총에 맞아 선종했지만, 성인의 영성은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성인의 선종 후 성인의 영성을 따르는 20여 개의 영성가족이 생겨나 비그리스도인 안에서, 세속 안에서 관상으로 살아가던 성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2월 12일, 이승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 (중)
전 세계서 ‘나자렛 삶’ 살아가는 이들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생전 홀로 자신의 영성을 살아갔지만, 성인의 선종 이후 수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따랐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성인의 영성, 바로 나자렛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간다.
성인의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자렛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인의 모습으로 나자렛의 사람들과 똑같은 눈높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만난 것. 성인은 그 영성을 사막에서 가난한 무슬림 원주민들 안에서 실현해나갔다. 이 영성은 당시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선교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그러나 성인은 단순히 무슬림들과 동화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원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교리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지만,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영성은 바로 성체조배와 미사를 중심으로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이 성체가 되도록, 원주민에게 양식이 되도록 했다.
1916년 성인은 선종했지만, 이런 성인의 영성은 세계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다. 성인이 선종한지 16년이 흐른 1933년 파리 신학교를 갓 졸업한 5명의 신부들은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파리 몽파르나스 언덕 예수성심대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알제리 엘아비옷에 정착해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1899년 성인이 작성한 「회헌규칙 초안」이 그들의 길잡이가 됐다. 5명의 사제들은 예수님의 나자렛 삶을 따르고, 오랜 시간 성체조배를 했으며, 찾아오는 방문객들, 원주민들과 일상을 나누며 형제적 우정을 실현했다. 성인만이 살아냈던 새로운 형태의 생활이 공동체 생활, 수도회로서 형성된 것이다.
수도회가 추구하는 ‘나자렛 예수님의 삶’은 형제적 친교 안에서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경배와 관상생활을 하는 삶이다. 특히 복음적 가난의 실천, 육체적 노동과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조건에 실제적으로 동참하면서 ‘나자렛 예수님의 삶’을 닮아간다.
수도회는 2~3명 수도자들이 형제집이라 불리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면서 나자렛 성모님과 함께 신비체인 교회의 사명에 결합한다. 수도회는 무엇보다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시키기보다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수도자들이 복음화 된다고 고백한다.
수도회의 영성은 사막에만 머물지 않았다. 알제리 엘아비옷의 수도원은 사막생활과 기도생활로 수도자들의 수련소가 됐고, 이 수도자들은 유럽과 중동지방을 시작으로 라틴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퍼져나갔다. 그때마다 그 지역의 ‘나자렛 삶’으로 자리잡아갔다. 수도자들은 탄광의 광부가, 농촌의 농부가, 어촌의 어부가, 상선의 선원이, 화물트럭 기사가, 서커스단의 잡부가, 윤락가 식당 청소부가 됐고, 집시들과 유랑생활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의 나자렛 삶을 보여줬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2월 19일, 이승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 (하)
노동자로 살며 가난한 이들과 생활
성 샤를 드 푸코 신부의 나자렛 삶 영성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어져나가고 있다.
국내에 예수의 작은 형제회가 자리를 잡은 것은 1969년 9월의 일이다. 먼저 국내에서 활동해온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성인의 영성을 따라 한국 수련자 1명이 유럽에서 수련을 받게 됐다. 이어 수도회 본원에서 한국에 프랑스와 벨기에 출신 수도자들을 파견했다.
수도회가 찾은 나자렛 삶은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노동자로 가난한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면서 그들 중의 하나로 사셨던 나자렛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왔고, 산업현장과 공장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수도회는 셋집에 자리를 잡고 노동자들의 곁에서 생활해 나갔다. 수도회는 한국 땅에서 감실 안에 계신 성체를 중심으로 공동기도를 바치고, 일터에서 노동하며 이웃들과 일상을 나누는 단순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수도회는 어느 나라에 진출하든 2~3명의 수도자가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려 지역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침으로 삼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매번 도시 재개발 계획에 밀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뿌리 뽑히는 아픔을 나눠야 했다. 산동네에서 변두리로, 월세와 전세를 오가면서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주민들과 거대 건설사 사이의 이권 다툼과 갈등으로 지역 공동체가 파괴되는 슬픔을 공유하면서 생활해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도 여러 젊은이들이 함께해나갔다. 젊은이들은 양성기간을 거쳐 노동현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고, 함께 모여 공동생활과 기도를 하고 형제적 우애를 통해 용기와 자존감을 길러 지역교회와 친교를 넓혀나갔다.
수도자들은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평등을 실천하고자 했고,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 토착화되고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왔다. 수도회는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사회 안에서 또 다른 나자렛 삶을 관상해나가고 있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가난을 넘어 고독과 외로움, 소외와 버려짐, 차별과 집단 따돌림 현상까지 우리 삶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가난한 이들. 수도회는 이들 곁에서 나자렛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장 김신관(프란치스코) 수사는 “우리 수도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꼭 물질적일 필요는 없다”면서 “양 냄새가 나는 그들 중의 하나로, 수도자들은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작은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 수사는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로서는 유일한 수도회로 우리사회 현실을 반영한다”며 “성소자 감소와 형제들의 노령화라는 현실이 우리의 가는 길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상)
애덕사업 통한 신앙 전파 위해 설립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마태 5,7)이라는 말씀을 삶의 정신과 방식으로 삼는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총원장 박윤숙 에밀리아나 수녀, 이하 수녀회)는 1937년 살레시오회 소속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와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에 의해 ‘육체적, 정신적 애덕사업을 통해 신앙을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이탈리아 출신인 치마티 신부와 가볼리 신부는 일본에 최초로 파견되는 9명의 살레시오회 선교단 일원으로 참가해 1926년 일본에 첫발을 내딛었다
일본에 도착한 그들은 미야자키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했고, 젊은이들 및 성인들의 단체를 조직해 애덕 활동에 착수했다. 미야자키본당에서 기초가 마련된 애덕 활동은 성당 밖에서의 사도적 활동으로 점차 범위를 넓혀 1932년 가난과 병으로 버림받은 노인들과 고아들을 위한 ‘구호원’(救護院) 설립에까지 이르렀다. 이 구호원의 애덕 활동에 자신을 봉헌하던 여성들의 단체가 ‘애자회’(까리따스의 딸들)라는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고, 이 애자회가 바로 수녀회의 요람이 됐다.
당시 선교지의 방인(邦人) 수도회 설립을 권고한 비오 11세 교황의 방침에 따르면서 구호원의 진로를 내다볼 수 있고, 다른 곳에도 같은 애덕 활동을 확장해 갈 수 있는 수도회를 만들고자 하는 치마티 신부의 의향과 권고에 가볼리 신부가 응답해 그 실무를 수행함으로써 수녀회가 태어나게 된다.
수녀회 초창기 자매들은 살레시오회 선교사들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르면서 창의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살레시오회의 환경에서 받아들인 성 빈첸시오 영성은 활동의 뿌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렇기에 태생적으로 무엇보다 사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이와 고통받는 이를 향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증거자로서 이 사명을 수행하며, 이 사도적 수도생활의 계획을 실현함에 있어서 수도회 고유의 정신에서 활력을 얻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화의 길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수녀회는 1956년에 첫 해외선교사로 세 명의 한국인 수녀를 전남 나주에 파견해 본당 사도직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점차 한국에서 수도회 기반을 다지고 선교에 힘썼다. 1959년 광주시 학동에 본원과 수련원을 지었고, 1961년 한국에서 7명의 첫 서원자가 탄생했으며, 점차 파푸아뉴기니, 아프리카, 남미 등지로도 선교 수녀가 파견돼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한국 회원 수가 500명이 넘자 2009년 광주·서울·수원 세 관구로 분할됐고, 각 관구 회원들은 그 이후에도 서로 간의 원활한 소통과 발 빠른 선교활동을 통해 사도직 안에서 예수성심의 사랑을 더 깊이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15개 나라에서 920명가량의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1월 15일, 박지순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중)
자신을 내주는 ‘자비로운 사랑’ 실천
예수님의 자비로운 사랑, 예수성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총원장 박윤숙 에밀리아나 수녀, 이하 수녀회) 영성의 중심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주고 용서하는 자비로운 사랑이다. 그 원천이요 모범은 예수님의 성심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와 물을 쏟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수도자들은 이 자비로운 사랑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장 작은 이들에게’ 증거하고 열성적으로 선포하며 살아간다.
구체적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의 사도로서 복음서에 나타난 나자렛 예수님의 모습,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돌보시는 예수님, 굶주린 이·감옥에 갇힌 이와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을 형제자매들의 친교로 모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을 관상하고 닮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특별히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과 애정의 중심에 두고 자신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또한 주님과의 끊임없는 대화 안에서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 안에서 길어낸 깊은 연민과 자비로운 사랑에서 활력을 얻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과 재능, 힘과 건강을 바치게 된다.
수녀들의 사도적, 형제적 삶에는 독특한 가족정신이 있는데 이는 살레시오회의 특징으로 수녀회의 공동체와 사도적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가족정신은 신뢰, 용서, 존중, 온유함, 친절, 기쁨으로 표현돼 수도가족으로서 친밀한 사랑을 꽃피우게 한다.
설립자인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와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는 수녀들이 수호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며 항상 그분들께 전구를 청하도록 했다. 첫 번째 수호성인이신 도움이신 마리아는 수녀들이 성령의 영감에 유순하게 따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수녀들은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믿음의 여인, 이웃에게 마음 쓰는 애정 깊은 어머니, 아드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성모님을 본받고자 노력한다. 또한 내적 생활과 내성(內省)의 보호자, 아기 예수님과 동정녀의 보호자, 노동자의 모범, 하느님 섭리의 주보성인이신 성 요셉의 덕행을 본받도록 장려하고 있으며, 설립자들은 특별히 성인들의 보호에 수도회를 의탁했다.
애덕 사업을 첫 사도직으로 시작했기에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였던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수녀회 사도직의 모범이자 수호성인이다. 그리고 살레시오회 회원으로 돈 보스코의 충실한 아들들이었던 설립자들은 성 요한 보스코의 정신과 모범을 따르도록 했다.
수녀회 영성은 예수성심의 사랑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도움이신 마리아, 성 요셉, 성 빈체시오 드 폴, 성 요한 보스코의 모범과 전구로 탄탄하게 지지를 얻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1월 22일, 박지순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하)
국경 넘은 연대로 예수님 사랑 실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총원장 박윤숙 에밀리아나 수녀)는 다양한 사도직을 통해 예수성심의 사랑을 살고, 전하고 있다. 본당에서는 물론 출판사도직, 병원사도직, 해외선교 분야에서 ‘까리따스’(사랑)를 증거하고 있다. 국내 선교인 본당 사도직은 현대사회 안에서 여러 유형으로 살아가는 가정들과의 만남을 통해 신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주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본당의 신심단체와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별히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웃들에게 필요한 작은 물질적 나눔으로도 연대하고, 이 시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구석구석 찾아 나서는 ‘변방 사도직’을 개척해 가고 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양한 소외 계층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까리따스 이주민문화센터, 까리따스 이주민화성센터, 화성시 외국인복지센터, 까리따스 이주민초월센터, 오목천 장애인주간보호시설, 별빛누리 그룹홈 등에서 이주민들,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또한 출판사도직과 성서사도직, 의료사도직 등에서도 여러 수녀들이 일하고 있는데 1983년, 한국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해 설립한 생활성서사는 진리에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에게 홍보매체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고 있다. 올해 창간 40년을 맞는 신앙 월간지 「생활성서」뿐만 아니라 성경교재, 신학, 영성, 전례, 교회, 신심, 어린이 서적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탄탄히 키워 갈 수 있는 도서를 펴내고 있다. 더불어 생활성서사가 갖고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SNS를 활용해 나누고 전하며 현대적인 선교를 펼치고 있다.
또한 성서사도직으로 여러 교구에서 신자들에게 말씀 봉사를 하고 있으며 유아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병원사도직에서는 신체적, 정신적 질병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전문적 의료기술을 통한 치유를 제공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또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신자들을 위해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까리따스 거단길 피정의 집’에서 피정을 통한 쉼의 시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선교는 나의 사명’이라는 정신을 품고 살았던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수도회이기에 1980년 파푸아뉴기니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후 꾸준히 해외선교를 이어오고 있다. 현재 남수단과 우간다, 페루, 아르헨티나에서 그 지역의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기쁨과 희망을 나누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