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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단 기구
27: 3
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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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에 그들의 장막 중심에는 성막을 세우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그 성막은 바로 오늘의 교회와 같은 것인데, 이 성막 비유를 연구하면 우리의 구원의 도리를 많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성막 안 뜰에 놓여 있던 번제단의 부속기구들입니다. 번제단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말하는데 우리 교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소요, 사람을 살리는 구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헤로 말미암아 이전 죄와 사망과 마귀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은 죽이는 곳이요, 피와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오면 죽여야 될 옛사람을 발견해서 죽여야하고, 새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살려는 결심과 각오로 다시 새로와 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의 역사로 은헤를 받은 사람이지, 그저 흥분과 떠드는 것으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이 번제단에 우리를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번제단에 번제 제사를 잘 드리기 위해서 보조되는 기구가 본문에 5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도 이 5 가지와 같은 교인이 꼭 있어야 교회가 부흥 발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재 담는 통입니다.
매일 번제단에서 번제 제사를 드리면 재가 많이 나옵니다.
희생의 제물을 태우므로 나오는 재, 나무가 타면서도 재가 나옵니다. 이렇게 나오는 재를 쓸어 담지 않으면 제사장이 입은 세마포 흰옷이 더러워 질 것이고, 제물도 재로 덮혀서 더러워질 것입니다.
이 재가 사방에 날려서 사람의 눈에 들어가면 눈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복음 역사를 해 나가는 데는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부족한 사람을 붙들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어떤 때는 재와 같은 안 좋은 일도 일어나게 됩니다.
오전에 살펴본 말씀 같이 노아가 홍수심판의 위대한 역사를 다 이루고 나서 그만 실수해 버립니다.
교회는 지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은 아닙니다. 천국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어제도 찾아와서 따지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따졌습니다만 교회 안에 있는 직분 자들이나 모든 교인들이 다 거룩해야하고 의를 행해야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에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는 부모가 바로 하려고 해도 실수가 있듯이 교회 안에 목회자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에 함과 같이 이 실수를 즐기고 들추고 두루 두루 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재를 날리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형제가 범죄하므로, 실수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로 교회에는 재가 날리고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온통 교회 안을 더럽혀서 교인들에게 큰 시험거리를 주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때에 재담는 통과 같은 신자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잘못된 문제들을 자기가 안고서 재를 모아서 통에 넣는 것 같이 교회가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 문제를 책임지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그 일에 대하여 자기 일로 알아 감당하려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 노력하는 사람이 셈과 같고 애벳과 같은 사람이 교회에 필요합니다.
재를 날리고 뿌려 오히려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 재를 오히려 재통에 쓸어담고 두껑을 닫아서 날리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바로 성막의 번제단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재를 담는 통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신자들이 많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는 부삽과 같은 교인이 필요합니다.
부삽은 재를 끌어 모우는 기구입니다,
번제단에 재 때문에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재를 긁어 모으는 기구가 삽입니다. 교회는 인간들이 모이는 집합 단체이기 때문에 학식, 연령, 개성, 취미, 생각이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잡음과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부삽과 같이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이런 재를 조용히 긁어모아서 재통에 담는 신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재통은 못되어도 재를 긁어 모으는 부삽과 같은 신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일을 만드는 사람 있다고 했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꼭 말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 일 하지 않고 간섭하는 사람으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각기관에서 모일 때는 각기관들의 할 일을 의논해야합니다. 제직회에서 의논할 일이 있고, 권찰회에서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전도회에서 그 전도회의 임무를 의논하는 데서 그쳐야합니다.
누구든지 말을 만들고, 일을 일으키는 사람을 조심하여야합니다. 재가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재를 긁어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통 두껑 까지 열어서 재를 붓고 재를 날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로 대야가 필요합니다.우리들은 다 대야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대야는 세수 대야가 아니고, 희생의 고기와 피를 단에까지 운반하는 도구로서 사용되며, 때로는 제단 밑에 희생의 피를 붓기 위해서 필요한 그릇이다.
이것은 교회에 전도 대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해서 번제단 까지 옮겨 놓는 일을 말하는데 이 같이 우리들이 대야교인들이 되어서 전도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죄 사함을 받게하는 곳입니다. 이 번제단에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므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일을 하는 것 같이 교회가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을 이 번제단 앞으로 인생들을 위해서 피 흘리신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대야와 같은 신자가 많이 일어나면 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넷째로는 고기 갈고리가 필요합니다.
번제단에 고기가 타면서 튀기도 하고 흘러내리기도 하기 때문에 고기를 올려 놓고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갈고리가 필요한데 이런 갈고리 역할하는 신자가 교회에 많이 필요합니다. 대야 교인이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 놓고 나면 이 교인이 교회로 튀쳐 나가지 않도록 살피면서 하나님과 연결시켜주고, 사람과 연결 시켜 주는 신자가 아주 요긴한 사랍니다. 어떤 사람은 대야 역할은 잘못해도 이 갈고리 역할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고리로 걸어서 고기가 번제단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입구는 크게 열려야합니다. 뒷 문은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옆문들이 많아야 합니다. 영혼을 전도하는 일은 그를 가르치고 지도하여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까지 해야합니다. 이를 권위한다고 합니다. 우리 구역장들은 지권찰들이 열심히 전도한 식구들을 구역예배로, 심방으로 그 새교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걸어주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한번 등록하면 여러 갈고리로 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구역에 걸립니다. 또 각 전도회에 걸립니다. 목회자에게 걸립니다. 성경공부에서 걸립니다. 심방하는 일에서 걸립니다.
우리 권사님들은 이런 일을 잘 해야합니다. 이 재료도 놋으로 되어 있습니다. 불에 견딜수 있는 강하고 연단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고 견디며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믿음에서 떨어지지는 않는가 살펴서 떨어지기 전에 권면하고 경계하는 일을 해야합니다.
다섯째로 불 옮기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제단 위의 불을 담아서 향단에도 부치고, 일곱 등대에도 부칩니다.
이 때는 불 옮기는 그릇에 담아서 불을 옮기는 것입니다.
역시 교회에서도 불 옮기는 그릇 교인이 있어야 그 교회가 뜨거워지고 부흥합니다.
교회 안에 불이 붙어야 하는데 기도의 불, 전도의 불, 찬송의 불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의 불이 식어서 책망 받았고,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의 불이 식어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덥지도 않게 미지근하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누군가 이 불을 붙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소방차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는데 마다 불을 끕니다. 어떤 사람이 충성을 하려하면 그만 가서 그 불을 끕니다. 기도를 하려하면 기도의 불을 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서나 기도하자는 운동이 일어나면 그 무슨 기도냐? 산에까지 뭐하려고 가는가?
교역자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결정한 일이면 불을 일으켜야하는데, 이 불을 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불신으로 보는 사람들은 불을 끄는 사람입니다.
안효일 집사님의 기도의 불,
여름성경학교의 불,
번제단 모습과 같은 우리교회에 대야 교인들이 많아야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올 것입니다. 대야 교인이 인도한 사람을 나가지 않도록 사랑으로 품어서 엮어주는 하나님과 사람으로 연결시키는 갈고리교인이 되어야합니다.
불이 붙도록 불을 옮겨서 여기 저기에 성령의 불길로 채우는 교인, 이 불길이 식지 않도록, 꺼지지 않도록 살피며 구석구석마다 있는 재를 긁고 통에 담는 부삽 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 날 때에 그 문제를 안고서 책임지면서 그 날라 다니는 재를 담는 재 담는 통과 같은 교인이 일어난다면 우리교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옛 사람은 완전하게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온전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구원하는 번제단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교회가 될 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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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단의 기구들
출 27: 3-8, 요 19: 1-3. 행 11: 22-24.
오늘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목적은 남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목적이라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사명을 잃어버리면 그때부터의 존재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들이 짜증납니다. 사명에 감격해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런 사명은 보통의 사람들이 평범히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어느날 요한 웨슬리에게 사람이 물었습니다. 만약에 내일이 마지막이라고 할 때에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랬더니 요한웨슬리는 말하기를 오늘처럼 살아가겠습니다. 오늘의 최선을 연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본다면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dno\ptmffl의 후예입니다.
오늘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일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곤란하며 초라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교회에 불림 받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막연히 보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교회에 보내실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생명을 연장하여주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에는 주님의 말로다 할 수 없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보내주셨다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의미가 상실됩니다.
왜 있어야하며 왜 내가 이곳에서 성도라는 말을 들어야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안고 우리는 오늘 성막에 대한 부분을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 지난 시간에 우리는 번제단을 기억을 하였습니다.
번제단에는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의 첫째는 피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신앙고백에는 피의 흔적들이 없습니다. 피의 사건이 없이 그리스도인이요, 피의 보상이 없이 천국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우리들의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필요함을 인식을 하여야 하며 오늘의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세워졌음 인식을 하여야 합니다.
힘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처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을 주심은 환경과 처지를 극복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늘 환경적인 요인 앞에 절절매는 상황들입니다. 다니엘을 아십니까? 그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환경의 지배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환경을 믿음으로 이겼습니까?
왜 그리도 그렇게 힘이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전락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힘의 배경이 세상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조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의 배경은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배경은 성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은 우리들이 감당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들이 표현되어지는 것 중의 하나는 성령의 생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특징은 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번제단에 있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생활이 아니고는 늘 인간적인 감정에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분명히 성령의 불에 의지한 놀라운 바람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 개인 안에 이 성령의 도우심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늘 우리들에게 참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늘 인간적인 부정이 있고 인간적인 시각으로 인한 아픔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 안에는 늘 용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양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용서가 선언이 되면서 그분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들의 자리에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 저는 이 번제단에는 늘 필요한 기구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 출27:3절의 말씀에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번제단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조기구들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완전한 번제단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번제단에 필요한 것으로 준비되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번제단의 첫째는 재를 담는 통입니다. 우리 교회안에 벽난로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제는 몇 일을 사용하다보니 재가 쌓여있습니다. 그 재를 치우는 일이 남아있습니다.그 재를 치우기 위하여는 통이 분명히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할 것이 잇습니다. 재는 가벼워서 아마도 온통 재 범벅이 되지 않기 위하여는 조심스럽게 그 재를 치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는 쓰레기입니다. 재는 바람에 날리면 모든 더 지저분합니다. 그 재는 바람에 날리면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 재를 치우는 일은 보통의 자세를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나는 우리교회의 한 권사님을 볼 때마다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분은 재를 치우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교회의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들의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기도 하고 정함이 없이 놔두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늘 그 쓰레기를 치우시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일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런 일들은 가르치는 일이나 성가대나 교회의 특별한 일에 쓰임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일쯤으로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사명으로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언제든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 일생을 불평으로 살아가려고 작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날리면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재와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담는 재 담는 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재를 담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물을 주어 담는 그 통은 누구를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약점을 친히 담당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우리의 성정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양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분이 십니다. 재처럼 날리고 불필요하고 해만 끼치는 존재들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재 담는 통처럼 쓰이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불필요하고 오히려 존재하는 자체가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드는 우리자신들이건만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감싸주시며 오히려 날리지 않도록 안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담고 안아주는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에 교회의 모든 일들이 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직서를 써 가지고 담임목사님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모든 일들을 안하고 백의 종군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겠다고 주어진 사역을 살임을 하고 백의종군하겠다는 그 뜻을 보니깐 참으로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일을 안하고 백의 종군한다는 이야기는 말장난입니다.
재 담는 통이 되시기 바랍니다. 불만도 날리지 않게, 불편도 날리지 않게, 자기의 뜻이 관철이 안된 것 때문에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도 안아볼 수 있는 재를 담는 통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부삽입니다.
번제단의 탄재를 긁어내는 도구입니다. 부삽으로 긁어내야 담을 수가 있습니다. 재를 긁어내는 도구는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예배를 드리고 나면 모두가 기뻐야 하는데 그런 감격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번제단에 제물을 드리고 난 후에는 재가 남듯이 예배를 드리고 나면 흡족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떡합니까? 긁어내는 것입니다. 이때에 잘 긁어내지 않으면 다음번에 불을 지필 때에는 불잘 붙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재가 없이 재 긁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교회 안에서 평생의 야당으로 살아남는다. 그게 대단한 일입니까? 교회 안에서 어떻게 나는 야당이다. 나는 여당이다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들과 이야기를 하셔서 그분은 정말로 우리들에게 민주적으로 일을 하여나가시는 분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의사는 도무지 수렴을 안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일방적이십니다. 아무런 의사도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의사는 그래서 일방적이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달음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야당이 된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는 불행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여러분들에게는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즐거움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소망으로 엮어지기를 바랍니다. 재를 긁어내지 않으면 교회는 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긁어서 온전케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험거리를 알고 먼저 긁어내는 성도입니다. 오랬동안 쌓이면 연기만 나고 번제물로 잘 태워지지 않기에 온전한 예배를 위하여 온전한 교회를 위하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부삽은 재를 갖다가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만 긁어내서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부삽은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분은 우리의 남아있는 찌꺼기를 긁어주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앞에 서면 부정적인 것들이 들추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재를 담는 통으로 옮겨주어서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불평과 불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여 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대야입니다.
대야는 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뺀 후에 그 번제물을 제단에 담아 나르는 기구입니다.
제물이 만약에 소 한 마리라면 그것을 담아 나를 수 없는 그릇이 없다면 번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제물을 끊임없이 제단에 나를 수 있는 역할은 대야만이 가능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우리지방의 어느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를 만나자마자 그러시더라구요
"감리사님 저는 새해 첫 주에 새 가족을 3사람이나 만들었습니다. 올해는 10명을 정하였는데 그래도 장로가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전도를 하여야 하는데 3명이 첫날에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감리사님 앞에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 장로님은 대야입니다.
영혼구원을 하는 성도는 번제물을 대야에 담아 제단에 옮기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이 전도를 하는 대야교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작년의 쎄미나 중에 개미의 집단에는 15%만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그랬던가요?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대야교인들이 도시기를 주미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돌아오는 당회에는 제가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전도를 얼마나 했는가를 물어보려고 합니다. 다 전도하는 자들이 도기를 바랍니다.
교회성장학자에 따르면 어느 교회나 10%의 전도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성령을 받았는데 그곳에는 12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 제자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10%입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전도의 은사가 없는 것 같다. 전도를 은사로 여기십니까? 전도는 결단코 은사가 아닙니다. 전도는 명령입니다.
명령과 은사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은사는 주어진 사람들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면 그것은 폐만 끼치지 되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대야가 없는 제단은 번제단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를 날마다 만드는 회개할 사람을 날마다 인도하는 대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지 않고 있다면 그곳은 번제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야의 역할을 감당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미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번제단의 또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것은 고기 갈고리입니다.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온 고기를 찍어서 제단에 올려놓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어느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인데 갈고리는 번제물이 드려지는 동안에 그 고기가 제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전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전도한 교인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떨어지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행11:22-23절을 보면 그곳에는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파송이 되어서 교회를 돌아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안디옥 교회에 방문을 하면서 교회의 형편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은혜가 있는 사람은 은혜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교회는 은혜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어찌하던지 은혜로 보고 은혜로 말하고 은혜로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나바는 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를 순회를 하면서 그 교회 안에 은혜가 있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권고하고 힘을 실어주는 사람입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모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이 갈고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꾼들이 교회 안에는 필요합니다. 분리시키고 문제를 만들어서 당을 짓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떨어뜨리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불을 옮기는 그릇입니다. 광야에 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성막의 번제단은 옮기는 과정에는 불을 꺼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씨는 남겨두어야 하였기에 그 불씨를 담아두는 그릇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불은 성령을 뜻한다고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 불은 지금 현재의 교회에도 필요합니다.
불이 없으면 교회는 늘 싸늘합니다.
이성만을 주장하는 교회는 늘 싸늘합니다.
교회는, 믿음이라는 것은 이성을 초월하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주님이 바다위로 걸어가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주인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믿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그 주님처럼 바다위로 걸어 갈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지금도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그분은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늘 권세가 있으신 분이심을 성경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성으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이성을 초월하여야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성령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그 인도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교회 안에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도가 있으면 교회는 당연이 불이 붙어집니다.
불을 옮기는 그릇 교인은 언제나 교회 안에 희망의 원동력이 됩니다.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이 힘을 얻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불을 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불을 끄는 전문가입니다. 교회가 일어서려고 하면 바치던 디딤목을 넘어뜨리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일어서면 그를 향하여 마귀의 도구가 됩니다.
몇일전에 우리교회의 집사님이 우리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의 아내되시는 집사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집사님은 울면서 저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교회를 통하여 감사와 감격으로 섬기고 받들고 있는데 남편 집사님은 연수제일교회를 와서 성장을 하는데 아직도 어린아이같이 조심스럽게 자라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린 신앙의 자리에 자라나려고 하면 누군가 불을 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불평만을 늘어놓아서 결국은 남편의 신앙이 잘 자라다가 그만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분은 어린 아이같은 남편에게 할 이야기가 있고 조금 자란 다음에 할 이야기가 있는 데 그 분이 원망스럽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무리 권고를 하여도 이미 그 마음에 마귀가 뿌리고 간 가라지는 숙으려 들지않고 더 승해서 이제는 돌이키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안타깝게 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불끄는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언제나 찬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늘 불을 가지 뜨거운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차가운 곳에 불을 옮기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번제가 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제단으로 만들어 가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