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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출 4:2-4)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블로 피카소는 1943년 어느 가을 맑은 날 혼자 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고장 나서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버려진 자전거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 안장과 핸들을 떼어내고는 그 안장에 핸들을 거꾸로 붙이고 그 이름을 '황소머리'라고 지었습니다.
이 버려진 자전거의 고철로 만들어진 작품 '황소머리' 가격은 현재 30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300억은 피카소의 상상력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완성한 후에 만족스러워하며 "쓰레기라 해도 위대한 예술품의 재료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버려진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에 의해 위대한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런 것처럼 가장 쓸모없고 남에게 해로움을 주는 사람도 가장 가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고물이 된 자전거가 위대한 미술가의 손에 붙들리면 위대한 작품으로 재탄생 됩니다. 허름한 악기일지라도 위대한 음악가의 손에 붙들리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다 낡은 붓일지라도 훌륭한 화가의 손에 붙들리면 사람을 감동시키는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시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들을 사용하신다면 2012년 밴쿠버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는 장면의 일부입니다. 이 때 모세의 나이는 이미 80세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초라한 80대 노인 모세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광야에 버려진 떨기나무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애굽에서 신음하는 백성, 고통 받는 백성을 구원하는데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민족의 비난과 배척을 받아 이미 뼈저린 실패의 아픔을 경험했던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 내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감 부족과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 그리고 바로에 대한 두려움 등을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미 네 차례나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참으시며 모세를 설득하기 위해 두 가지 기적들을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첫 번째 기적은 오늘 말씀으로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모세에게 묻습니다. 이에 모세가 "네, 지팡이 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목자에게 있어 지팡이는 일상적인 물건으로 보잘 것 없고 양을 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팡이이기에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자, 모세는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일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손 안에 있던 지팡이가 뱀이 된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어쩌면 모세가 길을 가다가 주웠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또한 이제까지 자신의 손 안에 있으면서 양이나 치던 말라비틀어진 나무 조각입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는 몇 년 동안 모세의 손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 지팡이가 도움이 됐으면 됐지, 모세 자신에게 해가 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뱀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지팡이였는데 자신을 죽이려는 뱀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물리면 죽으니까 모세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 뱀에게서 피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왜 하필이면 꼬리입니까? 모세는 광야에서 뱀을 많이 보았을 것이고 뱀을 잡는 기술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뱀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를 잡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압도되어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그 뱀의 꼬리를 잡자 그 징그러운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이적을 보이십니다.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셔서 모세가 그대로 하였더니 손에 나병(한센병)이 생겨 눈처럼 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품에 넣으라 하셔서 다시 품에 넣었다 내어보니 이전처럼 정상이 되었습니다. 8-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8]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가지 완벽한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고, 그것도 안 되면 앞으로 열 가지 재앙에 대한 것도 미리 말씀하심으로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자신의 영적 리더십과 하나님의 메시지와 소명에 관한 것들을 믿지도, 듣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세를 설득하시며 확신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기적을 주셨으면 하나님의 제안에 '예' 하고 순종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하며 또 변명을 합니다. 좀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안 믿어줄 것이라 하여 그 문제 해결책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언변에 자신이 없다는 이유를 댑니다. 모세는 지금 유창한 웅변의 재능을 지도자의 우선적인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지혜와 말의 재능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과 순종에서 나오는 영적 능력인데 모세는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을 평가하여 못한다고 변명하고 거절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런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혜보다 인간의 재능이나 말과 세상의 지혜를 앞세우는 애굽적인 사고방식, 곧 세속적인 가치관을 우선시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러한 세속적인 고정관념에 빠져 있음을 보시고 속상해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꾹 참으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11절에서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끔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는 12절에서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하고 애굽으로 갈 것을 다그치십니다. 이만하면 더 이상 사양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입과 함께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에게 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더 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모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번에는 이유도 없이 못한다고 합니다. 주제넘게 아무 데서나 나서며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위험스럽고 미덥지 않지만 이젠 '예'할 상황인데 끝까지 못한다고 고집하면 일을 맡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이제까지 참고 설득하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노를 발하십니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안다. 그가 너를 맞이하러 올 것이니 너는 그에게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아론의 입에 함께 있어 네가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말할 것이니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하시며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대변자로 준비시키시고 이젠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7절에서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상황을 종료시켜 버리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더 이상 거절 못하고 드디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20절을 보면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애굽을 향해 출발하는 순간부터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기 전에 그의 지팡이는 그저 마른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살았던 사람이라 그 누구보다도 애굽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80세의 노인이 된 모세에게 단 한 명의 군인도 붙여주지 않으시면서 맨손으로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오라 명령하셨습니다. 모세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두려움으로 주저하고 있는 동안 모세의 지팡이는 그저 볼품없는 마른 막대기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애굽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 볼품없는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 출애굽 대역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갑자기 불치병을 주시지만 그것을 한 순간에 고쳐서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이 모세를 하나님의 손 안에 두어 지팡이처럼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는 것, 내 손의 가치, 내 손이 하는 것 너무 과소평가할 것이 아닙니다. 가치 있는 것이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의 근원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네 손에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토프카피(Topkapi)라는 도시에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에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세례요한의 뼈 등 성경인물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유물들이 정말 모세의 지팡이인지 또 다윗이 사용했던 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진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여러 가지 입증해야 할 일들이 많겠지만 그 지팡이가 모세 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지팡이라고 생각하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박물관에 전시된 그 지팡이를 보고 이것이 정말 모세가 사용하던 지팡이가 맞느냐고 묻는 이유는 그 지팡이의 볼품없는 모양에 실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지팡이가 엄청난 이적들을 행한 것이기에 '모세의 지팡이'하면 영화 '십계'에서 모세로 열연한 찰톤 헤스톤이 들고 있던 크고 멋지게 생긴 신비한 모양의 지팡이를 연상합니다. 우리나라 영화를 봐도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는 모양이 희한하게 생겨 지팡이만 봐도 그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의 권위가 있어 보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마법사 간달프(Gandalf)의 지팡이도 머리 부분에 무슨 수정 같은 덩어리가 박혀 있어 찬란한 빛이 쫙 비치면서 엄청난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는 겉모양이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토프카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소위 모세의 지팡이라고 하는 그 지팡이가 얼마나 볼품없는지 길이는 약일 미터 남짓에, 굵기는 대나무보다 더 얇아 지팡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금 굵은 회초리라고 하는 편이 훨씬 어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 '십계'를 보고 모세의 신비롭고 멋진 지팡이를 상상했던 방문객들은 모두들 '이게 정말 모세의 지팡이 맞느냐?'고 실망에 찬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기거하였던 미디안 광야에 직접 가보면 그곳에서는 찰톤 헤스톤의 손에 들려 있던 것과 같은 크고 굵은 가지의 나무를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토프카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회초리처럼 볼품없는 지팡이가 사실에 더 근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도 중동지방에서 양을 치는 목동을 보면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지팡이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일 미터 정도 크기의 지팡이를 들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을 봐도 목동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갔을 때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들고 나왔느냐?"고 조롱하는 골리앗의 말을 보면 양치는 사람들의 지팡이는 작은 막대기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성경보다 영화를 더 가까이 하고 재미있게 보다보니 성경에 나오는 사실과는 좀 동떨어진 상상력이 동원되어 왜곡된 지식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모세 당시의 사람들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보려면 모세가 기록한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만들라고 하신 언약궤 안에 넣어 두었던 세 가지 물건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히 9:4). 그런데 출애굽기 25장 10절에 나오는 언약궤의 모양을 보면 길이가 이 규빗 반, 넓이가 일 규빗 반, 높이가 일 규빗 반으로 된 상자입니다. 일 규빗이 약 45㎝라고 할 때 언약궤의 길이는 약 120-130㎝ 정도가 되며 그 안에 넣을 수 있는 아론의 지팡이 길이는 그보다 짧은 것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 토프카피 박물관에 전시된 일 미터 남짓의 막대기가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회초리보다 조금 굵은 볼품없는 지팡이를 들고 서있는 모세의 실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만약 그의 손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가 들었던 지팡이와 같은 멋진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면 그 멋진 지팡이 자체가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에는 차라리 회초리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정도의 전혀 볼품이 없는 막대기가 들려 있습니다. 어쩌면 그 볼품없는 막대기야말로 바로 모세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 나와 양치기의 인생을 시작한 지 40년이 지난 모세는 어느덧 팔십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정도의 나이, 연세라고 하면 손주의 재롱을 보면서 인생을 즐길 때입니다. 아마 모세도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시니 마른 막대기 같았던 그는 출애굽의 대업을 이루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 되니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약하고 힘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내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내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나는 할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며 패배주의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볼품없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극복해 나가도록 격려하십니다. '맞다. 너는 마른 막대기다. 하지만 너는 나의 사랑스런 자녀다. 내가 내 손으로 너를 붙들리니 너는 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낼 나의 종이다. 지금 네가 가진 것으로 나의 능력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양을 치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리니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고, 80세의 양치기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니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길을 향하여 가는데 온통 기적으로 뒤흔드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손에 40년 동안이나 무심코 들려 있던 마른 막대기가 민족 해방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사용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민족을 구원하는 도구로, 나 자신을 온전케 하는 도구로, 우리 교회와 가정 그리고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지금 있는 자그마한 것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 손에 주어진 것, 가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얼마든지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쓰임받기 위해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쓰십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하나님은 그만큼 쓰십니다. 모든 것이 다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재능, 작은 것 같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쓰시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고 비관하지 마시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금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너무 부족하다고 여긴 그 재능,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쓰시는 분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한 회사의 직원이지만 어느 날 대통령이 비서로 쓰면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될 수 있습니다. 버려진 자전거가 300억 원의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아무리 부족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쓰시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왼손잡이 에훗도 쓰셨습니다. 겁 많고 의심 많았던 기드온, 아내를 내어놓은 아브라함, 배반자 베드로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재능을 사용하셨습니다. 역사 속에 한 시대 위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잘나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부족하기에, 모자라기에, 흠이 많기에 그들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할 때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이 하나님께 쓰임 받느냐 못 받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축복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모세 이외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쓸 수 있었습니다. 꼭 모세이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 말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받아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부담으로 회피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200만 이라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미사일이 필요하고 전차가 필요하고 대단한 재물이 필요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팡이를 가지고 이적을 행하라고 합니다. 지팡이는 전쟁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양치는 데는 필요하지만 전쟁을 하는 데는 오히려 거침이 되는 지팡이입니다. 사람은 양도 아니기 때문에 백성들을 이끄는 데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이적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볼품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저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모세는 지팡이를 던질 때 뱀이 되고 꼬리를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도구, 익숙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으니까,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하니까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지팡이로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됩니다.(출 7:9)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자 피로 변합니다.(출7:17) 지팡이로 개구리를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합니다.(출 8:5)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니까 이가 됩니다.(출8:16)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으니까 뇌성과 우박이 내립니다.(출9:23)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으니까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들입니다.(출 10:13)
홍해 앞에서 200만 명의 백성들이 원망하며 절망합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있어 진퇴양난에 놓여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백성들이 아우성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이 때 모세가 뭐라고 말씀합니까?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하나님이 주신 것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홍해를 가르게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불을 피우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큰 산이 넘어지게 하며 인생의 홍해를 가르는 도구가 됩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익숙하고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 받으면 승리의 도구가 됩니다. 모세의 손에 40년 동안이나 무심코 들려 있던 마른 막대기가 민족 해방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쓰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에 손 안에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사탄에게 쓰임 받지 말고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질그릇 같은 나를 하나님이 붙들어 쓰시면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 7-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이사야 41장 8-10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께서는 힘이 없는 자를 그 오른손으로 붙들어 힘을 주시고 실패로 낙심한 사람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제 가라!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하십니다. 내가 모든 면에 빈틈이 없이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맡기시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믿음으로 지팡이를 들고 나가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나를 통해 세상을 두렵게 하시고 당신의 능력을 행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일까지 다 하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아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막대기 같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셔서 내 손에 들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학문이든 물질이든 시간이든 나에게 지팡이로 주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여 주님 나라를 위해 힘 있게 쓰임 받는 주의 일군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며 "이제 가라!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하시는 말씀을 기억하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 주께서 맡기신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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