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리얼리즘 양상과 그 특징(4)
기본적 요소와 시적 특성: 전형성과 진실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본 장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씌어진 리얼리즘시의 시적 특성을 고찰하는 차원에서 집필되는만큼 리얼리즘시에 나타난 기본적 요소와 시적 특성의 고찰을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시의 이해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여기서 리얼리즘시의 기본적 요소를 유형별로 살핀다는 것은 ‘어떻게 한 편의 리얼리즘시가 되나’를 가늠해 보는 것이니 시에 대한 일종의 생성론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성론적 접근이야말로 유기적 형상으로서 시에 대해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 되리라 본다. 리얼리즘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시는 다른 사조적 특성을 가지는 시와 분명 구별되는 특성적 원리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본 장의 내용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시의 기본적 구성 요소로 진실성, 전형성, 주체성, 산문성,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체를 형성하는 리얼리티로서, 시의 구성적 특성을 이룬다. 필자는 이 네 가지 항목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어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이 두 가지 항목들은 유기적 형상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위한 추상의 통로로서, 리얼리즘시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다. 이들 항목 혹은 논의의 축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고, 본 장의 논의 또한 그러한 상관 관계에 유의해서 써나갈 것이다.
가. 전형성과 진실성
엥겔스는 리얼리즘을 정의하여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라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물론 극히 일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마르크스주의 사상 전체를 그 배후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전형성>은 바로 이 정의에서 발전된 것이며 리얼리즘의 문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이론가들에 의하건데 <전형적인 것을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전형적인 것은 <미래 사회발전의 법칙과 전망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형성>의 개념은 관찰된 현실을 직접적으로 재현한다는 <리얼리즘> 종래의 의미를 변모시킨다. 즉 <리얼리즘>은 그 대신 어떤 원칙에 입각한 조직적인 선택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리얼리즘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전형’ 개념이 함축하는 정확하고도 원만하며 포괄적인 현실인식의 중요성을 제대로 살려낼 필요성이 있다. 시적 전형론의 유효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시를 통해서는 현실세계에 대한 적실하고도 유연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현실세계에 대한 정확하고도 원만하며 포괄적인 인식을 시적 형상으로 구현하는 문제가 다름 아닌 시적 전형의 문제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 속에 구현된 형상이 현실세계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결부되는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형성의 논의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리얼리즘시의 창작 방법의 하나로 전형성의 추구를 논한다는 것은 개별적 형상이 어떻게 현실세계의 보편적 문제를 끌어안을 수 있느냐의 과제를 탐색하는 것이다. 예술적 현실 반영이 “특정하고도 본질적인 한 측면에서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인 이상 시적 전형론의 초점은 시적 형상을 통해 어떻게 현실인식의 순간성과 파편성을 극복하느냐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전형의 개념이 시에 적용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서정적 주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정적 주체가 환기하는 정서, 혹은 정서적 체험이 되어야 한다.리얼리즘의 성취 혹은 시적 성취를 염두에 둘 때, 시에서 전형 논의는 최대한으로 유연성을 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전형론에 의해 리얼리즘의 성취가 판가름나는 게 아니라 전형성의 구현 정도가 리얼리즘 성취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시는 서정시임으로 정서에서 전형성을 찾아야 한다’는 식의 연역적 논리를 앞세우기보다는 리얼리즘의 성취와 관련하여 ‘개별적 형상이 얼마나 현실세계의 핵심적 문제를 끌어안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넷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연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여승> 전문 -
인용시의 시적 응축은 우선 과감한 생략을 통해 이루어지는 바 가령 지아비의 행적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인도 끝내 알아낼 수 없던 사고로 죽었을 거라는 추정을 하게 하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이 시의 시적 응축은 주체의 깊은 슬픔이 행간에 스며들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인용시의 여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에는 시적 주체의 막막하고도 안타까운 마음이 적셔져 있다. 한 여승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불과 열두 행의 시구에 수용되어 있지만 시의 형태에는 조금도 무리가 가지 않고 있다. 산문적 화장과 시적 응축이라는 면에서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경지를 보여준 경우다.
그런데 문제는 <여승> 속에 구현된 여인의 기구한 생애가 당대의 식민지 현실 전체와 연결된다는 데에 있다. 금전찬에서의 옥수수 행상을 하다가 승려가 되고 가지취의 냄새가 나는 여인은 특별한 개인이지만 그녀의 생애는 가족이 붕괴될 지경의 당시 농촌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인용시의 여인은 개별적 형상이로되 생존 자체가 의문시 될 정도로 열악해진 일제강점기의 민족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용시의 ‘여승’의 형상에서 전형성의 구현을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인의 정신과 삶이 당대의 핵심적 문제와 결부되지 않는다면 정형성의 추구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러한 핵심적 문제가 시적 주체와의 상관 관계 속의 ‘시적 대상’에 구현된 경우와 시적 대상과의 상관 관계 속의 ‘시적 주체’에 구현된 경우가 있는데, <여승>이 전자에 속한다면, 이용악의 <5월에의 노래>는 후자에 해당한다. 장시가 아닌 보통의 시에서 시적 형상은 시적 대상을 중심으로 통일되거나 시적 주체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하여 <여승>의 경우 시적 대상에서 전형성을 찾고, <오월에의 노래>의 경우, 시적 주체에서 전형성을 찾은 것이다.
시에서, 특히 리얼리즘시에서 실감이 감동의 원천이라면 진실성의 논의는 회피할 수 없는 과제라 하겠다.원론적으로 사실주의적 시는 개연성, 곧 경험적으로 가능한 것, 또는 조회 가능한 시유형이다. 요컨데 리얼리즘적 시에서는 진실성에의 충실성이 기본적 의무조항으로 요청된다. 시에서 실감이란 진실성에서 나온다. 진실성의 구현은 시적 성취에 이르는 데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면서 리얼리즘시의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진실성이란 ‘시 쓰는 동기가 순수하고 올바르다고 해서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 창작 동기의 순구성은 시에서 진실성을 구현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건인 것이다. 이것은 리얼리즘시의 요건인 ’세상에 대한 진실한 마음‘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시의 진실성은 ’시의 진술과 그 지시 내용이 일치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주체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마음이 시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그러한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가의 문제로 남을 것이다.
사회 현실에 대한 정당한 관심 혹은 올바른 정치의식은 리얼리즘시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중요한 것은 사회의식 혹은 정치의식을 시 속에서 제대로 소화해 내는 문제다. 시에서 사회의식을 배제해서 작품으로서의 파탄을 막을 수는 있지만, 그런 식의 창작은 리얼리즘의 성취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시적 성취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눈보라는 하로 종일 북쪽 철창을 따리고 갔다
우리들이 그날 회사 뒷문에서 ‘피케’를 모든 그 밤같이........
몇 번 몇 번 그것은 왔다 팔 다리 코구녕 손꾸락에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푸고 쓰린 것보다도 그 뒤의 일이 알고 싶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늙은 어머니와 굶은 안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모두들 다 사나이 자식들이다
언제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니
너만이 늙은 어메나 아베를 가진 게 아니고
나만이 사랑하는 계집을 가진 게 아니라고
어메 아베가 다 무에냐 계집 자식이 다 누에냐
세상에 사나이 자식이 어덯게 xx이 보기좋게 패북하는 것을 눈깔로 보느냐
올해같이 몹시 오는 눈도 없었고 올해같이 치운 겨울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계집애 어린애까지가
다 기계틀을 내던지고 일어나지 않았다
동해 바다를 거쳐오는 모진 바람 회사의 뽐뿌, 징박은 구두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속에서도 우리는 이십 일이나 꿋꿋이 뻗대오지를 않었니
해고가 다 무에냐 끌려가는 게 다 무에냐 그냥 그대로 황소같이 뻗대이고 나가자
보아라! 이 치운 날 이 부람이 부는 날! 비누궤짝 짚신짝을 싣고
우리들의 이것을 이기기 위하야
구루마를 끌고 나아가는 저 어린 행상대의 소년을.......
그러고 기숙사란 문 잠근 방에서 밥도 안먹고 이불도 못 덮고
이것을 이것을 이기려고 울고 부르짖는 저 귀여운 너희들의 계집애들을......
- 임화, <양말 속의 편지> 전문 -
단편서사시의 대표작 하나다. 시적 수준을 확보하면서 당시의 노동운동에 이만큼 밀착된 작품도 드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의 제재는 파업이고, 시의 위상은 파업투쟁 중인 동료 노동자에게 보내는 ‘양물 속의 편지’로 상정되어 있다. 인용시에서 창작 주체의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은 노동문제로 집중돼 있고 그것은 임화의 카프 시인다운 면모인 셈이다. 파업투쟁을 이끄는 선진적 노동자를 시의 화자로 삼아 그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데 수반되기 쉬운 작위성을 상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