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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0편 5절-6절: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5절: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려면 어떻게 해 달라? 응답을 해 달라. 하나님께 건져달라고 할 때 미운 자를 구원해 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구원해 달라고 해야 옳은 기도다. 그런데 어떻게 응답을 해 달라고 하느냐? 오른손으로 구원해 달라고 한다. 그냥 ‘당신의 손으로 구원하소서’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왼손으로 구원해 주소서’ 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데 왜 구태여 오른손으로 구원해 달라고 하는 거냐?
주의 오른손으로 응답을 해 달라는 것은 ‘오른손이냐, 왼손이냐?’ 이걸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른손’이란 주님의 힘 있는 능력의 역사를 의미하는데, 곧 진리의 역사를 말한다. 진리의 역사는 언제나 성령님과 동반하기 때문에 굉장히 힘이 있는 거다. 그래서 진리의 역사의 주체성이 된 자는 그 정신력이 굉장히 강해서 세상이 넘어뜨리지 못한다.
보편적으로 오른손이 왼손보다 힘이 강하듯이 신앙 면에서 ‘오른손’이라고 할 때는 육적인 의미보다 영적인 의미가 먼저 붙는다. 강하다 그 말이다. 튼튼하고 강하고 능력이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적이며 육적이며 비진리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종교사상이 정복해 들어올 때 여기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강력한 하나님의 진리본질이라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니까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려면 진리로서 세상적이며 육적이며 죄악적인 곳에서 끄집어내야 하고, 정복을 해야 한다. 진리가 강력한 능력이 있는 거다. 진리가 힘이 있다.
세상적 비진리적 인본주의 정신이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처럼 교회로 쳐들어 올 때는 성도가 진리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교회 인도자는 이걸 봐야 한다. 그 다음에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 속에 들어있는 세상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되고 신앙이 바로 선다. 그러니까 이 구원이 사람에게 있는 거냐, 사업에 있는 거냐? 사람이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성도의 구원은 주님의 오른손이 아니면 안 된다. 주님으로 인해, 진리로 인해 되어진 것이 아니면 구원이라는 말이 안 붙는다. 진리라야 사람의 차원을 올리거나, 끄집어내거나,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거다. 이렇게 하는 게 다 구원의 일이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아니면 안 된다.
예수 믿고 병이 낫는 차원의 구원도 있기는 하지만 이건 힘이 없다. 이런 구원은 영의 구원에 따라오는 거지 이게 목적이 되면 안 된다. 이런 걸로 ‘믿음이 있네. 없네’ 하는 것은 안 된다. 말하자면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구원에 힘써 나갈 때 우리의 몸은 자꾸 움직이다 보면 몸이 정화가 되기 때문에 내 몸의 잘잘한 감기 등의 몸 속의 잡병들이 물러가기도 한다. 우리의 구원에는 이런 힘이 들어있다.
지구 땅덩어리는 그 원리가 인간의 몸과 비슷해서 인간이 심한 공해나 오염을 일으키지 않으면 스스로 정화가 된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놨다. 그런데 인간들의 욕심이 지구가 스스로 정화를 못 시킬 정도로 물질 만능주의로 살다보니 지구가 자꾸 더러워진다. 결국 인간 자기가 고통을 받게 된다.
살아있는 진리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인간은 구원이 안 된다. 사람이 바로 되지를 않는다. 사람이 바로 되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있지,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있지, 하나님의 도덕성이 들어있지, 사람이 이렇게 되면 자기를 다스릴 줄 알게 되니 여기에는 건강도 들어있고, 열심히 일을 하게 되니 물질이 들어오는 것도 들어있다. 이런 이치를 모른 채 자꾸 물질적으로 형편이 펴지기만을 바란다면 이것은 요행을 바라는 거고, 이건 신앙 믿음이 아니다. 이방신을 믿는 사람들이 이런 요행을 바라는 거지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정복이다. 정복의 성질이 들어있다. 이 정복성이 그냥 맞쳐다보고 나가는 것도 있고, 빙 둘러서 정복을 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방편이 있다. 어쨌든 기독교의 성질은 정복이다. 사는 것도 계속 개발이다.
기독교가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서양사람들을 보면 개척정신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은 이상하게 종교성이 많아서 그런지 어디가 조금만 아프면 손수건에 쌀을 싸서 문지르는 등 요행을 바라거나 귀신에게 공을 드리는 게 많다.
한국에서 애국자가 누구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다. 왜냐? 애국자는 국민을 사랑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애국자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사람을 천국을 사모하는 자로 만드는 일을 하는데, 사람이 이런 사람으로 되면 일반 도덕적인 면에서도 바로 하기 때문에 이런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우리가 애국자다.
모든 성도가 주 하나님의 주권적 독권적인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구원을 얻었다. 이것을 기본구원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을 말한다. 이걸 좀 더 풀어보면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이 땅에 사시면서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만족을 드린 삶을 사셨고, 이로 인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을 얻으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기본구원을 얻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 양쪽에 두 강도가 같이 매달린 것은 우리로 예수님의 삶과 강도들의 삶을 비교해 보라는 거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심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죄인이라서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 대신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맞게 사셨고, 그리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다.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 이 공로로 믿는 우리는 천국에 가는 거다. 이것이 기본구원이다.
이 기본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된 거다. 이 기본구원으로 아담과 하와로 통해 내려오는 우리의 원죄를 다 없이했다. 우리에게 이 원죄가 없어야 기본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가면서 죄를 짓는 게 있으니,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고도 시험에서 틀린 게 있으면 얻어맞기도 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얻어맞기도 하고, 그러면서 고쳐나가기도 하는 거다. 이걸 이룰구원 성화구원이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우리를 당신의 관할 하에 두시고 늘 감찰하시면서 내가 이룰구원을 이뤄나가려고 하면 도와주신다.
믿는 우리는 기본구원은 주님께서 당신의 주권과 독권으로 해 놓으셨으니 이 면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고 이제는 이룰구원을 위해 힘을 쓰면 쓰는 것만큼 주님께서 도와주신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안 하려고 하는 게 들어있다. 하루 온 종일 일을 하고 밤에 늦게 자고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면 벌떡 일어나려고 하는 의욕이 있느냐, 자꾸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자 하는 게 있느냐?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려고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불을 홀딱 거둬버린다. 그런 것처럼 성도가 이룰구원에 게으르고 힘을 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매를 들거나 간섭을 하신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면 신체성장, 기능성장, 지능성장이 되어가야 하듯이 영이 중생된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적 기능과 지능이 성장이 되는 이룰구원을 이뤄가야 하는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예수 믿기 전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세상이라고 하는 정신에 포로가 되어있는 거다. 그 증거가 이런 사람은 신앙에 자유가 없다. 신앙에 자유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포로라는 뜻이다.
세상만사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룰구원을 위해 주관하시는 거지만 성도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개척을 하고 헤쳐 나가는 거다. 이러려면 물질 면이나 능력 면이나 지혜지식 면에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실력이 없으면 만물에게 지배를 받게 된다. 이러면 신앙 면에 자유가 없어지는 거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의 정신이 세상에 쌓여있다는 거다. 이건 이룰구원이 안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런 게 있다. 남이 보면 세상에 포로가 되어있는 것 같은데 자기는 진리를 붙잡고 사는 게 있다. 활동 면에서는 자유가 없으나 신앙 면에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활동도 자유가 없고 신앙도 세상에 붙어있다면 이 사람은 완전히 세상에 포로가 된 거다. 우리교인들이 사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의 수하에서 일을 하는 게 있고, 자유업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살건 그 마음이 진리신앙을 따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자유롭게 사는 거다.
바로 왕을 누가 움직였느냐? 요셉이 움직였다. 믿는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던 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려니 직장인이라면 열심히 일을 해서 사장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하고, 장사를 한다면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물건을 팔아야 한다. 이런 것은 없이 종교적인 이력과 업적을 크게 쌓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주님 앞에 시은자로서 교만자이니 이룰구원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단 마귀의 핵심 이용물이 된다.
믿는 사람이 진리이치를 바로 깨닫고 생명 길로 나가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인격의 사람으로 성장이 되어나간다면 자기의 성격도 성질도 고쳐진다. 믿는 사람은 빨리 고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연관을 지어나가기 때문이다. 이러면 자기가 행복해진다. 이렇게 되는 것을 ‘주님의 손으로 건지셨구나. 주님의 역사가 그 사람을 구원했구나’ 라고 하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역사를 의심치 말아야 한다. 주님의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주님의 손에 건지심을 받는다. 이걸 구원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오른손으로 건지심을 받는데, 이렇게 건짐을 받은 사람은 제일 먼저 안 믿는 사람 측에 있다가 교회로 나온다.
다윗이 구원의 기도를 했는데, 우리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구원의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서 전도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령 어느 집이 맨날 싸운다면 이 집을 위해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하겠느냐? ‘예수 잘 믿으면 복 받고, 날마다 술도 먹을 수 있고, 돈도 막 굴러 들어온다’ 라는 식으로 전도를 하느냐? 사람을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구원이 되는 집안은 온 가족이 하나님과의 단일의사로 들어간다. 그러나 구원이 안 되는 집안은 예수를 믿어도 식구들의 소원 목적이 제각각 다르다.
6절: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하나님 당신 자체가 거룩하시다. 따라서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거룩하고 활동하시는 모든 것이 거룩하다. 말씀도 거룩, 활동도 거룩이다. ‘거룩’이란 빛이 가는 곳은 빛과 어둠이 구별이 되고 다 드러나듯이 구별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구별을 하려면 하나님의 것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구별된 옳은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 자타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구별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구별을 시키시고, 활동으로 구별을 시키시고, 정신도 사상도 마음도 구별을 시키셔서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거룩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신다.
‘내가 뛰놀리라.’ 누가 뛰논다는 거냐?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라고 했는데, 누가 말씀을 하시는 거냐?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내가 뛰놀리라’ 라고 하는 것은 누가 뛰논다는 거냐? 하나님이다. 그래서 ‘내가 뛰놀리라’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승리를 보장하는 구별운동의 역사를 과감히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신나게 구별의 일을 하시겠다는 거다.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이 말이 혼성 혼합으로 합치겠다는 거냐, 구별을 시키겠다는 거냐? 구별을 시키겠다는 거다. 세겜은 요단강 서편 고을이요, 숙곳은 요단강의 동편 고을이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은 분명히 다른 건데, 이 땅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곳이다. 그런데 왜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한다고 하시는 걸까?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세겜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고, 숙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나누고 측량을 한다는 거냐?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에게 당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고대 성읍이기도 하고, 푸른 초장이 있고, 피난처가 있고, 요셉의 무덤이 있고, 여호수아의 고별사가 여기서 있었고, 야곱이 이곳의 땅을 샀고,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고, 솔로몬의 직속 부하였던 여로보암이 이곳에서 왕 위에 올랐다. 이 세겜은 지대가 약간 높은 들판이라서 무엇이든지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자랑할 것도 많고 흉잡힐 일도 많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다.
그런가 하면 속곳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서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숨어있다. 그래서 골짜기 구석구석마다 천막을 세워놔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두운 골짜기라서 사람이 조용히 숨어있기도 좋다. 그러니까 안 나타났다 뿐이지 조용한 게 조용한 게 아니고 안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게 아니다. 이 숙곳은 야곱이 일시 거주했던 곳이고, 숙곳이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비협조적이었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진을 쳤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겜이건 숙곳이건 문제는 이곳에 이방인들이 이스라엘과 같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이스라엘이 혼합적인 신앙사상이라는 거다. 그래서 이걸 나누겠다고 하는 거다. 혼합으로 되어있는 정신 사상을 나누겠다는 거다.
우리교인들이 다른 교인들과 얘기를 할 때 ‘아, 이 사람이 다니는 교회는 세상과 혼합이 돼 있구나’ 하고 알아질 때는 주의 칼날 같은 말씀으로 나눠야 한다. 쪼개야 한다. 쪼개면 듣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 쪽에 있는 것인지, 말씀 쪽에 있는 것인지 그냥 드러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빛을 확 비추면 듣는 사람이 구별이 들어간다.
이스라엘이 다른 것과 혼합이 된 사상을 그대로 둔 채 이방인들과 싸운다면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반드시 진리로 단일이 돼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전도를 나가면 오직 진리만 외치겠지만 세상이 절반쯤 들어있는 사람이 전도를 하게 되면 진리를 말하는 것 같은데 세상을 말하게 된다. 이러면 싸움이 안 된다. 진다.
귀신들린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할 때 진리정신으로 무장이 된 사람이 기도를 하면 문제가 없는데 세상정신이 들어간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되면 귀신들린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오히려 기도를 한 사람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돌아올 수도 있다. 믿는 사람이 이방 혼합적인 사상이 주격적으로 되어있다면 영적인 싸움은 싸우나 마나다. 힘만 들 뿐이다. 영적 이스라엘이 바른 싸움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절대 정확한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를 가지고 진리사상인지 비진리사상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믿음, 믿음’ 할 때 그것이 영에 속한 믿음인지 육에 속한 믿음인지, 천국에 속한 믿음인지 땅에 속한 믿음인지, 임시성인지 영원성인지, 생명과를 따먹고 나온 신앙인지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신앙인지를 나눠야 한다. 성격적으로 나누고, 성질적으로 나누고, 성분적으로 나눠야 한다. 척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측량을 하는 것은 나누기 위해서다. 연관적으로도 구별하고 또 구별을 해야 이스라엘의 싸움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믿는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군대인데, 영적 이스라엘 군대가 적을 알아보려면 눈이 밝아야 한다. 몸 밖에 있는 적은 구별하기 쉽지만 몸 안에 있는 적은 구별하기 힘들다. 내 몸 안에 있는 적을 발견해야 내 몸 밖의 적도 알아볼 수 있는 거다. 그래야 신앙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싸운다면 아무리 못 싸워도 잡혀가지는 않는다. 반면에 구별을 안 하고 싸우게 되면 헛 싸움질이 되고, 결국은 원수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망성적인 것들에게 안 잡아먹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도망을 가면 되느냐? 구별이 들어가야 한다. 측량을 해야 한다. 재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