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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旅情)〈16〉녹음방초(綠陰芳草)
금수강산(錦繡江山)이 노래가사를 빌어 표현한다면 온통 푸르른
신록과 향기로운 풀냄새가 꽃보다 나은 때라는 "녹음방초승화시
(綠陰芳草勝花時)"다. 사흘이 멀다 하고 오르내리던 뒷산의 계절
변화가 사십대나 오십대에 느꼈던 감정과 요즘 느끼는 감정이 하늘과
땅차이라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사오십 대에는 맹목적
으로 건강관리 차원에서 산길만 바라보고 달리며 정상의 목적지를 향해
오르내리는 일에 불과하였는데 요즈음은 각양각색의 꽃도 보고 꽃이
지고나면 샛노란 잎사귀가 나날이 푸름을 더해가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며 그 정취를 한껏 느낍니다. 마음의 여유뿐만 아니라 시간의
여유와 오감(五感)이 열리듯 나를 옥죄는 허물을 벗어야만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난날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지내온 날들이
무엇 때문인지 원인조차 열거하기가 싫습니다. 다만 지난 봄날 화려한
꽃의 자태가 꽃 그림자만큼 내 기억에 두텁고 지금의 녹음방초(綠陰芳草)
가 봄날보다 싱그럽습니다.
앞서 말한 정서(情緖)가 나만의 정서라면 장년기의 나의 삶이
고단하였던 탓일까요? 이시대의 보통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분명 지난 봄 부터는 온산을 물들이던 진달래와 철쭉은
물론 마른 풀 섶에서 피어나는 제비꽃 등 이름 모를 꽃까지 나를 붙잡아
세우는 연유를 이제야 나는 알 것 같습니다. 왜 그때는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살았는지 지금에야 생각하니 너무도 후회스럽습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정취를 느끼며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왜 듣지도
못하였는지 곰곰이 생각하니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척박한 이 땅에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버려야할 유산과도 같은 삶의
적폐가 장년기에 상실한 내 인생의 여유라 생각됩니다. 부모님의 삶을
답습이라도 한 듯 가장이라는 삶의 무게가 나를 거세게 짓누르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보니 봄이 오고 여름이가는
줄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인생의 가을 문턱에서 잃어버린
봄과 여름을 선물 받은 이 기쁨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요즈음 가끔 나는 출가한 아이들에게 “너무 힘겹게 살지 말고
여유롭게 살아라.”라는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우리들의 암울한
시절을 답습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과거 우리들은 부모님들로
부터 “한 푼이라도 아끼고 열심히 살아라.”라는 이야기를 수시로
들어왔습니다. 물론 가난이라는 치욕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우리들
부모님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겠지만 지금에야 생각해보니 그러한
가정교육이 나의 머릿속 여유까지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습니다.
다가오는 6월에 부산시청 전시실에서 개최되는 “국제서화만세”
전시회에“지족상락(知足常樂)”이라는 사자성어를 형상화한
서각작품을 전시할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 동창회 여행과 맞물려
개막식 행사에는 참석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으나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 속에는 나의 장년기에 여유를 잃어버린 이유가 들어있습니다.
‘지족상락’이라는 사자성어는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는
내용으로 도덕경(道德經)의 禍莫大於不知足(화막대어부지족)
咎莫大於欲得(구막대어욕득)이라는 원전의 내용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禍)없고, 탐욕보다 더 큰 죄악(咎)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알아야 여유가 생겨나고
여유가 있어야 항상 즐겁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맹목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한 푼이라도 더 벌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기위해 온통 탐욕으로 두 눈을 가리고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가는 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정녕코 우리들 자식에게는
봄과 여름을 잊고 살아가는 허망한 유산을 물려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되돌아보면 까마득한 지난날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처럼
방년(芳年), 약관(弱冠)의 나이에 보았던 잃어버린 꽃과 신록으로
흐드러진 산천이 낯선 정경으로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은 험난한
인생여정(人生旅程)에서 탐욕으로 잃어버린 신기루와 같은 것인가
하여 오늘도 온종일 산자락을 휘젓고 다니며 희열에 넘치는 이 기분을
여러 친구들과 고루고루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 탐욕은
한 시절의 야망으로 치부(置簿)하고 이제는 노욕은 물론 찌꺼기마저도
내려놓고 인생만년(人生晩年)을 즐겨야겠습니다.
요즈음 출가한 두 자식 놈의 여유로운 생활행태를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우리부모님들의 당부처럼 ‘조금 더 아껴 쓰고 노후 대비를 해야 할
터인데’라는 조바심과 ‘즐기며 살아야지’라는 이중적 잣대가 내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내심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되찾은 삶의 여유로 찾은 것이 지나가는 계절에 대한 정취뿐이겠습니까.
과거 가족을 이끌고 다니던 여행이 무엇을 먹고 어떤 곳에서 잠을 자며
또 다른 여행자들과 하찮은 것까지 비교하며 빈약한 주머니를 향한
적개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것은
당시 현실에 대한 부질없는 앙갚음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50년 전 진해 시가지
50년 후 진해 시가지
지난한해 퇴직하면 꼭 해보고 싶었던 전국일주 여행을 지금까지
해오면서 그동안 동해안 고성 대진항에서 서해안 강화도 교동도 평화
전망대까지 해안선 일주여행을 마쳤습니다. 여행과정에서 퇴직 전
가족들과 같이 다녀갔던 여행지에 대한 기억은 빈약한 여행비로
민박으로 숙식을 하였던 허망한 생각만 여행지를 맴돌고 있을 뿐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안에 가득한 탐욕과 가식의 세상에서 구름에 가리어진 달이
나오듯 나와 신세계의 사계(四季)를 즐기며 진정한 자연의 한 자락으로
살렵니다. 마음한번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왜 예전엔 미처
몰랐을까? 내안에 가득한 탐욕이 나의 눈을 멀게 하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삶을 살다보니 내안에 움켜지고 살았던 그것이 탐욕인지를
미처 몰랐습니다. 그냥 부모님이 신신당부하며 쥐어준 것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버릴까하여 지금까지 움켜쥐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불만에 가득하여 내안의 나를 학대하며
살아왔습니다. 인간이기에 탐욕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제 여생은 내안의 탐욕을 씻어내는 일에 매진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안의 평화를 찾아가려합니다.
친구들과 약속된 여행 날이 다가옵니다. 1박2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수일간의 여행처럼 긴 여운이 남는 여행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번 여행이란 글을 통해서 이야기 하였지만 여행의 잊을 수 없는
첫 경험이 초등학교 수학여행이란 점을 명심하시고 그때 그 기분으로
다녀오시고 지난시절 억울한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한 친구가 있다면
그 시절의 추억과 그 기분을 만회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의 심정은 마치 초등학교 소풍 날짜를 잡아놓고 기다리는
심정이라고 하면 체통(體統)없는 늙은이라 이야기하겠습니까?
나이 들어 받은 선물 중에 하나가 여유입니다. 여유는 시간과 마음이
함께하여야 진정한 여유입니다. 만일 물질이 개입되는 여유는 진정한
여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앞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유로움으로
인해 즐기는 참된 여행을 말하는 세간의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여행과
관광의 차이입니다. 여행은 걷는 것이고 관광은 보는 것이며, 여행은
나그네로 떠나는 것이고 관광은 손님으로 떠나는 것이며, 여행은 버리고
돌아오는 것이고 관광은 잔뜩 사들고 오는 것이며, 여행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고 관광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며, 여행은 적당히 챙겨
입고 떠나는 것이고 관광은 잔뜩 멋을 부리고 떠나는 것이며, 여행은
주위 풍경을 위주로 사진 찍는 것이고 관광은 자기중심으로 사진 찍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일하게 두 가지가 공통점인 것은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이라네요. 모쪼록 누더기와 같은 탐욕의 옷을 벗어 던지고 천사의
날개와도 같은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멋진 추억을 만드는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흘러나오는 단가(短歌)는 소리꾼들이 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의 일종으로 국악으로 남아있는 40여곡중
한곡이다. 전남 고흥(高興)에서 출생하여 국악계의 거목으로 작고하신
창극인(唱劇人) 동초(東超) 故김연수(1907∼1974) 명창이 지어 부른
단가입니다. 지난해 영화 ‘서편제’와 ‘태백산맥’의 현장인 남도
삼백리를 여행 중 다도해 국립공원 내 산재한 2,300여개의 섬마을에
격리되어 뭍 을 향한 한(恨)과 여순반란 및 지리산 빨치산 등 민족의
비극이 점철된 산하(山河)를 걸으며 임권택 감독님과 조정래 작가님의
머릿속을 수도 없이 드나들며 느낀 감상(感想)을 영화와 소설로도 다
이야기할 수 없어 이 소리 한곡으로 대신합니다.
사철가(四節歌 : 短歌) 명창 안숙선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푸르게 우거진 나뭇잎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도 좋은 때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寒露朔風)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차가운 이슬과 차가운 북풍
황국(黃菊) 단풍도 어떠한고.
✱노란 국화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나뭇잎이 다 떨어진 추운 하늘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달빛도, 눈빛도 온 세상도 모두 하얗다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 보소
인생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년도 못 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北邙山川)의 흙이로구나
✱죽어서 가는 곳. 북망은 중국 낙양의 북쪽으로 역대 왕들의 무덤이 많음
사후에 만반진수(滿盤珍羞)는 불여생전(不如生前)에 일배주(一杯酒)만도 못하느니라.
✱죽은 뒤에 상에 가득한 좋은 음식이 죽기 전의 한 잔 술만 못함
세월이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 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늘어진 계수나무 끄트머리에다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國穀偸食) 허는 놈과 부모 불효하는 놈과 형제 화목 못허는 놈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하여 먹음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제 차례로 모아가며
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첫댓글 너무길다 다읽라카이 돌아가시겟다
ㅎ ㅎㅎ
조은 글 댕큐
다녀 갔구나, 건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