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碑) 후면에 천관공(휘 민환)의 글이 새겨있다.
¤ 비문 판독
구름이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 덮칠때에 홀로 한줄기 청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 만 사람 가슴을 찢는구나. 아! 회천의 그 기상 칠색 무지개 되어 이 땅 위에 길이 이어지리라.
일천구백팔십구 년 일월 이십일 천관 위민환 삼가 짓고 일우 박민기(전) 청호 김승남 삼가 쓰다.
비 옆면에는 會員 인명이 새겨져 있다. 우측 첫번째 줄의 여섯번째에 흐릿하지만 魏民煥이라는 휘자가 보인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고 경호실장 차지철을 사살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김재규는 내란목적 살인죄와 내란수괴 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한 육군본부 계엄고등군법회의가 선고한 원심이 확정되었고 결국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된 후, 경기도 광주시 삼성공원묘지에 묻혔다.
이후 1989년에 '10·26 재평가와 김재규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추진위 회원들에 의해서 추모비와 상석이 설치되었다.
당시 추진위 중요인사는 김재규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를 비롯해 함세웅 신부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었다.
¤ 천관 위민환 프로필
장흥위씨 33세, 안항공파이다.
天冠(휘 民煥, 1922-1997년)公은 조선대를 나온 언론인이다. 계사(휘 성호, 1927~2011년)公과 대논쟁에서 벌인 견해가 저서 연사록(燕私錄)에 전하고 있다. 시조공사적비 건립을 주도하고 광주종친회장을 수대에 걸쳐 재임하면서 광주종친회보를 발간하는 등 늘 문사의 최전선에 서있었다. 그래서 영이재공과 나란히 요람에 모선의 주역 주인공 중 한 분으로 등재되어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간 계사공과 함께 장흥위씨 씨족사 연구에 몰두한 석학이었다. 계사공의 연구논문이 대부분 정사로 자리 잡았지만 천관공도 씨족사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지제지》 국역 감수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