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金春洙, 1922년 ~ 2004년)
1922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니혼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이 때에 그는 일본 제국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퇴학당하고 교도소에 7달동안 수감되었다. 석방된 후 귀국한 김춘수는 고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1946년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48년 대구에서 발행하는 동인지 ‘죽순 8집’에 시를 발표했다.1965년에 경북대학교 학부에 가입했다. 1978년에는 영남대학교 문학부 학장으로 지냈다.
김춘수가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에 힘을 기울인 것은 이듬해 자비로 출판한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준비하게 되면서부터다. 유치환의 서문을 단 이 시집에서 김춘수는 비록 문단에 갓 나온 풋나기이지만 시인으로 산다는 게 여름 사막과 같은 현실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의 길을 가는 것임을 이미 헤아린다.
“가자. 꽃처럼 곱게 눈을 뜨고,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원한의 눈을 뜨고 나는 가자. 구름 한 점 까딱 않는 여름 한나절, 사방을 둘러봐도 일면(一面)의 열사(熱沙). 이 알알의 모래알의 짜디짠 갯내를 뼈에 새기며 뼈에 새기며 나는 가자.”
김춘수, 「서시」 전문, 『구름과 장미』(행문사, 1946)
그의 첫 시집은 표제와 「서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수, 비탄, 그리움 같은 서정성과 ‘장미’에 매혹된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구름과 장미』는 릴케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름과 장미』의 언어들은 존재와 부재 사이에 있는 실존의 흔들림에 섬세하게 반응한다.
1948년 그는 대구에서 나온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하고, 이후 마산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49년 『백민』에 시 「산악(山嶽)」과 『문예』에 「사(蛇)」 · 「기(旗)」 등을 발표한다. 김춘수는 이 무렵 손소희가 경영하는 다방에서 만난 서정주에게 새 시집의 서문을 부탁한다. 이윽고 그는 “전자(前者) 『구름과 장미』에 비하야 월등한 진경이나 비약을 뵈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서정주의 서문이 실린 두 번째 시집 『늪』을 펴낸다. 이 시집에서도 소멸하는 삶에 대한 응시에서 비롯된 허무적 비애와 존재론적 숙명성이 감상 어린 어조에 실려 있는 것은 여전하다. 다만 첫 번째 시집에 비해 『늪』에서는 정확하고 치밀한 언어의 운용이 돋보이고, 자연과 사물에 대한 묘사가 한결 정교해진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전쟁의 참상은 평소에 ‘불완전’과 ‘역사’는 아프게 무시하겠다고, 만일 이를 견디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 산문을 쓰겠노라 결심한 순수주의자 김춘수조차 절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 절규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표출된다.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 순간 /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뛰었다. /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 다뉴브 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일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춘조사, 1959)
첫댓글 긴춘수 선생님의 무의미 시...
과연 그의 시어들이 무의미했을까?..
무의미 속에 숨겨진 진실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