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인연
1997년 1월 말, 스물일곱 꽃보다 예쁠 나이의 아내는 갓 태어난 딸 아이와 함께 불꽃 앞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어머님은 가족묘에 아내를 묻자는 내 부탁을 거절하셨다. 제사를 지내줄 자녀도 없을 뿐 아니라 아내의 묘 앞에서 눈물 흘리는 아들놈의 모습을 바라볼 용기가 없다 하셨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차마 버리지 못한 한 줌의 재를 가져와 아버지 산소 옆에 땅을 파서 묻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봉분을 세웠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종이에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로 아내의 이름을 적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봉분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삼월의 끝자락에 아내의 사십구재를 치르기 위해 고향 산사 찾아 아내의 유품을 태우며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빌었다. 사십구재를 마치고 포천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3월의 마지막 날답게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벚꽃 길을 연인이, 가족이 함께 걸었다. 사진을 찍으며 깔깔대는 그들의 웃음소리에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십구재를 치르고 돌아온 집안, 이제는 병든 아내마저 없는 텅빈 공간이었다.
차가운 방바닥에 몸을 누이면 어둠 속에서 아내가 나를 불렀다. 눈을 뜨면 아내는 언제나 맞은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내가 베고 있는 베개에서 누룩곰팡이 냄새가 났다. 마주한 아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아이가 울었다. 우는 아이를 안은 아내가 온종일 방안을 맴돌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내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피시방에 몸을 숨겼다.
게임의 세계는 아내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내 영혼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임 속 세상은 완벽했다. 사람들은 병들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 죽는다 하더라도 되살리면 그만이었다.
던전은 또 다른 나만의 세상이었다. 한층 한층 내려갈수록 어둠은 깊어졌고 나의 분신인 게임 캐릭터는 어둠이 깊어질수록 강인해졌다. 마침내 지존이라는 자리에 올랐을 때 나는 더이상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있었다.
하루 열네 시간 이상을 피시방에서 살았고 때론 사흘 밤을 꼬박 세기도 했다.
메케한 담배 연기 가득한 곳에서 서너 잔의 자판기 커피와 컵라면 두어 개가 내 하루 치 양식이었다. 버림받은 육체는 견디지 못하고 주인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병들어 갔다. 혈변이 나오고 마른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희망 없는 삶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수년이 흘러도 봄은 다시 찾아왔고 거리엔 벚꽃이 한창이었다.
아내가 떠난 벚꽃 핀 거리를 연인이, 가족이 함께 걸었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끊이질 않았다. 잔인한 봄이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를 피해 나의 은신처인 피시방에 몸을 숨겼다.
사흘 밤을 꼬박 새우고 핏기 가득 충혈된 눈으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피시방 문 앞 담벼락에 기대어 앉았다.
사월 초,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찬 바람을 맞으며 한 모금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길게 내 뿜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담배 연기를 흩트려 놓았다. 흐트러진 담배 연기 사이로 붉게 물든 새벽노을이 보였다. 붉은 노을 사이로 벚꽃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몰아치자 한 잎 한 잎 떨어지던 벚꽃잎이 우수수 흩날려 마침내 꽃보라를 이루었다. 무수히 떨어지는 꽃보라 사이를 새벽노을이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붉게 물든 꽃잎 사이로 기억 저편 너머에 있던 아내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가물거리던 아내의 얼굴이 마침내 선명해졌을 때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꽃보다 하얗게.....
노을보다 붉게…….
웃고 있던 아내가 점점 멀어지더니 끝내 흰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가는 아내를 붙잡으려 팔을 내밀어 보았지만, 떨어진 벚꽃잎만이 아내를 대신하고 있었다. 슬슬 눈이 감겼다. 저 멀리 아득히 먼 곳에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끝내 눈이 감기고 어둠만이 짙게 남아 있었다. 지치고 병든 육신은 삶의 의지를 잃은 체,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들의 입원 소식에 천릿길을 한걸음에 달려오신 어머니가 병원문을 나서는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화물차 한 대 사 줄 테니까 과일 장사라도 하려무나.”
“싫어요.”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끝없는 방황에 마침내 자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하셨다. 어머님의 눈물 앞에서 나는 살아야겠다고, 잘 살아야겠다고…….
어머님이 고향에 내려가시자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만이 이 기나긴 방황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황 끝에 내게 남은 건 빈곤한 삶과 병든 육체와 형편없는 직업, 그리고 막대한 빚이 전부였다. 이런 내게 시집올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 있어요? 집은요? 한 달에 4백 이상 벌어 올 수 있어요?”
여자들의 질문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왜 나오셨어요? 고생하려면 혼자나 하세요. 괜히 애먼 여자 데려다 같이 고생시키지 말고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결혼을 꿈꾸던, 새로운 사랑을 꿈꾸던 내 잘못이었다. 이미 떠나버린 사람을 못 잊어 수년의 세월을 허무하게 보낸 내 잘못이었다.
정신을 차린 후 피시방도 끊고 빚을 갚기 위해 적금도 붓고 있었지만, 결혼을 포기해 버린 나는 희망을 잃은 지난날로 시나브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인연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전혀 닿을 수 없는 인연이었음에도 우리가 만난 건 분명 운명이었다. 누군가의 소개로 만난 그녀는 몽골 국적의 외국인이었다.
결혼하자는 내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많은 여자가 해오던 질문
“차 있어요? 한 달에 얼마 벌어다 줄 수 있어요. 집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몽골에 7년 전 두고 온 열 살 된 딸이 있어요.”
남편의 부재로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린 그녀의 삶 또한 험난하기가 자갈길보다 거칠었다. 불법체류 노동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숨어 살면서도 위로 어머니를 모셔야 했고 아래로는 딸과 동생의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우리가 만난 2004년은 유달리 불법체류 노동자 단속이 심했다. 매일 쫓기는 삶을 사는 그녀는 참 많이도 지쳐 있었다.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딸을 못 본 지 벌써 7년이에요. 너무 힘들어요. 차라리 불체자 단속반에게 잡혀 강제추방이라도 당하고 싶어요. 그래서 7년 전 공항에서 손 흔들던 엄마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더 일하고 싶었는데 붙잡히는 바람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노라고 거짓말이라도 늘어놓고 싶어요.”
내 품에 얼굴을 묻고 눈물 흘리는 그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말없이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된 우리는 2005년 아내라는 이름으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딸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되었다.
두 번째 아빠, 두 번째 딸, 두 번째 남편, 그리고 두 번째 아내, 서로에게 두 번째이기에 더더욱 애틋하여 서로에게 첫 번째가 된 우리의 두 번째 인연이었다.
내게 주어진 7년의 방황, 아내에게 주어진 7년의 고난, 딸에게 주어진 엄마에 대한 7년의 그리움이 어쩌면 우리의 인연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려는 예비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족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 생활풍습은 서로를 지치게 했고 특히나 준비 없이 한 결혼은 경제적 빈곤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과 아내는 단 한 번도 내게 경제적 불만이나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수많은 환란과 갈등, 경제적 핍박 속에서도 우리는 꼭 잡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꼭 잡은 손위로 어느덧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딸아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기엄마가 되었다. 2022년 1월 우리 부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자가 태어났다. 처음으로 외손주를 안아보던 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더는 벚꽃 핀 거리가 아프지 않았다.-
2022년 04월 11일 김태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