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어김없이 한해를 돌아보는 싯점으로 들어섰고, 인생 여정도 " 짧으면 5년에서 10년, 길면 15년에서 20년" 하는
황혼의 노을을 바라보는 시기로 들어서고 있다. 이제는 아무리 잘 닦아도 손주한테서 " 냄새난다 "는 소리 듣는 걸
피하기 어려운 나잇대가 되었다.
20여년 전에 서예와 산수화를 4-5년 배운 적이 있다. 노후에 근사하게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조금 일찍 시작을 했다.
그때 여러 기억 중에서, 사군자를 공부할 때 선생님한테 처음 꾸중을 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먹을 붓에 묻히면 한번에
화지에 그려가야 하는데 더 잘 그려보려는 욕심에 그린 곳 위에 덧칠을 해 버린거다. 더덕 더덕 찍어 바르는 유화와 달리,
자연스럽게 한번에 그려 번지는 농담의 맛이 동양화의 진수인데, 억지로 덧칠을 하다 들켜서 야단을 맞았으니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법정스님은 종교를 떠나서 모든 생활인들에게 고결한 성품과 더불어 주옥같은 문장으로
우리 삶을 가라앉혀 주고 정화시켜 주셔서 아직도 저서 일부는 가까이에 두고 있다. 스님이 떠나시면서 당신 사후에는
더 이상 본인의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지를 남기셨는데, " 버리고 떠나기" 의 본보기를 보이신 것 같긴 하지만,
당시에는 좀 더 많은 후손들이 좋은 말씀에 접하는 게 좋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의 유언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풋풋한 나이때 글쓰기에 대한 기초 연마도 하지 않은 채, 신문사 신춘문예에
짝퉁(?) 단편 소설로 응모를 해 본 적이 있지만, 사실상 생각이나 글의 많은 부분이 내 것 위에다 남의 것 엿본 것을
은연중에 차용도 하고, 그 시대의 시류와 야합(?)한 얕은 표현을 혼입해 쓰기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덧칠을 하는 수가
있는데, 스님은 아마 본연의 자연스러운 삶에 많은 것을 덧칠하며 살아 오셨다고 되짚어 보며 사후에라도 더 이상
덧칠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니시더라도 범부의 졸상을 용서하여 주시고.
자연을 좋아하고 여행을 가까이 하다 보니, 이제 큰 거점들은 대충 훑어 보았고, 내년 여름 마지막 장기간 장거리 여행으로,
그간 미뤄온 중앙아시아 카라코람 하이웨이 트레킹을 끝으로 여행 일정도 마무리 수순으로 들어 가려 한다. 그 동안
다니면서 느낀 감흥의 큰 틀은 " 하늘아래 땅위의 인간 모습은 어디 가나 비슷하며, 요즘 국내외 시국이 조금 시끄럽지만
결국 역사는 반복되게 마련이고, 제일 행복한 사람의 모습은 긍정으로 가득 찬 덧칠 안 한 자연의 미소 그 자체 " 라는
것이다. 그런데 100여 나라를 여행하면서도 조용히 발길을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과 열흘 정도 어느 지역을 다녀 오고 책을 내는 사람도 있다. 결국은 세상에 깔려 있는 정보와 자료를 차용해서 자기 이름에 덧칠을 해 보고 싶은 너절한 욕망이 낳은
산물인 셈이다. 그런 반면에 자기 모습에 덧칠하는 게 어색해서 노벨문학상 수상식 참석도 사양한 가수 밥 딜런 같은
조금 순수해 보이는 사람도 주위에 적지 않다.
오늘 얘기의 요제가 덧칠인지라 이 자리를 빌어 외제차 얘기를 한번 해 보고 싶다. 우리 주위에 몇년 사이에 외제차가 부쩍
는 걸 쉽게 본다. 지나치다 싶은 체면과 이웃 눈치 보는데 익숙한 토착 기질이 작용하다 보니, 밥술만 뜨면 외제차를 타는
것이 특히나 젊은이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아 가는 게 아닌가 싶어 일종의 사회 병리현상으로 까지 느껴질 때도 있다. 나의 경우는
오래 전 해외 근무시에 독일의 B차등 여러 차를 운전해 보았지만 큰 매력은 느끼지 못한데다가, 굴뚝산업 수출업체에서
수없이 밤샘하던 일, 샘플 들고 외국 출장 나가서 다못 몇 달라라도 더 받으려고 발버둥치며 세일하러 다니던 추억과,
외제차가 성능에 비해서 유지비, 수리비등의 가성비가 많이 떨어진다는 실사구시적 사고방식에, 외국서 지내다 온 동포들도
귀국하면 가격 괜찮고 성능 좋아진 국산차를 타는 자연스러운 모습 등도 보며, 어떤 때는 A차나 F차등 연비에 속은 걸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도 있다. 나는 우리 자녀들 한테는 단호히 소위 외제차를 멀리 하라고 해서
모두 동감하고 있다. 두애들 집 모두 APT나 사는 형편이 객관적으로 보아 또래보다 월등 좋은 상태이긴 하지만, 얘기인즉,
너희는 우리보다 노후기간이 훨씬 길어진다, 주요 활동기가 길어야 50대 까지이고 그 이후의 변화에 대응하다 보면,
불가측한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수입차등에 익숙해져 자연히 UP되어가는 생활 수준으로 인해, 맞딱뜨린 어려움을
헤쳐가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도 예방한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여유의 일부를 노후대비 자금으로 돌려 개인연금 가입으로
유도해 주었더니, 내가 얘기하고 이끌어 준 실생활 GUIDE를 본인들이 이해하고 고마워 하니 나도 마음이 좋다.
물론 이 다음에 큰 사업가로 변신하면 그때 너희 하고 싶은대로 해도 늦지 않을꺼라는 얘기도 했지만 애들 사는데
그렇게 방향을 제시한 건, 한번 잘 못 칠을 하면 그 위에 덧칠을 하게 되고, 또 다시 덧칠을 하면서, 우리때보다 더 큰
고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세상사 대부분이 오늘의 주제와 연을 대고 있다고 보아 더 이상 열거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데,
마지막으로 유승준 파동으로 떠들썩했던 젊은이 병역문제로 마무리해야겠다. 자리잡은 기성 지도층이 예전에는
상당수가 군입대를 안 하려고 발버둥쳤고 실제로 많이 면탈을 했다. 그러면서 요즘은 급기야는 멀쩡한 자기 아들도
하루아침에 반병신으로 둔갑시켜 징집을 피하려는 얕은 술수를 쓰는 것을 주위에서 이따금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성공(?)을 하면 당장 몇년은 편할지 몰라도 결국은 귀여운 자식에게 사회 병리현상을 가르치는 것 밖에
되지 않고, 자녀가 지녀야 할 제일 큰 덕목인 당당한 자생력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생활면역력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고 마는 우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성층이 때로는
더 큰소리를 치고 있는 걸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올해도 한 두가지 벌린 일을 추스리며 흙과 씨름하는 일을 일년내내 하다 보니 한해가 어떻게 갔나 모르겠다.
내년 이후로도 봄부터 가을까지는 어쩌면 더 흙일과, 같잖은 농사일에 묻혀 자연의 그늘 밑으로 더 가까이 가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한 덧칠을 조금씩 지워가면서 그 넓직한 품으로 기어들어가려 한다.
이제 세모를 향한 하루 하루를 나한테 백지위임한 채, 춘삼월 흙냄새 맡으며 숲으로 향할 생각에 가슴이 조금
부풀어 오는 느낌이 든다. 내년봄 새 식구로는 호두나무, 당귀, 참취, 방풍나물등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렇게 그림을
그려 가고 있다 보면 시나브로 새봄이 성큼 다가 오고 있겠지.......
남한산성 자락의 위례에서-----나른해져 가는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