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5장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기 26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5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1)라합을 깨뜨리시며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설교
욥기 25장은 빌닷의 세 번째 말입니다. 여기 빌닷의 말은, 지금까지 친구들이 했던 말을 요약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이 말한 순서대로라면, 빌닷 다음에 소발이 말을 해야 하죠. 그런데 빌닷이 말하고 나면, 세 친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뒤에 욥기 32장 1절 보시면, “끝내 욥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자, 세 친구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엘리후라는 조금 젊은 또 다른 친구가 찾아와서 말을 하는데, 그때까지 이제는 욥의 말만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25장에 있는 빌닷의 말은, 세 친구의 말을 요약하고 마무리하는 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5장 2절과 3절을 보시면, 빌닷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고 계시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감히 계수할 수조차 없고, 그분은 온 세상을 그분의 빛으로 비추이십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면, 하나님은 거짓된 우상이나 어떤 존재가 아니라, 살아계신 진짜 신이십니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아마 욥도 여기까지는 분명히 동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부터 빌닷과 친구들은 잘못된 생각에 빠집니다. 너무 과한 해석이고, 지나친 판단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절 보시면,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또, 5절, 6절 보시면 하나님 눈에는 달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않는데, 구더기와 벌레 같은 사람은 어떻게 보이겠느냐 묻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믿지도 않고, 의롭다 인정하시지도 않고, 좋게 보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맞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1장부터 강조하듯이, 죄인들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병들고 연약하고 상한 자들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느 것도 내세울 수 없는 철저한 죄인들입니다. 단 한 곳도 상하지 않거나 썩지 않은 곳이 없는, 모든 것이 타락하고 죄로 물든 죄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뭔가를 주장하거나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그분이 사랑하는 자들을 의롭게 보아주시고 여겨주시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신 사람들이죠. 어떻게 죄가 하나도 없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처럼 죄를 짓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그들도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 여겨주시고, 그들을 믿어주셨습니다.
시편 8편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사람을 생각하시며, 돌보십니까?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존귀하게 여겨주신다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인 우리를 벌레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분의 형상으로, 그분의 자녀로 바라봐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어떤 신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벌레처럼 하나님께 기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존귀히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욥기 4장에서 엘리바스가 봤던 환상을 기억하십니까? 욥기 25장에서 소발은 그 엘리바스가 봤던 환상을 근거로, 욥을 공격합니다. 그 환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온 것이었죠. 빌닷이 그 환상을 다시 언급했습니다. 친구들은 그게 하나님께서 준 계시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욥 네가 그것을 거부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26장 4절 보시면, 욥이“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냐는 것이죠. 자신이 아는 하나님과 다르다는 겁니다. 욥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존귀히 여기시는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26장부터 이어지는 욥의 고백을 보면, 아주 감동적입니다. 욥은 26장부터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지, 빌닷의 짧은 고백을 넘어서 정말로 풍성하게 표현합니다. 26장 6절에서,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 앞에서는 훤히 보인다고 합니다. 7절부터 쭉 보시면, 하늘을 허공에 펼치시고,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달아 놓으시고, 물을 구름으로 싸시고, 보름달을 구름 뒤에 가리시고, 물과 땅의 경계를 정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죠.
또, 12절부터 보시면,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십니다. 바다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여서 악의 세력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그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바다에 사는 괴물 라합을, 아니면 폭풍을 무력화시키시고, 날렵한 뱀을 사탄 같은 악의 세력을 무찌르십니다. 마지막 14절에서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그분이 행하시는 일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욥기 맨 앞에 나왔던 것처럼, 욥과 같은 자들을 인정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벌레나 구더기가 아니라 그분의 형상으로 바라봐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어려워도, 욥처럼 극한의 상황에 떨어질 때에도,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며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신다는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의 고백이 저와 성도님들께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붙드시고 다스리시고, 심지어 악의 세력까지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를 그분의 자녀 삼으시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옳다고 여겨 주십니다. 우리 삶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내 소원과 내 뜻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심지어 욥처럼 고난과 절망의 순간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 우리의 손을 결코 놓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내시고, 더욱 더 하나님 의지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