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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4일(주일)
고린도후서 7:2-7
우리에게는 위로의 선순환이 필요합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를 가진 여인입니다. 어느 날, 우영우의 아버지가 딸이 속한 로펌의 대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영우한테 기회를 주지 않아. 서울대 로스쿨 수석을 하고 변호사 시험에 만점 가까이 받아도 자폐인은 안된대. 로펌이며 개인 사무실이며 닥치는 대로 지원해봤지만 면접 볼 기회조차 없었어. 그런 딸을 보면서 아무것도 못해주는 내 마음은…”
아버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딸인 영우에게 기회만 줄 수 있다면 자신은 나쁜 아빠가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제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한참 이야기를 시켜 보고 퇴짜를 놓았고, 다른 어떤 곳에서는 보자마자 퇴짜를 놓았습니다. 굴욕이었습니다. 그때에 이분은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내 불알 굵어져/ 세상 밖으로 나가 허허/ 모질게 바람맞고 오던 날/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라는 시를 쓴 것도 그 무렵입니다.
이 분은 꽤나 공부를 잘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졸업하면 취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안타까움에 자식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2013년 이맘때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은 평소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자, 이 분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회한에 남 몰래 참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버지가 우영우에게 말합니다.
“부모 돼 보면 알거야, 자식의 좌절을 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그러자 우영우가 말합니다.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좌절해야 한다면 저 혼자서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른이잖아요… 아버지가 매번 이렇게 제 삶에 끼어들어서 좌절까지도 대신 막아주는 거 싫습니다. 하지 마세요!”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505005999550783&id=100001243137995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보이지 않는 담들이 존재합니다. 자폐를 가진 딸을 둔 아버지, 그리고 변호사 우영우, 장애인을 자녀로 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먼저 보낸 아들처럼, 지금도 이 세상에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과연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고,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지금 바울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부터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 안에서 복음의 문이 열려,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 전도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열린 것처럼 신나고 감사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평상시 바울답지 않게, 그는 드로아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짐을 꾸려 좀 더 아래 지방인 마게도냐로 향했습니다. 과연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바울이 드로아 사람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내려갔던 이유는 디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고후 2:13). 그는 영적인 형제였던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디도가 나타나지 않자, 바울은 디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좀 더 아래 지방인 마게도냐로 향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애타게 기다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디도의 손에 고린도 인들에게 전해 줄 편지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쓴 편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인들을 아끼고 사랑했기에, 그들과 함께 죽고, 그들과 함께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인들 중 몇 명은 이러한 바울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저명한 사도로부터 추천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도이며, 막대한 양의 헌금에 관심을 가진 사기꾼이라며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무고함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 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손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아무에게도 돈이나 물건을 속여 빼앗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변호해야만 했습니다(2절).
이미 바울은 다시는 근심 중에 고린도 인들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더욱 애타는 마음으로 디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바울은 육체가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바울이 당했을 정도의 극심한 오해와 비난을 받아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의 고난이 어려운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선한 뜻 안에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열이 40도까지 올라 거친 숨을 헐떡이며 밤을 지새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옆에는 함께 밤을 지새워주며 제 머리에 차디찬 수건을 올려주시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제 머리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돌봄과 희생과 위로의 이미지로 각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 비쳐진 바울은 아직까지 그런 돌봄과 위로를 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의 고통이 더욱 쓰라리게 느껴집니다.
부스 터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큰 구세군 교회에서 전도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터커는 ‘사랑의 하나님’이란 주제로 뜨겁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만일 저처럼 아내를 잃고 아이들은 결코 살아나지 않을 엄마를 부르며 운다면 당신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겁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고 절망과 분노에 가득 차 있던 그에게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그의 질문에 대해, 터커는 별 다른 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내를 잃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일로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로하거나 권면하는 것이 얼마나 무력하고 부질없는 일인가에 대해서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341600629325835&id=100004277616324
혹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울은 지금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육체의 고통을 느꼈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과 안으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은 표면적으로는 디도와 재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교회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위로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록 바울이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였지만, 아직 하늘까지 막힌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역설적인 진리를 믿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4절).”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에는 ‘위로가 가득 채워진 상태’와 ‘필요 이상으로 풍부한 기쁨’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고통 속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편지 서두에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했던 적이 있었습니다(고후 1:3).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디도의 방문을 통해서 바울과 그의 일행을 위로해 주셨습니다(6절).
과연 디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고린도 인들을 위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바울의 동료요, 동역 자였습니다(고후 8:16;23). 디도는 좋은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것은 고린도 인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모하고 있으며, 바울을 위해 애통해 하며, 열심을 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교회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완수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의 손에 전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장차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마음으로 자신과 일행들을 영접해 주도록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여기서 “영접하라”는 헬라어 단어(Χωρήσατε, 코레사테)는 “~을 위해 공간을 만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를 나의 마음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에 누군가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위로의 선순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부탁했던 목적은 장차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통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를 통해서 바울을 위로하셨던 것처럼, 장차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도 고린도 인들을 위로할 것입니다.
제가 설교 초반에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렸던 장애인 아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분은 비록 대학을 졸업하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하지 못했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 위로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고 “과연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며 울부짖던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부스 터커는 자신이 그러한 일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 진정한 위로를 전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정말 예기치 않았던 의외의 사건이었습니다. 갑자기 터커의 아내가 기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시신은 시카고로 운구 되었고, 구세군 교회에서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는 말없이 누워 있는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평온하게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는 순간, 터커는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평안으로 가득 채워주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터커는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 전 제가 이 자리에 섰을 때, 어떤 분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아내가 방금 죽었고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 울고 있다 해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요? 혹시 그분이 여기 계신다면 그분께 말씀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맞습니다. 제 아내가 갑자기 제 가족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났어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맞습니다. 제게 이런 평안과 확신으로 위로해 주고 계시니까요.”
놀랍게도 그 사람은 그 현장에 있었고, 관 옆에 무릎을 꿇고 사랑의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341600629325835&id=10000427761632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디도를 통해 바울을 위로해 주셨고, 장차 바울을 통해 고린도 인들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위로의 선순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 위로를 전할 자들을 영접할 공간을 만들어 두십시오. 특별히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는 일을 위해 여러분의 시간을 할애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고후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