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5학년 남매를 둔 주부 이근영(40·경기 과천시·가명)씨는 며칠 전 가슴이 덜컥하는 경험을 했다. 큰아이 재민이(11·가명)가 자기 방 문고리에 아빠 넥타이를 걸어 목매는 시늉을 목격한 것. 너무 놀란 이씨는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만 쏟아냈다. 이씨가 “왜 그랬느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이씨는 아이 손을 잡고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의사는 재민이에게 '소아우울증'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찬바람이 소슬하게 부는 '고독의 계절' 가을. 이맘때면 누구나 가벼운 우울함에 빠져들곤 한다. 그동안 어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우울증. 그러나 '마음의 감기'는 아이들 가슴에도 찾아들었다.
5일 민주당 박은수 의원이 발표한 보건복지가족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울증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19세 이하 소아·청소년 환자는 2만8420명이었다. 2003년 1만8527명, 2004년 2만 274명, 2005년 2만2717명, 2006년 2만4613명 등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국가적인 대책과 함께 각 가정에서도 자녀의 정신건강에 관심을 기울일 때다. 자녀가 건강한 정신을 지닌 인격체로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부모들이 예방 백신이 되어줄 방법은 없을까.
◆이럴 땐 우울증을 의심해야=소아·청소년기 우울증의 경우 짜증이 늘고, 행동이 난폭해지고, 거짓말과 싸움을 자주 하고, 학교에 가는 것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 검진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자주 신체적인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등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또 수면·식사 습관도 변하며, 체중의 급격한 저하나 증가 등 신체적인 변화도 함께 나타난다. 이제껏 즐겨온 활동이나 취미·친구관계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기도 한다. 반항적이고 자기 비판적인 성향도 내비친다. 아이들이 보내는 우울증의 신호는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이 '우울하다'는 말을 스스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사춘기 때 의레 보이는 증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우울증인데, 행동문제로 표출되어 '가면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라고도 한다. 필요도 없는 물건을 훔치고, 학교에서 자주 폭력을 휘두르거나, 인터넷·게임·알코올에 중독되는 등 비행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서울대 소아정신과 신민섭 교수는 “중독증이나 폭력적 성향 등 아이들의 문제 행동 바탕에는 대부분 우울증이 자리 잡고 있다”며 “부모들이 이를 보지 못해 야단만 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부족한 것 없는데 왜 우울할까?=자녀를 이끌고 어렵게 정신과를 찾은 부모들은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우리 아이가 왜 우울증이냐”고 황당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소아·청소년 우울증의 원인도 천차만별이다. 호르몬 불균형 같은 생화학적 원인과 유전적으로 우울증 소인이 많아 쉽게 우울증에 빠지는 일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환경적인 요인, 특히 부모의 태도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이보다 더 아픈 엄마들』의 저자 신의진 교수(연세대 소아정신과)는 “보통 아이와 부모를 함께 진찰하는데 우울증을 앓는 아이들은 그 부모가 우울증 환자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부모 스스로 본인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회피하려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와 아이가 함께 치료를 받아야지 아이만 치료를 받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광주광역시에서 소아청소년정신건강 클리닉을 운영하는 최영 박사(정신과 전문의)는 “부모의 그릇된 양육태도도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또 “실수나 결점을 인정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부모, 자신의 감정상태에 따라 자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등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이는 부모, 아이가 부모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만큼 억압적인 부모, 매질과 욕설을 자주 하는 부모 등이 '슬픈' 아이를 길러내는 대표적인 부모상(像)”이라고 덧붙였다.
◆부모들의 역할은=우울증을 앓았던 청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우울증을 앓거나 다른 정신장애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우울증이 의심되면 가능한 빨리 전문의를 찾아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치료 방법은 연령에 따라 다르다. 상담치료와 음악·미술 치료가 보통이고 항우울제 같은 약물 치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신의진 교수는 “소아·청소년기 우울증은 성인우울증에 비해 예후가 훨씬 좋다”며 “제때 발견해 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또 우울증에 걸린 아이가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막으려면 마음에 버팀목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 혹은 친구 같은 지지 그룹이 든든하면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신민섭 교수는 “신체의 건강과 성적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이어 “아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애정의 허기를 느끼지 않도록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랑”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