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일손을 도우러
코로나 펜데믹이 조심스레 걷혀가던 재작년은 퇴직 첫해로 무척 의미 있게 보낸 나날이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가 낡아 리모델링 하느라 원룸으로 나가 이십여 일 머물다 집을 새로 단장해 돌아왔다. 그 무렵 지인으로부터 주변에 고령으로 힘에 부쳐 묵혀둔 텃밭 경작을 의뢰받아 뒤늦게 작물을 키워 이웃과 나눔도 했다. 그런 속에 고향을 몇 차례 다녀와야 할 일까지 겹쳐 자주 갔다.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은 띠동갑보다 더한 연상이다. 큰형님은 초등학교가 최종 학력이지만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한학에 궁구해 한문 문장과 칠언 율시를 남겨 가고 있다. 퇴직 즈음 큰형님의 배움 기회를 아우가 양보받은 미안함을 되갚을 일이 생겨 다행이었다. 퇴직을 앞두고 큰형님의 육필 문장과 한시를 넘겨받아 워드 입력해 놓고 교정 단계에 형님을 찾아뵈어 문집을 펴냈다.
올해가 퇴직 삼 년째로 여전히 바쁘게 보내는 일상이다. 자연학교 등교는 연중무휴이고 평일 오후는 시골 초등학교 아동안전지킴이 봉사활동을 나간다. 봄이 다 가도록 주말은 근교 산자락을 누벼 산나물을 마련 우리 집 식탁은 물론 주변 지기들에게도 보냈다. 이제 산채 산행은 끝나고 강변으로 나가면 국가하천 대숲에서 죽순 채집이 가능하다. 죽순은 비가 흡족하게 내려야 솟는다.
오월 하순 주말은 고향을 찾는 걸음을 나섰다.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의 농사에 도움이 못 되어도 안부라도 전함이 도리다. 토요일 이른 아침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의령행 버스를 탔다. 남해고속도 순천 방향으로 달려 함안 군북에서 국도로 내려 남강에 걸쳐진 정암교를 건너 의령읍에 닿았다. 녹음이 짙은 남산 기슭엔 낯이 익은 의병탑과 충익사 사당이 자리했다.
택시로 읍에서 십 리 떨어진 고향 집으로 이동해 가니 큰형님은 동구 밖 마늘을 거둔 논에 물꼬를 돌봤다. 진주 사는 조카가 나와 트랙터를 몰아 무논 다릴 준비를 했다. 장유에 사는 질녀도 친정 일손을 돕느라 아침 일찍 와 있었다. 마을 회관 앞 논에 심은 마늘 수확은 마쳐도 밭마늘은 캘 게 남았다. 큰조카는 아버지보고 제발 농사 규모를 줄이십사 해도 아직 손을 놓지 못한다.
나는 집안 재실 벽운재와 다른 밭뙈기 자라는 농작물을 둘러보고 마늘 캐기에 합류했다. 포크처럼 생긴 쇠스랑을 한 손에 쥐고 마늘을 하나하나 캐서 뽑아냈다. 근래 마늘을 캐는 기계가 보급되기는 해도 아직 일반화가 되지 않아 손으로 뽑는 데 품이 많이 필요했다. 장갑을 끼고 쇠스랑 호미를 잡았는데도 얼마 되지 않아 손바닥에 아려와 살피니 접촉면에 살갗이 벗겨져 따가웠다.
상처 부위를 응급으로 처치하고 보직을 바꾸어 가내용으로 삼을 양파를 캔 뒤 고추 이랑에서 곁순 땄다. 일철은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촌에는 뭐든 할 일이 밀려 있었다. 이후 마늘밭으로 되돌아 와 가위로 마늘 줄기를 잘라 수집 상자에 담는 일을 도왔다. 때가 되어 집으로 가서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삼겹살을 구워 상추쌈에 싸 먹어도 반주는 곁들이지 않았다.
그새 형님과 조카는 마늘을 먼저 캔 논에 모를 내려고 트랙터로 무논을 다려 놓고 마늘밭으로 와 일손이 늘었다. 오후에는 진주 근교 사는 여동생 내외까지 얼굴을 내밀어 큰 힘이 되어 능률이 올랐다. 캔 마늘은 상자에 담아 경운기 적재함에 실어 바깥마당 건조실로 옮겨졌다. 건조실에 차곡차곡 쌓아 전기에 의한 가열과 송풍으로 함유 수분을 줄여 두어 달 후 상인들에게 넘어간다.
가족들이 마늘밭에서 날이 저물도록 흙투성이 되도록 일을 해도 못다 하고 남았다. 두 조카는 부모님 곁에서 일손을 마무리 짓도록 하고 아우는 귀가를 서둘렀다. 양파는 무거워 후일 배송하기로 하고 가벼운 상추 봉지만 챙겨 여동생 내외의 차에 동승 진주로 향하다 반성역으로 갔다. 순천을 출발해 부전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탔더니 차창 밖 산천은 어둠이 내려 불빛이 비쳤다. 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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