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계윤의 인기척을 아직 느끼지 못했는지 굳게 잠겨있는 철문에 기대 한숨을 내쉬는 누군가.
새벽에 온 무현령의 문자를 도저히 무시하지 못하고 결국 이 곳까지 온 수혼이었다.
문자 내용은 찝찝하리만치 간단했다.
이 곳의 주소와 비밀번호.
계윤과 유경보다 30분 쯤 먼저 도착해 로비에서 맞아주는 스텝에게 보안상의 이유로 핸드폰까지 반납하고 4층에 있던 수혼은
어딘지 이상한 낌새에 서둘러 룸에서 나왔지만 간발의 차로 시스템이 차단 된 후였다.
"무현령..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의외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몸을 틀어 철문을 등지고 경계태세를 취하려던 수혼은 곧 눈에 들어오는 계윤의 모습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깔끔한 화이트 셔츠에 굵은 체크가 들어간 잘 빠진 슬렉스.
"안녕하셨습니까 생략, 잘 지내셨습니까 생략. 식사는 하셨습니까 생략."
어느덧 수혼의 앞까지 내려온 계윤은 수혼보다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 눈높이를 맞추고,
수혼은 그런 계윤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 세 단어 생략하니까 할 말이 없지."
"..날씨가. 참 좋습니다 도련님."
"누구랑 마셨냐 술."
새벽 늦게까지 마신 술이라 양치를 했음에도 수혼이 입을 열자 아직 풍겨나오는 알콜냄새에 살짝 미간을 구기며 말하는 계윤.
그에 수혼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 했다가 술냄새가 신경 쓰였는지 다시 입을 다물고는 손가락으로 계윤의 손바닥에
꾹 꾹 눌러 두 글자를 남기곤 계윤을 지나쳐 먼저 계단을 오른다.
[ 비밀 ]
공중에 붕 뜬 자신의 손을 한동안 쳐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계윤은 이내 피식 웃어보인다.
"..무현령이 이제야 일을 좀 하네. 어르신들 일하시는데 협조 좀 해볼까.."
무현령과 김유경. 그리고 오픈도 안한 이 장소를 사용하도록 허락해줬을 천회장.
계윤은 허무맹랑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그들의 작전이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의
전원을 끄곤 5층 게스트룸으로 향한다.
새 것 냄새가 맞이해 주는 거실을 지나쳐 부엌으로 가니, 냉장고 문을 열고 선 수혼이 보인다.
빵과 우유. 계란. 몇가지 과일과 멀리서 얼핏 보면 채소밭으로 보일 정도로 한 칸을 독차지한 푸른 소주들.
"아직 사용하지 않는 이 곳에 어제 사 놓은 듯 유통기한이 정해진 식품들을 넣어 놓았습니다.
도련님께선 어떻게 오셨습니까. 김유경 경호원은 알고 있습니까."
"걔가 데려왔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냉장고 안만 들여다 보는 수혼 옆으로 팔을 뻗어 식빵과 계란을 꺼내는 계윤.
"토스트로 해장해도 괜찮겠냐."
"저는 무현령의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저는 그렇다 해도 계윤 도련님을 왜 이 곳에 모시고 와서 이런.."
"나도 새벽에 무현령한테 문자 받았지. 짧고 임팩트 있게."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새 식용류를 뜯으며 말하던 계윤은 심각해 보이는 수혼의 손에
묶여있는 식빵 봉지를 쥐어 주었고, 수혼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식빵 봉지를 풀며 입을 연다.
"도련님께도 무현령이 이 곳 주소를 보냈습니까."
"아니."
"그럼.."
"지금 말하면 나랑 있기 싫을텐데."
웃음기 서린 얼굴로 수혼의 머리를 꾸 누르곤 전기 스토브 앞에 서는 계윤.
"회장님도 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도련님. 한 집안의 경호원과 제사장이 후계자를 감금하고..
왜 제가 아니고 도련님을.. 왜 도련님과 저를.."
말을 하면서도 모르겠다는 듯 끝을 맺지 못하고 이리 저기 말하는 수혼을 쳐다보는 계윤은 어딘지 즐거워 보인다.
"나만 가두면 니가 날 찾으러 올 줄 알고 친절히 한 번에 가뒀나 보지."
"그런.."
"아니면."
어느새 후라이펜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깨 넣은 계윤은 수혼의 손에 들린 식빵 봉지를 뺏어 들곤 말을 잇는다.
"너랑 나랑. 먹고 죽을만큼 있는 냉장고 속 술을 마시다 취해서.. 뭔가 저지르길 바라거나. 앉아있어."
수혼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예전같았으면 두통이 올 법한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처음엔 적응 안됬던 몰라보게 누그러진 계윤의 분위기도, 숲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새 우는 소리도,
밝은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햇살도.. 그 햇살을 등지고 서서 꽤나 능숙하게 토스트를 만들고 있는 계윤의 뒷모습도.
"제가 하겠습니다."
"근데 임수혼."
"네. 말씀 하십시요."
"..괜찮냐."
다 된듯한 토스트를 접시에 옮겨 담으며 덤덤히 말하는 계윤.
"..여기 너랑 나 밖에 없는데. 나갈 수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없어."
"유통기한이 짧은 유제품만 있습니다. 늦어도 내일쯤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똑똑한 넌데 왜 하나 밖에 모를까. 승부욕 생기게."
"무슨.."
"장난하냐 너."
곧 토스트 접시를 내려놓고 식탁에 두 팔을 짚어 식탁 앞에 서 있는 수혼을 양 팔 사이에 가두듯 서서는 시선을 마주하는 계윤.
"임수혼 너랑 나. 남자랑 여자랑. 도움도 청할 수 없는 갇힌 공간에 둘 뿐이라고. 그렇게 태평하게 있으면
긴장하게 만들고 싶잖아..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