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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는 주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탈출기의 말씀 24,3-8>
그 무렵
3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
5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치게 하였다.
6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7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8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 복음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찾기만 하면 내 기분을 바꿔줄 성령의 통로를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하늘 나라 사람이고 가라지는 불 속에 버려질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밭의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일꾼이라도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확 때, 즉 종말에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뜻은 그 사람이 죽어 심판받기 전까지는 인간이 감히 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라지인데 밀인 줄 알고 끝까지 잘 못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일꾼들이지 본인 자신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려면 사제나 수도자들에게 물어보아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점검해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밀과 가라지인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성장하며 밀은 하늘 나라의 열매로 가득 찰 것이고, 가라지는 하늘 나라의 열매가 아닌 다른 것들로 자신이 채워질 것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하늘 나라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느님 나라는 육체적 행복이 아닌 ‘감정의 행복’이란 뜻입니다.
‘감정’을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의로움은 사랑과 같은 말입니다.
죄책감 없는 감정,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운 감정은 사랑의 감정과 함께 솟아납니다.
그리고 기쁨과 평화, 이것도 감정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잘 살피며 살아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감정을 바쁜 일이 없을 때 꺼내 보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여깁니다.
기분 전환을 위한 다른 것들에 초점을 맞추다가 실상 감정은 자기 내면의 방 구석에서 썩어버려도 참아냅니다.
이것을 자기 희생으로 여기고 삽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 자기에게 딱지를 끊으려고 한 경찰에 화내다가 사망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고위급 경찰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딱지를 떼려는 경찰관에게 자신이 누군지 아느냐며 따지다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위급 경찰이 오기 전에 유치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라보아야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구해주고 원수를 갚아줄 고위급 경찰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뇌혈관까지 터뜨리게 만드는 감정을 바라봐 주어야 했을까요?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고, 어떤 사람은 목표를 위해, 어떤 사람은 그냥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서 감정을 바라보기를 회피합니다.
이렇게 속이 텅 빈 쭉정이, 혹은 가라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숀 탠’이란 작가가 쓴 『빨간 나무』란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림책 안에 있는 대부분 그림은 우리 일상에서의 우울한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날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안 좋은 일만 겹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무도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냥 나 자신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 사는 한 부속품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희망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난 어디쯤 와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은 이렇습니다.
“하루를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또 하루가 끝나갑니다.
그러나 문득 바로 앞에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방 안에 조용히 자라고 있었던 ‘빨간 단풍이 든 나무’입니다.
빨간 단풍은 내 기분을 즐겁게 해 줄 무엇입니다.
파랑새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만 찾던 행복에 내면에 있다는 뭐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가 그린 모든 그림 안에 그 빨간 단풍잎을 숨은그림처럼 하나씩 그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신경 써서 찾아보지 않으면 거의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소녀는 자신을 웃게 해 줄 다른 것들만 찾기만 하였지 정작 자신 주위에 떨어져 있던 빨간 단풍잎은 보지 못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온통 낙서투성이인 작은 종이배를 탄 소녀가 물 위에 뜬 빨간 단풍잎 하나를 바라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을 보지 말고 빨간 단풍잎을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빨간 단풍잎은 우리 마음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줄 성령의 통로입니다.
내 노력이 아닌 성령께서 바꿔주시는 색, 바로 작게나마 용솟음치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단풍잎은 작은 나무가 되고 점점 커갈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알곡을 채워가는 사람이 하늘 나라의 알곡을 채워가는 밀과 같습니다.
감정의 승리를 거두십시오.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행복해지게 하십시오.
사람은 분명 어디엔가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통장 액수나 자녀의 성장과 성공, 혹은 나의 지위 등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의 감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목표를 위해 내 감정을 무시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나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감정을 기쁨으로 바꿔줄 성령의 통로를 찾으십시오.
찾기만 하면 항상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얻었는데 내가 가라지였다는 판정을 받는다면 어쩌겠습니까?
내 감정의 행복, 이것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운전할 때 길을 주시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살아갈 때 내 감정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연료 게이지도 보고 속도 게이지도 보고 음악도 틀며 즐겁게 가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길을 잃지 않고 가라지처럼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
잡초로 뒤덮인 과실 묘목밭을 단장하기 위해 예초기를 돌리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세 달 이상을 잘 견뎌내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어린 나무 하나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상처나 덜렁거리는 부위를 노끈으로 정성껏 묶고 지지대까지 하나 세워줬습니다.
사과하는 마음으로 물도 듬뿍 주었습니다.
상처 난 여린 묘목을 싸매주고 일으켜 세워주면서 제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내 인생 여정 안에서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똑같이 하셨겠지? 하는 생각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더 이상 손써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이제 틀렸어! 다 끝나 버렸어!’ 하고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느님,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셨던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 번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 살려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던 하느님,
그런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인내의 달인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마태오 복음 13장 29~30절)
공동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일생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가라지 같은 존재들, 독버섯 같은 존재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저 같았으면 눈에 띄는 족족 과감히 솎아내야 외쳤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혹시 모를 변화나 회개의 가능성, 대대적인 방향 전환이나 새 출발을 기대하며 또 다시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두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 엄청난 인내심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죄하시고, 인간의 기를 꺾어놓는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심판 앞에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하든 그저 묵묵히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도 참아내시는 분,
우리의 악행을 끝까지 견뎌내시는 분,
우리의 불효를 끝끝내 인내하시는 분,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끝이 좋아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 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 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 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마태 13,25)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리와 안주로 자신이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보다 뿌리를 깊이 내리기도 하고,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이 가라지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25)
주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되게 하소서!
제 안에 하늘이 열리고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 온갖 나쁜 것들을 도려내고 당신 형상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세상과 형제들과 공동체를 밭으로 주셨으니 제 손이 당신 사랑을 뿌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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