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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 IMAGES/ 유로포토) |
국내파 감독들의 시기(?)
히딩크는 러시아축구 사상 최초의 외국인감독이다. 러시아팬들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해 많은 업적을 일궈낸 히딩크가 러시아축구를 부활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첫번째 시험무대였던 8월 17일 라트비아와 가진 평가전에서는 경기 종료직전 짜릿한 결승골로 1-0의 상쾌한 스타트를 끊었다. 그러나 러시아 국내 감독들의 표정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아 보인다. 1950년대부터 옛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해체되던 1991년까지 유럽의 축구 강국(유럽선수권대회 우승 1회, 준우승 3회. 올림픽 우승 2회)으로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던 그들은 외국인감독의 힘을 빌어 조국의 축구 부활을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있다. 라트비아와 평가전 승리 조차도 못마땅해 하는 상황이다.
발레리 가자예프 전 대표팀 감독은 “히딩크가 또 마법을 부린 것처럼 언론이 떠들고 있지만 그는 마법사가 아니다”라며 “짧은 시간 안에 팀의 전력을 얼마나 끌어 올릴 수 있었겠나. 그 경기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가자예프뿐만 아니라 유리 세민, 로만체크 등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몇몇 국내 감독들도 히딩크 부임 초기부터 그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로만체크 감독은 심지어 호주대표팀을 이끌던 히딩크의 전술을 전근대적인 전술로 몰아 세우기도 했다.
히딩크의 도박 그리고 로만과 유착설
네덜란드 출신 감독들은 그들 특유의 상업적 수완을 발휘하며 각국 대표팀과 클럽에서 상당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히딩크는 그들 가운데 단연 선두주자다. 많은 러시아언론에선 그의 행보를 정치적이고 계산된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축구 월간지 <모이클룹>은 히딩크가 조세 무링요 감독의 뒤를 이어 첼시의 차기 사령탑에 오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히딩크감독과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는 실제로 만남을 이어 온 관계였고, 히딩크의 러시아대표팀 감독 선임 발표가 있기 전부터 <선데이 미러> 등 잉글랜드언론과 러시아언론에서는 이 둘의 만남을 첼시와의 유착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았다. ‘유로 2008’까지 400만 유로에 러시아대표팀 계약을 맺은 히딩크와 2008년까지 첼시 감독 계약을 체결한 조세 무링요의 맞물리는 계약기간도 이러한 시나리오에 힘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또 첼시는 마테야 케즈만과 아르옌 로벤 등 PSV 에인트호벤 출신의 스타 등을 영입하며 히딩크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PSV 에인트호벤 단장을 지낸 프랑크 아르네센은 첼시의 기술고문 겸 수석 스카우트로 재직 중이다. PSV 에인트호벤의 중앙 수비수 알렉스는 모든 이적 협상 과정에서 첼시 구단과 협의를 하고 있는 선수로 첼시 소속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러시아의 반 히딩크파가 그를 경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아브라모비치의 정치적 행보에 있다. 히딩크감독은 러시아기자들의 아브라모비치와 유착설 질문에 대해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축구연맹에 누가 추천을 해주었는지는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러시아축구연맹의 비탈리 무트코 회장과 두터운 친분 관계인 아브라모비치가 히딩크와 러시아축구연맹을 연결시켜 주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이 운영하던 석유회사가 과거 10억 달러 이상의 세금 탈루 혐의로 러시아 감사원의 수사를 받아 오던 상황이었고 그동안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은 채 정치적인 입김을 키우는 데에 주력해 왔다. 그리고 네덜란드 일간지 <텔레흐라프>는 최근 기사에서 “아브라모비치가 아약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대니 블린트를 러시아청소년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접촉을 시도했다”고 밝혀 아브라모비치와 러시아축구연맹 그리고 히딩크를 위시한 네덜란드파들의 유착관계는 더더욱 밀접한 쪽으로 발전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러시아 국내 감독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히딩크감독은 스스로 모험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도박을 시도하고 있다. 그동안 첼시의 중장기 계획에 히딩크감독을 포함시키는 데에는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다. 아르네센 현 첼시 수석 스카우트가 PSV 에인트호벤 단장 시절 히딩크감독과 싸우고 팀을 떠났다는 이력이다. 그러나 만약 히딩크가 러시아를 유로 2008 본선에 올려 놓는다면 아브라모비치는 무링요의 다음 감독으로 히딩크를 추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첼시로 이적해 거액의 연봉을 노리는 히딩크에게 러시아에서의 도전은 도박이 아닐 수 없다.
히딩크,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
그러나 히딩크의 야망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 같다. 러시아가 속한 유로 2008 예선 E조에는 잉글랜드와 크로아티아, 이스라엘, 에스토니아, 그리고 안도라와 마케도니아가 있다. 조2위까지 주어지는 유로 2008 본선 티켓을 놓고 크로아티아와 이스라엘이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와 힘겨운 싸움을 펼쳐야 한다. 히딩크감독은 9월 7일 크로아티아전에 출장할 19명의 대표팀 명단을 발표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골키퍼와 포백진의 세대교체다. 골키퍼는 2006 독일월드컵 지역예선부터 주전으로 급부상하며 ‘제2의 야신’으로 불리고 있는 20살의 ‘신동’ 아킨페예프(CSKA 모스크바)가 또 다시 히딩크의 신임을 받았다. 유로 2004와 독일월드컵 지역예선을 통해 부분적인 세대교체를 해 오던 포백진은 좌우 풀백으로 오랫동안 대표팀에 몸담아 왔던 1976년생의 동갑내기 에브세예프와 세니코프가 빠지고 A. 베레추스키(CSKA)와 안유코프(제니트)가 히딩크호의 새로운 좌우 풀백으로 들어섰다.
중앙에는 CSKA의 힘이 좋은 센터백 이그나세비치(CSKA)가 중용됐다. 그러나 러시아대표팀의 허리에서는 히딩크감독의 고민이 엿보인다. 1974년생인 노장 로스코프를 탈락시키고 알도닌(CSKA) 주장 체제를 선언했지만 스메르틴(디나모)이 예선을 앞두고 부상에서 복귀한 것이 변수가 됐다. 일단 히딩크는 2명을 모두 대표팀에 선발했다. 이들은 미드필드 중앙에서 대표팀을 지휘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안고 있다.
히딩크감독은 8월 29일 러시아통신사인 <뉴스인포>와 인터뷰에서 “2명 가운데 누구를 주장으로 임명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알도닌은 그동안 주장 역할을 잘 해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주장은 경기 중에 감독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히딩크감독은 노련한 스메르틴을 유로 2004와 같이 센터백으로 돌리고 알도닌과 아르샤빈(제니트)을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해 공수의 연결 고리로 활용하는 전략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격진은 새로운 세력이 급부상하고 있다. 한때 한국의 박주영처럼 러시아에서 큰 기대를 모았던 케르자코프(제니트)가 슬럼프에 빠졌고 지난 시즌 부진했던 시체프(로코모티프) 또한 과거의 위력을 완전히 되찾은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떠오르는 세력의 위력은 상당하다. 최근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파블류첸코(스파르타크)가 대표팀 주전 자리를 노리고 있고, 알바니아와 평가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가졌던 포그레브냑(톰)은 경기 종료 직전 결승골을 기록하며 크로아티아전 명단에 포함됐다. 또 분데스리가 뉘른베르크에서 놀라운 기량향상을 보이고 있는 이반 사엔코도 처음 대표팀 명단에 올랐다. 한국과 호주, 그리고 러시아까지. 야망을 품고 성큼성큼 내딛는 히딩크감독의 행보에 유럽언론은 나폴레옹과 같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정복하지 못했다. 과연 히딩크의 거침없는 행보가 유로 2008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볼 일이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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