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외사 2권
14. 어려울 때 친구
심랑은 다만 탄식을 하고 머리를 가로 저은 다음 몇 걸음 걸어가더니
멈춰 서서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근 백년 이래에 아무도 이 고묘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내가 사람들을 불러서 이 고묘를 파헤칠 때 유심히 관찰해봤으나, 이
고묘에는 사람들이 들어왔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소. 그 고산청의 관은
뚜껑이 약간 열려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관 뚜껑을 완전히 닫기 전에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을 뿐이오. 그리고 고산청의 시체는 이미 백골로 변해
있었으며, 관 옆에는 그가 쥐고 있다가 죽은 후에 비로소 떨어져 깨져버린
옥으로 만든 잔이 있었을 뿐이었소. 그리고 그의 손은 여전히 관 밖으로
나와서 관의 뚜껑을 닫으려고 관 위에 얹혀 있었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고묘의 기관들이 한 번도 사용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오. 이러한 몇몇의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나는 근 백년 이래에 어떠한 사람도 이곳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었소."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 재물과 보석들, 그리고 무공비급은 틀림없이 이
고묘에 그대로 있겠군요. 다만 김 형께서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그 점은 귀하께서 마음을 놓으셔도 좋소. 이 고묘에 만약 그러한
재보들이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찾을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그러한 재물들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이 고묘 안에는
그러한 물건들이 없다는 거요."
심랑은 한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김무망을 보며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본인은 틀림없이 믿지 못했을 거요.
그렇지만 김 형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김 형의 말씀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되오. 다만...... 다만 그 보석들과 재물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죠? 고산청 그 사람이 원래 이 고묘에 가져오지 않은 것은 아닌가요?
그가 이 능묘를 만드는 데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을 전부 써버려서 더이상
여기에 갖고 들어올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물인데 내가 뭐하러 이런 생각을 하는지......."
말을 마친 그는 김무망의 뒤를 바짝 따라서 한 달음에 고묘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묘 밖의 풍설은 이미 멈춰있었으며, 둥근 해가 대지에 쌓인
눈을 찬란하게 비춰서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칠칠이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바로 그런 점이 대단한 장점이에요. 어떤 일이라도 당신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 그 문제에 초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생각하는 일을 당신은
생각하자마자 순식간에 이미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또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제 동생을 잊어서는 안 돼요. 빨리, 빨리, 빨리......
화예선의 혈도를 풀어 주세요. 도대체 제 동생을 어디에 숨겼는지 빨리
물어보세요."
화예선은 혈도가 풀린 후에도 몸을 여전히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그 신선일일취의 효력이 여전히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주칠칠은 예리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내 동생을 어디에 숨겼죠? 빨리 돌려 주세요."
눈이 그쳤을 때가 가장 추운 법이다. 주칠칠은 그 뼈를 에이는 듯한
추위를 느끼면서도 동생 불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조급해 하면 할수록 화예선은 더욱 꾸물거렸다.
화예선이 냉랭하게 말했다.
"지금 내 머리가 너무 어지러운데 어떻게 네 동생을 어디 숨겼는지 생각해
낼 수가 있단 말이냐?"
주칠칠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겠어요."
"지금 이 순간 네가 나를 죽인다 해도 소용없지. 내 몸에 남아있는 그
미혼약의 효력이 사라져서 내 머리가 맑아지기 전에는...... 그렇지
않다면......."
심랑이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당신이 만약 불아이를 내놓기만 한다면 당신의 공력이 회복되기 전에
어떠한 위험도 없으리라는 것을 내가 보장하겠소."
심랑은 화예선이 불아이를 내놓은 후에 주칠칠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화예선은 그의 공력이 회복되기 전에 주칠칠과 같은 적이 덤벼든다면
자신의 생명도 지키기 어려우나 그녀가 불아이를 그들에게 내놓기 전에는
주칠칠과 심랑은 자연히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보호해 주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심랑이 한 마디로 그녀의 생각을 간파해내자 화예선은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한참을 생각하더니 또 냉랭하게 말했다.
"내 공력이 회복된 후에는 또 어떻게 하겠소?"
주칠칠이 얼른 말을 받았다.
"당신의 공력이 회복된 후에 당신은 당신의 갈 길을 가고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면 돼요. 당신을 말리지 않겠어요."
화예선이 신음소리를 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나를 따라 오시오."
한참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화예선의 약의 효력은 점점 사라졌다.
화예선은 그전처럼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으나 억지로라도 혼자서
걸어갈 수가 있었다.
주칠칠도 당연히 스스로 걸어갈 수 있었으나 그녀는 심랑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두 손으로 심랑의 목을 꼭 부여 잡고 그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김무망은 그들과 같이 걸어가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나 도망가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도는 김무망의 뒤를 바짝 쫓아가면서 그 큰 한쌍의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쉬지않고 중얼거렸다.
"만약 나였으면 벌써 도망가 버렸을거야. 이 사람들을 쫓아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이 사람들이 죽여주기를 기다리는 건가?"
그러나 김무망은 그를 상대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이런 중얼거림을 듣지도
못한 척했다.
화예선은 산등성이를 따라서 십여 장의 거리를 걸어가더니 한쪽에 있는
거대한 암석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 바위를 치우면 그 속에 하나의 동굴이 있는데, 너의 그 귀한 동생이
바로 그 동굴 속에 있을 것이다. 흥! 우습게도 내가 그 귀한 여우털
바람막이 옷으로 그를 탄탄하게 싸서 그 속에 집어 넣었으니, 어떻든 얼어
죽지는 않았을 거야."
주칠칠은 이 동굴이 상당히 안전함을 확인한 다음 속으로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차갑게 말했다.
"심랑! 빨리 그 암석을 치워버리세요."
심랑은 아무리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돌려 김무망을 보고 빙긋 웃을
뿐이었다.
김무망은 심랑과 눈이 마주치자 큰 걸음으로 그 암석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일 장을 휘둘러 그 암석을 쳐냈다. 그의 이 가볍게 휘두르는 일
장은 조금도 힘이 들어가 보이지 않았으나 그 무게가 삼백 근이 넘을 듯한
거석은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버렸다.
심랑은 그 광경을 보고 탄성을 발했다.
"김 형, 대단한 장력이오!"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주칠칠의 놀람에 찬 부르짖음이 들려왔으며, 화예선의 안색도 갑자기
변했다.
그 굴 속에는 어디에서도 불아이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주칠칠이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친 할망구 ! 당신, 당신이 나를 속였어요."
화예선도 당황한 듯했다.
"내가. 내가 분명히 그 녀석을 여기에 숨겼는데......."
주칠칠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내 동생을 여기에 숨겼다구요? 내 동생이 어디에 있어요? 당신,
내 동생을 도대체 어디에 숨겼죠? 빨리, 빨리 돌려주세요. 빨리 내 동생을
돌려줘요."
화예선도 마음이 조급해져서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왜 너를 속이니? 나는 내 목숨을 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줄
알아? 그런데, 그런데 이녀석이 도대체 어딜 갔지? 직접 혈도를 풀고
도망간 것일까?"
옆에서 바라보던 김무망이 냉랭하게 말했다.
"만약 그 애가 자기 스스로 혈도를 풀고 도망을 갔다면 이 동굴 입구를
원래 상태로 이렇게 막아 놓을 필요가 있었겠소?"
주칠칠이 그 말을 받아서 소리쳤다.
"맞아요. 하물며 그애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직접 혈도를 풀 수가
있겠어요? 심랑! 저 할망구를 죽여버리세요. 빨리 저 미친 할망구를
죽여버리세요."
심랑이 침중한 음성으로 탄식하면서 말했다.
"지금 이 사람을 죽인다 해도 별로 도움이 없소. 하물며, 내가 보건대
화예선은 거짓말을 한것 같지도 않소. 당신 동생은 아마, 이미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 것 같소."
화예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래도 심 상공이 바른 말씀을 하시는군."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젠 어떻게 하죠? 심랑! 빨리 무슨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렇게 조급해 한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주칠칠이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요? 내 동생의 목숨이 이미 없어졌을지도
모르는데요? 당신...... 당신 너무하는군요. 이런 말을 제게
하다니......."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끝내는 방성대곡하기 시작했다.
김무망도 눈썹을 약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녀는 좀 쉬어야 될 것 같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본인이 보기에도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구려."
김무망이 가볍게 소매를 들어올리자 그 소매끝이 주칠칠의 혼수혈에 살짝
닿았다.
순간 주칠칠의 울음소리가 점점 낮아지더니 눈을 감고 순식간에 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주칠칠이 흘린 눈물은 심랑의 어깨에 떨어져 순식간에 결빙되어 얼음으로
변해버렸다.
김무망이 차가운 눈빛으로 화예선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심 형께서는 이 녀석을 어떻게 처치할 작정이시오?"
화예선은 그의 차가운 눈빛을 바라보고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화예선은 비로소 밝은 햇빛 아래서 김무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은 기괴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의 귀, 코, 눈, 입은 만약
하나씩 떼어 내서 본다면 다른 사람과 별반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두 귀는 한쪽은 크고 한쪽은 작았으며, 두 눈썹은 한쪽은 두텁고
짙었으나 다른 한쪽은 얇고 가늘었다. 코는 마치 어린애 주먹 만큼이나
커다랗게 얹혀 있었으며 입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얇았다.
두 눈은 손바닥 길이 만큼이나 서로 널찍이 떨어져 있었고, 왼쪽 눈알은
구슬처럼 동글동글 했으나 오른쪽 눈은 도리어 뱀눈처럼 삼각형이었다.
보건대 아마 하나님이 그를 만들 때 순간적인 실수로, 본래는 오륙 명의
서로 다른 사람의 얼굴에 있어야 할 기관들을 한 사람 얼굴에 갖다 붙여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만약 여자나 어린애가 그를 쳐다봤다면 한밤중에 잠을 자다가 악몽에
놀라서 깰 듯한 그러한 형상이었다.
화예선은 그를 더이상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눈길은 슬쩍
엿보곤 했다. 그녀가 그를 보면 볼수록 차가운 기운이 더욱 짙어져갔다.
그녀는 본래 김무망이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며 창피도 모르는 자라고
욕설을 퍼부을 작정이었으나 그의 모습을 보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지거리를 속으로 도로 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는 모습으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평일에는 어떤 사람도 눈에 두지 아니하던 주인 김씨 어르신이 오늘
이처럼 심랑을 존중하는 것이 매우 이상하다는 듯이.......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만약 본인의 입장이라면 저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김무망이 냉랭하게 말했다.
"죽이는 것도 재미없고, 끌고 다니자니 피곤만 할 뿐이오. 아예 여기에
남겨두고 가버리겠소."
그가 이렇게 말하자 화예선이 크게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이 만약 나를 여기에 놔두고 그냥 가실 바에는 차라리
죽이고 가세요."
이순간 그녀는 몸에 기력이 조금도 없었으며, 입고 있는 옷은 아주 얇고
짧은 것으로서 만약 다른 사람이 구해주지 않으면 그녀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자기 혼자 있을 경우에는 동사(凍死)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무망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알고보니, 장중천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들이군. 받으시오."
그는 천으로 된 허리띠를 풀어서 밧줄처럼 화예선에게 던져주었다.
화예선은 손을 뻗쳐서 김무망이 던진 허리띠를 잡았으나, 도대체 김무망의
이러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이미 당신의 생명을 살려주셨으니 얼른 그 허리띠로 손목을
묶으시오. 우리가 움직이는데 김 형께서 당신이 움직이는 것을 도와주실
것이오."
김무망이 말했다.
"심 형께서 이미 이 녀석을 죽일 마음이 없는데 본인은 심 형의 뜻을
받들어 귀찮지만 이 녀석을 끌고 다닐 수밖에 없죠. "
심랑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이 동생의 지기(知己)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이 동생의
생각을 그렇게 정확히 알아차리다니요."
이때 화예선은 이미 얌전히 자기의 손목을 그 허리띠로 단단히 졸라 매고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으나 자기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생사의 기로에
처하자 그녀는 비로소 죽음이 얼마나 고독하고 두렵게 생각되는지 뼈에
사무치게 느끼게 되었다.
김무망이 말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고로 가장 어려운 것이 죽는다는 것이오. 화예선이
죽음을 두려워할진대 본인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심
형께서 본인의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본인이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있겠소? 심 형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본인은 심 형 곁에서 미력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하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만약 김 형께서 은혜를 분명히 아시는 대장부라고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안심하고 이렇게 옆에 있을 수가 있겠소? 본인이 앞장서서
나아갈테니 우선 이곳에서 벗어난 다음에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심랑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앞으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김무망은
화예선을 끌고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두 사람은 경공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 달려가는 속도는 빠르기가 비할 데 없었다.
다만 화예선은 그들 뒤를 쫓아가면서 화살 한 대 거리를 달려가기도 전에
이미 입술이 파랗게 변했고, 얼굴은 혈색이 사라져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은 싸늘한 적막에 싸여 있었고 새나 들짐승들도 종적이 끊겨 있었다.
그러나 눈 위에는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방천리나 전령송 등이 틀림없이 아주 낭패한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다.
심랑이 이들 발자국을 자세히 바라보니 이들 발자국은 올 때는 아주 얕게
찍혀있었고 발자국과 발자국간의 거리도 적어도 오륙 척은 되는 듯했다.
그러나 돌아갈 때 찍힌 발자국은 약 이 촌이나 깊이 패어 있었으며,
발자국과 발자국 간의 거리도 상당히 짧아져 있었다.
이들은 올 때는 신법이 매우 가벼웠으나, 돌아갈 때는 마치 내상을 입은
듯 상당히 힘들고 무거운 발걸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랑은 그 발자국 자국을 보면서 김무망을 향해 말했다.
"김 형께서 만든 걸작의 효과가 이렇게 나타났군요."
그러나 김무망은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공의 그 말씀은 무슨 의미오?"
"본인은 방천리 등이 가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주 아가씨를 귀찮게
할까봐서 걱정했소.
그렇지만 지금 보니 그들은 이미 김 형에게 부상을 당했으니 안심을 하는
바이오."
"본인은 그들을 부상시키지는 않았소."
심랑이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방천리 등을 부상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상, 틀림없이
방천리 등은 이 사람에게 부상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부상을 입혔단 말인가? 김불환 한 사람의 능력으로써는
이렇게 많은 무림 고수들을 부상시킬 수는 없었을텐데.......)
그는 생각해볼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걸음을
천천히 하였다. 그들이 이생각 저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걸어왔을 때,
갑자기 정면에서 하나의 인형이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볼 때는 점과 같았는데 그 회색 인형은 순식간에 그들 눈앞에
들이닥쳤다.
그 인형은 다름아닌 난세신룡(亂世神籠)의 딸이며 철화학의 처(妻)인,
얼굴에 상처자국을 가진 반면미부 그녀였다.
그는 가슴에 딸 정정(亭亭)을 안고 얼굴 가득히 황급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심랑을 보자 마치 친형제를 만난 듯 반가워하면서 발걸음을 멈춰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다.
"심 상공께서는 우리집 부군(夫君)을 보셨나요?"
심랑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면서 되물었다.
"철화학이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어요."
"방천리, 승형, 일소불 등 그 사람들은......."
심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면미부가 말을 가로챘다.
"그들은 모두 심 상공과 같이 그 고묘의 비밀을 캐러 가지 않았나요?
그들의 행적을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아직 돌아가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는 철화학이 그 애처(愛妻)와 어린 딸을 상당히 사랑해 몸이
자유롭자마자, 틀림없이 심양성으로 급히 되돌아가 처와 딸을
만났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틀림없이 무슨 변고가 생겼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또한 방천리 등 수십인의 행적도 묘연하여 심양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반면미부는 심랑의 얼굴색을 살펴보고 나서 더욱 당황하면서 한손으로
심랑의 옷깃을 부여잡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화학이...... 그 사람이 혹시 이미......."
심랑은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는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그러나 그의 눈빛이 한곳을 주시하면서 말소리도 동시에 뚝 끊겼다.
그의 눈길이 머문 곳에서 그는 이미 그 고묘를 향해 나아가는 발자국은
발견하였으나, 고묘에서 심양성으로 돌아가는 발자국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심랑은 속으로 외쳤다.
(상황이 좋지 않군 !)
그는 더이상 반면미부를 위로할 수도 없어서 즉시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김무망의 안색은 신중하게 변했으며, 반면미부의
표정도 암울하게 변해갔다. 정정은 그녀의 목을 더욱 꼭 움켜 안고
쉬지않고 울 뿐이었다.
일행은 심랑의 뒤를 쫓아서 오던 길로 걸어 돌아갔다. 약 화살 한 대의
거리만큼 걸어 돌아갔을 때, 갑자기 심랑이 가볍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여기요."
김무망이 눈을 들어 쳐다보자 심양성을 향해 가던 어지럽게 난 발자국이
바로 그 자리에서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강호 무예인 수십 인은 바로 이곳에서 하늘로 날았는지, 땅으로
스며들었는지 그 종적이 끊겨버렸던 것이다.
반면미부가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심랑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철 형과 방천리, 일소불 등은 이미 그 고묘의 위험 속에서 벗어났었죠.
그 일행은 틀림없이 심양성으로 급히 돌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이르러......."
그 일행이 여기에 이르러서 도대체 어떻게 실종되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경천동지할 이변이 일어났단 말인가. 심랑은 머릿속이 오리무중에
빠져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길게 탄식하면서 말을 멈췄다.
반면미부는 확실히 평범한 아낙네와는 달랐다.
이처럼 황급하고 비통한 상황 하에서도 그녀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눈 위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을 몇 번 더 살펴보았다. 그
발자국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간 흔적도, 혹은 옆으로 비껴간 흔적도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하늘로 날아가버린 것처럼....... 그녀는 비록
표면상으로는 진정된 듯했으나, 그 발자국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이상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와 더불어 놀람과 두려운 기색을
나타내 보였다. 그녀의 손과 발도 동시에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극도의
놀라움 속에서 그녀는 도리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무망과 심랑은 서로 상대를 마주 보았다. 이 두 사람은 평시에는 모두
세상만사를 마치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꿰뚫어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생각을 굴려도,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생각해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이 평소에 만약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었다면 이 일을
귀신의 장난으로 돌려버렸을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평시에 일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그 스스로 '이 일에는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어.
다만, 내가 생각하지 못할 뿐이야!' 하고 말하는 자기의 이성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어떻든 두뇌가 명석하고 사려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이 일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으나, 어느 한 점도 이러한 현상을 유효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귀신의 존재가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고, 또 이러한
현상을 자신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해석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은 결코
알아낼 수 없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이 일이 이상하면서도 두렵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어느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순간에 이르러 반면미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떠듬떠듬 말했다.
"천첩(賤妾)의 마음이 상당히 혼란해져 있어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상공께서 적절히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일에는 틀림없이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 같군요. 다만 제가 일순간 어떻게 된 까닭인지 알아낼 수
없을 뿐입니다. 부인께서는 너무 비통해 하지 마시고 저와 더불어......."
이때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씨 형수께서는 그 녀석의 개 같은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그 녀석 옆에
서 있는 놈은 바로 쾌락왕의 수하로서 이번 이 고묘에서 장난을 친
놈입니다. 그리고 심가 놈은 벌써 그 녀석과 한통속이 되었어요. 철 형과
방 대협, 그리고 수십 명의 무림 친구들은 벌써 이 두 녀석한테 당했던
것입니다. 나, 견리용위 김불환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 찢어지는 듯한 음성은 바로 김불환이 냈던 것으로서, 그는 멀찍이
떨어진 길가에 있는 큰 나무에 숨어서 손짓 발짓을 하면서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네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 네 사람은
바로 불패신검 이장청, 기탄두우 연천운과 금은보다도 말을 아끼는
냉가(冷家) 형제였다.
원래 이장청 등은 심양성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전해 듣고 밤을
도와 달려오다가, 우연하게도 심랑 등을 해칠 궁리를 하고 있던 김불환과
마주쳤던 것이다.
이 순간 이장청은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연천운은 이미 노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며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우리 형제들이 저 심가 녀석의 내력을 알아낼 수가 없어서 이상하다
했더니만, 원래 저 녀석은 쾌락왕의 앞잡이었구나. 냉대(冷大)!
냉삼(冷三)! 이번에는 저 녀석을 그대로 놔줘서는 안 돼오."
반면미부는 김불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다가
인의장(仁義莊) 주인의 말을 듣고는 망설이지 않고 이를 악물더니, 아무
소리없이 섬섬옥수를 들어서 심랑의 가슴을 향해 일 장을 날렸다.
그 장세의 신속하고 기괴함은 진산장 황보수보다 훨씬 더 고명했다.
심랑은 가슴에 사람을 안고 있었으나 신형을 번쩍 하더니 어렵사리나마
그녀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는 이 순간, 말로는 결코 그들의 오해를 풀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한 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불환은 더욱 득의한 기색을 나타내며 소리쳤다.
"여러분! 저 놈이 결국 승인하는 것을 보셨죠? 철씨 형수님! 손에 사정을
두지 마세요. 연 노선배님! 노선배님께서도 같이 공격을 하셔야죠?"
연천운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노부가 어찌 사람 숫자가 많은 것을 믿고 승리를 취하려는 그런
무리겠소?"
김불환이 냉소하며 말했다.
"저런 녀석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무림 도의를 앞세워야 하는가요? 연
노선배님께서는
저기를 보십시오. 저쪽 눈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나 아십니까?"
연천운이 화예선을 힐끗 쳐다보더니 즉시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그는 폭갈을 터뜨리며 화예선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공격이 화예선에게 미치기도 전에 갑자기 살기등등한 회색
장포를 입은 사람이 옆에서 그의 공격을 가로 막았다.
연천운이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감히 내 앞길을 가로 막다니."
김무망은 냉랭히 그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천운은 그의 얼굴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주먹을 내려 찍었다.
그러나 김무망은 가볍게 일장을 휘둘러서 그가 공격하는 주먹의 기세를
와해시켜버렸다. 연천운이 계속하여 다섯 주먹을 공격하여 들어갔으나,
김무망의 쌍장은 마치 춤을 추듯 그의 맹문을 역공해 들어오며 한 걸음도
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연천운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대갈했다.
"화예선과 너는 어떤 관계지?"
김무망이 냉랭하게 말했다.
"화 아무개와 본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단지 심 상공이 그녀를
나한테 부탁했으니, 누구도 그녀를 해칠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오."
눈 위에 앉아 있던 화예선은 그동안 김무망에게 끌려오느라 전신이 쓰리고
아려서 참기 어려웠으나 이 순간, 김무망의 말을 들으면서 얼굴에
감격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천운은 수염을 부르르 떨더니 순식간에 다시 아홉 주먹을 공격해냈다.
기탄두우 연천운은 비록 형산의 싸움에서 무공의 반 이상을 상실했으나,
이때 공격해 내는 주먹의 기세는 그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연천운이
휘두르는 주먹에서는 바람소리가 휙휙 일어났으며, 주위에 쌓였던 눈들을
어지럽게 날리게 했다. 그러나 김무망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에서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이장청은 보면 볼수록 더욱 놀람에 찬
표정을 드러냈다.
그는 김무망의 무공의 고강함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심랑의 표홀함과
경공의 뛰어남에 더욱 놀랐다.
심랑은 가슴에 한 사람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의 신형은 눈위를 이리저리
나는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고, 그 눈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옮겨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미부의 장력이 비록 신속하고 기괴하기 짝이 없었으나 끝내 심랑의
옷자락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김불환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만면에 미소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더욱 정색을 하고 싸우면 싸울수록 그는 더욱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그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냉대! 냉삼! 당신들도 가서 도와야죠. 당신들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강하고 예리하기가 그지없는 바람소리가
일어나며 자기 자신의 얼굴로 곧장 지쳐들어옴을 느꼈다.
냉삼의 오른팔에 달려 있던 그 거무튀튀한 쇠갈고리가 이미 그의 면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김불환은 크게 놀라서 공중으로 펄쩍 뛰며 어렵게 쇠갈고리를 피해냈다.
그는 노갈을 터뜨렸다.
"당신, 무슨 짓이죠?"
"네 녀석 주제에 감히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말을 마친 후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한 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김불환은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으나 그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이때, 반면미부와 연천운는 이미 수십 초를 공격했으나 심랑과 김무망 두
사람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피하기만 할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심랑은 비록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반면미부 역시
가슴에 딸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사리나마 그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무망은 이미 연천운의 그 강력한 주먹의 기세에
쉽게 대처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방어만 하는 방법은 확실히 너무 힘이
드는 수법이었다. 상대방과의 무공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이상
이러한 방법은 패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장청은 그들이 대결하는 모습을 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젊은 부인은 틀림없이 난세신룡의 딸 유반풍(柳伴風)이겠군. 그녀의
무공이 화산옥녀보다 뛰어날 줄은 진짜 생각도 못했구나. 그녀의 남편
철화학의 무공은 더욱 대단하겠지.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강호 중에는
무림 칠대고수 이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이 많음에 틀림이
없어. 그렇지만 그들 부부는 어쨌든 명가의 후예인데 저 소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람으로 하여금 추측을 불가능하게 하는군."
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면미부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 뿐, 반격을
하거나 공격을 전개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의 무공 내력을 알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이장청의 눈빛이 김무망 쪽으로 돌려져서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의 두
눈썹이 더욱더 깊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반면미부 유반풍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이미 심랑과의
싸움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으며, 가슴은 오르락내리락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심랑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심랑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 당신은 왜 반격을 하지 않는 거죠 ?"
"저는 부인과 원수진 일도 없는데 왜 반격을 한단 말입니까?"
"헛소리 ! 만약 이 일이 당신이 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다는 거예요? 당신이 만약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일은 본인도 상당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초지종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유반풍이 발을 구르면서 외쳤다.
"당신, 당신......."
그녀는 이를 악물고 가슴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정정은 심랑과
반면미부가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놀래서 더 이상 울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간,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시 크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유반풍은 그 딸과 심랑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국 눈에 가득
눈물이 글썽 하더니, 허리를 굽혀 딸을 껴안고 가볍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심랑이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면 말했다.
"이 일의 진상은 쉽게 밝혀질 것 같지 않군요. 부인께서 만약 저에게
보름간의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철 대협이 계신 곳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유반풍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심랑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김불환이 끼어들어 몇 마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냉대, 냉삼의 차갑고 예리한 눈빛과 마주치자 한 마디도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유반풍은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한참 심랑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아요. 제가 심양성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심랑은 이장청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선배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이장청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보건대, 냉씨 형제들은 자네에게 퍽 호감을 갖고 있어서 자네와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 그렇지만, 내 셋째 동생...... 자네가
화예선을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는다면......."
"저는 화예선이 결코 김진우(金振羽) 일가를 도살한 장본인이 아니라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연천운은 김무망과 쉴새없이 주거니받거니 싸우고 있었으나 그의 귀는
여전히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심랑의 화예선을 비호하는 말을 듣고
그는 노갈을 터뜨렸다.
"개 같은 소리! 이 노부가 직접 본 것이야."
심랑이 연천운의 말을 잘라서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지금 무림 천하에 이미 수많은 절전된 무공이 다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선배님께서는 안양오의(安陽五義)가
자살수(紫煞手)라는 장법 아래 죽은 것을 아시는지요? 선배님께서
자살수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철화학은 결코 그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제가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화예선을 선배님께 넘겨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진상이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 선배님께서는 반드시 그녀를 해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장청이 손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고 또 한참을 생각하더니 시원하게
대답했다.
"좋네. 노부는 자네에게 보름의 시간을 주겠네. 보름 후 자네는 우리
인의장으로 와주기 바라네. 철씨 부인도 그곳에서 자네를 기다리게 될
것이네."
유반풍이 손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심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청이 가볍게 질책했다.
"셋째! 아직도 손을 멈추지 못하겠는가?"
연천운이 맹렬하게 세 주먹을 공격하고 뒤로 여섯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김무망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무망은 머리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한
척했다.
김불환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대갈했다.
"심랑은 놔줘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저 놈은 쾌락왕의 수하로서 절대 놔줄
수 없습니다."
심랑이 말했다.
"김 형께서 그것을 막을 수 있으시겠소?"
김불환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것은, 그것은......."
심랑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사람이 쾌락왕의 수하이든 아니든, 선배님들께서 이미 저를 놓아
주셨으니 그 사람에게도 더이상 난처하게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저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저 혼자 힘으로는 이 일의 진상을
정확히 밝혀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장청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분 형씨께서 가시려 한다면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갑자기 그는 소매를 가볍게 휘두르면서 말했다.
"일은 이미 이렇게 결정되었으니, 더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소이다.
수고스럽지만 철씨 부인께서는 저 화부인을 부축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돌아갑시다."
심랑이 냉씨 형제를 향해 웃음을 머금고 포권의 예를 보냈다. 냉대와
냉삼의 일그러진 얼굴에 순간 웃는 웃음이 번쩍했으나, 그의 눈빛이 다시
김불환을 바라보는 순간 웃음은 즉시 사라져버렸다.
김불환은 마른 기침소리를 내며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쫓아갔다.
그는 더이상 다른 사람들의 눈빛을 받기가 두려운 듯 고개를 모로 꼰 채
따라가고 있었다.
이장청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참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 흔들며
가벼이 탄식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다음 아도가 엄지 손가락을 곧추세우며 크게 감탄의
소리를 냈다.
"심 상공께서는 정말로 친구애가 두텁군요. 방금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 사부님을 버리지 아니하시다니.... 사부님께서 기꺼이 심
상공을 위해서 이렇게 애쓰시는데 그것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얘야, 오직 어려움에 처했을 때만 친구간의 우정이 나타난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상공께서는 어째서 그......
그...... 김가 놈을 그렇게 놔줬죠?"
"내가 그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려 했다면 이장청 선배께서는 틀림없이 그
사람을 보호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심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본인에게는 다시 한 가지 김 형께 여쭤보고 싶은 점이 있는데, 김
형께서는......."
김무망이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답했다.
"쾌락왕의 네 사자 중 본인이 제일 먼저 중원으로 왔소. 그렇지만 본인은
화예선의 이름을 도용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았소. 그 김진우
일가를 누가 도살했는지는 본인도 모르고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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