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공짜는 달콤했다
‘나와바리’라는 말이 있다. 조폭들이 주로 쓰는 말인데 영향력이나 세력이 미치는 공간이나 영역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조폭끼리 상대방의 나와바리에 침범하면 칼부림이 나게 마련이다. 우리는‘고딩’시절 ‘바운다리’라는 말을 썼다. ‘붕붕 떠다닌다’는 뜻인데 우리가 즐겨 노는 구역을 뜻하기도 했다.
나의 ‘고딩’시절 바운다리는 신시장과 구시장을 구분하는 제방 동쪽 이었다. 구시장이나 8.15 다과점, 문화극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섭슬려 다녔다. 서쪽은 경고의 성구와 초등학교 동기 세진이가 잡고 있었다. 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그쪽 애들도 통근하는 일 외에는 동쪽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무슨 약속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건 하나의 묵계였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친구 사이엔 바운다리가 있다. 지금 내 바운다리는 대구 달서구 용산동이다. 혹여 친구들과 어울려 용산동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으레 술값은 내 차지다.
전국 동기회에서 버스킷리스트에도 없는 2부 사회를 하면서 목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었다. 21일 날, 목이 깔깔한데 친구들이 한 잔하자며 전화가 왔다. 사정을 얘기 했더니 너 답지 않게 웃겨 죽겠다며
“야, 임마! 쐐주가 약이야 약. 까불지 말고 총알 타고 와!”
하고는 휴대폰을 끊어버렸다. 나는 기면증이 걸린 듯 시도 때도 없이 졸리고 기운이 없어 따끈한 물을 홀짝이고 있는데 두 어 시간 지나 설가, 전화가 걸려왔다. 용산동 어느 횟집에 있으니 10분 내로 나오라면서 마지막에 엄포를 놓았다.
“쳐들어가기 전에 나오시지?”
세 친구는 이미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데도 힘이 부친 듯 했다. 영, 촉이 닿지 않았다. 지들이나 나나 70이 넘어도 인간되긴 글렀다 싶었다. 교직 경험이 없는 친구들은 단작스러웠지만 나름대로 재미난 구석도 없지 않았다. 친구들은 불 지핀 가마솥의 개구리들처럼 와글거리기만 했다. 나도 술 취하면 저랬던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희곡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인생은 7막이라고 했다. 마지막 7막에 이르면 ‘제2의 천진함’을 갖게 된다나. 그들에게 다시 천진함이 찾아온 걸까. 고주망태 천사가 돼어...
그러거나말거나 납득이 안 가는 조합에 양쪽 귀에서 연기가 솟구쳤지만 어쩌랴. 코 푼 휴지처럼 친구들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부대껴 온 세월이 얼만데…. 어금니를 물고 훗날을 기약하며 금방 시집온 새색시처럼 바닥을 깔아주고 고양이 소리를 냈다. 그날 나는 홀아비들에게 맡겨진 과부 꼴이었다.
택시를 부를 겸 술에 취해 뿔뿔이 대고마고 시킨 술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에 가니 아가씨가 말했다.
“술값은 계산 했는데요?”
“누가?”
“저 분.”
아가씨는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손을 흔들며 내게로 걸어 왔다. 금시초견이었다.
“…?”
사내가 손을 쑥 내밀어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나는 얼떨결에 사내에게 손이 잡힌 채 덩달아 흔들어 댔다.
“어르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걷습니다.”
사내가 제자리 뜀뛰기를 몇 번 해보였다. 옳거니, 그 친구였다.
작년 가을이었다. 와룡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하늘은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닦아 먼지 하나 없는 유리창처럼 보였고, 말간 파란색 하늘에 구름이 간간이 게으른 듯 지나갔다. 날씨 한 번 징 하게 좋았다. 산은 만산홍엽이 꽃보다 뜨겁게 울긋불긋 단풍으로 단장하고, 비탈길 회나무는 브로치처럼 빨간 열매를 조롱조롱 매달았다. 어제 내린 비에 낯을 씻은 아홉 손 당당풍의 빨간빛이 유난히 새뜻했다. 하트모양 가을 잎에 쌓인 엿당이 콧구멍으로 달짝지근한 향기를 솔솔 풍겼다. 산이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들이 바람이 살푼 불 때마다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람이 분다. 김광석이 노래했던 ‘라흐마니노프’가 사랑했던 아. 가을이 온다. 단풍보다 더 뜨겁게 내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건강한 몸으로 가을 산을 즐기고 있음을 자신에게 감사하자 마음이 들떴고, 안도현의 ‘가을산’이란 시 구절이 떠올랐다.
어느 계집이 제 서답을 빨지도 않고
능선마다 스리슬쩍 펼쳐놓았느냐
용두질 끝난 뒤에도 식지 않은, 벌겋게 달아오른
그것을
햇볕 아래 서서 꺼내 말리는 단풍나무들
읊조리며 흥에 겨워 산을 내려오는 내 눈에 산을 오르는 중년의 남녀가 들어왔다.
사내는 뇌경색의 후유증인지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어둔하게 걷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불안했다. 여인은 그런 사내를 부축하면서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조금만 더 힘내보세요.”
“못하겠어, 못해! 차라리 날 죽여!”
왕년에 한 솜씨 해보였던 사내에게 판타지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둘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여인은 매니큐어에 립스틱을 하고 있었고, 얼핏 보아도 왕관 쓴 하트모양의 판도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티였다. 사내의 앞날이 훤히 눈에 보였다. 웬지 목 안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하면 내가 전문 아닌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쓴 소설가 김영하는 거짓말을 하는 순간이 스토리텔링의 시작이라 했었다.
“보쇼. 젊은 양반. 작년 이맘 때 내가 당신하고 똑 같았소. 아마 더했을 거요. 그런데 보쇼. 지금 멀쩡하잖소.” 나는 제자리 뜀뛰기를 몇 번 해보이며 말을 이었다. “길은 하나뿐이지요. 죽기 살기로 움직여야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난 잘 알지요. 주저 않으면 평생 병신이 됩니다. 앞으로 6개월이 고빕니다. 아름다운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를 부둥켜 않고 귀에 속삭였다.
“병신이 되면 부인은 당신을 버릴 겁니다. 틀림없이!”
나는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내려왔다. 사실 마지막 말은 ‘당신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힘내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내 입에선 엉뚱하게 말이 새버렸었다.
그날 그 사내였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쨌든 공짜는 달콤했다.
첫댓글 아-시원하다!
거짓말이 큰 약이되어 지팡이에 의지하던 한 가장을 제 자리뛰기를 할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워준 일등공신 무무님! 우리동기중 인물입네다 요..
글찮아도 의리의 사나이 무무님! 앞으로도 술은 적당히 하시고,,ㅎ 사람살리는 일만
많이많이 하시기를 기대합니다..
말 한마디로 병도 고처주고 술 값도 공짜로 생기고...
신통방통 세상에 어찌 그런일이 있으리...축하하네.
정의의 주먹만 쓰는 줄 알았더니...
말 몇 마디로 한 젊은이를 살려냈군.
역시 고제홍다운 일을 했어.
선의의 하얀 거짓말이 특효약이 되었군요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의리의 친구 맞네요
참잘했어요 동그라미 다섯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