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정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실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에서 따온 것이다.
경회루의 서북쪽 넓은 터에 있는 향원지(香遠池) 안의 작은 동산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향원정은 임금이 휴식과 풍류를 즐기던 곳이자 신하들과 간소한 시회를 열던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2년(1456년) ’경복궁 후원에 취로정聚露亭이라는 정자를 지은 뒤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고종 때 그 자리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모지붕으로,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節甁桶(지붕마루의 가운데에 세우는 탑 모양의 기와로 된 장식)을 얹어 치장하였다. 육각형 모양의 초석과 평면 그리고 육모지붕의 2층 누각인 향원정은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2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 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 살 창틀을 달았으며, 1층에는 구들을 들여서 난방이 가능하고 2층은 마루를 깔았고, 지금도 불을 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연못의 북쪽에 연못과 정자를 연결하는 취향교(醉香橋)가 있었으나 6·25때 파괴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남쪽의 다리는 1953년에 가설된 것이다. 북악산을 병풍처럼 뒤에 두고 고즈넉하게 서 있는 향원정은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고, 예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높은 정자로 나라 안에서도 손꼽히는 정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