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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모데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은조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신자’, 즉 믿는 자라고 부르지요. 그만큼 믿음은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할 때도,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설명할 때도 항상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사람들은 믿음을 그저 개인적인 행위로 치부하려고 합니다. 믿음은 나와 하나님 간의 개인적인 관심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 혼자 하나님을 믿고 천국 가면 되지, 나만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되지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맞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믿음은 나와 하나님 간의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기독교의 믿음을 이렇게 개인적인 신뢰 행위로 이해하려고 했고, 루터의 신학적 유산을 이어받은 유럽의 많은 실존주의 신학자들도 믿음을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신뢰행위로만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골도 믿음을 가리켜 어두움 속으로 뛰어드는 실존적 모험(venture) 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이렇게 개인적 신뢰행위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은 성경이 교훈하는 믿음의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왜곡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을 보면 야고보 사도는 독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가 어떻게 믿음의 본질에 위배되는 행위일까요? 만일 믿음이 그저 나 개인과 하나님 간의 개인적인 신뢰 정도를 뜻한다면, 어떻게 신자의 차별 행위가 그가 가진 믿음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일까요? 오늘 저는 믿음이 지닌 공동체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살던 사회의 차별 현상
우리는 우선 야고보 사도가 살던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 그리고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회적 병리현상에 휩쓸리고 있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은 하늘에서 별안간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사도들이 살던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 또는 지역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권면으로 제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야고보의 교회는 빈부격차가 심했던 공동체였습니다. 2절을 보면 교회예배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한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보통 옷은 몸을 따듯하게 하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실용적인 목적으로 입을 때가 많지만, 고대나 현대나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나 부를 과시할 목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고 화려한 치장을 하기도 합니다. 입는 옷이나 치장이 고대에도 신분차별,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야고보가 살던 사회는 부와 권력을 통해 사회적 정의가 왜곡되고 무너지던 불의한 사회였습니다. 6절을 보면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보통 부는 권력을 얻는 수단입니다. 돈이 있어야 권력을 얻기도 하고 아니면 권력자와 유착관계를 맺거나 그를 매수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부와 재산을 쌓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강자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자가 왜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갈까요?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높은 금리를 내서라도 부자들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높은 이자를 갚을 능력이 없다 보니까 부자들은 이를 약점으로 삼아 행패를 부리고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고대사회의 법정은 가난한 자들 편이 아닌 때가 많았습니다. 부자들은 평상시부터 자신의 부를 발판으로 재판관들과 유착관계를 맺을 때가 많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권리가 법정에서 보호되기를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로, 야고보가 목회하던 교회도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에 물들어 자연히 돈과 재물을 중히 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던 공동체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야고보의 교회가 지녔던 문제들은 다음 두 구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1) 첫 번째 문제는 신분차별의 악습이었습니다. 3-4절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는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교회 예배 안내를 맡은 자들이 옷차림과 치장을 보고 차별적인 언사를 했다는 말인데, 부한 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사회적 악습이 교회 내에도 어떻게 스며들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문제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결여된 공동체였다는 사실입니다. 15-17절을 보세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왜 궁핍한 형제를 보고도 말만 하고 아무것도 돕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 분위기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한다,” “돈이 최고다”라는 물질지상주의가 팽배하다보니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인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차별행위가 왜 믿음의 본질에 모순되는가
야고보는 4절에서 독자들에게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 이면에는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는 교만한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다’는 행위는 우월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경멸하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판단하다’ 동사는 보통 ‘정죄하다’는 뜻을 함께 포함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그를 정죄하고 경멸하기 마련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월의식을 갖고 형제를 업신여기고 경멸하며 정죄하는 태도가 악하다고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형제를 차별하고 업신여기며 태도가 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을까요?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4:2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를 통제하는 중심 요소는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인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벗어나서 무엇을 행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한다는 것을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을 행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믿음의 확신이 없이 의심 속에서 행한다면 그는 벌써 죄를 짓고 있는 셈입니다.
(2) 성경은 믿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데 기초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과 안다는 말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믿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아는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5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씀합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성경의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부자들과 권세자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 시민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들을 특별대접하고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처신이나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며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을 차별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의 믿음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제를 차별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태도가 악한 이유는 형제를 차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교회의 성도들이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지닌 내면적 가치를 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치장을 했는가를 눈여겨보고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 것입니다. 명품을 걸치고 오면 그 사람은 가치 있는 인생이고, 남루한 옷을 입고 오면 그 사람은 말을 섞을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인생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이 얼마나 세속적이고 천하고 불신앙적인 판단기준입니까?
야고보 사도가 목회하던 교회도 이런 차별 행위가 성도들 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 교회는 주로 유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아직 기독교가 초기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회당에서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을 때 예배를 안내하는 사람이 사람들을 어떻게 차별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안내자는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올 때 그를 “눈여겨보고”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았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다른 사람을 보이는 외모를 통해 판단하지 그 사람의 내면의 가치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머리를 땋아 올리고 금가락지를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벌써 회당에 들어올 때 눈에 확 띠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아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는 사람을 이렇게 외모만 보고 차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조차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 가치관과 별 다를 게 없는 행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무한대 가치
믿음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가 가진 믿음을 통해 지배를 받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눈여겨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주관적 신념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자요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신뢰하는 행동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결정은 그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아는 지식에 의존해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죽는 데 내어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이기에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버려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자기 목숨과 바꿀 만큼 우리를 무한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기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끼실 때 여러분은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나의 존재가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있다고 말이지요. 오래전 신형원이 부른 ‘개똥벌레’라는 가요가 있는데요, 오늘날 사람들 중에는 사람을 개똥벌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형원의 노래가사를 이렇습니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 번만 노래를 해주렴/
나는 쓰라진 가슴 안고 오늘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마음을 다 주어도 친구가 없네/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뿐일걸/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손을 잡아주렴/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만일 우리 중에 나는 개똥벌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를 어찌 개똥벌레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무한한 존재가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개똥벌레와 같은 하찮은 인생이라고 치부했을 것입니다. 야고보 교회의 독자들은 그들의 교회에 남루한 옷을 입고 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깨똥벌레 같은 하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가난한 자들, 사회적으로 하찮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인생의 존재가치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존재가치는 내가 걸친 아름다운 옷과 치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가치는 내가 걸친 명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존재가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발견됩니다.
천국백성의 자격조건: 왕의 법을 준수하는 것
본문 5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될 사람들의 자격 조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그런데 8절을 보면 또한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니라.” 이 구절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표현은 ‘최고의 법’(nomon basilikon)이란 말입니다. 한글 성경은 ‘최고의 법’이란 말로 번역했지만 실제 헬라어 원문의 뜻은 “왕의 법”이란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왕의 법’은 누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를 정해놓은 천국헌법과 같은 것입니다. 누가 왕 되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자들인가요? 당연히 천국헌법에 동의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5절과 8절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사람의 자격 조건은 두 가지로 제시됩니다.
(가) 첫째 조건: 세상에서 비록 가난하지만 하나님께 대해 믿음이 부요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5절)
(나) 둘째 조건: 천국헌장으로서 ‘왕의 법’을 준수하여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는” 사람(8절)
이것은 믿음의 본질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을 지향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은 믿음에 부요한 자, 다시 말해서 빈부귀천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셔서 믿음에 부요케 하신 하나님을 본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내면적 가치를 보기보다 외모나 소유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사람은 아직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평하고 거부하는 사람도 참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에 최고 가치를 두고 비록 가난하고 못 배우고 배경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참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본질은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고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결심하는 것, 그리고 그런 하나님에게 전폭적으로 헌신과 신뢰를 두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디설연 구독자님들,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이런 본질에 충실한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