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시너스에서만 [워낭소리]를 상영했는데 ,며칠전부터 세이백화점에 있는 C G V에서도 상영하기 시작했다. 입소문과 인터넷 평이 너무 좋아서 집에서 가까운 C G V에서 봤다. 영화의 첫 장면 부터 충청도 깡촌에 있는 시골집이 생각이 났다. 고치기 전의 시골집의 모습과 많이 비슷했다.
평생을 농부로 살면서 소와 함께 일해서 마을의 논 밭을 조금씩 사 모으셨다는 시할아버지. 99세에 돌아 가실 때까지 단정하고 곧은 모습을 보여 주셨지만 손은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처럼 두껍고 거칠었다. 80년전의 예산군 덕산면 외나리는 신작로도 없고 시계도 없고, 온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산간 벽지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 어귀의 수덕초등학교의 교사들은 벽지 수당을 받고 있다. . 당시에는 학교가 없어서 아버님을 홍성까지 업어서 데려다 주었던 시할아버지. 시계가 없어 달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짐작하시고 새벽 밥을 했다는 시할머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 연고자도 없는 서울의 [배제 학당]으로 아버지를 유학을 시켰다. 하숙비는 한 달에 쌀 한 가마니였었다. 그집에서 [연희 전문학교 상과]를 졸업을 할 때까지 계셨다니 옛 어른들의 심성의 무던함을 알 수 있다. 작은 아버지도 홍성으로 보통학교를 다녔고 졸업후 농업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역시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업어서 데려다 주는 날이 많았다. 시고모님이 5분 있는데 셋째 고모님인 가르개 고모님부터 마을 입구에 생긴 수덕 학교에 다니게 됐다.
사진출처: daum영화에서 발췌.
최원균 할아버지에게 소는 가족 이상이며 오래된 친구였다. 묵묵히 일만하는 소같은 심성의 할아버지의 생활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현대식 농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는 이유는 소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애정이 다른 소보다 두 배나 살게 하는 생명력이 있게 만들게 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애정을 보이면 사람보다 더 주인을 지키는 정확한 예를 보여 준다.
시할아버지는 해마다 농사를 지어서 2남 5녀와 6명의 손주들에게 다섯 가마의 햅쌀을 보내 주셨다. 온갖 작물도 보내 주셨다. 콩, 메주,고추가루, 깨, 고구마, 늙은 호박, 보리쌀,참기름,들기름..... 아버지과 작은 아버지의 집을 사 주셨고 , 교사 봉급이 박했던 옛날에는 손주들의 학비도 주었다. 자가용이 없는 자손이 명절에 가면 봉투에 여비를 넣어서 주셨다. " 차비 없어서 못 온다는 말은 하지 말어라. "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200만원을 자손들에게 줄 차비로 따로 보관 하셨다.
할아버지의 손은 마디가 굵고 컸다. 술,담배를 하시지 않고 취미이며 생업인 농사를 평생 지으신 전형적인 농부였다. 어릴 때 건너 마을 까지 서당을 다니셨는데 선생님이 성실하게 보셔서 당신의 딸과 결혼을 시켰다. 할머니는 3살 연상이었다. 할머니는 대전 집에서 노인정을 다니셨다.93세에 점심 진지 드시고 쓸어지셔서 일주일간의 혼수 상태에서 계속 잠만 주므시다 돌아 가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돌아 가시고 9년을 혼자 사셨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모두 교직에 계셔서 시골 집에는 셋째 고모님 가족이 함께 살았다. 할머니 돌아 가셨을 때 90세 였던 할아버지는 힘들어서 농사를 직접 못 지으시니 매일 지게에 도시락을 올려서 메고 조상들의 산소에 가셨다. 선산이 여기,저기에 있어서 묘지에 가는 길을 만드느라고 낫으로 풀을 베며 올라 가셔서 점심드시고 산소에 기대서 한숨 자고 내려 오셨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거의 매일 산소에 가셨다. 할아버지는 족보와 당신이 마련한 땅에 집착이 많으셨다. 훗날 자손들이 땅을 팔까봐 공동 재산으로 묶어 놓으셨다. 장손의 몫은 따로 더 주셨다.
*[워낭 소리]의 주인공 최원섭 할아버지와 이삼순 할머니의 사진, 영화에서 영정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두 분이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이영화의 백미는 할머니의 푸념이다. 경북 산지의 사투리가 강해서 영화의 모든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했다. " 아이고 내 팔자야. 영감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구나" " 소가 사람이라면 우리는 맞아 죽었어요. 얼마나 일을 많이 시키는지" " 소팔어!"하는 할머니에게 평소에는 말이 거의 없는 할아버지가 "안팔어" 퉁명한 사투리 속에서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 는 소 말고 할머니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시할아버지는 시골 집을 비워 두고 대전의 아버지 집으로 오셔서 7년을 작은 방에서 학생용 큰 돗보기로 신문,이조 오백년사를 보셨고, 박씨 가문의 족보를 정립라는 일을 하시다 노환으로 돌아 가셨다. 그 때 아버지는 여고 교장으로 근무하셨는데 퇴근 후 바로 할아버지 방으로 가셔서 인사를 하셨다. 그 때부터 2시간 이상씩 같은 소리를 들으셨다.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이 없으셨다. 나는 결혼해서 효도를 하는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웠다. 어머니는 하루 세끼모두 곰국을 드렸다. 세끼모두 제시간에 정확히 드시고 여름에도 꼭 뜨거운 물을 드셨다. 식 후 30분 정각에 약을 드셨다. 나는 결혼을 한 후 할아버지나 할머니,아니 시집 식구들 누구도 큰소리를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반찬 투정을 하는 사람도 못 봤다.
할아버지는 99세 되던 해 7 월 쓰러지셔서 한 달을 아프시다 돌아 가셨다. 큰동서, 막내 고모님, 아파트 고모님이 3교대로 간호와 빨래,식사를 분배해서 했다. 식사는 큰형님이 빨래는 고모님들이 빨아서 삶어서 햇빛에 잘 말려서 항상 청결하게 해드렸다. 할머니때도 그랬지만 나쁜병이 아니고 노환으로 돌아 가시는 분은 혼수 상태 속에서 계속 오줌을 누셨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대변을 보시면 돌아 가셨다.
[워낭 소리]에서 소는 할아버지에게 사람보다 더 소중하고 다정한 친구로 보였다. 한쪽 다리를 다쳐서 절면서도 평생을 쉬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40살 된 소는 할아버지의 일생을 잘 알고 있다. 소보다 더 열심히 농사 짓는 사람의 모습을 본 것이다. 늙은 소를 팔 때와 죽기 전에 굵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영화를 보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할머니의 굽은 허리가 평생의 고단한 노동을 말해주고 있다. 9남매를 낳고 키우고 교육시켰다. 근 20년을 배가 불러 있으면서 고된 농사를 지었다.
*평생의 친구였던 소가 죽은 후 무덤을 만들어 주고 쓸쓸하게 앉아 있는 할아버지. 자녀들이 농사를 그만 짓고 보내드리는 돈으로 생활하라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두통이 아무리 심해도 일을 하신다. 평생을 해 온 일이라서 ,마치 소처럼 묵묵히 일해서 키운 자녀들은 서울 방배동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농사 지은 것 중에서 좋은 것은 팔거나 자녀들에게 보내고 찌거리만 잡숫고 평생을 살아 왔다.
시댁의 할머니는 귤이나 사과중에서 약간 상한 것을 그 부분만 잘라 내고 잡수셨다. 과일이 남아 돌 때에도 그렇게 하셨다. 셋째 손주인 우리가 결혼을 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했을 때 두 분이 한번 오셨었다. 하루 밤 주무시고 가셨는데 차비를 드렸다.가신뒤에 보니 아기 사진 뒤에 도로 두고 가셨다. 해마다 우리 몫이라고 쌀을 5가마 보내셨는데 감사해서 미역이나 멸치,김등을 소포로 부쳐 드렸다. 할아버지는 다음부터는 보내지 말라고 하셨다. " 내가 너희를 도와 주고 싶어서 쌀을 보냈는데 그런 것을 받아 먹으면 도와 준게 없지 않느냐?" 하셨다. 당신의 장례 비용까지 농협에 저금해 두신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있어서 아버지가 생활의 걱정을 하지 않으시고 어려운 제자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교사가 되셨다.
영화 [워낭 소리]를 보면서 관객은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추억했을 것이다. 그 분들의 희생적인 삶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음을 되새기게 하는 영화였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자식들을 책임을 지고 죽는 순간까지 의리를 지키는 게 우선이다. 빨리 돌아 가셨지만 정많고 어른 공경을 제일 중요시 하는 부모 밑에서 나는 자랐다. 결혼해서 시댁 어른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자식과의 의리와 책임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말없이 실천을하는 법을 알려준 시댁 어른들께 감사함을 느낀다.
나 또한 그런 인생을 살아 가고 싶다. 자기 앞의 생은 자기의 선택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
**전 국민이 모두 봐야 할 좋은 영화이다. 감독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참고 사항: 1) 시아버지는 시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거리감이 느껴진답니다. 2)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 가셔서 글을 올리지 않으려 했으나 [워낭 소리]의 최원균 할아버지는 마치 자식들을 위한 성자로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영화 처럼 고생을 해서 일으킨 나라인데, 우리는 그 분들보다 고생을 하지 않고 살지 않습니까?
*이 어려운 시국을 남의 탓만 하지 말고 힘을 합해서 극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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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과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모과
첫댓글 소중한 글 감사히 읽고, 마음에 새겨놓 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홍님... 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부부의 순수한 삶과 열정을 느끼고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저두 돌아가신 시아버님께 사랑듬뿍받던 때가 그리워지네요
글쓴이의 시할아버님이 어떤 분이신지 미루어 짐작이 되네요...좋은 글 잘 보고 가구요...요즘 바쁘셨나요?? 못 뵈었던 것 같은데요....
너무너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다홍님 건강하세요 ^^
그렇잖아도 관람을 갈려고 하느데 공부때믄에 차일 피일 미루다 용 케도 모과분 께서 상세히올려주셔서 정말 뭉컬한 감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