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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탈출기의 말씀 32,15-24.30-34>
그 무렵
15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영에서 전투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18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승리의 노랫소리도 아니고 패전의 노랫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노랫소리일 뿐이다.”
19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22 아론이 대답하였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23 그들이 나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빼서 내시오.’ 하였더니, 그들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행여 너희의 죄를 갚을 수 있는지,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 보겠다.”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3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34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
✠ 복음
“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순리가 지배하는 곳>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 대가리와 뱀 꼬리라는 말로, 시작은 요란하고 그럴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일이 흐지부지 흐려지는 것을 빗대어 말합니다.
반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감한 사람은 시작은 잘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한 사람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눈으로 볼 수 없게 시작하여 점점 거창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눈으로 볼 수 없게 시작하여 거창해지는 일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밀가루 속에서 부풀어 오릅니다.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법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면에서 시작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 기쁨으로 말씀을 실천하게 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큰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인간의 일일 뿐이고,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의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잘난 척하면 헐뜯는 사람이 생기고, 아는 척하면 무시하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리고 힘센 척하면 해치려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척하면 뺏으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세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법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모두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은 힘이 들지만 머지않아 큰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작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반드시 큰일을 위한 준비가 되니만큼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큰 나무를 감추고 있고, 조그마한 누룩 덩어리는 위대한 능력을 이미 지녔습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누룩은 때가 되면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니고 있으면 성장합니다.
그렇지만 그 열매를 얻기까지는 햇빛과 비, 그리고 거름도 필요합니다.
주변의 잡풀을 뽑아주어야 하고 땀과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영양을 제대로 취할 수 있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나뭇가지에 깃들이듯 우리도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이의 휴식과 안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수고와 땀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열매를 주고 싶어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 사람은 튼실한 열매를 수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수 있는 하느님의 에너지가 있고 겨자 나무가 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열매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주간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랜트를 찾고 가꾸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혹 나에게 주어진 몫이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때가 되면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은 비유로 소통해야 하는 삼위일체 구조로 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나무처럼 자라나 휴식 같은 친구가 되게 합니다.
또 성령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진 누룩과 같아서 그 사람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빵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라고 하신 시편 구절을 인용합니다.
직역하면 “나는 비유로 내 입을 열리라.”입니다.
정말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본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왜 비유로만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성자’, 그 계시를 완성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모습을 따라, 영-혼-육으로 되어 있는데, 보이지 않는 ‘생각’(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말’(육), 그리고 그 말이 생각과 일치하게 만드는 ‘마음’(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나 나무와 소통한다면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같은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과 같은 ‘아버지’, ‘말’과 같은 ‘성자’, ‘마음’과 같은 ‘성령’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긴 말은 생각과 일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생각과 다릅니다.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할머니가 신부님 쓰시라고 돈 만 원을 비닐봉지에 싸서 몸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가 몰래 손에 쥐어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 만 원을 주시는 행위일까요?
돈 만 원 안에는 할머니가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나, 행위, 혹은 말에 마음이 담겨야 비로소 완전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선물은 분명 보이지 않는 생각을 계시하는 비유가 됩니다.
하지만 개에게 그렇게 준다면 그 비유는 무너져 아무 쓸모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마음이 담겨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어서 당신 생각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을 닮은 구조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요즘 성인들이 저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느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자매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들어서는 좀처럼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친구와 새벽 5시까지 통화하다 잠든 날이 있었거든요.
그날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이었습니다.
그 전날 딸에게 ‘내일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축일이니 천둥이 칠 수 있으니까 잘 들어봐!’라고 했었어요.
그냥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오빠를 보내기 싫어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내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정말 아침에 딸이 저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정말 천둥이 치고 비가 왔어!’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참 신기하다 여겼죠.
그런데 손목을 보니 제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그림이 있는 묵주 팔지를 차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팔지를 차지는 않거든요.
전 세례명이 마리아인데요.
그래서 친구에게 신기해서 전화했죠.
신기하게도 내가 성녀의 팔지를 차고 있는데 정말 그분들이 표징을 보여주셨다고요.
근데 그 친구가 더 놀라는 거예요.
그 친구는 베데딕도 팔찌를 차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쵸?
요즘 성인들 축일을 미리 기억하고 기도하였는데, 정말 그분들이 함께 계심을 느꼈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정말 성인들이 그 자매님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처음에 말만 들었을 때는 머리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기니 그것이 비유가 되는 것이고, 그 비유 말씀을 들으면 머리만 건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건들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인격적 소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힘내, 파이팅!”한다고 해서 힘이 날까요?
머리로만 전달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건들려면 내 마음을 그 생각과 합하여 비유로 전달해야 합니다.
“게도 탈피하는데 그때는 죽은 것처럼 보여.
하지만 더 강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잖아.
우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 같아.
조금만 더 힘내자!”
이렇게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구나. 그래 힘내자!’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제가 굳이 복음 묵상을 할 때 억지로라도 비유를 끼워 넣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비유를 찾으면서 저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따지자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온전한 계시가 되지 못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모든 행동과 말에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하나의 비유가 됨을 잊지 맙시다.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계시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혼과 육이 하나가 된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사람은 완전한 소통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이란 교회의 둘도 없는 보배이자 빛나는 별을 낳아주신 요아킴과 안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최근 반복되어 강조된 복음 말씀의 주제가 좋은 땅, 좋은 열매였습니다.
땅 주인이 신경 하나도 쓰지 않은 불모지에서는 절대로 좋은 나무가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퇴비를 넉넉히 뿌리고, 갈아엎고 또 갈아엎은 비옥한 땅에서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앙인,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셨던 성모님 역시 영적으로 가장 잘 준비된 가정을 배경으로 탄생하셨고 성장하셨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초 세기부터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 이 두 성인을 각별히 공경해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언급이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승을 통해서 두 분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모님의 부모님은 성모님 못지않게 겸손한 분들이셨고, 언제나 기도와 침묵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던 모범적인 신앙인이셨다는 반증이 두 성인에 대한 부족한 자료라고 확신합니다.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신심이 깊고 출중했던 요아킴과 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양육했고 교육시켰을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선물을 잘 받아들이고, 끝까지 그 선물을 잘 안고 갈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시켰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작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선택하시는 하느님께, 그리고 성모님이란 교회의 둘도 없는 보배이자 빛나는 별을 낳아주신 요아킴과 안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태 13, 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밭’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품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올리베따노회 수도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반죽되는 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태 13,31)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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