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A의 <금쪽같은 내 새끼>의 매회, 아이들은 이상 행동의 원인인 부모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아무리 이상한 부모라도 열렬하게 사랑하고 간절하게 사랑받고 싶어 한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는 게 맞나? 내리사랑의 우월함만을 강조하는 속담은, 성장한 자식에게 연로한 부모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때 자주 소환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알 것이다. 치사랑이 얼마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지. 그런데 그 대단하다는 내리사랑은, ‘내’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순간 철회되거나 나를 공격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사랑의 정도나 방식은 다르지만 ‘효’ 사상이 강한 한국 사회가 부모의 사랑을 과도하게 성역화하는 것은 사실이다. 부모의 사랑은 그 자체로 너무나 완전하기에 이를 몰라주거나 거스르는 행위는 ‘불효’이자 ‘패륜’이라는 믿음. 이는 부모·자식 간의 위계를 공고히 하고, 가정 내 폭력이나 불평등을 은폐한다.
사회는 육아라는 공동 과제를 방치하는 대신 부모에게 유일한 보호자로서 막강한 지위를 보장해준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내 자식 내가 패는 것’에는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었고, 아동·청소년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부모는 육아를 ‘투자’, 회수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아동은 부모가 자신을 기르는 행위를 ‘갚아야 할 은혜’로 여기게 함으로써 부채 의식을 품는다. 자연스럽게, 육아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보상’을 바라게 된다. ‘화목한 가족’을 연출할 수 있는 착하고 말 잘 듣는 성격, 남들보다 뛰어난 성적 또는 성취, 두둑한 용돈 등.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는 비난은 치명적이다. ‘나’의 성공, 그것도 부모가 인정하는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효이자 자식 된 도리라는 죄책감은 자식의 삶과 자유를 침해한다.
꼭 범죄나 학대가 아니더라도, 듣는 사람들이 헛웃음을 터뜨릴 법한 기상천외한 부모들이… 세상에는 있다. 어떤 성취가 있든 “내가 기도해서 잘됐다”며 영광을 신도 자식도 아닌 자신에게 돌리기, 스마트폰에 깔아둔 일회성 만남 앱 들키기, 끝없는 외모 지적으로 자존감 깎아 먹기, 살쪘다고 구박하면서도 앞에 있으면 음식 억지로 먹이기,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으려고 딸에게 미리 밥을 차려서 먹인 후 “배부르지? 이제 배달시켜도 되냐?” 물어보기, 혼자 비싼 화장품을 쓰며 다른 가족은 손도 못 대게 하기, 일기장 훔쳐보기, 아파서 누워 있는데 불 켜고 들어와서 머리 한 거 봐달라고 자랑한 후 불 안 끄고 나가기…. 에피소드는 단편적이지만, 상징적이다. 세상에는 독특한 사람이 많다. 그런데 부모·자식 사이의 기울어진 권력관계는 이것이 개성(!)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하고 자기방어 능력이 없는 아동·청소년기를 함께하기에. 부모는 자식과 상호작용하고 협의하기보다 자기 입장을 밀어붙이는 데 익숙하다. 자식은 다른 관계와 달리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부모를 떠나기 어렵다. 그렇게 가정용 지옥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