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피곤에 지쳐 맛있게 자고 있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도 다
른 공간의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방안에서도 밝게만 비추던 햇살
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나리! ...나리!...”
밖에서 경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잠귀가 밝은 미자르
였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이 안 보였다.
다행히 손이 안보였다는 것은 투명인간으로 전환하고 잤다는
얘기다. 습관이 잘 됐다고 피식 웃으며 자위하고는 경진을 흔들었
다. 그래도 경진은 일어날 줄 모르고 잠을 이었다.
“나리!...나리!...”
미자르가 안 되겠다 싶어 한손으로 경진의 입을 막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꼬집었다.
“읍! 뭐야?”
경진이 깜짝 놀라 눈을 뜨자 내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내관, 뭐요?”
“예! 조계청에서 상선어른이 오셨습니다!”
경진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세종대왕을 알현하러 가야된
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알았소! 내 곧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겠소!”
경진은 옷을 입으며 조그마한 소리로 미자르를 찾았다.
“미자르! 어디 있어요? 난 곧 나가야되는데 어떡할 거요?”
미자르가 그의 뒤에서 두루마기를 추슬러 주며 속삭였다.
“바늘 가는데 실 가야죠?”
“전하! 경진공이옵니다.”
“들라 하라!”
편전 안에서 들려오는 세종대왕의 목소리가 조금은 들떠 보였
다. 경진이 들어가자, 세종대왕은 편전 안에서 왔다 갔다 하던 발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가득 담고 경진을 반겼다.
“어서 오시오, 경진공!”
“전하! 문우 여쭈옵니다.”
경진의 인사말에 세종대왕이 어좌에 앉아 인사를 받았다.
“경진공! 새벽까지 짐과 대작하느라 힘이 들었나 보오!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구려!”
세종대왕이 경진을 향해 따듯한 인사말을 건넸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경진은 세종대왕이 마음이 넓고 따듯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짐에게 유쾌한 얘기 많이 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이
쪽으로 앉읍시다.”
세종대왕이 자신의 다과상에 먼저 앉으며, 경진의 다과상을 향
해 안내했다.
“드시오! 그리고 우리는 군신관계가 아니질 않소? 친구처럼 편
하게 생각하고 많은 얘기 해주길 바라오!”
“전하! 아니옵니다. 저는 이 나라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제가
가장 존경하는 조상님이 세종대왕님 이십니다.
경진은 세종대왕의 말에 감격했다.
“하하하! 이것 참! 짐이 많이 곤란하오! 경진공이 먼 훗날의
후손이긴 하나...”
세종대왕이 끝말을 흐리더니, 차를 마시며 손으로 경진에게도
마시라고 손짓을 했다.
“경진공, 나의 형님에 대해 알고 있소?”
“예! 양녕대군 말씀이십니까?”
경진은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 서울에서 쓰는 말투를 자주 사
용했다.
“그렇소. 잘 아시오? 허면, 형님에 대해 후사는 어떻게 평하고
있소?”
세종대왕은 궁금함이 큰 지, 경진을 관심 있게 주목했다.
“예! 두가지옵니다. 하나는, 전하를 아끼시는 태종왕의 마음에
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미치광이 흉내를 했다는 말이 있고, 다
른 하나는, 일부러 자유인이 되고자 그랬다는 평이옵니다.”
“음...그렇구먼...”
“예, 제가 아는 것은 그 정도입니다.”
세종대왕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차 한 모금을 길게 마셨
다.
“공이 살고 있는 그 시대에도 숭례문이 남아 있소?”
“예, 그렇습니다.”
“그 현판의 글씨가 그 때까지 남아 있다면 짐의 형님이신 양녕
대군이 쓴 거요.”
“예, 글은 자주 접합니다. 하지만 양녕대군께서 쓴지는 몰랐습
니다.”
“양녕대군은 참으로 안타깝소. 아직까지도 일부러 짐과 그리고
왕실과 멀리하고 있소.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함도 있겠거
니와 만의 하나라도 조정에 대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몸부
림을 치는 것이오. 그의 뛰어난 재능과 자유분방함은 짐도 부러워
하고 있소”
“예, 제가 아는 것 중에서도 전하께서 형님의 처지에 안타까워
하셔서 술자리에 자주 초대도 하셨고, 사냥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세종대왕은 긴 웃음을 끊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경진공, 술 한 잔 하겠소?”
세종대왕이 마음이 울적한 지 경진에게 물었다.
“예, 전하의 어심에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경진공이 너무 마음에 드오! 한 잔 합시다! 하하
하!”
세종대왕은 기분이 조금은 전환되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
고는 문 밖을 향해 하명을 내렸다.
“여봐라! 게 있느냐? 주안상을 보도록 하라!”
“예이!”
문 밖에서 상선이 대답했다.
“경진공! 나도 형님이신 양녕에게 속으로 원망도 했소. 그 분
이 왕이 되셨더라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 편하게 하면서 여
생을 즐길 수 있었거늘, 자유를 빼앗긴 것이오.”
“전하의 어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전하의 애쓰심이 후사
에 길이 남으심을 보람으로 아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하하하! 그것이 그렇게 되는구려!”
“예! 후세의 역사가들 평에 의해서 보면, 태종께서 이루신
가장 훌륭한 치적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 전하께 왕위 이양하심을
평가하옵니다.”
“뭐라고요? 짐이 그 정도란 말이요?”
“예! 그렇사옵니다.”
세종대왕은 경진의 대답에 스스로 놀랐다. 자신의 선왕인 태종
왕이 비록 정권은 탈취한 흠은 있으나 많은 업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을 왕의 자리에 앉힘이 가장 큰 치적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허! 경진공이 내게 참으로 많은 숙제를 주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구려!”
세종대왕은 약간의 의심의 눈초리로 경진을 쳐다보았으나 그의
진지한 표정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잠시 후에 눈
에서 빛이 나며 굳건한 의지가 얼굴에 베어나기 시작했다.
“전하! 제가 어주를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저희 후세에서는 아
랫 사람이 먼저 헌주하게 되어 있사옵고, 조선시대에서의 궁중 주
법을 모름에 송구하옵니다.”
세종대왕이 제조상궁까지 물리고 경진과 둘이서 상에 마주 앉았
다. 그래서 머쓱해진 경진이 세종대왕에게 의향을 물었던 것이었
다.
“하하하! 그리 하시오. 편하게 생각하시오. 짐이 그렇게 막힌
사람처럼 보이오?”
“전하, 송구하옵니다....”
경진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어법이 서툴러서 그만 두었다.
“그러면 따르시오! 하하하!”
세종대왕이 잔을 받더니, 경진에게도 따라주었다.
“경진공, 짐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알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오. 해서, 조정 회의를 끝으로 기록들을 검토하며 계속 기다렸
소!”
“예, 전하! 황공하옵니다. 소신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
리겠나이다.”
“고맙소!”
세종대왕과 경진의 대화 속을 상선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
다.
“전하! 진양대군께서 납시었사옵니다!”
“급한 일이냐고, 고 하여라!”
잠시 말이 끊어졌다가 상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중에 문우 여쭌다고 하옵니다!”
세종대왕은 상선의 말을 듣고는 경진을 향해 말했다.
“경진공, 우리 진양대군에 대해서도 아시오?”
“예, 잘은 모르오나 후에 수양대군으로 책봉이 되옵고, 명년에
전하께서 한글이 창제됨을 반포하신 이후에는, 후세의 사적으로도
유명한 월인석보와 월인천강지곡을 한글로 번역 하였습니다.“
“음! 진양대군이 총명하기는 하지만 권력욕에 대한 집착이 너
무 많구려! 해서, 세자에게 왕권에 버금가는 많은 권한을 주고 안
정을 꾀하고 있소. 진양대군을 보면 마치, 선왕이신 태종왕의 기
질을 그대로 보는듯하여 섬뜩할 때가 많이 있소.”
“예, 전하...”
경진은 침묵만 하고 있었다. 자칫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말실수
로 이어져 단종 폐위의 일까지 거론될까 두려웠다. 스스로의 마음
잡기에 급급했다.
“경진공? 안색이 왜 그러시오?”
“아니옵니다. 괜찮사옵니다. 안평대군의 글 솜씨 역시 유명합
니다. 전하께서는 치적으로나, 왕세자님과 영민한 대군님들을 많
이 보신 최고의 대왕이십니다.”
“하하하! 고맙소. 그런데, 진짜 괜찮은 것이오?”
“예, 전하! 심려치 마옵소서!”
“알았소. 그럼, 안평대군에 대해 말 좀 해주시겠소?”
“예,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했으므
로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었나이
다. 특히 서풍은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그를 뛰어
넘는 대단한 대군이옵니다. 또한 무예도 일가견이 있어서 문무에
모두 출중하옵니다.”
경진은 세종대왕의 질문에 모면키 위해서 안평대군을 거론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세종대왕의 표정에 화색이 돌
았다.
“하하하! 짐의 셋째 왕자인 안평이야말로 최고의 재주꾼이요.
모든 것을 다 갖추었소. 장자로 태어났었더라면...”
세종대왕이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세자 또한 나무랄 데가 없소. 어릴 때부터 책하고 친해서 학자
들과의 교분도 두텁고, 천문이나 산술, 서예도 능하여 더 바랄 나
위가 없으나, 마음이 여리고 몸이 허약한 것이 흠이요.”
“전하! 이 세상에는 완벽한 것이 없사옵니다. 세자께서는 참으
로 훌륭하시옵니다.”
“하하! 그렇긴 하오. 하지만 경진공에게만 말하오. 내가 마음속
으로 가장 아끼는 왕자는 안평대군이오.”
세종대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얼굴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예, 소신, 전하의 어심을 읽고도 남음이옵니다.”
“고맙소! 자, 한 잔 더합시다.”
세종대왕이 술병을 잡고서 경진에게 손수 따라주었다. 경진도
왕의 술잔을 힐끗 보았다. 잔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공손히 따라
주었다.
"그런데, 공은 어찌 그리 짐의 역사에 대해 잘 아오?"
"예. 그것은 소신이 그만큼 대왕님의 업적을 흠모해서 이옵니
다."
" 하하하하하!....짐이 사람을 잘 봤구려! 마음이 너무 잘 통해!
하하하..."
세종대왕이 큰 웃음으로 경진의 말에 화답을 했다.
경진은 이처럼 세종대왕에 관계된 기록을 잘 알게 해준, 대학시
절 시간강사의 얼굴을 떠 올리며, 내심 고마워했다. 1학년 후레쉬
맨 시절이었다. 2학점짜리 국사 중간고사에서 그는 시험지를 받자
마자, 백지를 내고 나왔다. 그때 30대 초반인 담당 시간강사가 그
를 불러 세웠다.
"자네는 뭐가 불만이어서, 시험지를 받자마자 백지로 내는가?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자신의 수첩을 뒤지며 경진의 학번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
었다.
"출석과 레포트 성적은 좋은데..."
경진은 강사의 말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교수님! 왜, 우리는 그 많은 외침을 받은 질곡의 역사만을 아직
까지 배워야합니까? 대학교에서까지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뭐라고?..."
교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으나, 그와는 달리 시간강사는 잠시
침묵하더니 경진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음... 듣고 보니 자네 말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군. 우리 모두
반성해 봐야 할 일이네. 하지만 시험은 보게! 그리고 시험 끝나고
나와 함께 진지하게 얘기해보세!"
경진은 젊은 강사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말에, 자신의 경
솔함을 사과하고, 시험을 치루었다. 시험 후에는, 학교 밑에 있는
학사주점에서 시간강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역사를 바라보는 관
점을 토론하기도 했다.
얼마 후, 시간강사의 기말 시험내용은 한국사에서 특정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는 자유 시험이었다. 그때, 경진은 세종대왕 시대에
관하여, 깊이 공부했고 시험을 보았던 것이었다. 물론 경진은 A
플러스의 좋은 결과를 얻었다.
카페 게시글
━━━━○ 이야기 샘터
콩다칸 팥다칸(장편소설) - 자유가 그리운 세종대왕(18회차)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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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21 17:35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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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남한산성"을 읽고 있는대요..군왕의 자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자리인지 다시금 책을 읽으며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죠? 높은 자리일수록, 적도 많고 외로운 자리인 것 같습니다. 평범한 범인(凡人)의 일상도 참 행복인 것 같습니다. ^^*
시간여행님 ~ 제주에서 뵈어요 ^^*
한별나라님, 오랜만입니다. 모레 제주에서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