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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목자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3,15-17.20-21
형제 여러분,
15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16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7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2,19-20)와 복음(마태 28,16-20)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말라며, 이것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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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저자는 위대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 좀 쉬려 하셨으나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외딴곳으로”라는 표현이 두 번 거듭 나옵니다(31절과 32절).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그 뜻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며 일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셨고, 그들과 함께 따로 외딴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잠시 군중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장면이 때때로 나오는데, 그 다음에는 언제나 중요한 계시가 이어집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낫게 해 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7,33 참조). 당신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9,2 참조).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곳도 군중과 따로 떨어진 한적한 집입니다(9,28 참조).
교회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활동과 애덕을 실천하는 데는 신자들의 많은 노력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저마다의 열정과 열의로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자칫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잃을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도 어느 순간 인간적인 기준을 따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활동이 개인의 선호와 관심에 따라 흘러가기도 합니다.
제자는 언제나 스승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시 돌아와 그분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계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따로 한적한 곳에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믿는 이의 삶은 넓게 보면 주님께 바치는 한 편의 기도이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이 모든 것 안에 주님과 함께 머무는 침묵의 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집착과 열망에 따른 것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성당을 찾는 모든 신자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 머물면서 삶의 방향을 찾고 그분의 양식으로 힘을 얻는 ‘외딴곳’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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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는 눈, 그 시선을 느껴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바라고 갈망하는 눈빛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눈과 군중의 눈이 만납니다. 그 만남 속에서 참된 목자, 착한 목자를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전해집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강조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고 다윗 임금은 노래합니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주님께서 목자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은총과 자애로 다가옴을 아름답게 읊어 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렇게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말씀을 마주하게 됩니다. 좋은 말씀, 위로의 말씀, 힘이 되는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체적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주하였을 때, 항상 일치되는 신앙을 체험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는가? 잔잔하고 고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예!”라고 확신하기보다, 말씀과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느끼는 거리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스스로를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마주하셨던 군중,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다윗 임금. 주님을 향한 갈망을 지닌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다면 깊은 골짜기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자리로 변화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참된 의미입니다. 나의 눈과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당신께서 목자이심을 알려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방향을 정해 봅시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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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셨던 열두 제자가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보고하였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배를 타고 떠나는 그들보다 육로로 먼저 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짧은 말씀 안에 예수님의 마음과 하시는 일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나선 사람들을 쳐다보십니다. 그분의 눈길은 사람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느님의 눈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립적이거나 무관심하시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시며 겪으십니다. 그 가엾어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이 시작됩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이제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무작정 따라나선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풀밭을 찾지 못하여 배를 곯은 채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러한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빵을 주시는 대신 가르침을 주십니다. 바로 말씀의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고 말씀의 빵으로 배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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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의 명성과 권위를 맛본 제자들은 불철주야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쉼 없이 일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전부를 걸고 나선 제자들이 그 정도의 열정 없이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분주하게 일하다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잊을 때가 있습니다.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확인해 주지만, 때로 인간이 노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의 규율 사회와는 달리 긍정성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피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할 것이 너무 많고, 좋은 것이 넘쳐도 우리는 선택 장애를 겪고, 피로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누려야 할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와 기쁨이 일과 노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송과 환대가 넘치는 곳을 떠나 ‘외딴곳’으로 가서 쉴 것을 명하십니다. 마치 예수님 자신이 수많은 기적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아 칭호를 받을 때, 언제나 산속 깊은 외딴곳에 가시어 하느님을 만나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제물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잃을 수 있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되찾고자 욕망의 나를 벗어던진 참된 나를 찾고,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가엾은 마음’을 닮아, 참된 선행과 나눔의 가치를 찾아가는 ‘인생 피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시편 저자의 말씀처럼, 나에게도 주님 안에서 아쉬움 없는 쉼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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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에도 상류층에게는 늘 좋은 것이 바쳐졌다. 법은 토지의 도조 수익을 보장해 주었다. 빈자들에게는 보호보다 위협이 가해졌고, 가진 것마저 내놓는 일들도 있었다. 몸이 아파도 치료받지 못함은 물론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쫓아다니던 무리의 형색은 마치 길 잃은 양의 두려운 눈망울처럼 처연하다. 그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얻으려 가시는 곳마다 그토록 쫓아다녔을까? 예수님이 그냥 좋아서다. 가난한 이들은 시간이 많아 구경을 좋아한다. 그런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 곁에 모이면 알 수 없는 위로와 용기가 충만했고, 이심전심의 감명과 행복감이 있었다.
경쟁 관계에서는 성과로 평가되고 인정받아야 하며, 속지 않으려면 경계해야 하니 마음이 굳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당에 와서는 자신의 상처와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그다지 부끄럽지 않다. 마음이 여유롭고 너그러워지는 것이니, 아무도 경쟁 관계나 상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마음을 내어놓을 수 있는 모임에 참여하면 행복감이 따른다. 신심 단체, 구역·반 모임, 귀농·귀촌 공동체 관련 모임이 대표적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나누고 헌신하려는 이들의 모임이나 생활은 언제나 알 수 없는 평화와 행복한 경험을 얻게 해 준다. 경계심이 없으면 정신이 맑고 마음이 평온하게 열리게 된다.
이곳 공동체 마을에는 그런 기운이 가득하다. 무소유의 자유와 정직한 노동, 기도 생활에 몰두하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영접하여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방문자들도 그렇다. 도시의 즐거운 행사도 많은데 가난한 산 위의 마을까지 찾아오는 발걸음은 스스로를 정화시킨다. 방문자도, 이곳 가족들도 서로 좋은 마음을 내어놓기 때문에 치유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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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여겨진 군중에 대해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들다’(스플랑크니조마이, splangkhnizomai)라는 동사는 ‘배 속’, ‘내장’을 의미하는 낱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가엾은 마음’이란 속이 요동칠 정도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예수님의 마음 상태를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또 복음서의 세 가지 비유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그 비유들도 온갖 사랑으로 가득한 경우입니다. 첫 번째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입니다. 한 사마리아 사람은 길에서 강도에게 폭행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서는 속이 요동칠 정도의 연민을 느낍니다.
두 번째는 만 탈렌트를 빚진 종에 대해 그 주인이 가엾은 마음을 갖습니다(마태 18,27 참조). 비록 비유의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한 탈렌트가 6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 한 데나리온을 우리 돈의 5만 원으로 친다 해도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 엄청난 빚을 그냥 탕감해 줍니다.
세 번째는 돌아온 아들을 멀리서 아버지가 알아보고 느낀 마음입니다(루카 15,20 참조). 미리 유산을 받고 도망친 아들, 호화로운 옷을 입고 ‘먼 고장’으로 가버린 아들, 이제는 거지가 되어 누가 보아도 그 아들이라고 알아볼 수 없는 아들을 아버지는 알아봅니다. 그것도 멀리서 알아보고 가엾은 마음을 갖습니다.
이처럼 가엾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상대방의 고통과 아픔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어 내 마음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예수님께서 느끼시어 꿀맛 같은 휴식도 포기하시고서 사람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예수님을 찾을 때 그분께서는 그러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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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실행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 선택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일에 관한 것일 때도 있고, 때로는 인생의 흐름을 바꿀 만큼 중요한 것일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 가운데에서 특히 의미 있는 것은 우리가 ‘윤리적(도덕적) 선택’이라 부르는 선과 악의 분별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 선택은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오 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올바른 윤리적 선택을 하게 하는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솔로몬 임금에게 허락하신 대로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통찰하였듯이, 이것 없이는 부와 성공과 건강 같은,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지혜로운 삶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갖가지 유혹이 깃든 세상에 살면서 인간이 자신만의 힘으로 이러한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분별력을 바라는 솔로몬은 먼저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한 것입니다. 주님의 소리를 겸허하게 듣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분별의 지혜는 자라고 보존됩니다. 이러한 이라야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옳고 훌륭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타인을 위한 삶을 선택하게 하는, 듣는 마음과 분별력의 진정한 중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연민의 감정이 살아 있지 않으면 분별력과 주의력은 진정한 이웃 사랑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지니신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청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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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늘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딱한 처지를 보시고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이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시고, 외로운 사람과 함께 외로움을 나누신 자비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는 ‘남을 위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가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라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고대하는 메시아는 언제 옵니까?” 그러자 스승은, “네가 직접 가서 알아보아라.”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문 앞에 있는 불구자들을 찾아가거라. 그들은 모두 온몸에 상처를 입어 붕대를 감고 있단다. 그들은 하나같이 붕대를 한꺼번에 풀었다 감았다 한단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상처의 한 부분만 풀었다 감았다 한다. 그 사람은 ‘누군가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곧바로 가서 도와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상처의 한 부분만을 풀었다 감았다 한단다. 바로 그 사람이 우리가 고대하는 메시아란다.”
내 몸에 상처가 있더라도 누군가 내 도움이 필요할 때 바로 가서 도와주는 사람이 메시아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형태는 다르지만 자기 나름대로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픔만을 어루만지며 산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아프지만 남의 아픔도 헤아릴 때, 내가 어렵지만 남의 어려움을 살필 때,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더욱 살맛 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시대의 작은 메시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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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다닙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체험했고,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했습니다. 삶의 또 다른 에너지인 ‘희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사 제쳐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대하십니다.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희망을 주십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시며, 악령 들린 이에게는 자유의 기대를 갖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 또한 언제나 희망을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희망은 하늘의 힘입니다.
얼마만큼 희망을 안고 살고 있는지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지요? 희망은 ‘덕’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투자 없이 가만있는데 삶의 에너지를 만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먼저 뛰어들고, ‘먼저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건강한 삶과 행복한 노년을 바랍니다. 재산이 많고 통장에 돈이 넉넉하다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셔야’ 행복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복음의 군중은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성체 안에서 ‘삶의 에너지’를 받아야 합니다. 불공평한 현실에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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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보고합니다. 모두가 놀라운 일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했으며,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을 준 일입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쉬게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해 감사할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면 누구나 교만해집니다. 본인은 평상시처럼 행동해도 사람들은 금방 느낍니다. 감사와 겸손한 자세만이 그분의 능력 안에 계속 머물게 합니다.
봉사자에게서 주님의 능력이 빠져나가면 자신의 능력만으로 일하려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자연히 역정을 내고 강압적이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서로가 지칩니다. 교회 봉사자들이 가끔씩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이유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넓고 따뜻한 배려입니다.
신앙인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겸손과 감사와 열정을 지니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그분의 능력’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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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하러 온 사도들에게 조용한 휴식의 시간을 가지라고 배려하십니다. 활동과 휴식은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의 양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균형이 깨질 때 생명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성 생활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사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영적인 휴식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영성의 대가들은, 영혼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영적인 휴식이란, 잠시만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 조용히 머무르는 침묵의 순간을 말합니다. 곧 온몸의 긴장을 푼 상태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정지하고 자신의 영혼을 텅 빈 상태로 만드는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10분만이라도 오감의 자극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그 빈 공간을 주님께서 영혼의 충만함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하루에 10분이나마 영혼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통하여 충만한 영성 생활의 맛을 느껴 보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성지순례나 여행을 가게 되면 많은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방문한 곳에 대한 기억을 위한 것이지요. 사실 너무나 좋았던 곳을 찍기도 하지만, 반대로 최악의 장소 역시 기억하기 위해서 사진으로 찍습니다.
언젠가 글을 쓰기 위해 충청도의 어느 펜션에 2박 3일 동안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펜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가격은 저렴했지만, 너무 작았고 또 지저분했습니다. 여기에 계속 비가 멈추지 않고 와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방안에만 머물러야 했지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방에만 있으니 사진 한 장 찍어놓지도 못했습니다.
둘째 날 밤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비가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펜션의 조명에 아주 멋져 보였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가서 야경을 찍었습니다.
며칠 뒤, 인터넷에 올린 이 사진을 본 어떤 지인이 장소를 묻습니다. 자신도 가 보고 싶다면서 말이지요. 2박 3일 동안 최악의 시간을 보낸 곳인데, 누구는 사진 몇 장만을 보고서는 가 보고 싶어 합니다.
사진 몇 장만으로 그 장소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의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과 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보고서 하느님을 판단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기적과 힘이 되는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마치 맡겨둔 것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예수님을 찾아왔고, 심지어 어디를 갈 것 같으면 미리 가서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은 전혀 보장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안 다면 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해도 해도 너무하네.”라면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사랑과 달리, 무조건적인 주님의 사랑이 크게 비교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나 자신의 말과 행동만을 드러내면서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빌 게이츠).
공감의 마음
중학생 딸이 펑펑 울고 있습니다. 아빠는 다가가서 왜 우는지를 물었지요. 딸은 아빠에게 남자친구가 그만 만나자는 통보를 했다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자기는 그만 만날 생각이 전혀 없는데, 여전히 남자친구를 좋아하는데 이별 통보를 받으니 너무나 화가 나고 슬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빠는 어떻게 말해줘야 딸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나쁜 놈이 있나. 울지마. 네가 아까워. 그냥 훌훌 털어버려.”
아빠 말처럼 훌훌 털어 버리기가 쉬울까요? 불가능한 말은 오히려 거리감만 줄 것입니다. 딸이 자신의 슬픔을 아빠에게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빠가 공감해주길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한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친밀한 사이일수록 상대방이 공감을 더 많이, 더 강하게, 더 정확하게 해주길 기대한다고 합니다.
아빠는 딸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이야기하니 거리감만 더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웃의 말에 해결책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공감인데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공감의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공동체는 만들지 말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 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십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사람들은 육로를 따라 먼저 그곳에 다다랐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들을 당신께서 직접 가르치십니다. 이런 공동체가 가장 건전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를 위해 일한 이들은 쉬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치시고 먹이십니다.
만약 집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 집은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를 않아.”라고 말하면 훌륭한 공동체의 리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지 않게 만든 잘못된 리더입니다. “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라고 자녀에게 말하며 자녀를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부모와도 같습니다. 훌륭한 부모라면 자신들이 없어도 하느님께 직접 힘을 얻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들은 자신들에게로 사람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쉴 수 있고 자신들이 더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어도 공동체가 잘 유지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가 점점 성장하게 만들어놓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열두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하여 하늘에서 쉬어도 교회는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장예모 감독‘인생’(1995)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인생’은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남편 푸구이와 아내 자전 부부의 한 생애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일명 부잣집의 아들 도련님이었던 푸구이는 아내 자전과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매일같이 도박했습니다. 결국, 도박으로 룽얼이란 사람에게 집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내 자전과 자식들은 친정으로 떠나 버립니다.
푸구이는 자신의 집을 빼앗은 룽얼에게 그림자극 도구를 빌려, 그림자극으로 생을 연명합니다. 도박에서 손을 떼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자전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남편 푸구이 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내전으로 푸구이는 전쟁터에 난데없이 끌려갑니다. 공산당에게 잡혀 포로가 된 푸구이는 그림자극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며 잘 버팁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큰딸 평샤는 열병으로 벙어리가 됩니다.
공산당이 집권하게 된 이 시기 자신의 집을 도박으로 빼앗은 룽얼은 지주로 지목되어 인민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이 도박으로 집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자신이 죽었어야 함을 안 푸구이는 공산당이 정의를 실현해 준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후 대약진 운동으로 마을에서 철을 제련해 무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촌장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후 모든 철을 수집해 제련하게 되는데 푸구이는 이런 철 제련 현장 속에서 다시금 그림자극을 통해 재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깐이었습니다. 아들 유칭은 잠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꼭 학교에 가야 한다면서 졸린 아들을 등에 업고 학교까지 데려다줍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잘 들어봐. 우리 집은 아직 병아리야. 병아리가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면 양이 되는 거야. 양이 자라면 소가 되는 거야.”
“그다음엔 뭐야?”
“그다음엔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지는 거야!”
이는 푸구이의 기승전결 식의 직선적이고 목적 지향적 리더십을 잘 말해주는 대화입니다. 하지만 그날 잠이 모자랐던 유칭은 트럭 뒤에서 자고 있다가 사고로 인해 죽게 됩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전쟁터를 함께 누볐던 오랜 아우 춘성이었습니다.
이후 어른이 된 딸 펑샤의 혼처를 알아보게 되고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온 집안은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명언들로 가득하고 펑샤의 남편마저 노동자 계급으로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 발을 절기는 했으나 착실한 청년이었습니다.
펑샤는 완얼시와 결혼 후 아이를 낳습니다. 병원엔 학생들뿐이었고 의사들은 자아비판을 위해 밖에 끌려나가 있었습니다. 푸구이는 만약을 대비해서 자아비판 중인 한 의사를 데려와 찐빵을 먹으라고 줍니다. 역시나 펑샤에게서 갑작스러운 출혈이 발생합니다. 학생들은 의사를 찾지만, 의사는 갑자기 찐빵을 먹다 목이 막혀 쓰러진 상태입니다. 이렇게 딸 펑샤도 죽습니다.
푸구이 부부는 아들 유칭을 꼭 닮은 손자 ‘찐빵’을 키웁니다. 푸구이는 손자가 병아리를 가져오자 자신의 그림자극 소품이 있던 상자에서 병아리를 키우게 하며 이렇게 말해줍니다.
“병아리가 다 크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다 크면 양이 되지. 양이 다 크면 소가 되고 ...”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할머니인 자전이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다음엔 만두가 다 자랐겠구나.”
“전 소 등에 탈래요.”
“그래! 만두는 소 등에 타거라!”
푸구이가 말합니다.
“만두가 자라면 소가 아니라 기차, 비행기를 타야지! 그때가 되면 점점 더 살기 좋아질 거야.”
이 마지막 대화가 감독이 말하려던 메시지일 것입니다. 푸구이는 한 인생을 거치며 인생관의 병화를 겪었습니다. 인간 주도적 리더십에서 섭리에 맡기는 리더십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푸구이는 처음에 가정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집을 빼앗기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 것은 시대의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푸구이는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지키려 하지만 시대의 힘이 딸 펑샤가 벙어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잠이 많은 아들 유칭을 자신이 그날 깨우지 않았더라면 유칭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찐빵을 주지 않았어도 딸은 살았을 것입니다.
푸구이의 인생관은 자기 주도적이었고 목적 지향형입니다. 기승전결로 가며 공산주의가 자신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중국의 인생관이었고 이것은 모택동과 같은 생각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없음을 마지막 때에서야 깨닫고 시대의 힘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의 변화를 겪어야 합니다. 자신이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처음엔 자신의 힘으로 그 공동체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다 그 공동체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보다는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빠집니다. 공동체는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공동체의 봉사자들은 물이 흐르고 싶은 방향을 잘 찾아 길만 내어주면 됩니다. 그것을 계곡으로 만들고 시내가 되게 하고 강이 되게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공동체 리더들은 나의 목적지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길만 내주고 쉬면 됩니다. 내가 쉬어도 더 잘 돌아가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자신이 사라지면 공동체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단체를 만들면 안 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75년에 발표된 가수 이종용의 ‘너’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멜로디는 빠르고 경쾌한데 가사는 학생들의 감성을 울리는 내용이었습니다. “낙엽 지던 그 숲속에 하얀 모래밭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 별빛 같은 눈망울로 영원을 약속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던 너/ 바람에 실려 가고 빗소리에 몰리는 잃어버린 너의 목소리/ 부서지는 머리 결을 은빛처럼 날리우고 되돌아선 너의 옛 모습/ 웃음 지며 눈감은 너/내 곁을 떠난 뒤 외로운 집시처럼 밤을 태워버린 숱한 나날들/ 오늘도 추억 속에 맴돌다 지쳐버린 창백한 너의 넋” 이 노래는 학생들이 응원가로도 많이 불렸습니다. 교내 체육대회에서 응원가로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는 노래였고, 가사의 내용과는 달리 박자가 빨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연히 이종용 씨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75년도에 ‘너’를 발표하고 인기절정의 가수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절망 중에 있을 때 사형수를 만나게 되었고, 사형수를 통해서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사형수는 ‘나는 곧 죽겠지만 당신은 곧 밖으로 나갈 겁니다. 나가면 예수님을 믿고 기쁘게 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그는 가수가 되면서 세상의 기쁨에 빠져서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다시금 신앙을 찾은 그는 가수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찾았다고 합니다. 가수로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고, ‘Jesus Christ Super Star'이라는 뮤지컬에서 예수님 역할을 236회가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년의 집으로 알려진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기억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1957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그해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부산에서 가난한 사람을 보았고, 특히 전쟁고아들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고아들을 위한 소년의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신부님은 협조들이 필요했고, 수녀회와 수도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 받을 수 있도록 ‘소년, 소녀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신부님은 안타깝게도 1989년 ‘루게릭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1992년 선종할 때까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꿈은 멕시코, 과테말라, 필리핀에서도 꽃이 피었습니다. 신부님의 영상을 보면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내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좋고 서로 사랑하는 것 보다는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다.’ 이제 곧 봄이 옵니다. 봄이 되면 많은 꽃들이 필 것입니다. 그런 꽃들 모두는 추운 겨울을 온 몸으로 견디어냈습니다. 눈의 무게에 가지들이 꺾이기도 했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꽃은 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삶도 그만큼 상처와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일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앞을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날입니다.’ 언젠가 들은 말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날들이 어떠신지요?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날인지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날들인지요? 물과 공기는 주변에 많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를 모르고 지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감사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것이 인생입니다. 나누면서 살기에도 빠듯한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망과 분노, 시기와 질투, 미움과 좌절로 하루를 채우면서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악의 세력에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 왜이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제 생이 3달 정도 남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늘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늘 곁에 있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은 하루에 한번 전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은 식구들이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말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요?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제자들이 가엾은 마음을 가질까?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사람들은 각자 잃은 것을 찾으려 길을 나선다.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볼 때면 가엾다. 찾을 수만 있다면 다행스럽지만 그렇지 못하면 상심이 클 수밖에, 예수님 주변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예수님께서 군중 속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마귀를 쫒아내고 병을 고쳐주고 계시다. 군중은 소문을 듣고 잃은 것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움직인다. 우리 믿음의 여정 또한 그러해서 예수님을 찾아 떠라 움직이고 있다.
“도대체 저 분이 누구신가?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시는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제자들이 의문에 불을 지폈다. 보물찾기 중이다. 파견과 사명 수행, 그리고 예수님께 돌아와 경험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보고 중이다. 제자들은 자기 노고를 이야기 하며 칭찬 받으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 마음을 모르실리 없으신 예수님은 “수고들 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거라” 제자들이 솔직히 쉬고 싶었을 것이고 자기에게 집중된 이야기는 자랑이며 아직 칭찬을 좋아하는 응석받이들이다.
예수님 일행은 배를 타고 앞질러 먼저 갔지만 먼저 도착해 있는 군중을 보게 된다. 제자들은 군중을 보자 쉬지도 못하고 또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여력을 잃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는 군중의 움직임을 바라 보신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6,34)
제자와 예수님의 생각의 차아는 엄청났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높여 가려고 군중들을 향해 가르치신다. 군중은 완성되지 않은 초짜들이듯 제자들 또한 초짜들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봄은 군중들의 노력보다 거리가 멀다. 여전히 제자들은 군중들을 피곤한 대상으로 여갈 뿐이다. 제자들이 군중을 바라볼 때, 조금도 군중이 가엾게 보이지 않는다. 제자들은 파견 선교 후 돌아와 피곤하니 하루 눌어지게 쉼이 필요할 뿐이다.
언젠가 제자들도 예수님 닮아 상대를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도대체 그런 일을 행하셨는지 그때의 일의 참뜻을 헤아릴 것이다.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적응과 응용력을 갖지만 사람은 지식을 이해하고 응용력을 갖기에는 최소한 30년이 필요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30년간 지식 습득에 시간을 빼앗겨 상대방을 향하는 가엾은 마음을 기르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쳐 키워내야 할까? 고만이 크실 것 같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신자 분들 중에는 요즘 시대에 참된 목자, 참된 사제를 만나고 싶어 하시고 또 그리워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절박한 마음에 먼 곳까지도 목자를 찾아 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같은 사제로서 생각해 볼 때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분들의 바람을 채워드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많은 반성과 책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목자는 세상의 어떤 사제들보다도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참된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비록 비대면의 시대를 지내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주님은 대면 비대면의 차원을 넘어서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참된 목자이신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늘 함께하시도록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의 측은지심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가득히 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만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너에게
스며야하니
힘이 들지만
네가 나에게
스미어드니
힘이 솟지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함승수 신부님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헌신적,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목하시는 선배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좋은 것들을 더 많이 해 줄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합니다. 사제관에서 커다란 철판에 고기를 구워주고 볶음밥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일상'입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찾아가 힘내라고 등을 토닥여 주면서 직접 준비한 간식 꾸러미를 전달하고 옵니다. 주일학교와 청년 공동체에 꼭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어떻게든 마련해 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각 본당의 살림살이는 그리 넉넉치 않기에 그러기 쉽지 않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더치커피를 만들어서 신자분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불철주야 노력하다보니, 몇 년 후에는 본인이 직접 생두를 사다가 로스팅을 할 정도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정성과 진심으로 신자들을 대하니 많은 분들이 그 '매력'에 빠져들 수 밖에 없지요. 그렇게 후회 없는 사목을 하다가 떠날 때가 되면 당연히 많은 분들이 정말 아쉬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고 합니다. 정든 본당을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 미사가 끝난 후 차를 타고 새로운 임지로 출발하는데, 주일학교 아이들 몇 명이 "신부님 가지 마세요"하고 울면서 한참을 뛰어 그 차를 쫓아오더랍니다. 그런 진심어린 모습에 자신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 신부님은 어느 본당에 가든 늘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사목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떠나는게 아쉽고 슬퍼서 그분이 타신 차를 쫓아 달렸던 아이들의 마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일행을 쫓아 달렸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애정어린 충고와 가르침, 그분이 따스한 손길에 담아 건네주신 큰 자비와 사랑에 감동한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을 떠나셔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프고 아쉬워서 조금이라도 더 그분을 보고싶은 마음에 그분을 향해 달립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둘레가 53킬로미터, 동서의 너비가 11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큰 곳입니다. 그 호수를 배를 타고 건너가는 예수님 일행을 쫓아가 그분보다 먼저 반대편에 도착하려면, 25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배보다 2.5배 이상 빠른 속도로 달려야 합니다.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 때엔 힘들게 예수님을 쫓아다녀야만 그분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미사 중에는 성체의 모습으로, 성경에서는 말씀으로, 기도 중에는 내 마음 안에서 들려주시는 목소리로 만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런 '간편함'에 비해, 우리가 그분을 찾는 '간절함'은 얼마나 큰지요? 신앙생활이 재미없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 마음에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고 사랑해야 비로소 구원의 진리가 보이는 법입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동시대의 저자가 쓴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기’에서 (Cap. 14,109-110: Acta Sanctorum Febr. 1,769)
그들이 못박혀 있던 십자가들이 땅 위에 세워졌을 때 놀라웁게도 모든 이들은 파시오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가 준 격려의 말에 응하여 견고한 자세를 취했다. 원장 신부는 거의 부동 자세로 시선을 하늘에다 못박아 놓고 있었다. 마르티노 수사는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라는 시편을 외웠다. 프란치스코 블랑코 수사도 낭랑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감사 드렸고 한편 곤살보 수사는 목소리를 좀더 높여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낭송했다.
우리 형제인 바오로 미키는 자신이 이제까지 서 보았던 강단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강론대 위에 서 있다고 느끼고서 우선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는 일본인이자 예수회원이라고 밝히고, 자기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그 위대한 특전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강론을 마쳤다. “이제 이 순간을 맞아 내가 진리를 배반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여러분 중에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국왕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려 이 마지막 고뇌의 순간에 동료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모든 동료들의 얼굴에 커다란 기쁨의 표정이 나타났고 특히 루도비코에게서 그러했다. 군중 가운데서 한 교우가 루도비코에게 “당신은 조금 있으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외치자, 그는 기쁨에 넘친 동작으로 손과 온 몸을 위로 뻗쳐 모든 군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루도비코 곁에 있던 안토니오는 하늘에다 시선을 못박고는 예수와 마리아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 나서 나가사키의 주일 학교에서 배운 “찬양하라, 주님을 섬기는 아이들아.”라는 시편을 노래했다. 그 곳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과제 가운데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시편의 학습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평온한 얼굴로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구경꾼에게 참된 그리스도교 생활을 영위하라고 격려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행위들로써 그들은 기꺼이 죽는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네 명의 회자수들이 칼집에서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장검을 꺼냈다. 모든 신자들은 이 무서운 장검을 보자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외치고 슬피 울면서 탄식하여 그 울음 소리는 하늘까지 치솟았다. 회자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두 차례 칼을 휘둘러 그들을 쳐죽였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예수님께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복음 선포와 치유와 구마의 권한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많이 지치고 또 들뜨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력을 회복하고, 또 차분히 지난 시간을 성찰하면서 그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안내하시는 겁니다. 혹여 실패와 거부의 상처가 패였다면 어루만져 주실 것이지요. 번잡함을 벗어난 외딴곳의 고요한 시간은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목자이시기도 하지만 지금은 제자들의 필요를 살피시는 자상한 목자이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34)
그런데 군중은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외딴곳으로 달려와서 그분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힘이 놀랍고, 또 그 힘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외딴곳은 더 이상 외딴곳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은 기대했던 쉼을 포기하고 또다시 군중을 마주해야 하지만, 자기들의 필요를 먼저 살피고 돌봐 주시려고 했던 예수님의 의향을 이미 확인했으니 크게 실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사랑의 가르침, 자비로운 돌봄, 그리고 당신의 뜻을 돌이키는 희생과 인내는 제자들에게 확실한 시청각교재이니, 이곳은 그야말로 산 교육의 현장인 셈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목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히브 13,20)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목자 정체성을 위와 같이 서술합니다. 예수님의 목자 직분은 "계약의 피"로써 완성된 영광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의 증거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화답송)
화답송은 목자와 우리의 관계를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시니 우리는 결핍과 아쉬움,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양들에게는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도 흡족하거니와, 막대와 지팡이를 들고 자기들을 보호하며 이끄는 목자의 현존이 더없이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양들의 충만한 평화와 위안이 곧 목자의 행복이기도 하지요.
주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불편함과 시련, 고통을 모른 체하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 그분 마음에서 자동으로 연민의 사랑이 분출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감지하시면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쩔 때는 염치 없고 죄송해서 그분께 심려를 끼쳐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지요.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이고 우리를 둘러 싼 세상의 도전들이 전방위적이고 상당부분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자의 눈길과 손길, 마음길이 필요한 작은 양들입니다.
"제 한평생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화답송)
"은총과 자애!" 목자와 함께하는 우리에게 보장되는 선물입니다. 이밖에 무엇이 더 필요할지요! 우리 곁을 떠나시지 않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목자가 계신데 더 기웃거릴 세상 유혹이 무엇이겠는지요!
사랑하는 벗님!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에 평화로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나"를 향한 그분의 연민 안을 헤엄치는 작은 양이 되어도 좋겠지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목자를 소유한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아멘.
행복한 삶 -관상과 활동의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16세기 후반 순교한 우리의 이웃 일본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당시 곳곳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던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선교사들과 수사, 신자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25명은 체포되어 1597년 1월3일부터 교토를 출발하여 혹한의 추위속에 1000km(600마일)를 걸어 나가사키에 도착한후, 1597년 2월6일 십자가형으로 순교한 성인들입니다. 순교당시 바오로 미키는 33세 였다하니 예수님과 같은 연배였습니다. 성인의 마지막 유언도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저는 일본 사람입니다. 제가 죽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를 믿고 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 이렇게 죽게 돼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죽기 전에 진실만을 말할 것입니다. 여기있는 분들게 또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도록 도와 달라고 그리스도께 청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저를 박해한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박해하는 이들을 가엾게 여기시길 청합니다.”
순교 성인들의 모범은 우리에게 강렬한 도전이자 자극이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주님과 함께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무엇보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이 균형잡힌 삶입니다. 기도의 샘터, 노동의 일터, 개인방의 쉼터의 조화와 균형이 필수입니다. 현대판 이단은 모두 극단을 뜻하는 기도만의 정적주의와 일만의 활동주의라 합니다. 너무 일에 빠지다 보면 일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매일 일정한 시간 외딴곳을 마련하여 영육을 충전시키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성공적인 복음 선포 활동을 하고 돌아온 제자들의 활동 보고를 들은 주님은 즉시 외딴 곳의 쉼터에서 관상적 휴식중에 지친 영육을 충전시킬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영육이 살기위해 마련해야 할 외딴 곳의 시간과 장소입니다. 외딴 곳의 샘터이자 쉼터인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주 예전 신자들에게 드렸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수도생활이 아니더라도 내 처지에 맞은 기도와 공부와 일과 운동이 균형잡힌 일과표의 시스템을 따라 질서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영성생활은 습관이다. 변덕이 심한 감정따라, 기분따라 살지 말고 일과표의 궤도 따라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균형잡힌 삶을 생활화, 습관화할 때 내외적으로 무너지지 않으며 성공적 정주생활도 가능하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밤에는 외딴곳의 샘터와 쉼터에서 아버지와의 일치의 관상기도로 자신을 충전시켰습니다. 그러나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주변의 필요에 유연하게 탄력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자비심입니다.
예수님은 외딴곳에 도착하자 앞서 도착한 목자없는 양들같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이어 5천명을 배부르게 먹이십니다. 그대로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를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며칠전 읽은 71세 사제의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저는 71세니까 지금까지 밥을 7만7745그릇 먹었군요. 그 음식들 가운데 내 손으로 구해서 먹은 음식은 한 끼도 안 될 수 있습니다. 쌀 한 됫박도 배추 한 포기도 기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71년 동안이나 한끼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으로 지은 곡식과 어떤 이가 수고한 생선과 고기를 넙죽넙죽 받아먹었습니다. 신비가 따로 없습니다. 신앙적 표현으로 ‘하늘이 내려준 만나를 먹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 갚아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죽기 전에 갚을 길이나 있을까요?”
평생 지금까지 먹고 산 하늘의 만나인 주님의 성체와 말씀, 매일 세끼의 음식임을 깨닫습니다. 굶주린 육신에 앞서 굶주린 영혼을 생명과 빛의 말씀으로 충전시킴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누리는 관상적 휴식입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의 궁극의 샘터이자 쉼터가 됩니다. 화답송 시편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믿는 이들의 소원이 그대로 함축된 영혼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이 함께 계신 푸른 풀밭이요 주님의 집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관상적 휴식의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도취의 찬미와 감사의 관상적 기도와 휴식만으로 부족합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는 선행과 나눔의 섬김의 사랑이 절대적입니다. 바로 히브리서의 가르침입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찬양의 ‘관상’은 선행과 나눔의 ‘활동’의 열매로 드러날 때 온전한 제물의 봉헌생활입니다. 하여 깨어 끊임없는 기도중에 안으로는 관상가 마리아로, 밖으로는 활동가 마르타로 사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이 일치된 균형잡힌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관상과 활동이 일치된 봉헌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아름다운 히브리서 마지막 축복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주시어 우리가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히브13,20-21).
책보다 사람 통해 배워야 합니다. <마르코 6, 30-43> 2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요사이는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쉽게 지식을 취할 수 있으니 지식의 혼을 배우려면 지식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책을 보면서 이해되지 않는 것이나 설명이 더 필요한 것은 지식의 본질을 아는 사람에게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서로 간에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지식을 체험한 사람과의 소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지식을 글로만 배우면 깊이 자리 잡은 영과 혼을 모르게 됩니다.
수도 생활이 무엇인지 알려면 이론보다 실제로 살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목자 없는 양을 보시고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르치고 보여주신 이유는 보고, 듣고,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학자의 책을 본다고 영적 진리를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쓰고 자기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본질적 진리를 깨닫고 올바로 실천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참 목자이고 스승이신가? 가짜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듯이 가짜 박사들이 있어 이름만으로 박사 행세하고 진실과 사랑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많은 이를 크나큰 오류로 인도합니다.
오늘 주님이 오셔도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살겠다고 여야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사람이 자기 자리만 지키고,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현 위치만 생각하고 편 가르기, “내로남불” 같은 이기적인 생각에 머물면 그들의 관리 능력만 믿고 사는 국민은 참으로 불쌍한 국민입니다. 지금 없는 것이 많이 있지만, 참으로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은 진실과 사랑을 채워주는 지도자, 선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가 간첩이 되어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학교에서 지식을 전하고, 올바른 인생관을 가르치지 않고 역사 왜곡, 물질적 선심으로 국민을 속이거나 가짜 스승은 있으나, 참 지도자 없는 국민은 불쌍합니다. 교회도 자리다툼만 하고, 이름이나 얻으려 하고, 자기 안일을 찾는 종교 지도자들의 현상은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살도록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못 하던 사회 지도자가 공식 석상에서 “나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지금은 나가지 않습니다.” 하면 듣는 사람들도 거의 “나도 안 나가” 할 것입니다. 침묵이 금입니다.
양심적 지도자, 마음이 가난한 지도자, 깨끗하고 순결한 지도자, 욕심 없이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지도자가 있어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해주는 선각자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믿음이 진실과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습니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향한 백성들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염원들이 엿보입니다. 먼저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마르 6,30)합니다. 그 보고들을 다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수고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며 쉬게 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고를 받던 그 자리 그 순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하고 깊은 말을 나눌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인가 봅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31절) 얼마나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헌신적으로 임하셨는지를 직감하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밥을 굶어가시면서까지 백성들을 가르치고 고쳐 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모습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게 떠나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33절) 다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배를 타고 가로질러 건너가는 것보다 더 빨리 육로로 달려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눈망울이 놀랄만큼이나 선하게 떠오릅니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헌신적이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백성들이 예수님을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필요로 했는지 그 상황과 밀도가 물씬물씬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간절하고 다급하게 예수님을 찾아 온 군중들을 보시고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4절)고 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이 글을 바라보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북받쳐 오릅니다. 나름 하노라고 하는데도 늘 부족하고, 늘 채우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해야 하는 저의 현실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도 복음에 나오는 백성들처엄 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가 봅니다. 문득 바로오 사도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우리 사목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부족함과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고야 마시는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일을 할 충분하고 완전한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이 현실에 드러나기 위해 나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잘났고 못났고,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수행할 인간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통찰합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어도 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살아 있고 내가 주 대전에 나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주님의 거룩한 일을 하신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거룩한 일을 이루어내시는 주 하느님께 기꺼이 저를 봉헌하며, 우리 교회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나라를 하루빨이 이 땅에 이루시기를 간구합니다.
쉼의 중요성
양성일 시메온 신부님
고등학생 때 늘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만원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습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우리 아들 고생했네, 이제 좀 쉬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쉬라는 그 말씀이 어찌나 저를 평화롭게 만들던지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직장을 잃은 힘듦, 과도한 업무로 인한 힘듦 등 코로나가 가져온 양면성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변해가는 세상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태초부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일 것입니다. 코로나라는 시련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고생했다. 이제 좀 쉬어라.”는 말로 우리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목자를
만난 양들의
기쁨이다.
양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목자이시다.
보시니
참 좋은
목자와 양들의
관계이다.
목자의
소명은
양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삶이다.
산다는 것은
예수님같이
사랑하는
삶이다.
사랑하는 삶이란
양들을 위해
죽는 삶이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양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사랑이다.
구체적인
우리의
삶속에서
만나게되는
목자의 지극한
사랑이다.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사랑이다.
용서의 넉넉한
품으로 양들을
모으신다.
어둠을 비추는
희망으로
삶의 한복판에
계신다.
우리의 목자는
삶의 참맛을
되찾아주신다.
사람됨을
당신의 삶으로
들어높이신다.
목자의 사랑은
각별하다.
일그러진
인격을
온전하게
하신다.
욕망의 자리를
인격의 자리로
바꾸어주셨다.
우리에게는
끝까지 믿고
신뢰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자가 계신다.
가장 큰
은총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공감하시고
치유시켜
주시는 사랑이
양들을
지켜주시는
참빛이다.
목자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심을
믿는다.
목자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어느 수행자가 길을 가다가 물에 빠진 전갈을 발견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이 수행자는 전갈을 손으로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 전갈이 자신을 살려준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손가락을 물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갈은 다시 물에 빠졌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 수행자가 전갈을 더 이상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다시 전갈을 손으로 꺼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물리고 말았습니다. 수행자는 아픈 손가락을 꾹 참고서 다시 꺼내서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도 모르는 이 전갈을 왜 구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이 수행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갈은 물려는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오.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저의 본성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갈에게 계속 물려도 계속 살려야 했습니다.”
상대의 본성을 인정하는 이 모습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내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절대로 사랑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잘못하는 그 행동을 그 사람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기에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의 본성은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행동에 상관없이 내 본성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 수행자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그 자체인 사랑을 철저하게 따르셨습니다.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예수님 곁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님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고 뺨을 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본성은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본성 역시 ‘사랑’에 맞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말과 행동에 반응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인 ‘사랑’만을 따르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따르는 모습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두 가지 이상의 우선순위를 가진 사람은 우선순위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마틴 스콧).
죽음에 대해...
몽테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알려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마라.”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많이 목격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죽음은 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어떨까 하고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 죽음 역시 뜻밖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분 앞에 편안히 앉는 것이 참된 휴식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네 인간 존재 생각할수록 신비롭고 묘한 존재입니다. 어떤 분은 존재 자체로 엄청난 부담이요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잠시라도 마주하는 시간이 그렇게 어색하고 힘겹습니다. 한번 진지하게 대면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심호흡과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우황청심환이 그래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존재 자체로 기쁨이요 위로입니다. 생각만 해도 얼굴에 미소가 돌고 가슴이 설렙니다. 잠시라도 함께 있는 것이 치유요 위로의 시간입니다. 존재 자체로 축복이요 은총인 분, 그 분과 함께 있는 것이 최고의 쉼이요 휴식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는 시간은 초스피드로 지나갑니다.
사목 실습을 나갔다고 복귀한 제자들이 그간 체험했던 일들을 신나게 보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녹초가 된 제자들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던 예수님께서는 우선 좀 쉬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복음 6장 31절)
세상 살이에 지친 우리들, ‘나와 다른 그’로 인해 지친 우리들에게도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아무리 하루 온종일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드러 누워 뒹굴거리고 있어도, 더 피곤한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참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쉼터 같은 존재, 선물 같은 존재와 시간을 보내야 될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존재,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힐링이 되는 그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참 휴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편안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들인지라 언제나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환대 받던 존재에서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란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더 많은 배려와 예의, 친절과 존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진정한 휴식, 참된 쉼, 깊은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분은 인간 존재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궁극적, 최종적으로 나아가 머물 곳은 주님 면전 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 그분 앞에 편안히 앉는 것이 참된 휴식입니다. 그분과 눈을 마주치고, 그분 앞에 머무는 것이 참된 쉼입니다. 그분께 내 모든 상처 보여드리고 맡겨드리는 것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비결입니다.
쉬면 도움이 되고 쉬지 못하면 짐이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활기 왕성한 20대 초반 겨울에 성당 청년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을 간 적이 있습니다. 2박3일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을 정상까지 뛰어서라도 올라갈 기세였기 때문에 남들의 짐까지 짊어지고 쌍계사에서 뱀사골까지 거뜬하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무릎 인대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틀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남에게 내 짐까지 맡기고 끝에 쳐져 한쪽 발을 질질 끌며 쫓아가야 했습니다. 어제는 제가 기다려줘야 했던 이들이 이젠 저를 기다려줘야 했습니다. 그때 왜 산에 오르면 겸손해진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일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일주일에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리고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하는 이들은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버는 것처럼 쉬는 날을 마련해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하면 오래 못 버팁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읽으며 신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사제들이 좀 더 본당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십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피정하라’는 뜻입니다.
현재 교구사제의 연중피정은 길어야 5일입니다. 그것도 저녁에 들어와서 오전만 하고 가니 실제로는 3일 정도라 하겠습니다. 일 년에 3일 피정! 교황청에서 정한 피정기간은 일 년에 10일입니다.
그리고 피정에 들어가서도 강의를 듣고 전례를 공동으로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피정은 본래 광야에서 나 혼자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광야에서 하신 일이 피정입니다. 광야에서는 미사도 성경 읽는 것도 강의 듣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 대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침묵 중에 주님과만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피정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정기간이 짧은 데는 신자들의 영향도 매우 큽니다. 평일미사를 빠치면 개중에는 불만을 토로하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많은 신자들이 제자들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제자들의 피정을 방해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직접 그들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들이 없어 목말라 하는 수준의 신자들은 이미 주님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오른 이들입니다. 목자들이 피정할 때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스미르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카르포스 교부의 일화입니다.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던 폴리카르포스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인이라 불리시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리카르포스는 빙그레 웃으며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아야지, 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자들이 쉴 시간이 부족하면 오히려 양들에게 피해가 갑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목자들에게 쉴 시간을 충분히 할애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더 많이 쉬어 보다 생기 있는 영으로 신자들을 대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너무 바쁘게 사목하셔서 지쳐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외국은 피정기간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이요 휴가도 일 년에 거의 1달이고 7년을 일하면 1년은 안식년을 합니다.
그러나 저희 교구 같은 경우는 평생 1번만 안식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사제들에게 조금 더 쉬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신자들이 본당 신부님이 피곤하신 것을 보면 평일에는 우리가 공소예절이라도 하며 지낼 터이니 일주일 동안 조용하게 피정하며 쉬고 오시라고 권하는 분위기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인간 활동의 규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Nn. 35-36)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이 활동을 통하여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기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신을 초월한다. 이같은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외적 재산의 축척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정의와 더욱 넓은 형제애와 더욱 인간다운 사회 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이런 기술의 발전이 인간 향상에 물질적 바탕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 힘만으로 인간 향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활동의 규범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 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은 인간 활동과 종교를 밀접하게 관련시킴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하다.
만일 지상 사물들의 자율성이란 말로써 피조물과 인간 사회가 고유의 법칙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인간이 그것을 점차로 알아내고 이용하며 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이런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사실,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조건 자체로써 고유의 안정과 진리와 선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각 학문과 기술의 고유한 방법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 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 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내용은 다 함께 하느님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하게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해도, 만물을 보존하고 만물의 존재를 규정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대립과 논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학문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놓은 정신 태도는 간혹 신자들 가운데에도 없지 않았지만,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란 말로써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는다거나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인간이 피조물을 멋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하느님을 인정하는 사람치고 이런 견해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종교이건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피조물들의 말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와 말소리를 언제나 들어왔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 자체의 정체도 어두워지고 만다.
<외딴곳>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2. 09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우리는 외딴곳에서 만났지요
쉬라는 꿀맛 같은 주님 말씀 듣고
보는 이 있을세라 한걸음에 달려간 그곳
외딴곳
삶에 지친 몸과 마음 애써 깊이 감추고
벅찬 달음질로 당신이 먼저 찾은 그곳
외딴곳에서 우리는 만났지요
주님의 사명 다한 뿌듯함 가득 품고
스스로 쉴만한 자격 있다 우쭐거리며
모든 것 잠시 잊고 홀로 머물려 찾은 그곳
외딴곳
치열한 삶의 피땀과 눈물 닦을 겨를 없이
곧 이어질 거친 여정 맞이할 숨 고를 겨를 없이
귀한 휴식 마다하고 당신이 달려온 그곳
우리는 주님과 함께 외딴곳에서 머물렀지요
홀로 쉴 곳을 찾아
애써 떠난 외딴곳에서
당신은 내 쉼을 가로막는 짐이었지요
짧은 쉼조차 포기하고
어렵게 찾아온 외딴곳에서
당신은 나를 귀한 벗으로 삼으셨지요
나와 함께 머물며
나를 쉬게 하셨던 주님께서는
당신과 나를 함께 따뜻하게 품어주셨지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외딴곳에서 하나였지요
잠시 머무는 외딴곳에서
쉼 없이 주님과 벗들과 어울리려는 당신을
쉼 없이 모든 이를 보듬으시려는 주님을
홀로 쉼을 즐기려는 나를 보았지요
얼굴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으로
이제 우리 헤어져
삶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또 다른 외딴곳에서
나 역시 주님과 당신처럼
그렇게 그렇게 함께 하리라
소박한 마음으로 다짐하지요.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생각이 드셔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렇게 목자가 지켜주지 못하는 양의 경우는 늑대처럼 맹수들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높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온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들이라고 생각하시며 그들에게 참된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우리도 주위에 목자 없는 길 잃은 양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참된 목자처럼 사랑으로 다가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으로 내 주위의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설 때 그 만남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산촌으로 유학가면 어떨까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설 명절 연휴에 폐교 위기의 학교를 가 보았다. 얌전히 자리잡은 학교교정은 평화스러웠다. 학교는 어린이 학생수 3명, 교사 3명이 전부이다. 마을도 평화로이 설명절을 지내고 있었다. ‘노는 것부터 가르치는 이상한 나라’ 여행사 대표 윤성희 저, 2018에 쓴 책이다. 이상한 나라 필란드는 어린이들을 신나게 놀게 한다고 쓰고 있다. 이곳 학생들은 신나게 놀면서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알아가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간다고 한다.
“‘산위의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톨스토이 공동체를 꿈꾸며 산촌마을에 둥지를 틀고 유학온 어린이들을 교육하며 함께 살아가는 단양의 박기호 신부가 있다. 벌써 이곳에서 여러해를 살며 삶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지낸다. 이는 한국교육 현장의 역발상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박 신부는 교육의 구원과 해방을 꿈꾼다. 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 ‘SKY캐슬’을 실상을 시청자들이 감명깊게 보았지만 반성이 얼마나 있으려는지? 여전히 대를 이어 의사를 꿈꾸며 부모가 자녀를 틀속에 가두고 병자를 만들고 그렇게 양성된 의사는 가정의 불행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가 그 양상만 다를 뿐 그 모습은 계층 따라 똑같이 학부모가 자녀의 불행을 만들어 가고 있다.
충북은 ‘사랍고 명문고를 새로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자”고 도백이 그리고 시장이 외치고 있다. 이들은 누구를 위한 인재양성인가? 각 분야에서 모두가 인재가 아닌가? 어떤 인재양성인지 뻔하다. 이제 시대는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가르치고 모두를 존중하는 행복교육’ 만이 미래가 살 길이다. 왜, 농촌학교를 살리려 꿈꾸지 않는가? 도시에서 유학 온 농촌학교를 만든다면 자자체는 저출산 초고령화도 해결할 수 있을텐데, 단양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말이다. 지자체 장과 지역의원들에게 책한권 소개한다. ‘이토록 멋진마을’, 후지요시 마사하루 저,김범수 역,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저 ‘산위의 마을’이 ‘SKY캐슬’의 바람을 잠재우고 역발상의 교육현장을 만들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일으키고 싶다.
축산업의 천국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뉴질랜드는 지상의 천국처럼 부러움을 샀다. 풍요가 넘쳐나는 나라였고 국민 모두가 편안했다. 농촌마을은 저택들이 들어서 있다. 빈부의 격차가 없고 모두가 똑 같이 행복했다. 직업의 차이도 없이 살아가는 일상이 모두가 즐겁다. 경쟁이란 단어는 없었고 협동하며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쯤 되면 나라가 천국이 아닌가?
나라 전체를 돌아보며 가는 곳곳마다 목축업의 현장이 보인다. 여유롭게 초지에서 풀을 뜯는 소들이며 양들을 본다. 이리떼의 습격도 없다. 휀스가 그들을 지켜주는 것 외에 연중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목초지에서 성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행복감을 갖게 한다.
이스라엘을 달랐다. 사막, 가파른 산비탈,
목축업 하기에는 환경이 열악한 정도를 넘었다. 건기가 계속되면 양들은 목초지를 찾기 위해 산판을 헤매는 가엽은 양들을 보게 된다. 부지런히 풀을 찾아 헤매야 하고 무리에서 잇탈하면 이리들에게 위험으로 노출되고 만다. 먹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목자 잃은 양들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한다. 목자들이 양들을 돌보기 위해 지팡이만 필요했다. 양들을 만나며 많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와 당신께 목자로써 경험한 체험담을 보고한다.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을까? 그들 나름 많은 것을 경험했을 것이고 이를 극복한 자랑도 섞여 있고 쉬고 싶은 피곤끼도 역력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군중들에게서 제자들을 격리시켰다. 이는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존중과 배려였다. 배를 태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게 하신다. 이는 제자들에게 휴식의 시간이며 또 다른 일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생명에 기갈이 든 군중들이 그들의 동선을 알아채고는 그들을 앞질러 따라잡았다. 이런 모습은 생명의 절박함을 보게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절박함을 읽으셨다. 가엽은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 보신다. 그리고 함께 하시며 당신의 본분을 다하여 가르치신다.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시고 가르치신다. 이 말씀의 가르침은 생명의 양식이 된다. 예수님은 소외감과 박탈감으로 가득찬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다가 가신다. 그것이 큰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파란 풀밭이 생겨나고 군중들은 생기를 되찾는다. 이 모습을 제자들이 보고 배운다. 군중이 바라는 생명의 양식은 빵이지만 빵보다 마음의 양식이 더 중요하다. 마음을 헤아려주고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는 것임을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내 가족만을 위해 돈을 벌고 부정함으로 코디를 이용해 겉포장하며 위화감을 주며 교만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려면 남의 마음을 읽어주고 가엽은 마음을 가지고 내 일처럼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하루를 살았으면 한다.
이스라엘에 사는 양들의 신세처럼 우리의 일상도 각박하다. 파견받은 제자들의 수고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되고 다시 파견 될 것이다. 예수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 함께 기도하자.
삶의 균형과 조화 -기도와 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엇보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평범한 일상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일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어제 ‘베드로 파브로 성인’ 전기를 읽으며 16세기 종교개혁 전후의 유럽 현실이 참 끔찍했습니다.
종교재판에 의해 이단자로 확정된 이들의 종교재판에 의한 공개 고문과 처형 및 화형식이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양심의 가책없이 이를 마치 축제처럼 구경하며 술을 먹고 이 장면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충실했던 자들인데 이처럼 이단자들로 몰리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미친 사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신盲信, 광신狂信보다 더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요즘 국내에서 전개되는 일을 봐도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분명 객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견해는 극과 극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균형잡힌 정상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게 됩니다.
삶의 균형과 조화가 참으로 필요한 사회입니다. 권위에 대한 존중과 신뢰, 순명의 정신도 필요하고요. 하여 제가 자주 면담고백성사때 강조하는 것이 기도와 일의 균형입니다. ‘하늘과 산’ 그림이 있는 수도원 로고를 휴대폰에 붙여 주며 당부하곤 합니다. 아마 수도원을 다녀간 수천명이 휴대폰에 수도원 로고를 붙였을 것입니다.
“하늘은 기도를, 산은 일을 상징합니다. 하늘에 기도하고 땅에서 일하는 인간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분도 수도회의 모토입니다. 기도와 일이 균형잡힌 생활을 하고 로고를 볼 때 마다 하느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둘이니 ‘하느님’과 ‘죽음’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은 전인적 균형잡힌 삶을 위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기도와 일에 하나를 추가한다면 공부(독서)가 되겠습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공부할 때 온전한 균형잡힌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예수님은 참 철저했습니다. 앞서 복음 선포 활동차 파견됐던 열두 사도가 오늘 복음에서는 귀환하여 예수님 중심으로 모입니다. 마치 활동후의 관상처럼 자연스런 삶의 리듬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삶의 중심과 질서에 관상과 활동의 균형은 절대적입니다. 일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때로 휴식이 필요할 때 죄책감없이 '노no' 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중독에 빠진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일만이 아니라 도박, 술, 인터넷, 등 중독사회같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중독으로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판 이단은 ‘활동주의activism’라는 토마스 머튼의 말도 생각납니다.
선교활동후 외딴곳에서 관상의 성찰과 휴식, 충전의 기회를 갖게 하는 예수님의 배려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외딴 곳에서 아버지와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시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는 토마스 머튼의 말이 생각납니다. 하여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자작시의 다음 대목에 많은 이들이 공감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교회나 수도원은 물론이고 믿는 이들은 누구나 앞문의 활동과 뒷문의 관상이 균형잡힌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은 둘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니 둘이자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히브리서가 이를 입증합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의 ‘입술의 열매’와, 선행과 나눔, 일의 ‘삶의 열매’를 제물로 바칠 때 온전한 영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목적 리더십이 돋보입니다. 참으로 겸손히 예수님께 순종하는 제자들입니다. 히브리서 역시 사목적, 영적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권합니다.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순종의 덕이 으뜸입니다. 겸손히 개방하여 순종할 때 배웁니다. 비단 지도자뿐 아니라 주변의 부정적인 분들 또한 반면교사反面教师로 삼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전 어느 도반의 “나는 그분을 보면서, ‘아, 저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반대로 살아야 하겠다.” 말 또한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혜롭게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지요. 눈만 열리면 모두가 삶의 스승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일의 리듬이 절대는 아닙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예외적 상황에 대한 분별의 지혜가 긴요합니다. 외딴곳에서 관상적 휴식을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들같은 그들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합니다. 말 그대로 목자의 사랑입니다. 화답송 후렴의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는 때로 다음처럼 말마디를 바꿔 노래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부러울 것 없어라, 두려울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등입니다. 일단 관상적 휴식을 보류하시고 주변의 필요에 응하시는 착한 목자, 주님의 분별의 사랑과 지혜가 감동적입니다.
매일미사나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가 이상적입니다. 미사의 관상은 하루의 활동으로 확산되고 하루의 활동은 미사의 관상으로 수렴됩니다. 수렴과 확산의 리듬중에 이뤄지는 ‘삶의 전례화’, 관상적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이 균형잡힌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야생동물과 가축동물<마르코,6/30-3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주님은 많은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목적을 잃고 가야할 곳 있어야 할 곳을 분간 못하고 가짜여론이나 진실한 사랑으로 돌보지 못하는 무리가 되어 머리에 불똥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어디로 나라가 가도있는지도 모르고 위선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이리저리 흔들 거리며 정신 없이 살아갑니다. 이는 마치 야생동물들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감각적 증흥적 행동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먹고 마시고 뛰어 다니는 것과 같고 목자가 있는 양떼는 목자의 지시에 따라 물과 풀밭을 찾아 길를 딸아 움직이게 됩니다.
사람도 부모 없는 아이들은 버릇도 없고 예모도 없이 들의 망이지 모양 함부로 행동하고 이성적 행위를 못하고 공동체나 인간관계를 정의와 평화와 행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람은 지혜를 사용하면서 교육을 통하여 해야할 일 하지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고 이간에 주어진 권리아 의무를 찾아 실천하고 웃어른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우리고 실천하며 살지만 들은바 없고 행동의 요령을 모르면 무례하게 판단하고 이기적 생각이나 눈앞에 현실에만 집착하게 되어 행동은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저이고 사람 다운 행동을 잃어 버리고 살게 됩니다.
사람인 각자는 중요한 존재이며 그 생명은 귀하고 살아야 할 가치가 자신 안에 내재에 있습니다. 어제 우리 수도원의 원로이며 신학 박사이며 수도자들을 가르치고 성장 시킨 신부님이 저 앞에 와서 몇 번 산에서 심장 때문에 쓸어져 숨막이고 정신을 잃어 의사 선생님이 산을 오르지 말라고 하시였다 하시며 그런 시간 싹 죽음이 오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나는 인기를 누릴만하게 누렸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고 하느님의 일도 보람있게 하고 할만한 일을 다하고 있으니 죽어도 행복하게 맞이하겠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저도 그런데요 속으로 대답하고 그런데 저는 조금더 살아야 하겠습니다. 목지 없는 양들이 너무나 많이 수도원을 찾아오는데 그들의 삶의 방향을 잡아 주고 푸른 목장 인도하고 잃어버린 하느님을 찾아 주어야 하겠기에 더 살기위해 이런 쉬는 시간을 병원에서 가지고 오늘 퇴원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저에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살아나 걸어 나오라 하십니다. 저는 사제로써 목자로써 저애게 주어진 양들 위하여 목숨을 내여 놓고 그들을 영원한 행복의 길로 나가도록 기도하며 이끌도록 기도부탁합니다.
그게 인생의 묘미다.
최민석 신부님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날을 맞는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온전히 새로운 유일한 날이 내게 선물로 주어졌다. 살아있으므로 내가 맞이하는 날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순간이야말로 찬란한 순간이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새 날이라 함은 내가 만나는 사람, 그 사람이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요, 내가 하는 일이 어제의 그 일이 아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날이기에 늘 새로운 마음이 되고 새로운 시선이 되어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일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 새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게 열려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일이 다 새롭다.
아침에 눈을 뜨니 새로운 창조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다 똑같 일은 아니다. 오직 나에게만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주는 일이다. 내게 주어진 일이기에 지극정성을 다할 것이다. 이 일을 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절대적 시간이다. 그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게 온 영원한 지금이 바로 이 순간이다.
사랑의 현존 안에 머무는 시간은 부족함이 없다. 충만하다. 경계가 없는 자유의 시간이다. 내 인생의 이 시간. 지금, 나. 이 순간. 영원한 현제의 맛을 맛본다. 하느님의 현존을 누리는 기쁨이 순간이다. 그러기에 순간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인 시간이다. 텅 비어 있지만 충만한 시간이다.
문 밖을 나와 지금 나 고요한 순간을 맞는다. 걸어가는 내 발자국이 하느님의 발자국과 많이 포개져 걷는다. 나란히 함께 걷는 발자국이다. 그분은 늘 나와 함께 걷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오직 내가 나의 욕망으로 가득 차면 나는 내가 아니다. 그 때가 되면 나는 그 분을 모른 채 하거나 잊어버리거나 그 분을 재껴 버리려고 한다. 욕망은 늘 내가 경계해야 할 사자다. 경계하지 않으면 욕망의 사자에게 먹히고 만다.
어느 농부가 해마다 정원 한구석에 잡초처럼 피어나는 민들레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하자 한 현자가 “어떻게 하면 민들fp를 뽑아버릴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민들레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미움도 분노도, 그리하여 고통에 이르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버리고 싶다고 해서 곧장 버려지는 게 아니다.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미움도 분노도 필요하다고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슬기가 요구된다.
그 슬기는 내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 들어 있어야 가능하다. 내 마음 속에 미움과 증오가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어여쁜 꽃도 보기 싫고 미워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고통의 덩어리다. 그렇지만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살지 못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을 주고받아야 산다. 사랑을 주고받은 생명만이 또 다른 생명을 사랑할 수 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느 부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얼굴 중 눈만 사랑할 수 있지 않다. 얼굴 모두가 예쁘고 사랑스럽기에 눈이 더욱 빛나 보인다는 말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사랑 받을 수 있고 사랑 할 수 있어 살아있는 것이요, 살아있는 하느님이 그와 함께 현존하고 있는 현실이 살아있음이다.
선물로 주어진 오늘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하며 살 것이다. 내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만 있으면 그만이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 세상의 모든 삶이 다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내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누구의 인생보다도 나의 인생이 가장 먼저 고통스럽다.
정말이지. 오늘은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이다. 이 선물을 얼마나 거룩하게 여기고 쓰는가는 내 몫이다. 밑동이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에서도 새싹이 돋듯이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제비가 지난해에 지었던 집에 둥지를 틀지 않고 반드시 그 옆에 새 집을 지어 둥지를 틀듯이 내 인생도 어제 그 집이 아니라 온전히 새로운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살 일이다. 그게 인생의 묘미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히브 13, 21)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봄이 오는 길목에서 따뜻한 날과 추운 날이 반복 되고 있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 1독서 히브리서(히브 13, 15~17.20~21)에서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히브 13, 21)
참으로 좋은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온갖 좋은 것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셔서 우리가 그분의 뜻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이미 받았습니다. 생명과 건강과 가정과 부모의 도움으로 성장하고 교육 받고 또 성당에 나가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또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좋은 인간 관계를 맺으면서 또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능력을 이미 받은 것이지요.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혜와 재능을 잘 활용만 해도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미 받은 것을 가지고도 주님을 섬기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나의 좋은 마음, 친절한 미소, 남을 위한 배려, 또 내가 갖고 있는 신앙심, 지식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나눠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화목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모두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는데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품위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며, 그것을 내가 갖고 있는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혜로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는 것은 나의 욕심과 자만심과 교만심 그리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딱딱한 마음, 이기주의 등 이런 것들이 나의 선행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서 그것을 가지고 선행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갖고 있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나는 충분히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나의 생명, 건강, 나의 인간성, 인간 관계, 나의 교육, 나의 전문성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충분히 이웃 사람들에게,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복음 (마르 6, 30~34)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들이 당신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 6, 34)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100% 이상으로 나눠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선교 실습을 다녀와서 좀 쉬어야 될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또 찾아 왔기 때문에 쉴 틈도 없이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그들의 어려운 점을 함께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그 자체를 가지고도 우리는 나눌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을 은혜로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 나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은혜로 이웃 사람들에게 어떻게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고독과 연민
곽승룡 비오 신부님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마르6, 31)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고요를, 외로움은 격리된 감정을 느낀다. 수도자들은 외로움보다 고요함을 찾는 고독의 삶에 가깝다. 고독은 외로움도 분리도 아니다. 더구나 고립과도 다르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독은 잠시 군중을 떠나 머문다. 이는 다른 이들을 가깝게 만나기 위한 쉼을 말한다. 이처럼 고독하게 한적한 곳을 찾는 것은 자신과 그리고 타인과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곳은 대화 할 수 없다.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의 대화 같다고 할까.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고독한 삶을 사는 자는 결코 혼자 외롭지 않다. 하느님과 함께 떠나는 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자의 어원 monachos(eremita)에 ‘수행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그 뜻이 고독을 담는다. 이는 복된 고독, 오직 복됨을 말한다. 카르투시안 수도원의 문지방 위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고독의 행복을 느끼는 자만이 참 행복한 자다.”
“좀 쉬어라”(마르6,31)
쉰다는 것은 긴장 그리고 많은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특히 과다한 일에서 나와야 한다. 윤한덕 중앙응급의료 센터장을 진심으로 추모하며 명복을 빈다. 이제는 주님 안에서 편안한 안식을 하시도록 기도한다. 하지만 많은 이가 참으로 쉴 수 없는 구조다.
그러니 쉴 줄 모르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정말 쉬어야 하는데, 이렇게 매일 말씀을 적고 있지 않은가. 의사들이 충고한다. 탁 트인 바다의 제방에 않자 적어도 반시간 정도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라고... 생각을 멈추는 것이 정말 현대인들에게 요청된단다.
등산을 하러 두 명이 같이 떠났다. 그 후 한 명은 회복되었다. 그런데 다른 한명은 여전히 피곤하였다. 다음 날 치를 시험을 걱정했단다. 몸만 아니라 마음과 영도 마찬가지다. 정신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생각을 내려놓고 고요히 머무르기를 권한다. 하느님 자비의 바다에 집중하면서 쉬고, 고독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영적 휴식의 최고라고 영성가들은 말한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6, 34)
가엾은 마음이 연민compassion인데, “함께con 가엾은 마음passion이 든다”는 뜻이다. 바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되는 마음이다. 이처럼 연민은 아름다운 말인데,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 같이 괴로워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마치 나의 것으로 느끼도록 초대받는 것을 말한다. “중증환자 살리려는 열망으로 버텼다”던 윤한덕 중앙응급의료 센터장를 추모하는데 눈물이 난다. 고귀한 희생이 있어야 법을 손보겠다고 하는 현실이다. 윤 센터장이 평소에 느꼈던 응급환자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착한 사마리아법 제정으로 이뤄지길 촉구한다.
솔로비요프에 따르면, 이 연민은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연민을 가지시는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이란다. 연민은 종교생활을 하면서 느껴야 하는 첫 번째 마음이다.
'건강과 선행 나눔'(마르코 6장 30~34)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이들이 가엾어서 뭐라도 더 해주시고, 제자들에게는 일한 후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십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지속적으로 달리다보면 숨이 차오르니 멈춰서 쉬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십년전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검사후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수녀님 심장은 마티즈인데 그렌져같이 달리다 과부하가 걸렸다고‥ ~^^
이 표현이 마음이 팍 와 닿았습니다.
저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호흡과 발걸음을 천천히, 가볍게, 부드럽게 하는것부터 시작했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게 멈추고 만다는것도 알게 되었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게 무엇일까요?
첫째, 건강하게 주님의 뜻 이어가기
둘째, 선행과 나눔 실천하기
열심히 일한 당신?
김정일 신부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오는 군중이 얼마나 많았으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까지 하셨을까요. 그런데 사도들은 정말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지쳤던 걸까요? 오히려 성 베다는 이 대목에서 가르치는 이들의 노고와 배우는 이들의 열성이 빚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이 엿보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르코 복음해설』에서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설파했지요.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 말이에요. 오늘날 성직자를 비롯한 교회의 말씀 봉사자들은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라’는 말씀을 들을 만큼 열심히 강론을 준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있는지. 한편, 사도들을 찾아가던 당시 신자들의 열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말씀공부를 위해 스스로 몰려드는 신자들에 의해 지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청중과 수강자들을 모집하느라 지쳐 떨어지는 형국은 아닌지. 그리하여 성 베다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노고와 배우는 이들의 열성이 빚어낸 커다란 행복이 오늘날에도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며 예수님께 내가 한 일을 보고하고 그분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매일 일상에 바쁘다는 이유로 정신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내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 나누는 데이트를 하면서 산다면 하루하루가 더 풍성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분의 발치에 앉아 투정도 부려보고 칭찬도 들어 보고 하는 시간들 말이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가지지 못하는 위안과 평화가 함께 한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비둘기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비둘기의 특성을 이용해서 전쟁에서는 적의 상황을 파악하기도 했고,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서울 시청에 있는 비둘기에게 표시를 해서 남산, 강화도, 강남에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표시된 비둘기들은 모두 자기의 생활터전인 시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비둘기만의 내비게이션으로 정확하게 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40일간의 달라스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단내 성지에서 미사와 강의가 있습니다. 작년부터 인연을 맺은 성지순례 팀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제가 성소국에 있을 때, 신학교로 성지순례를 왔습니다. 제게 미사와 안내를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제주도 엠마오 연수를 갔을 때는 제주도로 성지순례를 오셨고, 제게 미사와 강의를 부탁하였습니다. 2019년을 시작하면서 다시 성지순례를 시작하신 분들이 제게 미사와 강의를 부탁하였습니다. 비둘기는 어디엘 갖다 놓아도 다시금 자기의 자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사제는 어디에 있어도 미사와 말씀 선포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초대해 주신 성지순례 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곳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예수님께서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죄인들이 있는 곳이어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면 예수님께서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 있는 곳이어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면 예수님께서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면 예수님께서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크고 화려한 집일지라도, 먹을 것이 풍부하고, 부족함이 없다할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곳은 사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고풍스러운 도시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곳은 사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아닐 것입니다. 사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함께하는 곳이 사제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귀소본능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루가 복음 15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잔치를 벌려주셨고, 반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렸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막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사도들의 피로와 흥분을 헤아리시고 쉼과 성찰의 시공간으로 보내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이 '외딴곳'은 기도하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평가와 지적이 아니라, 수고에 대한 치하와 휴식을 통한 배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배려는 선교사의 삶에서 사람을 섬기는 활동과 기도를 위한 고요와 잠심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활동과 관상의 조화는 하늘 나라의 일꾼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잠시 현장을 떠나 영육의 원기를 회복하려는 예수님 일행을 쫒아 군중이 달립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마르 6,33)
그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많은 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헉헉대며 뜁니다. 뜀박질은 어린 시절에나 하던 놀이였을 법한데 나이도 체면도 내려놓고 그저 달립니다. 일행이 탄 배를 놓칠세라 절절한 눈빛으로 좇으며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마음에는 희망과 바람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가르침과 치유, 위로가 절실했습니다. 그 염원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들은 배를 타고 떠났던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군중들의 이러한 절실함에서 모든 것을 이미 누리고 살면서 절실하지 않은 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니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십니다. 제자들의 쉼과 회복을 위한 계획을 잠시 미루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 겁니다.
이렇게 오늘 군중들처럼, "함께" 간절히 바라고 행동하고 청할 때 주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십니다. 그 진정성, 그 간절함이 주님 마음에 가 닿았기 때문이지요. 멀리 배 위에서 그들의 달리기를 보셨기에, 그 마음의 긴박함과 심장의 요동을 들으셨기에 짠~한 마음이 드셨을 겁니다. 그분 곁의 제자들은 스승의 인기와 명예에 짐짓 우쭐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그저 짠~한 마음으로 그들을 마주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짠~한 마음을 '연민' 혹은 '측은지심'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달립니다. 세속의 것을 얻기 위해서도 달리고 하느님의 것을 얻기 위해서도 달립니다. 각자 목표는 다를망정 목표를 향해 내쳐달리는 건 비슷합니다. 믿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온갖 좋은 것"입니다. 저마다의 삶과 지향, 은사에 따라 "좋은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온갖 좋은 것"의 목적은 단 하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 13,20-21) 달려 온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좋은 것"을 얻었을 것이고 잘 간직했다가 제 때에 하느님의 뜻, 그분 영광을 위해 합당히 내놓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영혼을 향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이 달리기가 먼저입니다. 우리 갈망이 그분을 향해 치닫기 전에, 이미 그분께서 우리를 향해 달리기를 시작하셨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향해 달려온 군중의 절실함에 마음을 바꾸셨듯이, 우리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신 하느님의 절실함에 마음을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도직을 수행하느라 힘드셨지요? 성과가 좋든 그렇지 않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열매는 하느님의 몫이니까요.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돌아온 벗님들에게 "애썼다.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십니다. 그냥 잠이나 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영육간의 휴식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또다른 더큰 파견을 준비하라는 뜻일 겁니다.
오늘 예수님의 파견을 받아 복음선포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휴식의 시간을 가진 후 하게 된 일은 바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봉사하는 일이었습니다.(마르 6,35-44)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사도직 안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말씀에 주리고 영적인 빵에 주린 절실한 영혼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배웁니다. 하늘 나라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활짝 열린 실재(마태 7,7 참조)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잘 쉬시고 주님과 함께 열심히 일하는 하늘 나라의 참 일꾼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참 가여운 사람과 참 행복한 사람, 그리고 참 목자이신 부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하고 돌아온 데다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려 지쳐있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피해가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간 그 외딴 곳까지 따라오는데 얼마나 서둘러 따라왔냐 하면 배로 온 주님보다 먼저 도착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집요하고 염치가 없는 군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염치가 없다고 하시지 않고 가엽게 여기십니다. 그렇다면 군중은 어떤 면에서 가여운 것입니까?
우리는 즉각 굶주림 때문에 가엽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배불리시잖습니까? 그런데 복음은 우리 생각과 달리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가엽답니다.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사망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측은지심이 일어나고, 도와줘야겠다는 마음도 생깁니다. 반면에 많이 가졌는데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나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술이나 먹고 삶을 포기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엽다기보다는 한심하다거나 심지어 밉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더 가여운 사람은 병들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많이 가졌는데도 욕심 부리는 사람이고 방황하는 사람입니다.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고 배불러도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조금 가져서 가여운 것이 아니라 많이 가져도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 가엽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가여운 것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이 가여운 것이지요.
제가 외국에 처음 나간 곳이 1987년 필리핀 정의평화 국제회의였습니다. 그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Smoky Mountain이란 곳을 방문하는 거였는데 쓰레기더미를 뒤져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러 간 것입니다.
둘러보는 중에 한 여인이 벌거벗은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그 더러운 쓰레기더미에서 바나나 하나를 주워 자기도 먹고 아기에게도 먹이는데 그것을 같이 본, 유럽에서 온 신부님이 ‘우리나라에는 개를 위한 상점도 있는데’하며 불쌍하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연민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은 저는 거부감이 들면서 속으로 ‘당신네 나라 사람들보다 이 아낙이 더 행복하다. 당신네 나라 자살률이 이곳 필리핀보다 훨씬 높지 않으냐?’하고 반박을 하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얘기한 것은 비딱한 심사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 아낙이 그런 곳에서 먹는 모습을 보인 것이 겸연쩍었는지 씩 웃는데 그 얼굴이 그야말로 평화 그 자체였고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이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얼굴이었지요.
이 여인의 그 평화로운 얼굴이 행복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행복이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만족의 문제라고.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면 불행하고, 반대로 아무리 없어도 행복할 줄 알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그러고 보니 저도 어렸을 때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고, 이 세상을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을 때 죽고 싶었지요. 그리고 시한부인 사람들이 그 고통에도 오히려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대사제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히브리서를 오늘로 끝내며 화답송은 아쉬울 것 없고 푸른 풀밭에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에 대해 노래하는데 주님께서는 진정 살 길, 행복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참 목자이심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진정한 믿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을
찾게 만듭니다.
연민은 우리를
사랑할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첫발걸음은
바로 연민입니다.
연민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갈 사람으로
보게됩니다.
생명에 필요한 것은
연민입니다.
연민의 마음이
우리의 이기심을
씻어줍니다.
약점과 아픔을
다시 건강하게
하는 것또한
연민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에서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생명의 길을
만나시길 기도드립니다.
연민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성숙된 믿음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제가 본당신부로 있을 때 보았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미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성당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있었던 한 아빠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자기 아들의 그림을 도와주더군요. 그 그림은 아주 멋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러 온 한 엄마가 그 그림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그린 그림을 번갈아서 보더군요. 자기 아들이 그린 그림은 알 수 없는 추상화처럼 보였지만, 옆의 그림은 정말로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갑내기 친구는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데, 자기 아들은 왜 이렇게 못 그릴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눈치를 챘는지 그 아빠는 자매님께 얼른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그림은 제 아들이 그린 것이 아니고요. 너무 형편없어서 제가 도와 준거에요.”
그 순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럼 그렇지. 내 아들이 그렇게 뒤쳐지는 것은 아니지.’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자신의 자녀가 다른 집 자녀보다 뒤쳐지는 것 같으면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또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고유한 재능과 능력이 있지요. 무엇이든 다 잘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보다 못하고 뒤쳐진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남보다 못하고 뒤처지면 뭐 어떻습니까?
남들과 비교하고 우위에 서려는 마음을 통해서는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비교하면 할수록 열등감과 함께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질투심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들과 비교하고 우위에 서려는 행동에 바빠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남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데 바쁘다면 어떨까요? 마음의 진정한 평화와 함께 참된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모범을 주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시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얼마나 바쁘면 밥 먹을 시간도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는데 그토록 바빴을까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서기 위해서 바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렵고 힘들어 하는 이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데 바빴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쁘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왜 바쁘십니까? 나를 위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바쁘다”를 외치는 것은 아닐까요? 그보다는 주님의 뜻을 위해,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바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폴 틸리히).
더불어 생명의 축제를 준비하는 외딴곳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가르치고 마귀를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고쳐준 뒤 돌아옵니다. 그들의 복음선포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습니다(6,31).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쉬려고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갑니다(6,31-32).
복음선포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안고 떠났던 제자들이 다시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세상을 떠나 외딴곳으로 가라’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의식을 새롭게 할 하느님 안에서 쉼의 시간, 곧 일종의 피정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먼저 배를 타고 떠난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육로로 달려간 많은 사람들이 외딴곳에 먼저 다다릅니다(6,33).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6,34). ‘목자 없는 양들’처럼 뿔뿔이 흩어진 군중을 한데 모아 일치시키려 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외딴곳’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외딴곳으로 보내신 것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광야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사실 군중들도 외딴곳으로 초대하신 것이었습니다.
다음 대목(6,35-44)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얻는 수고를 하라는 뜻으로 외딴곳으로 가라 하신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현세의 것 그 이상의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고자 인간의 탐욕과 불순한 눈길, 불평등과 불의 저편 ‘외딴곳’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라 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실 제자들과 함께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기대하는 신앙을 보여줄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께서 불신앙과 거리를 둔 외딴곳으로 군중을 불러내시어 생명의 빵을 먹이실 준비를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외딴곳은 불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예수님과 복음선포를 하고 지쳐 돌아온 제자들, 그리고 간절한 갈망을 지니고 ‘달려온’ 가엾은 군중이 함께하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곳은 쉼의 자리요, 하느님 안에 함께하는 공생의 자리이며,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빵’이 봉헌되는 축제의 자리입니다.
내 안에 그런 여백을 마련하고 있나요? 우리 만남은 그런 성사적 사랑의 만남이 되고 있나요? 이 사회는 그렇게 탐욕과 불의와 현세적 욕망을 비워냄으로써 오롯이 하느님과 함께 하고 그분의 뜻이 드러나는 ‘거룩한 외딴곳’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매순간을 ‘생명의 빵’을 준비하는 축제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주님, 저 외딴곳에서 생명의 빵을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당신의 그 간절한 사랑을 알아차리도록 잠에서 깨워주소서. 세상 물질과 욕망과 집착의 끈을 끊어버리고, 당신을 잊은 채 인간의 소리에 젖어 방황하는 저희를 생명의 축제가 벌어지는 ‘외딴곳’으로 불러주소서! 아멘.
아버지의 뜻을 새겨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 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낯설게 하기
윤경재 요셉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6,31)
쉼이란 단어는 휴식, 숨을 쉼, 하던 일을 멈추고 지내거나 그만두다 등의 뜻이 담겼습니다. 휴식이라는 한자 ‘休’와 ‘息’은 사람이 나무 그늘에 기대어(休), 숨을 코로부터(自) 몸 중심까지(心) 깊이 들이쉬는 것을 형상화 한 글자입니다. 일에 몰두하거나 힘에 부치는 일을 하면 숨이 가빠지게 되는 데 잠시 짬을 내어 가빠진 숨을 정상 상태로 돌려놓는 행위를 휴식이라 합니다.
또 휴식이라는 글자에는 ‘숨을 깊이 쉬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다.’는 뜻도 담겼습니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혹시 그동안 실수한 일이라든지 잘못된 방향으로 벗어난 것은 없는지 반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휴식을 통해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단계로 올라서게 되면 곧바로 창의력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쉼을 통해 반성에서 창의력까지 얻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을 시인들은 ‘낯설게 하기’라고 부릅니다. 늘 대하는 평범하고 일상의 시각에서 벗어나 어떤 대상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시를 짓는 첫 번째 단계라고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저녁노을> ... 윤경재
서향 마주친 창 너머
성당 십자가 위에 걸린 노을
선명히 붉은 포도주를 뿌린 듯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마른 목젖을 간질이고
언덕마루 넘어간다
두 번 다시
쳐들지 않을 것처럼 매달려
고개 떨구고 서 있는 침묵
빈 하늘 붉은색은
한 남자가 남기고 간
핏빛 우정의 기억으로
외롭지만은 않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일상을
새로 축복하고자
익숙해져 무심한 것과
짧지만은 않은 이별을
저 노을처럼
아쉬움 갖고 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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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고민은 다 짊어진 것 같던 어느 날 저녁노을이 제 눈에는 예수님 성혈로 보이더군요. 그날따라 혼자라는 외로움이 서럽게 올라와 제 눈이 불그스레 충혈 되었는데 하늘도 제 맘 안다는 듯 붉게 변하더군요. 성당 첨탑을 향하던 눈길이 멈추면서, 예수께서 나를 친구라고 여기시고 찾아주셨다는 감사함에 그동안 헝클어지고 어지럽혀진 제 일상을 떠나 보내버려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를 뜻하는 그리스어 ‘eremos’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복음서에서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며, 동시에 악마가 사는 곳을 지칭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무려 28회나 나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처음 나가신 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에서 악마와 세 차례나 조우하고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처음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쳐주며 악령을 물리치느냐 몸은 지쳐 비록 피곤하였지만, 마음에는 뿌듯한 심정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스승 예수께 자랑하듯 다 보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지친 사도들을 휴식도 시킬 겸, 자신들을 돌아볼 시간을 가져보라고 광야를 뜻하는 ‘eremos’로 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에 찌꺼기가 남을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아직은 사도들의 영성이 무르익지 않았기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성취하였다는 만족감이 솟아올라 자칫하다가는 교만에 빠질 우려가 있었습니다.
탁월한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자신의 진짜 능력을 알아채고, 부족한 점과 단점을 파악하여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청취할 아량이 생기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법을 휴식을 통해서 배우길 기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지금 우리와 달리 광야를 뜻하는 ‘eremos’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의 뜻을 쉽게 알아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광야에 나가서 하느님과 만났다는 역사적 교훈을 어려서부터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비운 자만이 광야의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쉼은 그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재미나 즐기며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는 오히려 더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의 뿌리인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을 하는 것이 쉼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하고픈 일이 많고, 또 무슨 일을 해도 되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강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가 줄어드니 역설적으로 그 많은 상차림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해야 좋을지 모르는 ‘선택 장애’를 겪습니다. 그러면서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웬만한 자극에는 흥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지루함을 금세 호소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현대인을 ‘피로감과 지루함’이란 이중 중독에 빠졌다고 진단합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에 발표된 2015년 인구편람에 따르면 10년 새 천주교 교우수가 무려 110만 명이나 줄어 인구대비 10.8%를 차지하던 비율이 7.9%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적어도 ‘피로감과 지루함’이 한 원인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휴테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김정운 명지대 교수는 ‘피로감과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처방을 3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단순한 것을 즐겨라. 둘째 마니아가 되어라. 셋째 감동을 주어라.
이제 천주교 교우들도 광야에 나가 악마와 부딪혀 보기도 하고, 그 실패와 승리 체험을 나누며, 성경 공부에 마니아가 되어 소그룹에서 우정을 나누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모여서 하는 성경 읽기, 묵상 나누기나 소그룹 취미활동 등이 활성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외딴 곳은로 가서 좀 쉬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세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주님임을 알리라”(탈출기 31,13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쉼’ 안에서 그분이 ‘주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게 됩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좀 푹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 앞에 돌아왔을 때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것은 등산을 할 때, 최종 목적지는 산 정상이 아니라 출발지였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알찬 결실을 맺는다하더라도, 그 생명은 뿌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듯이, 우리의 뿌리이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만이 저의 진정한 쉼이오니, 오늘 제가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서 쉬게 하소서!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군중들에게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여기시고, 마치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양들을 먼저 돌보십니다.
그들을 측은히 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은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던 것은 바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참된 진리이신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참된 목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의 양인가?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사도들의 수고와 배우는 사람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을 말한다. 사제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이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성당에 와서 성체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구원을 볼모로 사람들을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 얽매여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사와 제물 봉헌을 담당하는 직업적 사제들이 생기면서 된 탈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이 세상의 원리를 적용하여, 잘 지키면 상 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제물 봉헌에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우리 욕심의 원리를 적용하여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이 좋아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에 속한 분이었지만, 그분은 율사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눈먼 길잡이들”(23,16)이라고 그들을 혹평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율사와 사제들은 백성을 하느님에게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의 자녀로 살겠다는 신앙인은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살아있게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모두 죄인이라고 단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이들도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해 예수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는 마음입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기억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문서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한 결의(決意)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전도 활동 후, 예수님에게 보고합니다. 이제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기준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준해서 실천하고, 반성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근거로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은 시야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만 보이는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시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수고하며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11,28)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망과 성취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를 쉬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그분이 사랑하고 베푸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호세 11,1; 예레 3,19 참조). 예레미야 예언서는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고 말한 다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예레 23,4)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절을 가장 큰 축일로 기념한 것도 우리 중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해방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의 좁은 시야에 갇히면,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무서운 분입니다. 인간은 오로지 지키고,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얻어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혜롭게 행동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감사에 참여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의 업적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우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대들은 내 벗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요한 15,14-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할 일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고, 그들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깨닫고, 그 은혜로우심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사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재물 혹은 권력이 우리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보여서 그 욕심을 쫓다가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입신출세(立身出世) 하고,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매진하면서,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웃과의 유대를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그 유대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서(8,31-32)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느님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수양하지 않으면,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웁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속물근성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예수님에게서 참다운 자유를 배워 하느님의 진리를 살게 해 줍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은혜로운 사람이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유지합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최원석
예수님의 활동 패턴을 저가 성서상에서 보면 이런것 같아요..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지만 매일 매일 묵상하다보니 조금은 그분의 생활패턴을 볼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주님은 아침에 일찍일어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혹은 광야로 가십니다. 그리고 손을 얹으실수 있는 곳에 가시고 그리고 깊은 침묵속에서 하느님과 일치의 시간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활동하시고 활동에 들어가시기 전에는 또한 기도로 시작하시고 그리고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시면 또한 조용히 외딴 곳으로 가시어서 하느님과 일치의 시간을 가지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가시는 것 같아요 ..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외지에 나가서 선교활동을하고 온것 같습니다. 칭찬 혹은 술 밥 외식 이런것 보다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외딴 곳으로 가서 쉬어라 ..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외딴곳 .. 하느님께 신뢰의 공간이지요 ..나를 솔직히 있는 그데로 보이고 그분의 섭리를 마주하는 공간이 외딴 곳이라 말할수 있지요 ..그리고 있는 그데로의 나의 모습을 대면할수 있는 공간이 외딴 곳이지요 .. 제가 보기에는 주님은 우리에게 외딴 곳으로 가라고 하는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사람이 세상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일속에서 파묻혀서 영적인 자아의 모습을 못볼수 있습니다 항상 나의 영적인 자아의 모습을 볼수 있는 외딴곳을 찾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의 모습이 추하던 예쁘던 그것을 볼수 있는 공간이 외딴 곳이지요 그 있는 그데로의 모습을 주님에게 보이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는 공간이 외딴 곳이지요 .. 어딜 가던지 주님은 우리에게 여백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힘들때도 혹은 기쁠때도 혹은 슬프고 아프고 괴롭더라도 그 상황에 묻혀 있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그 상황은 상황이고 그 상황으로 인해 영적인 자아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외딴 곳으로 가서 주님을 만나야 되요 ..영적인 자아가 먼저 힐링이 되야 세상사가 점진적으로 해결이 되지요 ...
항상 주님에게 자신의 공간을 할애하는 내가되어야겠네요 아멘.
<외딴곳>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쉬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
외딴곳
왁자지껄 소음에서 벗어나
고요를 벗하여 쉬는 곳
고단한 일상에서 해방되어
날아갈듯 자유를 누리는 곳
모든 이와 떨어져 오직 홀로
하느님과 함께 마주하는 곳
언제라도 가고픈 곳
언제까지나 머물고픈 곳
외딴곳
많은 사람들이 한걸음에 달려가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다다른
외딴곳
갈 곳 없는 가엾은 이들
이리저리 쫓기다 닿은 곳
볼품없는 그저 그런 이들
잘난 시선 피해 달아난 곳
필요 없다 세상이 버린 이들
받아들인 한줌짜리 가려진 곳
언제라도 가야할 곳
언제까지나 머물러야 할 곳
외딴곳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창조에는
쉼의 시간또한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치열한 삶의 시간이
있었기에 외딴곳의
시간이 따사로이
다가옵니다.
일과 휴식은
서로를
필요로합니다.
모든 시간은
이와같이
연속선상에
놓여져 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사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딴곳의 고요입니다.
정직한
자기자신을
만나는 시간이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살면 살수록
하느님의 힘으로
재충전되는
쉼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됩니다.
쉼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쉼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쉼의 시간을 통해
나자신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외딴곳의
시간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은총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고요와 평화로
바꾸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이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모든 관계와
모든 일에는
쉼 또한 꼭 있어야 함을
잊지 않는 소중한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환대(歡待)의 성모 마리아. -환대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15.2.7일 성모영보수녀원 피정 3일째인 오늘 우리는 '평화의 모후 복되신 마리아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의 복음도 각별한 느낌입니다. 바로 성모영보수녀회 수녀님들의 좌우명과도 같은 성모영보대축일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은 제 66회 생일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통해 '환대의 성모님'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아름다움입니다. 환대의 하느님이자 환대의 성모님입니다. 환대의 하느님을 닮을 수록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환대의 성모님을 닮은 '환대의 성모영보수녀회 수녀님들'입니다.
귀국과 더불어 저는 지금 성모영보수녀회 수녀님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행복하게 피정지도하며 저도 피정을 합니다. 환대 받고 있음을 온몸과 온맘으로 느낍니다.
어제 미사중 체험이 새로웠습니다. 미사 중 입당시 얼떨결에 슬립퍼를 신지 않고 양말만 신은 채로 제대에 올라갔는데 참 잘했다 싶었고 기분도 나를 듯 했습니다. 순간 제대에서 저를 가슴 활짝 열고 환대해 주신 주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어 미사 중 수녀님들의 활짝 열린 환대의 얼굴들과 마음들이 제 마음을 활짝 열어줬습니다. 이렇게 어제처럼 웃음띈 얼굴로 미사시작하긴 처음입니다. 새삼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을, 동시에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아, 환대의 사랑, 환대의 아름다움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환대를 많이 체험할수록 환대의 사람, 평화의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성모마리아는 물론 성모영보수녀회 수녀님들입니다. 오늘 주님의 천사를 통해 주님을 환대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평소 주님의 환대를 깊이 체험했던 성모 마리아이심이 분명합니다. 성모님의 환대와 천사의 잉태고지의 수락을 통해 마침내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아니 한 번뿐이 아니라 매일의 미사를 통해 우리의 순종의 응답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새롭게 잉태되어 탄생하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겐 매일이 영적으로 성모영보대축일입니다.
주님은 사막같은 삶에 오아시스와 같은 연중피정을 통해, 또 사막같은 나날 오아시스와 같은 매일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환대의 성모님'을 찾아 오신 주님은 성모님이 얼마나 축복 받은 존재인지를 일깨우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아, 바로 주님을 닮은 환대의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환대 자체가 축복입니다. 사람 환대는 바로 주님 환대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제가 처방전 보속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린 구절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신뢰와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성모 마리아인지요!
막연한 환대가 아닙니다. 성모님의 환대를 통해 분명히 들어납니다. 성모님은 활짝 깨어 열려있는 침묵 중에 주님 천사의 말에 귀를 열고 듣습니다. 환대의 우선적 요소가 바로 침묵이자 들음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성모님의 관상(觀想)과 배려, 공감이 놀랍습니다. 이래야 원활한 소통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천사의 축복된 말씀에 몹시 놀라지만 곧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며 되새기는 성모마리아는 '관상의 대가'이자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성모님은 주님의 천사의 말을 고요히 경청, 공감, 배려하며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여기 수녀원에서도 이런 배려와 공감, 환대를 많이 체험합니다. 인터넷의 불통, 카톡의 불통으로 답답해 할 때 비비안나 비서수녀님은 즉시 제 마음을 헤아려 적극적으로 해결해 줬습니다. 양크리스티나 주방책임수녀님은 식사때마다 정갈하고 정성껏 식탁을 차려주었고 저는 이 식탁의 조화가 아름다워 카톡 사진을 찍은 후 전송하며 사랑하는 분들에게 음식 대접(?)도 했습니다. 이 또한 제 환대의 표현, 사랑의 표현입니다.아, 여기서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수도회의 장상을 비롯한 모든 책임자들은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 진정한 권위가 있습니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봉사하는 권위, 섬기는 권위, 심부름꾼의 권위입니다.
제가 볼 때 여기 총원장 요안나 수녀님, 비비안나 비서 수녀님, 또 피정집 주방 책임자 크리스티나 수녀님은 그대로 주님의 사랑의 심부름꾼입니다. 제 강론을 가톨릭 굿뉴스에 정성을 다해 올리는 김명준 명혁 다미아노 형제님 역시 말씀의 심부름꾼입니다. 예전 저희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도 아빠스로 선출되었을 때 일성이 '공동체의 심부름꾼 역할을 잘 하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니 정말 나라나 사회, 공동체의 지도자를 뽑을 때는 밝은 눈으로 진짜 주님과 형제들을 잘 섬길 수있는 심부름꾼을 뽑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교회나 수도회의 진짜 심부름꾼 지도자들은 모두가 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환대했고 형제들을 환대했으며 겸손히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며 심부름꾼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겸손과 섬김, 순종의 사람들을 대하면 저절로 감동, 감복하게 됩니다. 성모님의 환대의 절정은 다음 순종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느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 주님도 우리에게 순종하십니다. 일방적 순종이 아니라 상호순종입니다. 권위가 있다면 오직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권위가 있을 뿐이며,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만이 있을뿐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환대하시며, 우리 역시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을 환대하는, 환대와 환대가 만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은 성모 마리아처럼 당신을 환대하여 순종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한량없는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무 부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6개월 전에 올림픽 체조 경기장 대관 신청을 했습니다. 3개월 전에 제단의 디자인을 구상하였습니다. 서품자들과 면담을 했습니다. 본당에서 보내온 서품자들의 서류를 검토했습니다. 현수막 제작, 초대장 발송, 평화신문과 가톨릭 신문에 홍보 신청, 주차증 발송, 성소 후원회 봉사자 모임, 성가대 섭외, 전례연습, 신학생들 모임, 운전기사 사도회 섭외, 의무지원팀 섭외 등을 했습니다. 물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걱정도 되었지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기꺼이 봉사를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는 새 사제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 모두 순수한 마음으로 사제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맡겨진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에 많은 덧칠이 칠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쇄신, 정화, 속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시기를 기도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좋고 서로 사랑하는 것 보다는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다.’ 이제 곧 봄이 옵니다. 봄이 되면 많은 꽃들이 필 것입니다. 그런 꽃들 모두는 추운 겨울을 온 몸으로 견디어냈습니다. 눈의 무게에 가지들이 꺾이기도 했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꽃은 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삶도 그만큼 상처와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일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앞을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날입니다.’ 언젠가 들은 말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날들이 어떠신지요?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날인지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날들인지요? 물과 공기는 주변에 많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를 모르고 지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감사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것이 인생입니다. 나누면서 살기에도 빠듯한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망과 분노, 시기와 질투, 미움과 좌절로 하루를 채우면서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악의 세력에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 왜이래!’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제 생이 3달 정도 남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늘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늘 곁에 있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은 하루에 한번 전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은 식구들이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말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6,3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셨고 이제 제자들은 열심히 일하고나서 예수님께 돌아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질책도 하지 않으시고
"수고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하시네요.
오늘 마침 주말이네요.
한주간 동안 열심히 일하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지요?
"수고한 당신, 떠날 자격이 있다!"
어느 광고 카피 생각이 나네요.
주말에 그냥 집에 있지 말고 조용히 산책이나 가까운 곳 여행을 좀 다녀오세요.
귀찮다구요?
에이 나가봤자 돈만 쓴다구요?
예수님께서 수고한 여러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가서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를 한번 느껴보세요.
알았죠?
빵보다 귀한 가르침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오늘의 우리를 반성케 합니다. 목자는 목자대로 반성을 하게하고, 양들은 양들대로 반성을 하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군중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목자가 없습니까? 목자가 있었으되 목자다운 목자가 없었다는 뜻이며, 지금도 목자는 많지만 목자다운 목자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목자가 목자답지 않은 목자일까요? 먹일 생각은 않고 (양을 잡아) 먹을 생각만 하는 목자, 비위에 안 맞으면 양을 두들겨 패는 목자, 양을 잃어버리고도 ‘까짓것 한 마리!’하며 찾지 않는 목자, 몸에서 양 냄새는 나지 않고 향수 냄새만 나는 목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이런 얘기를 했지만 저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러분 안 계실 것이고, 주님께서 오늘 대한민국에 오셔서 목자 없는 양들을 보고 가엾다고 하실 때 ‘김 찬선 너만은 예외다’고 하실 리 없으시고, ‘너부터 목자답고, 너부터 잘해라!’고 하시겠지요. 그러니 제가 누구보다 뉘우치며 더 노력해야겠지요. 다음으로 양답지 양에 대해서도 반성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외딴 곳에서 쉬시려는 주님께 군중이 몰려드는데 주님을 성가시게 하면서까지 군중은 왜 그리 몰려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군중을 배불리시는 얘기의 앞 장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군중의 배를 채우시기 전에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군중을 가여워 하셨는데 배고픈 군중이 가여운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많은 군중이 가여웠던 겁니다. 사실이지 우리는 깨닫지 못한 것이 더 가엾다는 것을 모르고 먹을 거 없는 것이 더 가엾다고 생각하는 가여운 존재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배부른 소리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뭘 모르고 배불러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루 세 끼를 다 먹어본 적이 거의 없던 어린 시절을 살았기에 저는 배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서러운지 압니다. 그런데 나이를 조금 더 먹어 사춘기가 되면서 더 괴로운 것은 이 고통스런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고통이 있는지, 하느님은 선하시다고 하는데 왜 세상에 악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자살도 시도하고,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수도원에도 들어왔지만 10년 가까이 방황을 하다가 수도원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 방황의 기간 이 종교, 저 종교 기웃거리고 이 책, 저 책 뒤지다 마침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수도원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수도원이 아니라 오히려 밖에서 그 이유를 찾은 것인데 사실은 밖이 아니라 복음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는 있는 행복의 가르침이 마르코복음에는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빵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는데 주님께서는 아마 여기서 빵보다 더 귀한 이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고,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 곧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빵보다 주님의 가르침을 더 목말라 하는 양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창조적인 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들으시고는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6,32) 하고 말씀하신다.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을 찾으신 것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멈추어서' 내면을 하느님으로 채울 ‘영적인 여백’을 마련하도록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하셨을 것이다. 영성생활에서의 ‘쉼’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하느님께서는 이레째 되는 날 창조를 완성하시고, 당신의 창조업적 안에서 쉬시면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바라보시고 경험하시며 느끼신다. 하느님께서는 쉼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지 또다시 노동하시기 위해 휴식을 취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쉼을 통해 이레째 날을 축복하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게 하시고, 시간을 영원의 시간이 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당신의 얼굴 앞에 두시고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함께 살아가도록 하셨다. 창조의 완성은 쉼이며, 활동의 완성은 창조주 하느님과의 함께 있음이다. 창조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며, 우리가 멈춰 쉴 때 그분의 거룩함과 선이 드러나며 그분께서 함께하신다.
우리네 삶은 노동과 쉼, 활동과 휴일의 창조 리듬을 통해 창조주와 일치하여 생명력을 얻고 성숙하게 되며, 다른 피조물을 평화 속에 살도록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안식일은 자연과 자신안에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끼워 넣지 않고 그분의 손길에 맡기는 날이다. 그 결과 쉼의 날은 '창조의 축제'가 되고 인간은 이 날 거룩한 여유 속에 경이로운 눈으로 창조된 만물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된다. 자주 멈추어 인생피정을 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쉴새없이 움직이고 심지어 활동주의와 일중독에 빠지기도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몸과 감성작용과 생각을 멈추어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과 서로의 공동 관심사를 다시 보고, 서로를 인격적으로 진지하게 수용하는 '절대의 쉼'(안식)이 절실하다. 우리의 목표는 노동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휴식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소음이 멈추고 반성과 계획을 거듭하는 ‘생각을 멈추면’, 침묵하는 하느님의 현존, 고요 속에 다가오는 주님의 현존, 자신의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참된 바람 등 무심코 지나쳤던 소리를 감지하게 된다. 칼 라너는 이를 ‘침묵하는 신비’라고 하였다. 바로 이런 날이 영원하고 거룩한 안식의 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바로 이런 쉼을 가지라고 초대하신 것이다. 멈춤과 쉼 사이를 순례하는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고 참 자기를 만나기 위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점이다.
쉼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멈추는 것이다. 멈추어 서서 다시 하느님을 호흡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외딴곳까지 달려온 가엾은 군중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들을 사랑의 창조 안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처럼 사랑 때문에 멈출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영 안에 살아가는 이들은 멈추어 쉬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창조의 자리를 그분께 내어드려야 한다. 모든 일의 완성은 이 쉼에 있다. 오늘 하루라도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이나 이건 해야만 한다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창조의 숨결이 살아있는 침묵 가운데 고요히 머물러보자! 침묵 속에 잠겨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듣기 위하여 멈추어 쉬는 일을 무엇보다도 더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이다. 하느님 친히 일하시도록 자리를 비켜드리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넘침과 모자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시는
온유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를 가엾이 바라보시는
예수님 마음을 만납니다.
누구보다도 우리자신을
잘 아시는 그분의 사랑을
외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봉사할 수 있는 힘또한
휴식안에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휴식은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안에서
기쁘게 진정 내려놓는 것입니다.
휴식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조용히 우리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외딴곳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휴식없이는
마음또한
넓어질 수 없습니다.
휴식 없는 기쁨은
온전한 기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휴식과
건강한 연민을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외딴곳에서
우리 마음의 먼지를
먼저 씻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외딴곳에서
우리의 마음을 읽으며
예수님 마음과 결합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외딴곳 중심에 계시는
가장 좋으신
예수님 사랑을 만나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휴식과 연민, 기쁨은
예수님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중한 가치는
휴식을 통해 재발견됩니다.
정신과 육체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푹 쉬고 나면
많은 것들이 더욱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외딴 곳은
단절과 고립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자신을
이어주는 믿음의
연결고리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순수하게 확인하는
정체성의 시간입니다.
믿음의 영역에는
외딴 곳의 휴식을 통해
우리자신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외딴곳은 어디입니까?"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시간입니다.
바쁘기만 한 우리에게
생명의 숨결을 듣는
외딴곳의 시간을 주십니다.
우리의 시간은
외딴곳의 휴식을 통해
새롭게 탄생됩니다.
휴식은 멈추어져있던
우리가 생기를 찾아
다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외딴곳의 휴식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샘을
길어올리게 하십니다.
영혼을 돌보고
영혼을 사랑하는
영혼의 외딴곳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몸도 마음도 영혼도
쉬어주는 은총의 시간되십시오.
모든 것들과 함께
생명을 노래하는
기쁨은 외딴곳의 휴식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가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외딴곳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쁨과 휴식은
이렇듯 하나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의 한 내용이 생각납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청년이 서글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 이유를 물었지요. 그러자 이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 언덕에서 넘어졌는데, 여기에 세워진 팻말을 보니 한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산다고 적혀 있습니다. 3년 밖에 못산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 울고 있습니다.”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웃으면서 말씀하시지요.
“그까짓 거 뭘 그리 고민하는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30번만 더 넘어져봐.”
한번 넘어지는데 3년이면, 30번 넘어지면 어떻게 되지요? 자그마치 90년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 청년과 같은 생각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좌절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잘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마치 앞선 이야기처럼 더욱 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넘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에 더 큰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한 가지는 이러한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찐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았던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오늘 복음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전도 여행으로 인해서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지요. 복음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갔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육로로 먼저 달려와 있었지요. 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피곤한 상태에서도 쉬지 않으시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는 큰 사랑을 베푸십니다.
피곤하면 만사 제쳐놓고 쉬고 싶은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내가 피곤해 죽겠는데 누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간절하게 다가오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고,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서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을 절대로 그냥 내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힘들다고 무조건 포기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께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 다시 힘차게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늘 가엾이 바라보시고 지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한 사람과 그가 인생에서 원하는 것 사이에 있는 유일한 것은 시도하려는 의지와 가능하다는 믿음뿐이다(리처드 M. 디보스).
이제 너 자신을 돌보아라.
신명희 수녀님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들이 갖는 기쁨 중 하나는 도서선교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물론 본당으로 찾아가는 도서선교는 무거운 책 박스를 나르고 추위에 떨며 책을 전시하고 접는 수고로움도, 간혹 받게 되는 몰이해와 냉대의 어려움도 따릅니다. 하지만 직접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놀라운 하느님의 손길을 몸으로 접하는 기쁨은 다른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게 합니다. 그 기쁨의 체험은 우리 가슴을 새로운 열정으로 뛰게 하는 기적의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본당으로 도서선교를 다녀온 날은 흥분으로 온 공동체가 함께 들뜹니다. 서로 나누고 싶은 감동 실화도 많고 자랑하고 싶은 뿌듯함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파견을 받아 여러 지방으로 떠났던 사도들도 다시 예수님 곁으로 모였습니다.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모두 다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신이 났을지 얼마나 큰 벅참과 흥분이 서로를 감쌌을지 느껴집니다. 아마 방금 세워둔 지팡이를 고쳐 들고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뛰쳐나갈 듯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들썩였을 지도 모릅니다.
사도들과 같이 기뻐하며 모든 것을 다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한껏 고조된 분위기의 맥을 끊는 듯 보이는 말씀입니다. 사실 제 안에는 시작한 일에 열성의 불이 붙으면 그 열기를 몰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 그 열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라고 하십니다. 고요함 속에 머물며 너 자신을 돌보라고 권하십니다. 지친 몸을 다독이며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지금 누리는 기쁨과 열정을 있게 하신 근원을 깨달아 내면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근원에서 길어낸 힘으로 새롭게 나아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제는 인천교구 대신학생 학생들의 등록금 책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2012년 1학기를 다닐 신학생들이 등록금을 책정하고 납부하는 날인 것이지요. 이 신학생들을 보면서 벌써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방학했다고 인사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등록금을 납부하고 곧 개학이라며 신학교로 다시 돌아갈 날이 가까워져 온 것입니다.
문득 제가 학창시절, 방학을 시작하면서 했던 행동 하나가 떠올려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획표였습니다. 커다란 원을 하나 그린 다음에 시간을 표시하지요. 그리고 구체적인 하루 일과표를 만들었던 때를 떠오릅니다. 이 일과표는 초등학교 때에는 방학숙제로 제출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하루 일과표를 만들었지만, 이 일과표대로 살았던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하루도 지키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 지요.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그때의 일과표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쉼’의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부만 많이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공부하는 시간만 엄청나게 많이 배정을 했었고, 그 결과 단 하루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공부하다가 갑자기 그 시간이 되면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외가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정확하게 시간단위로 구분해서 계획을 세우니 당연히 실천과는 거리가 먼 쓸모없는 계획표를 만든 것입니다.
그때의 일과표를 떠올리면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깨닫습니다. 첫째는 쉼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앞으로만 달리는 기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역에서 쉬어야 하고, 또 때로는 정비의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획일화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외 역시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전교활동을 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사실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셨지요. 따라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 쉼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이로써 더 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쉼을 위해 외딴곳으로 제자들과 떠나시지요. 그런데 그곳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척이나 피곤하셨고, 정말로 쉼의 시간이 필요하셨습니다. 하지만 획일화된 마음이 아닌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가엾게 보시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들을 보며, 가장 일차적으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넓은 마음입니다. 고정관념을 갖고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주님의 마음으로 나의 이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주님을 닮는 것이며,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신앙인의 모습이지요.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가요? 너무나 속 좁은 마음으로 내 뜻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면, 당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로버트 하프).
의지력 키우기
지금 현재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담배를 배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담배를 끊기 바로 직전까지 저는 하루에 3갑 이상을 피우는 지독한 골초였지요. 이러한 제가 담배를 끊는 것을 보고 어떤 이는 “독하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담배를 끊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5년 정도 담배를 피우면서 끊겠다고 시도했던 적이 수차례였습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담배를 전혀 피우고 있지 않습니다. 그 전에 그렇게 많이 시도했어도 작심삼일로 끝난 적이 많았는데 어떻게 2002년에는 성공했을까요?
그 전에는 의지 없는 제 자신에 대해 늘 불만이 많았습니다. 저 역시 단 한 번이라도 강한 의지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실패했던 금연에 목표를 두었던 것이었지요. 결국 금연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부족하지만 의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의 단점 하나하나를 극복하는데 누구보다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담배 끊음으로 인해 단순히 건강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을 떠나, 마음속의 의지력도 키울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선 자신의 단점들을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단점 들 중에서 가장 극복하기 쉬운 것을 선택해서 실천해보세요. 하나를 성공했을 때, 다른 것들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분명 갖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칠순 넘은 할머니 한 분이 낡은 노트 한 권을 들고 유명한 작가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지요.
“이보게. 자네 같은 대작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여기 이 글을 쓴 아이가 작가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지 한번 봐 주지 않겠나?”
노트를 꼼꼼히 살펴보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이 글만 봐서는 작가로서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 않는 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할머니가 큰 소리로 웃었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 보니 자네도 엉터리로구먼, 30년 전 자네가 초등학교 때 썼던 글을 몰라보니 말일세.”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저는 타고난 재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꾸준한 노력과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평범을 초월하는 노력만이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워낙 대문호로 불렸기에 어렸을 적에 쓴 글에 이미 그의 재능이 비춰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에는 아직 재능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즉, 그의 모든 글들은 계속된 노력을 통해서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아주 적은 극소수 일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능력과 재주가 없다고 포기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그러한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노력’이라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주님께서 제일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이는 오늘 복음에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전교여행으로 너무나도 피곤한 상태,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시지요.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서 옵니다.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의 간절한 노력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재주가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닌, 어떠한 순간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굳센 의지와 포기하지 않는 노력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간직하는 자만이 제1독서에 나오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일까요?
밝은 성격은 가지고 있는 어떤 것 보다도 더 귀한 재산이다.(데일 카네기)
조금 밑진 듯 살자(‘행복한 동행’ 중에서)
가천의대 이성낙 전 총장이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재직할 때 일이다. 한 대학의 제의로 한국에 돌아왔는데, 고등학교 동기동창 몇몇이 마침 그 대학의 조교수로 있었다. 이 전 총장은 부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독일 대학에서의 교수 자격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2년 뒤에는 정교수 승급을 제안받았다. 하지만 그는 동기동창보다 빠른 승진은 과분하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해 동기생들이 모두 부교수로 승진했지만, 이 전 총장은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난 뒤에야 정교수 승진을 받아들였다.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구든 거절하기 힘들다. 게다가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승진할 수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 전 총장은 무슨 생각으로 승진을 사양한 것일까?
“그 일 때문인지 동기동창들과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작은 포기’가 있었기에 오늘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늘 조금은 ‘밑진 듯이 살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그가 가천의대 총장이 될 때도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고 판단하는 밑거름으로 삼았던 것은, 그의 밑지고 사는 태도였다. 단기적으로 볼 때 손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장기적으로는 신망이란 보답으로 더 크게 돌아온 것이다.
당장은 조금 ‘밑진 듯이’ 살더라도 먼저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혜다.
며칠 전, 급하게 어디를 갈 일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마음도 무척이나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호등은 저를 도와주지 않는지요? 계속해서 빨간 신호등에 걸려 서야만 했습니다. 신호가 바뀌어도 교차로에서의 막힘 현상으로 신호를 받지 못하고 다음 신호등을 기다리는 상황까지 놓이니 초조함과 함께 약간의 화도 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득 빨간 신호등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배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르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빨간 신호등에 잠깐 서서 쉼의 시간, 즉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쉼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내 앞 길이 파란 신호만을 받아서 쉴 새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만 되었다가는 큰 일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10년 전 볼링에 완전히 심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점점 볼링 점수가 높아지면서 재미를 많이 느끼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단 한 번의 실수로 퍼펙트를 아깝게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특히 점수가 높게 나와서, 몇 번 계속 치다보면 분명히 퍼펙트라는 것을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 10게임 이상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는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너무 무리해서 허리를 다친 것이지요.
이 날 역시 제 몸에서는 빨간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만 치라고 허리가 뻐근했었거든요. 하지만 퍼펙트라는 욕심에 그만 계속 쳤고 결국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세상에 파견했던 제자들이 나름대로 성공을 하고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신났나 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들도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회심을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께 보고하면서 무척이나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났겠지요. 이런 분위기를 타서 다시 다른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고, 놀라운 기적도 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계속 파란 신호를 받아 쉬지 않고 앞으로 가는 것보다는 잠시 멈추어 서서 기다릴 수 있는 빨간 신호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서두르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쁘게 살아오신 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 속에서 정신없이 살았다면 이제는 주님 안에서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러한 충전의 시간, 도약의 시간이 있어야 더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짜 행복의 대가는 아주 저렴한데도 우리는 행복의 모조품에 참으로 많은 대가를 지불한다.(발로)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자.
미국의 신경과학회 회원인 앤드리어스 바텔스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자기공명 영상장치로 촬영하였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뇌의 20여 곳에서 혈류량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뇌는 인체 활동의 총 지휘본부입니다. 그러므로 뇌에 부패한 정신이나 문화가 들어가면 사람의 행동이 파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보기 좋은 것, 듣기 좋은 것, 귀한 것들을 보고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나쁜 것, 퇴폐적인 것, 세속적인 것, 향락적인 것 등을 자꾸 접하면 뇌가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이 생명수로 들어가면 회복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킵시다.
한 성악가가 있었습니다. 그 성악가는 너무나 악보대로 잘 부르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 있었지요. 그래서 웬만한 음악회에는 빠지질 않았습니다.
오늘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민 음악회에 출연을 교섭 받아 나가게 되었습니다. 작곡가도 이 성악가에게 줄 노래를 최선을 다하여 만들어 주었지요. 이 성악가는 워낙 잘 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습도 필요 없었습니다.
드디어 이 성악가의 순서가 되자 성악가는 악보를 받아들고 무대로 나갔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고, 성악가의 노래가 시작되자 성악가는 악보를 받아 들고 무대로 나갔지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악가의 노래가 시작되자 사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지 얼마쯤 되었을까요? 성악가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글쎄 악보에 쉼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숨표가 없어 숨을 못 쉬니 쓰러질 수밖에 없겠지요.
유명한 자동차의 왕이라 불리는 포드는 일과 쉼에 대해,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쉴 줄만 알고 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터가 없는 자동차처럼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한 바 있지요.
이렇듯 쉰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다음 시간을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일하는 것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일과 쉼 그리고 노동과 휴식의 적절한 안배와 조화를 갖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것이지요.
먼저, 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시작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께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해 보고를 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열심히 일 한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처럼 신앙인들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쉼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쉼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만 누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세상의 무거운 짐과 스스로 벗기 어려운 멍에를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은 주님 품 안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그 쉼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더욱 더 힘들어 할 뿐입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 지금 나는 과연 주님 안에서 쉬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렇게 힘들어하는 우리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제는 세상 안에서 해답을 찾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 법이다. 나이가 많아 죽을지라도 젊어서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피네로)
1억원이 든 돈가방(‘좋은 글’ 중에서)
두 친구가 만났습니다. 그들은 무척 가난했지만 성실한 친구들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장난식으로 물었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1억 원이 든 돈가방을 분실해 울고 있는 사람이 나오더라고. 그 가방을 주우면 참 좋겠지?"
그런데 그 친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네가 그 가방을 주은 거야. 그리고 그 가방을 열어 보니 1억 원이라는 돈이 있는 거야?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니 그 돈으로 너는 부자가 되는 거야? 정말 신나지 않겠니?"
그 친구는 짧게 말했습니다.
"하나도 신나지 않을 걸세."
"뭐라고? 아무도 보지 않았고, 네가 그 돈을 주웠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 친구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런 제안을 했던 친구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야, 아무도 모르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잖아."
일과 놀이
오상선 신부님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를 출간한 춮판사의 이름이 <일과 놀이>이다.
첨에 이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과 놀이라니???
그러나 이 제목이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휴식에서 비롯된 우리말다운 표현임을 알게 되면서 정말 멋진 표현이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현대인은 갈수록 일과 놀이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요즘 거세지고 있는 주5일 근무제에 대한 요구도 일과 놀이간의 조화가 윤택한 인생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도 보인다.
오늘날 가정문제 또한 직장생활과 가정공동체의 생활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그리고 학생들의 교육문제 또한 입시준비에만 치우쳐 있음으로 인성교육의 장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데서 오는 단순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평신도들은 가정생활, 사회생활의 고단함 때문에 기도생활과 애덕생활이 영적인 쉼의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단순한 악세사리로 전락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도자들 또한 사도직 생활이 주는 압박 때문에 내적생활, 기도생활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자꾸만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직자들 또한 사목활동과 그에 따르는 부차적인 일들 때문에 영적인 휴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착한 목자로서, 영혼의 아버지로서의 이미지가 자꾸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혜출중한 왕 솔로몬은 하느님께 부귀영화와 재물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청한다.
지혜는 들을 줄 아는 자세를 뜻한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청하였다.
이는 솔로몬이 얼마나 일(행정, 업무 등)에도 불구하고 늘 명상과 사색의 사람이었나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이다.
늘 사람들 사이에서 일에 매달리셔야 했지만 늘 쉼의 여백을 가지신 분이시다.
쉼 때문에 일을 마다하며 뿌리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일 때문에 쉼을 소홀히 하시지도 않으셨다.
나는 어떠한가?
<주님으로부터 일하는 은총을 받은 형제들은 충실하게 또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을 이 정신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이 권고말씀을 오늘 다시 묵상해보자.
기도를 넘어서
전삼용 요셉 신부님
며칠 전에 작년 제가 추천서를 써준 수녀원 입회한 자매가 휴가를 나왔습니다. 저의 첫 딸이니만큼 잊지 않고 기도해주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은 자신이 가는 것이기에 수녀원 들어가서 어떻게 살라고 이것저것 말을 많이 해 주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기도에 맛을 들여라.’였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잘 배워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인 기도가 휴식과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와 일이 되어버린다면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녀원에서 의무로 해야 하는 성체조배 시간이 한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잠깐 혼자 성체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함께 성체조배 하는 시간보다 더 좋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애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는 것보다는 단 둘이 만나는 것이 더 행복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복음전파를 마치고 예수님께로 다시 모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시며 배를 타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함께 떠나십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도 도시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막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도시에 머물지 않고 왜 자꾸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으로 돌아가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지요.”
성인에게는 사막이 바로 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친밀히 만나는 것은 힘들어집니다. 정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딴곳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데려가신 이유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서 사도들이 당신과만 머물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다시 힘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만 있는 것을 보고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께 동생도 좀 일을 하라고 말씀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외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머물 줄 아는 영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가 떠나는 것을 보고는 육로를 통하여 배가 도착할 곳에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좀 쉬려고 했던 사도들은 실망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아서 당신이 직접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가서 사도들과만 함께 머물며 그들에게 휴식을 주시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기도로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양들이 원하면 그 기도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보다 더 큰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저도 본당에서 힘들게 일하다 잠깐 시간 내어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와서 면담이나 고해성사를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나가기 싫습니다.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조금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박차고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기도보다는 항상 사랑의 실천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자신의 수도원에서 성체 앞에만 앉아있는 수녀님이 있었는데 그 수녀가 성당에만 앉아있는 것을 보면 불러서 일부러 다른 일을 시키곤 하였습니다. 휴식에만 푹 빠져있어 일을 하려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영적 게으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선 시간 있을 때면 외딴곳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을 휴식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은, 기도 중에 혹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 달콤한 기도도 포기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도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오늘의 히브리서는 히브리서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마지막 당부를 하며 축복을 빌어주는 부분입니다.
먼저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께 찬양 제사를 바치라고 당부하는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 제사는 다른 것이 아니고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애기합니다.
이는 마치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너희 서로 우애하며 사는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많은 가정이 제사 때 모이기만 하면 싸움박질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같이 기리고 나누지 않고 부모의 재산을 더 가지려 시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결국 사랑은 남기지 못하고 재산만 남긴 셈이고 부모의 일생은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처럼 당신을 바치심으로써 대사제와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여주셨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도 실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어서 축복을 빌어줍니다.
축복은 바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당부가 상대에 대한 바람을 상대에게 직접 표현하는 것이라면 축복은 상대에 대한 바람을 하느님께 표현하면서 다른 한 편 상대에게는 합당한 축복의 수혜자가 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먼저 축복을 주신 하느님을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대한 목자를 양들인 우리에게 주셨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끌어올리심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런 다음 과거 이렇게 해주신 분이 앞으로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기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세 가지를 청하지만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련해달라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두 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되는, 그런 우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우리에게는 내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이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한탄하듯 하느님 뜻대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또 다른 내가 내 원하는 대로 하고 맙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해주시지 않으면 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나이지만 그러할 수 있는 내가 되지 못하면 하느님 뜻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불쌍한 우리로 하여금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항상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에 불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외딴곳의 역동성
이은주 수녀님
피정을 위해 익숙한 곳을 떠나 세상과 분리되어 별도의 공간에 홀로 머물러야 할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특별한 시기를 마련하시는 것은 당신과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초대다. 이 때에는 내적 침묵과, 외적 단출함이 필요하다. 영혼과 육신이 고요해지고 단순함에 젖어들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에너지가 온몸을 차지한다. 그 힘은 어떤 도전에도 굴하지 않는 자존감과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끌어올린다. 나는 이것을 ‘침묵의 역동성’, ‘외딴곳의 역동성’이라고 부른다.
일상을 떠나 피정 집으로 들어오는 환한 얼굴의 형제자매들을 볼 때는 더욱더 확연히 하느님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하느님의 음성만을 들으려는 올곧은 내적 눈이 뜨이면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간다. 기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누러 올 때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재창조되는 것에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자신 안에 내재된 죄의 속성, 자신을 혼란으로 몰고 간 상황,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아픔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 안에서 의미를 되찾는다. 그리고 이런 정화의 시기를 거치면 기쁨이 찾아온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나 평화와는 다르다. 마치 정화된 물처럼 맑고 깨끗하여 고요하고 은근한 평화가 침묵 안으로 잦아들어 들뜨지 않는다. 그 모습만 바라보아도 마음이 흐뭇해지며 외딴곳으로 초대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역동적인 창조의 힘을 느끼게 된다.
전연동 신부님
꽃을 심어야 꽃밭에 여백이 생긴다고 합니다.
화선지에 점을 하나 찍어야 나머지가 여백으로 남는답니다.
짬짬이 시간을 내어 대자연의 화선지에 꽃도 심고 점도 찍어야 삶의 여백이 생겨납니다.
영혼의 여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바쁜 일상, 기도로 영혼의 화단에 꽃을 심어보고, 성체로 영적인 화선지에 점 찍어 보면, 영혼에 여백이 남습니다.
영혼의 여백에 비로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쁜 일상, 조급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머무는 외딴 곳, 영혼의 여백을 만드는 바로 그 외딴 곳이라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영혼에 하느님을 위한 작은 여백이라도 만드시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강지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지난 목요일 복음 이였던 마르코 복음 6장 13절 이후에 이어지는 복음 내용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쫒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고 곳곳으로 파견되어 떠나갔던 제자들이 주님의 사명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이 후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과 행 한 모든 활동들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모두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즉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해주었으며,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쁨을 전해 준 일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는 은총과 평화와 사랑을 주님을 대신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서 한 주 된 일이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묵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사목을 제자인 우리들과 함께 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을 당신의 벗으로, 당신의 협력자로,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과 사랑을 당신의 제자인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역할과 몫을 충실히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전해 주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마태오 복음14장 13절 이하의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안에서 분명하게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저녁 무렵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며 난색을 표현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주님이 주신 그 빵을 받아서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의 빵과 물고기를 당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시켜서 제자들이 당신을 대신하여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당신 친히 몸소 당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직접 전해주시면서도 동시에 그 능력과 권한을 제자들에게도 주시어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당신의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과 “더불어 함께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사랑의 전달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나부터 먼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수 많은 은혜와 사랑을 이제는 내가 주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진리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인 나부터 먼저 전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외롭고 아프고 힘들어 하고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내가 주님을 대신하여 손을 잡아 주어야 되고 주님을 대신하여 어깨를 내밀어 주어야 하고 주님을 대신하여 안아 주고 함께 웃고 울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되는 선교 사명인 것입니다.
어제 새벽, 너무나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봉성체, 미사, 성시간, 새영세자 첫 고백…….
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봉성체를 하게 되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많이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마다 하는 수영을 포기하고, 체력 보강을 위해서 그 시간에 잠을 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녁에 있을 성시간 자료를 살펴 본 뒤, 저는 취침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잠들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립니다. 조금 화가 났습니다. ‘왜 이 순간에 전화가 오는 거야?’ 전화를 받아보니 별 내용의 전화도 아닙니다. 성당에서 가장 많이 받는 내용……. “오늘 미사 시간이 어떻게 되지요?”였습니다.
전화 통화 후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잠시 뒤, 이번에는 전화 인터폰 소리가 들립니다. 사무장님이십니다.
“신부님, 세콤 설치를 해야 하는데 지금 해도 되겠습니까?”
지난 번, 성당에 도둑이 들어온 뒤 며칠 전부터 성당 무인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었거든요. 어제가 사제관에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는 날이라서 지금부터 설치를 해도 되겠냐는 것이지요. 또 화가 났습니다. 조금 쉬려고 매일 아침마다 가는 수영도 포기했는데…….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사제관의 경비 시스템 공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였습니다. 더군다나 침실은 모두 끝났으니, 그곳에서 쉬어도 된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었습니다. 막 잠들려는 순간, 드릴로 벽을 뚫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멈추고 잠들려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립니다. 내용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오늘 미사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입니다.
결국 잠시도 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운이 없냐고…….
어제 저녁 묵상 때, 문득 하루의 일과가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운이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감사하고 은혜로운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잠을 잘 수 없었던 순간의 시간만을 바라보면서 하루 전체가 운이 없었다고 단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쁜 한 일면만을 가지고 전부가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것……. 반대로 좋은 한 일면만을 가지고도 전부를 좋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것만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십니다. 사실 연일되는 복음전파로 인해서 많이 피곤하셨지요. 그래서 성서에서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군중을 보고서 짜증이 날만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지요. 오히려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고서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서 애쓰십니다.
바로 한 일면을 보고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큰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 역시 변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짜증내지 맙시다.
재능을 발견하다('행복한 동행' 중에서)
밤늦은 시간, 한 젊은 남자가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 술 취한 단골 한 명이 다가와 다짜고짜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 클럽의 정규 회원으로 중요한 고객이었다.
"나는 피아노 연주만 들으러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연주와 함께 노래를 듣고 싶어. 노래를 불러 줘."
"손님, 죄송합니다. 저는 가수가 아니라 피아노 연주가입니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날 다시 오셔서 노래를 들으세요."
"뭐야, 노래를 못 부르겠다고? 지배인 오라고 해. 오늘 내가 노래를 듣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어."
술 취한 남자가 막무가내로 덤벼들자 젊은 피아니스트는 마음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가 시작되자 시끌벅적하던 클럽은 금세 조용해졌고 모든 사람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노래가 끝나자 클럽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후 단골 고객은 자주 찾아와 노래를 신청하곤 했다.
그의 노래 실력은 클럽을 드나드는 손님들을 통해 퍼져 나갔고 얼마 뒤 데카 레코드사의 직원이 클럽에 찾아와 그에게 음반 제작을 제안했다. 그는 '모나리자', '투 영' 등의 힛트시킨 냇 킹 콜이다. 화를 내며 술 취한 손님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냇 킹 콜은 여유 있게 상황에 대처했고 그로 인해 내면에 잠재하던 자신의 재능에 눈뜰 수 있었다.
목자의 동반자
이정호 신부님
수도원에 피정오시는 분들이 꽤 계십니다. 본당 단체나 신심단체의 회원들이 교육이나 영혼의 쇄신을 위해서 조용한 수도원을 찾아 피정을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강의 후에 자신들의 삶을 나누기 위해 소모임으로 나누어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모임을 주재하는 분과 발표할 분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서로들 피하고 싶어하고 미루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정작 발표할 때 보면 너무나 조리 있게 잘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장서고 싶지 않고 주목받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목자없는 양들 같지 않은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끌림을 받는 양이 되기는 쉽습니다. 오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앞장서 가는 목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와 성사생활을 통해서, 교육과 피정을 통해서 사랑의 책임을 나누어 지는 목자의 동반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어요.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붙이라고 지시했던 것이에요.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는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어요.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제목의 보잘것없는 그림이었습니다.
뜻밖에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이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별로 알려진 화가의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합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는 것이었어요.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름 있는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름 없는 화가의 작품 따위는 관심조차 없었지요.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에게 그 모든 작품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즉,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의 그림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 이것처럼 어려운 것이 있을까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요. 그래서 외딴곳으로 쉬러 가십니다. 그런데 그곳으로도 사람들이 따라옵니다. 짜증이 날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시고 행동하시지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 사람의 입장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까요?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은 도통 모르겠다고 힘 있게 말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내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더 많은 물을 퍼 올리기 위해서는('좋은 글' 중에서)
미국 '아마고사’라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작은 길이 있는데, 이 길을 가다보면 중간쯤에 물 펌프가 하나 서 있습니다. 이 펌프의 손잡이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가 담겨진 깡통이 하나 매달려 있다고 합니다.
“이 펌프 옆의 흰 바위 밑에는 물이 가득 담긴 큰 병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햇볕에 증발치 않도록 마개를 잘 막았지요. 그 병의 물을 펌프에 모두 붓고 펌프질을 하십시오. 당신은 갈증 해소는 물론 씻을 수 있는 물도 충분하게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충분히 물을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다음 사람을 위해서 그 병에 물을 가득 채워 마개를 꼭 막아 처음 있던 대로 모래 속에 묻어 두십시오.
추신 : 병의 물을 먼저 마셔버리면 안 됩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글을 믿지 못하거나 또는 너무 급한 마음에 병에 든 물을 마셔 버린다면 잠시 목을 축일 수는 있겠지만 충분한 물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곧 고통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쉬어라.
윤인규 신부님
제자들은 화려하고도 초라한 세상, 행복하고도 불행한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눈에 세상은 예전 같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도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가난하다고 착하지도 않고, 지체가 隻鳴?거룩하지도 않은 세상이었다.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 6,17-29)에 대한 보도에 이어 나오는 제자들의 활동 보고(마르 6,30), 그리고 돌보는 이 없이 굶주리는 이들(마르 6,35-44)의 이야기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순과 딜레마에 빠진 세상과 제자들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스승께서 보시기에 제자들은 지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나무는 쉬면 나이를 먹는다. 나이테는 묵은 시간과 새로운 시간을 구분 짓는 금이다. 쉬었다는 것은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나이테가 없는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하고 켜도 무늬가 없어 아름답지 않다. 쉼은 시간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쉼은 과거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영혼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삶을 하느님 것으로 숙성시킨다. 하느님께서도 6일 동안의 창조를 완성하시고 쉬셨다. 세상을 보고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서 좀 쉬라’고 말씀하신다. 끝은, 아니 완성은 외딸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쉬는 것이다.
차성현 신부님
오늘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사람도 가엾고 저 사람도 가엾고 온통 그 마음 뿐입니다.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고 복음을 전한 후 돌아온 제자들이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습니다. 여행 길의 제자들이 고생하며 힘들었을 터인데 돌아와서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밥 먹을 겨를 조차 없습니다. 수고한 제자들이 너무 가여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도 참 대단합니다. 불붙은 그 열정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온 동네에서 떼거리로 몰려와 먼저 와서 기다립니다. 갑자기 예수님의 마음이 또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찹니다. 그래서 직접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도 가엾고 또 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제자들도 가엾고 사람들만 보면 온통 그 가엾은 마음 뿐 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보시고도 예수님께서 그 가엾은 마음을 가져 주셨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가졌던 그 열정도 또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그 열심도 모두가 다 부족할 뿐입니다. 부족함만으로도 부끄러운데 눈에 딱 들어오는 한 글자가 부끄러운 우리를 더 얄밉게 만들어버립니다. '가서 좀 쉬어라'
며칠 전 신문에 '휴가 위해 일하는 직원들'이란 제목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회사 사람들의 우선 순위는 '일' 이 아니라 '놀기' 였습니다. 무슨 회사가 일을 먼저 해야지 놀기를 어떻게 먼저 합니까?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도 그 회사는 직원의 반인 12명이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일보다 놀기를 우선으로 하는 회사, 정말 다니고 싶은 회사이지 않습니까? 그 회사 대표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에 치이면 결코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업무의 우선 순위는 당연히 놀기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너무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놀기'라면 우리 신부들도 결코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놀기'라고 부르기 보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처럼 '휴식'이라고 즐겨 부릅니다. 우리들처럼 자유롭게 휴식을 누리면서 사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대개 월요일에 우리 신부들은 휴식의 시간을 가집니다. 무엇이나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산으로 바다로 운동이며 등산 혹은 낚시를 즐기기도 하고 다양한 문화생활도 함께 즐깁니다. 때론 쿡 쳐박혀 실컷 잠을 자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휴식을 취합니다. 이렇게 하루의 휴식을 만족하게 보내고 나면 나머지 일주일도 행복하게 지나갑니다.
지난번 언젠가 한번은 월요일 휴식을 잘 계획해서 떠났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별로 상쾌하지 못하게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먼 길을 달려와 고속도로 통행료를 낼 때 였습니다. 아가씨 같은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제 차 번호랑 자기 차 번호가 똑 같다고 했습니다. 잠깐이지만 처음으로 그런 순간에 너무도 친절한 인사를 받았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낌이 남 달랐습니다. 처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말 몇 마디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보통 때와 달리 전혀 아깝지 않은 통행료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평화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세웠던 계획보다 한마디 말이 더 큰 휴식이었습니다. '가서 좀 쉬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릅니다. 제자들도 아마 예수님의 이 말 한마디에 피로가 한꺼번에 다 풀렸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 휴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보다 놀기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가 훌륭한 회사로 성장하듯이, 휴식 가운데서도 주님의 평화를 맛볼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더 행복한 신앙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휴식 같은 말을 정말 더 자주 많이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고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한마디 말로 하느님의 평화를 느꼈는데, 하물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것을 아낄 수가 있겠습니까? 아멘.
측은지심
김 미카엘 부제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자신만의 싹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무한하게 넓어지고 채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仁)의 싹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측은지심입니다.
바로 예수님 마음입니다.
성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이것저것 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 상대를 보며 자신이 가슴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바쁜 일상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십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하느님을 향해 정진하는 것 못지않게 휴식과 긴장 해소와 여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바쁨과 여유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인생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됩니다.
자연이 보이고, 주변 사람들이 보이고,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 보입니다.
휴식은 이렇게 우리를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으로 초대합니다.........
어제 저녁 인터넷 방송이 끝날 때 쯤 전화가 왔습니다. 강화 지역에 있는 후배 신부로부터의 전화였습니다. 강화 지역의 젊은 신부들이 지금 모여서 술 한 잔 나누며 이야기하려 한다고 저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전화였지요. 저는 이야기했습니다.
“나 잠자는 시간 알잖아? 나 잠시 뒤에 잘꺼야. 지금 눈이 거의 감겼다.”
전화를 끊은 뒤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아마도 저는 그곳에 가면 술 한 잔 하지 못하고 올 것이고, 더군다나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봐야 서로에게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잠자러 신부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오늘 새벽 2시. 저는 평소와 비슷하게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복음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서 성서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부끄러운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이런 말씀을 다 하셨을까요? 하긴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떳떳하게 쉴 수 있는 안식일조차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병자를 고쳐주시고 소외받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따라서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순간도 쉴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지금 자기 몸이 불편한 사람이 시간을 따지면서 오겠습니까? 지금 내가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께서 피곤하실테니 내일 낮 시간 한가할 때 가야지.’라면서 의사 선생님을 배려해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지요. 아픈 사람의 기준은 항상 자신입니다. 자신이 아파 죽겠는데 누구를 배려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100% 치유를 해주시는 것은 물론,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십니다. 단지 ‘저분께서는 내 병을 분명히 낫게 해주실 것이다’라는 강한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너무나도 피곤으로 지친 상황에 처해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좀 쉬자."
하지만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육로로 앞질러 예수님께서 가실 곳에 가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무나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본 예수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어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가르침을 계속해서 주십니다.
바로 이 부분을 보면서, 내 자신만을 생각했던 모습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또 꾸벅꾸벅 졸 것이라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미리 성급하게 판단을 내렸던 것이지요. 그 후배 신부에게 지금 제가 정말로 필요할 수도 있었는데, 저는 그 기회를 박탈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자신의 피곤함을 이유로 오는 사람들을 막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사랑의 모습을 기억하고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맙시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랑입니다(이용채)
아름다운 것은 모두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것은 모두 사랑하고 찾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것이겠지요.
오래 전 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었지요.
사랑을 하게 되면 갖고 싶은 게 나의 마음인가요.
아무튼 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랑 때문이라 생각했지요.
나는 세상에서 그 사람보다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보다 소중함을 또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며,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쯤 만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소중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렇듯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게 합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마음으로 보십시오.
그곳에 아름다운 사람 하나 당신을 기다립니다.
† 사단(四端)의 마음씨 †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견된 제자들의 복귀와 활동 보고,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목요일 복음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견한 사실을 들었고, 어제 복음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기록을 접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능력을 주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도록 아주 엄중한 여장규칙과 함께 파견하였고, 파견된 제자들은 실제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동안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과거기사를 들추어 보도하였다. 이는 제자들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한 편집상의 묘기로 볼 수도 있고, 예수의 정체에 관하여 헤로데를 포함한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을 불식(拂拭)시키는데 일조(一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고, 그들의 활동내역(6,13)은 이미 복음에 언급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활동들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기되었을 터이고, 더러는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재충전이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재충전이란 한적한 곳으로 떠나 좀 쉬면서 음식도 먹고 편안하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한편으로는 예수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찾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의 일행이 이동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했으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중은 영악했다. 그들은 여러 동네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의 일행을 앞질러 배가 닿을 곳에 이미 가 있었다. 이렇게 예수와 군중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곧 펼쳐질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6,35-44)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배고픔을 위한 빵을 먹기 전에 먼저 먹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빵이다. 무릇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마태 4,4)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로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자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피곤해 하여 휴식을 필요로 함을 알고 계시면서도, 말씀의 빵을 내리신 이유는 군중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말씀의 빵은 인간의 영적(靈的)인 배고픔을 충족시킬 것이다. 그러나 육신(肉身)을 위한 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게 직접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고 명하신 것이다. 불쌍한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또한 모든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기본적 소양(素養)이리라.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할 소양에 관하여는 유교교설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맹자(孟子)에서도 엿볼 수 있겠다. 맹자에는 사단(四端)이라는 대목이 있다. 사단은 사람의 본성인 인(仁)·의(義)·예(禮)·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가지 마음씨를 말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의 형편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경계하는 마음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겸손하여 불의(不義)를 받지 않거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는 마음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밝히고 따지는 마음이다. 이들 마음은 예수님처럼 행동에 옮겼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선 이런 마음을 우리 가슴에 사무치도록 새겨 넣는 것이다.
좀 쉬도록 하여라(6, 30-34)
유광수 신부님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황량한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었다.(마르 6, 7 참조) 지금 사도들이 예수께 보고하는 내용은 파견되어 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관계가 원만한 상태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서 무엇을 묵상할 수 있는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아가듯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루를 어떻게 사용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될 것인가를 계획하고, 낮에는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실천하고(생활하고), 저녁에는 하룻동안 아침에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고 계획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자기가 지낸 하루의 시간들을 예수님께 보고드리는 저녁 기도로 하루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비록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더라도 우리의 모든 생활이 이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게 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면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가족으로서 한 가정에 살면서 그리고 같은 공동체에 살면서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가정이며 공동체인가 아니면 무엇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생활이 이루고 지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 보자.
예수님이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묵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제자들이 활동을 하고 돌아와서 육신적으로 지쳐있는 데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 제자들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라는 것이다. 즉 지친 제자들을 좀 쉬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휴식은 필요하다. 휴식은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즉 음악에 강약이 있고 높낮이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서 일과 휴식은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의 리듬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쉬지 않고 열심히 뛰는 것만을 성공의 비결로 생각하고 지금같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더욱 바쁘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에게 쉰다는 것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고,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쉰다는 것은 경쟁에서 지는 것이고 경쟁에서 지는 것은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에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항상 그 다음 일을 생각한다. 그래서 늘 긴장한다. 이렇게 매사에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이런 생각들이 우리에게서 쉼을 앗아갔다.
우리가 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도 한몫을 한다. 즉 자기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사건건 모든 일에 끼어 들어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늘상 "쉬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 말 이면에는 쉬지 않고 일하는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쉬고 싶다."는 말은 "지쳤다."는 말이지만 막상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혹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고 능력을 과소 평가받는 것이 아닌가 섭섭해한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는 계속 바쁘게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갑자기 병이 나서 병원 신세를 지거나 아니면 과로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정말로 영원히 쉬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수없이 경험하였고 또 보았다. 오늘도 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마치 "바쁘다."라는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바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안절 부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또 바빠야 하고 바쁘기 위해서 왔다갔다해야 한다.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쉼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마무리하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게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2-3) 하느님께서 손을 떼고 쉬신다는 것은 창조를 계속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것들에 복을 주시는 것이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에 결실을 보며, 겨울에 앙상해졌다가 다시 새봄이 오면 물이 오르고 움트는 것, 이 같은 일들이 하느님께서 창조를 멈추시고 쉬시는 가운데 진행된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사건건 간섭하시며 늦겨울에 피어나는 개나리를 일찍 핀다고 벌주시고, 초봄에 눈이 내린다고 탓하신다면 창조의 아름다움이나 신비스런 경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느님이 쉬시는 시간에 온 만물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하느님께서 쉬시는 동안, 아니 하느님께서 쉬시기에 피조물은 더욱 완성으로 나아가며, 우리는 대자연의 신비와 함께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더욱더 찬양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를 멈추시고 쉬시는 동안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고요가 없는 곳에 쉼이 있을 수 없고, 쉼이 없는 곳에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창조가 쉼을 위해 있고 쉼이 더 나은 창조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쉼이 방해받는 데서는 재창조를 의미하는 레크리에이션도 그 기능을 잃고 만다. 이런 데서 사람들의 성격도 성급하게 변해가고 있다. 모든 자연들이 봄에 파릇파릇 새 싹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긴 겨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봄에 개구리가 나오고 온 곤충들이 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동면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여유'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얼굴을 다듬는 방법은 오직 마음의 여유를 찾는 일에서 시작된다. 여유는 '쉼'에서 나온다. 찡그린 얼굴에서는 결코 창조적인 일이 나올 수 없다. 여유 있는 얼굴, 쉬는 얼굴만이 창조적인 일, 구원의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잘 쉰 얼굴인지 점검하기 위하여 가끔씩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예쁜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 주름살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잘 쉬는 얼굴인지, 얼마나 여유롭고 평안한 얼굴인지, 혹시나 지치고 찌그러진 얼굴은 아닌지 스스로 관찰하고 반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예수님의 모델과 한참 후에 찾은 유다의 모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쉴 줄 아는 얼굴과 쉴 줄 모르는 얼굴의 차이이리라.
20세기의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몇 분만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은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슴 뛰는지, 어떤 일을 하는 순간이 가장 기다려지고 설레는지 살펴보라. 자신의 가슴에 가장 많이 머무르는 대상이 바로 당신의 꿈이다(아네스 안).
<목자이신 예수님>(마르 6,30-34)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목자' 라는 말과 '양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18장과 루카복음 15장에 있는 '되찾은 양의 비유'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상황이지만, 지금 2월 7일의 복음 말씀의 상황은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버려두고 떠나시고(마르 6,32), 사람들은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마르 6,33).
목자가 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양들이 목자를 찾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없는 외딴곳으로 가신 것은 사도들과 함께 쉬기 위해서였습니다(마르 6,31).
그러나 군중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쉬는 것을 포기하고 군중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아주 버리신 것이 아니었는데도 군중은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군중의 모습이 물을 주는 목자가 없어서 갈증에 시달리고, 양식을 주는 목자가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버림받은 양들' 같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는 말은, 그들에게 목자가 되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를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구절과 이어서 생각하면, 빵의 기적도 군중에게 주신 하나의 가르침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예수님의 가르침(말씀) 자체가 군중을 배불리 먹인 생명의 양식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을 찾아온 그 군중이 전부 다 예수님을 자기들의 목자로 생각하고 믿었을까?
군중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관심 갖지 않고 그저 자기 몸의 병을 고쳐 주기만을 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르 1,37).
기적의 빵을 먹은 다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요한 6,15)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보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물질적인 빵만 원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곳을 향해서 앞장서서 가라고 목자에게 강요하는 모습입니다.
(만일에 양들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 다닌다면 그 사람은 목자가 아닙니다. 진짜 목자는 양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양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하는지를 알고,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정치'가 아닙니다. 정치는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칙대로 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많은 사람이 반대해도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는 일입니다. 양들은 목자만 믿고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목자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은 목자 없이 버려진 상태로 방황하고 있는 양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양들을 불러 모으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버려진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되찾은 양의 비유'가 좀 더 잘 이해됩니다.
'잃은 양'은 목자가 없거나 목자를 잃어서 그를 찾아서 헤매는 양입니다.
목자 쪽에서도 그런 양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만일에 어떤 양이 목자를 거부하거나 배신하고 목자 곁을 떠나버린다면?
그런 양도 '잃은 양'이기 때문에 목자는 그 양을 설득하거나 타이르거나 꾸짖어서 되돌아오게 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끝까지 목자를 거부한다면 결국 '되찾은 양'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 버림받은 양'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된 목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목자를 찾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은 목자가 없어도 혼자서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자들과 무종교주의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목자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여러 종류의 양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목자 뒤를 따르는 양들이 있고, 중간에 옆길로 새는 양들이 있고, 적극적으로 따르는 양들이 있고, 소극적으로 끌려가는 양들이 있습니다.
목자가 주는 것을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양들이 있고, 주는 것은 싫다고 하면서 다른 것만 요구하는 양들이 있습니다.
몸은 목자 곁에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양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대구대교구의 박성대 신부님 지도 아래, ‘새로운 복음화’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던 피정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쁜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사제성소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생각하고 묵상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피정을 통해 얻은 힘으로 또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여 봅니다.
이번 피정 기간 중에, 인천교구의 원로 사목자 신부님의 강론 말씀 중에 인상 깊은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옛날에 고집 센 사람과 똑똑한 사람 둘이 서로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고집 센 사람은 2*8=17 이라고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2*8=16 이라고 주장했지요. 서로 맞는다고 주장하는 이 다툼이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자, 마을의 원님을 찾아가서 시비를 가려달라고 했지요. 원님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고집 쎈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2*8=17이라 말했느냐?”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 멍청한 놈이 16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이 말에 원님은 “17이라고 말한 사람은 풀어주고, 16이라고 답한 사람은 곤장 열대를 쳐라.”라고 선고를 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너무나 억울해서 다시 하소연하자, 원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8=17이라고 말하는 아둔한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고집 센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싸움도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집 센 사람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까지도 받아들이고 포옹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이 시대에는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바쁨은 다른 이들을 누르고 위에 올라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바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바쁨은 오로지 우리들을 위한 바쁨, 즉 우리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포옹하기 위한 참 지혜 그 자체로 인한 바쁨이었습니다.
‘2*8=17’ 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고집 센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역시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과 시비를 가리느라 바쁘고 정신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데 정신없이 바쁜 우리들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이 독감으로 인해서 꽤 긴 시간을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살, 오한, 고열 등으로 생활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리고 아프다보니 뭐든 것이 다 귀찮아집니다. 심지어는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도 얼마나 귀찮고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 때에 기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때로는 한꺼번에 몰아서 기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몸이 약해지니 의지도 약해지고 그래서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몸이 약해지면 이렇게 정신도 약해집니다. 그런데 정신이 강하면 몸도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만약 몸이 아파서 식사하는 것도 힘들다고 전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어떨까요? 병이 나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음식을 억지로라도 넘기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빠른 회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몸과 정신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 이 세상을 정말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것들입니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표어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나의 삶 안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으니까요.
측은지심
안융 신부님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고 파견된 제자들(마르 6,7 참조)이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돌아와 스승에게 자신들이 한 일과 말씀을 통해서 가르친 모든 것을 전하며 몹시도 기뻐합니다. 기쁨에 들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잠시 외딴 곳으로 가서 쉬도록 권유하십니다. 그러나 쉼의 시간을 통해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도 전에 그들 앞에 많은 군중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였고, 예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며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가르침을 주실 때에 복음사가들은 자주 그분께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었고, 그 마음이 복음 선포자의 기본 소양임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요.
동양의 성현인 맹자 역시 유교에서 모든 덕德의 근본으로 여기는 인仁, 즉 어진 마음으로부터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우러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영성생활을 통해서 완덕完德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사람을 가엾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진정한 완덕의 길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전달된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참된 쉼을 찾아라.
안호석 신부님
본당에서 신자들과의 모임 후나 잠깐의 대화를 하고 헤어질 때면 신자들은 친절하게 “신부님, 들어가서 쉬십시오.” 라고 인사합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말이 듣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쉬면 냄새만 나지요 ? 냄새 나라고 ?” 라고 무안을 줍니다. 아마 대부분 신자들은 사제나 수도자에게 그렇게 인사하는 것 같습니다. 매번 이런 인사를 받아서인지 저는 늘 몸과 마음이 ‘쉬어서 ( ? ) 냄새 날’ 정도로 피곤한가 봅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예수님께 보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초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쉬어라 !’ 는 ‘들어가 쉬세요.’ 라는 의미와 다르겠지요 ?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쉼’ 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11,28 )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성취욕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쉬라 !” 는 의미는 자신의 일과 업적만 보는 시야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시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전도에 따르는 사명과 책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당신과의 일체감을 상실하지 않았을까 염려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육체적인 휴식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휴식도 취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따로 제자들하고만 시간을 보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어수선하고 바쁜 생활 속에서 예수님하고만 따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는 것은 큰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외로움이 그리움 될 때까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외로움.
어느 정도면 적당한 외로움일까?
외로움이 불행이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여야 할까?
아니, 적극적으로 외로움이 행복이려면 어떠해야 할까?
외로움이 쓸쓸함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외로움이 그리움이 되면 좋을 겁니다.
그리움은 사랑이기 때문이고, 그리움은 사람을 귀히 여기게 하며, 자신은 보석 상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너무 많은 일에 치입니다.
그래서 일에서 손을 놓고 쉬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일에 시달리는 것이 사람에 치이는 것보다 차라리 낫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에 치이곤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니 사람이 귀찮아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중한 이웃이 잉여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잉여인간, 그거 심하게 얘기하면 인간쓰레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쓰레기 속에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만 쉴 것이 아니라 사람 만나는 것도 쉬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느낄 때까지 쉬어야 합니다.
외딴곳으로 가야하고 거기서 하느님을 우선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만큼 귀해질 때 다시 이웃에게로 갑니다.
이것이 피정을 떠나는 이유이고, 제가 밤 등산을 혼자 가는 이윱니다.
우리 오늘 피정이나 밤 등산 한 번 떠나보실래요?
측은지심
이진원 신부님
성경을 읽어보면 하느님께서 특별한 자비를 베푸는 상황은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가지실 때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께 저주받는 순간에도 두려움에 떠는 카인이 앙갚음을 받지 않도록 표를 찍어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해도, 그 잘못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통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도 측은한 마음이 드시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얻고 싶다면, 우리 삶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측은해야 한다. 오늘 복음의 군중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처럼?….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약하지만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순간순간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비난을 감수한다면,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기 위해 궁핍한 중에도 내 것을 나누며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분명 측은하게 보시고 큰 선물을 주실 것이다. 잘 살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사제로 살아보겠다고 매달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측은해서라도 날 구원해 주시지 않을까??
또 우리가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할 마음도 ‘측은지심’?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내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며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은 계명이
기억을 부르는 쉼
김효준 신부님
똑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엄마를 향해 손을 휘젓는 행동과 다 큰 성인이 상대방을 향해 손을 휘두르는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목적 없이 하는 행동과는 달리, 그 행동 안에 이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귀한 목적을 갖고 시작했더라도 이 행동이 장기간 반복되다 보면, 행동에만 정신이 쏠려서 본래의 목적을 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봉사활동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활동만 남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의미 있는 결과를 맺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행동의 목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숭고한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한 ‘쉼’을 제안하고 계십니다. 한 발 물러설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한 발 물러선 후 내 모습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동 속에 묻히기 쉬운 숭고한 의미를 순간순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영적 모라토리움(Moratorium)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말이 있습니다.
라틴말로서 ‘채무의 지불 정지’, ‘유예 기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을 때 지불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일정 기간 유예 기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말에서부터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지적, 육체적, 성적으로 한 사람의 몫을 다 할 수 있으면서도 성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의 현상을 일컫는 것으로 이때의 모라토리움은 이런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될 때까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일정기간 유예해 주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모라토리움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사람들이 너무도 몰려들어 먹을 겨를도 없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일종의 휴업 공지처럼 잠시 쉬겠다고 선언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들을 유예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안식일과 같은 개념입니다.
일을 쉬지만 사실은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일을 단순히 쉬는 것과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쉼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상황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힘을 다시 얻고 새로워진 나로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영적 모라토리움을 한 번 선언해보지 않으시렵니까?
나의 일, 남의 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개신교 신자들은 주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천주교 신자들도 요즘엔 많이 주일을 지키며 주님을 찬미하지만 아직도 주일에 일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전에 직장에 다닐 때는 주일은 결단코 쉬어야 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사업을 가지면 주일에 쉬지 않습니다. 잘 될 때는 밤을 며칠 세어도 수익이 늘어나는 기쁨으로 그 힘듦을 이겨냅니다. 만약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못할 것입니다. 나의 이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 힘듦을 잊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일’을 할 때는 ‘남의 일’을 할 때보다 몇 배의 힘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복음전파를 마치고 예수님께로 다시 모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시며 배를 타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함께 떠나십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도 도시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막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도시에 머물지 않고 왜 자꾸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으로 돌아가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지요.”
성인에게는 사막이 바로 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친밀히 만나는 것은 힘들어집니다. 정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당신의 제자들을 데려가신 이유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서 사도들이 당신과만 머물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다시 힘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만 있는 것을 보고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께 동생도 좀 일을 하라고 말씀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외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머물 줄 아는 영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알지만 우리는 사랑으로 그것까지도 넘어설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은 배가 떠나는 것을 보고는 육로를 통하여 배가 도착할 곳에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배보다 어떻게 사람의 발걸음이 더 빨랐는지는 미스터리하지만, 어쨌든 좀 쉬려고 했던 사도들은 사람들을 보고 놀라고 어떤 면에서는 밥 먹을 시간도 주지 않는 사람들이 짜증까지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아서 당신이 직접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스승이 일을 하는데 제자들이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기도와 쉼의 시간도 한 영혼을 더 구하시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뜻 앞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치지 않으시는 이유는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힘들고 짜증난다면 과연 지금 하는 일이 혹시 ‘남의 일’처럼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는지 뒤돌아보아야합니다.
성당 봉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나와 가정을 생각한다면 봉사하는데 쓸 시간을 찾기가 힘듭니다. 아마도 성당 신부님들이 가장 힘든 것이 봉사자를 찾는 일일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를 ‘나의 일’처럼 하는 몇 분만 계시면 어떤 성당이든 활기 있게 잘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이 나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그만큼 사랑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타볼산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영광의 장소입니다. 베드로는 천막을 치고 그 곳에서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바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왜 인간을 위해 내려오셨는지 잘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원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나의 일’처럼 하시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표하는 베드로는 그냥 그 휴식에 머물고 싶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직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배워야 했던 것은 기도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었느냐를 묻고 그 뜻을 ‘나의 일’처럼 수행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기도를 하면 그냥 오래 앉아있는 것을 넘어서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만 하지 못하시는 일을 마치 ‘나의 일’처럼 해내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하늘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마 전 무지 바쁘게 보낸 하루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시외에서 있었던 한 그룹피정을 따라갔다가 귀경길이 막혀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습니다. 이런 저런 뒷정리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3시였습니다.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지만 시간은 이미 3시 반이었습니다.
형제들 눈이 무섭기에 어떻게 해서든 새벽 6시 공동체 미사에는 나와야 했습니다. 묵상까지 끝내고 또 형제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지요. 억지로 아침 식탁에 앉지만 모래알을 씹는 듯 합니다.
형제들 학교가고 나서, 오늘 내로 끝내야할 숙제 한 가지 빨리 끝내고, 아이들에게 눈도장 찍고, "점심 먹기 전에 한 시간만 눈 좀 붙여야지" 하고 침실로 올라가는데, "반가운 상담전화"가 한통 걸려옵니다.
"오전은 안 되겠군" 하고 포기하면서 점심을 먹습니다. "빨리 먹고 올라가야지"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할 수 없이 축구화로 갈아 신었습니다.
재미있게 한 게임 뛰고 나서 "이제는 정말 눈 좀 붙여야지" 하고 올라가는데, 사무실 앞에는 "공포의 면담 고백성사"를 청하는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한 분 한 분 사연을 들어보면 정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기막힌 사연들입니다. 그분들을 가신 후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3시였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고 올라가는데, 또 다른 전화가 걸려옵니다. "어제가 원고 마감 날인데, 어떻게 된 일이냐"는 전화입니다. 또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갔습니다. 침실에는 잠시도 올라가지 못한 채 하루를 마감하고 고개를 드니 시간은 또 다시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눈꺼풀이 무거운 하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살레시오 회원이 되면 내가 3가지는 반드시 책임질 것이니 염려들 말라"고 하셨는데, 그 3가지는 일과 빵과 천국입니다.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처럼 언제나 때가 되면 식사가 마련된다는 것 외에도 늘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찾아오는 사람들,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점심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지나친 과로로 인한 심각한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있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동안만이라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귀신같은 군중들은 족집게처럼 예수님 일행의 거처를 알아 맞춥니다.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청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일이 있습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 탈진상태에 빠져있었던 예수님과 제자들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짜증내지 않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백성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발휘합니다. 단 한 사람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한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늘 제 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신부로 살아가면서 사람을 위해서 손해 보는 시간을 절대로 아깝게 생각하지 마라. 사람을 위해 쓴 시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보낸 시간과 마찬가지다. 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의 말을 정성껏 귀 기울여서 들어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라. 사람에게 투자해라. 지금 자네를 찾는 사람이야말로 자네를 향해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네."
결국 인간이 보물입니다. 인간이 복음입니다. 인간이 하늘입니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함께 설 수 있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코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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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지치기 마련이다.
좋은 일, 좋아서 하는 일조차 지치게 되어있다.
그러니 필요할 때 쉬어야 한다.
시끄러운 것이 세상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나’ 역시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내가 시끄러우니 세상도 시끄럽게 보인다.
결국 내 마음이 시끄러워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럴 때는 쉬어야 한다.
쉰다는 것은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라는 뜻이다.
자신만의 시간이란 하느님과의 철저한 둘만의 시간을 말한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걷고 있는 길,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다. .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홀로 와서 홀로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면서도 함께 아니면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 있는 나를 위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연습해야 한다.
보통 우리는 혼자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기에 더욱 혼자 서는 것을 배워야 한다.
홀로 설 수 없음은 함께 설 수 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간혹 혼자가 좋아 혼자 있는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것은 마음의 병이고 상처이고 도피이다.
혼자의 시간을 갖는 것은 함께 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복음적 의미는 ‘함께 사는 것’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너무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는 한 발 물러나서 고요에 머물러야 한다.
피세정념(避世靜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둘 씩 짝지어 현장 사목 실습을 떠났던 제자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명과 그에 따른 능력을 부여받은 제자들의 사목실습은 그야말로 대대적인 성공이었습니다. 제자들 스스로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어리벙벙했었는데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그 놀라운 기적적인 치유와 구마활동을 자신들의 손으로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목실습 대상자들을 만났습니다. 별의 별 케이스를 다 접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습니다.
제 자들의 체험담을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마침내 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그래, 다들 고생 많았다.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그럼 우리 축하주라도 한잔 할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 말은 다름 아닌 ‘피정’을 좀 하란 말입니다. 피정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데 피세정념(避世靜念)을 줄인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마디 그대로 복잡한 일상생활을 피해(避) 고요한(靜) 곳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입니다. 요즘은 피정에 대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휴식, 주님 안에서의 쉼이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간의 공생활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의 긴 단식침묵 개인 피정을 실시하셨습니다. 피정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는지 헤아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과 권력과 재물이라는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용감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피정을 보면 우리의 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시 답이 나오는군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는 시기가 피정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시기가 피정입니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기가 피정입니다.
알폰소 성인께서는 피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간단하게 세 문장으로 요약해주셨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십시오. 홀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새 사람이 되어 나가십시오.” 간단하지만 정말이지 다 들어있군요. 피정에 참석할 때 ‘좋은데 가서 좀 놀다오지’하는 마음으로 적당히 설렁설렁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꼭 하느님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겠다는, 그분의 현존을 체험해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뭔가 반드시 영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겠다는 간절한 마음도 중요합니다. 피정에 들어올 때는 온전히 비우고, 온전히 내려놓고 온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홀로 머무는데, 그냥 홀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홀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홀로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침묵입니다.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 침묵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피정 집을 나설 때는 피정 전의 세속에 찌든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새로운 나로 거듭 나서 피정 집 문을 나서라는 것입니다.
피정이란 말의 의미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이런 것인 듯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죽음의 삶에서 깨침의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은총을 체험하는 순간. 더 이상 어두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속박 받지 말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충만한 하느님 자비에 푹 잠기는 것. 바로 지금 이순간이 천국이고, 지금이 구원의 때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그러기 위해서 은혜로운 하느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에 머물러 지내는 은총의 순간. 결국 우리 매일의 삶, 인생 전체가 피정인 것을, 그래서 피정처럼 인생을 살고, 인생처럼 피정을 하는...”
지난 연례 피정 중 들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었기에 서둘러 피정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구름이 걷히면서 맑은 하늘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투명하게 열린 하늘 앞에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노라면 반드시 내 인생의 하늘에도 지금의 이 먹장구름이 활짝 걷히고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열릴 거야.’ 퀴퀴하고 꼬질꼬질해보이던 내 인생이 갑작스레 그런대로 봐줄만한 인생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피정의 결실이었나 봅니다.
그러면서 연이어 이런 생각들이 제 머릿속을 강타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신비이며 환희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느님 자비와 은총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우리 평생의 과제는 삶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큰 선물임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학창시절에 항상 1등을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까지 이용해서 공부를 한다면 ‘공부벌레’라고 말하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친구는 놀 것 다 놀면서도 1등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정말로 좋은가보다’라고도 생각되었지만, 하는 행동들을 보면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친구들과 놀 것 다 놀면서 집에 가서는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물어보니 그렇지도 않다고 합니다. 그때 내린 결론은 ‘공부를 잘 하는 유전자가 확실히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저의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공부 잘하는 유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가 다른 친구들과 남달랐던 것입니다. 사실 공부를 잘 못하는 친구들은 공부 못하는 핑계를 수십 가지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날 공부할 양을 다 마친 다음은 무조건 놀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 못할 핑계가 없었지요. 우선순위가 먼저 공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먼저 놀고 난 후에 공부를 하면서 시간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는 반면, 공부 잘 하는 친구는 먼저 공부를 한 뒤에 노니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없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십니다. 왜 어렵냐고 여쭈면,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기도할 시간을 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한 가지는 기도를 굉장한 일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 묵주기도와 염경기도를 바치는 것 등으로 축소시키기 때문에 기도가 짐으로만 여겨집니다.
헤밍웨이에게 창작 활동이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여하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는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글을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창작 활동은 우선순위를 글 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행하기 위해 자리에 앉기만 해도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십자가 앞에 앉기만 해도 절반의 성공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읽거나 묵주기도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주님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쉼을 제안합니다.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바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자 쫓아온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쉬지 않고 또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바쁘고 힘들다는 것보다는 말씀을 듣고 쫓아온 군중과 함께 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의 핑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여다보세요. 남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지, 원망과 투정을 하는지, 칭찬과 감사의 말을 하는지, 과거 이야기만 하는지. 주로 하는 그 이야기가 내 인생이 됩니다.(혜민)
대책 없는 신앙?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좋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대책 없는 긍정적인 생각은 오히려 큰 절망을 가져올 수가 있다고 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의 체험으로 의미치료의 창시했던 빅터 프랭클이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한 작곡가가 희망찬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달 후면 모든 게 끝날 거야. 꿈을 꿨는데 3월 30일에 독일군이 항복하게 되거든.”
하지만 3월 30일이 되었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였습니다. 이 작곡가는 시름시름 앓다가 1945년 3월 31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여기에 더불어 그 상태에 대한 백업플랜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능한 위험 사태를 비관적으로 예상하고 대치할 수 있는 계획도 세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성당에 나가면 무조건 구원을 얻는다는 막연한 긍정적인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 뜻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사는 내 모습과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구체적인 내 삶을 꾸려나가면 어떨까요? 보다 더 주님과 더욱 더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막연하고 대책 없는 신앙은 이제 버려야 할 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수요일에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15년 전에 저는 파주시 적성 성당에 있었습니다. 저는 기억을 못하는데 저를 찾아온 자매님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시 적성에는 군부대가 많았습니다. 아들을 군에 보낸 자매님은 아들을 면회하고 성당에 들려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아들 걱정에 눈물을 흘리는 자매님을 보고, 제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매님 울지 마세요. 저도 군 생활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잘 지켜 주실 겁니다.’ 당시에는 면회를 오신 가족들이 성당에 오셔서 기도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뒤로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자매님의 아들은 군 생활을 잘 마쳤고, 지금은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평화방송에서 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작정 명동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 저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서품식 준비 때문에 저도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은 우연히 저와 함께 일하는 동창 신부님을 만났고, 동창 신부님은 저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자매님을 만나면서 한 가지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따뜻하게 돌보신다는 것입니다.사실 저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모든 것을 저의 판단과 저의 뜻대로 일을 하는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많아도, 많은 일을 하였어도 넘어지는 것은 자신의 뜻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부족해도, 많은 일을 하지 않았어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채워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고 합니다. 일은 사람이 도모하지만 하늘의 뜻이 있어야만 성사된다고 합니다. 15년 만에 만난 자매님이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사람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한쪽은 감정과 예술을 담당하고, 다른 한 쪽은 논리와 이성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가 균형을 이루어 발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너무 감정적이어서 앞뒤 계산을 못하면 큰일을 도모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너무 계산적이어서 늘 현재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가 힘들어 진다고 합니다. 적당한 감성과 앞과 뒤를 분별하는 이성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좌뇌와 우뇌의 발달은 공부만 해서는 발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좋은 습관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만의 소유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고,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물려주었듯이 우리들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에서는 이와 같은 전인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르치지만 그것이 삶속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와 가정에서도 올바른 가치 형성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오늘 하느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이 올바른 분별력을 청하자 칭찬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솔로몬은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재물과, 명성을 찾지 않고,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솔로몬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이 돈과 명예와 권력보다 더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된 지혜의 길을 선택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서품식을 잘 마쳤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새사제와 부제님들께도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세 가지 꼭 필요한 것. -외딴곳, 분별력, 자비행-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일본의 순교성인들 축일입니다. 바오로 미키를 비롯하여 25명의 동료들이 함께 붙잡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 성인들입니다. 바오로 미키의 순교당시 나이를 보니 만33세 우리 주님과 똑같은 한참 젊은 나이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순교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산 햇수가 아닌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은 말씀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에 앞선 현세의 삶에서 ‘세 가지 꼭 필요한 것’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외딴곳의 장소와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복음의 예수님처럼 외딴곳을 마련해야 합니다. 저에겐 새벽마다 강론을 쓰는 수도원의 고요하고 깊은 제 집무실이 외딴곳입니다. 예수님처럼 주님과 새벽의 고독과 침묵중에 깊은 친교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낮에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열려있고 밤과 새벽은 외딴곳의 하느님께 열려 있어야 삽니다. 어제 대구 분도수녀원에서 피정지도를 끝내고 종신서원식에 참여한 후 만 10일 만에 밤 늦게 수도원에 귀원했습니다. 수도원 정문에 내려 여유있게 들어서는 순간 청신淸新한 분위기에 살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물을 떠난 물고기가 맑은 물속으로 들어온 듯 온 몸과 맘이 생기가 도는 듯했습니다. 짐이 무거워 택시를 탔습니다만 수도원 길이 너무 좋아 정문 앞에 들어온 후 문을 닫고 천천히 불암산과 하늘을 보며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사열을 받으며 수도원길, 하늘길을 걸어 귀가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 택시를 탄 경우도 정문앞에서는 꼭 내려서 걸어 들어오는 것은 내 불문율입니다. 말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권한 세상의 외딴곳 같은 수도원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오늘날 같이 생존경쟁 치열한 세상일수록 외딴곳에서의 관상적 휴식은 절대적입니다. 활동과 관상은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관상적 휴식은 없고 활동만 있기에 날로 삶의 중심을 잃고 천박해지는 얕고 가벼워지는 삶입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중심을 확인하고 심신을 충전시키기 위해 꼭 마련해야 할 것이 외딴곳의 장소와 시간입니다.
둘째, 꼭 청해야 할 바 분별의 지혜입니다.
오늘 하느님과 솔로몬이 주고 받은 문답은 우리의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하느님은 솔로몬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를 묻습니다. 관심사는 삶의 표현이자 관심사따라 형성되는 삶의 꼴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후 솔로몬은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청합니다. 무사한 솔로몬의 순수한 동기와 목적이 선명히 드러나는 답변입니다. 솔로몬의 대답에 감동하신 주님의 흔쾌한 답이 참 통쾌합니다.
“네가 자신을 위해 장수를, 자신을 위해 부를,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주겠다.”
세상에 분별의 지혜란 선물보다 더 좋고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력입니다. 잘 듣는 것이 분별력의 우선적 조건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청해야 할 바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을 청함으로 부와 명예의 선물까지 곁들여 받게 된 솔로몬입니다.
셋째, 꼭 행해야 할 바 자비행입니다.
우선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 외부의 필요에 따른 자비행의 응답입니다. 공선사후公先私後, 즉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하는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배를 타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한 외딴곳에는 이미 영육으로 굶주린 군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자 외딴곳에서의 휴식을 접으시고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기 시작합니다. 마치 미사중 성찬전례에 앞선 말씀의 전례를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심신이 지쳤을 당신과 제자들의 휴식에 앞서 군중의 필요에 응답하는 예수님의 자비행에서 하느님의 대자대비의 마음을 봅니다.
오늘 주님은 ‘세 가지 꼭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꼭 마련해 할 것은 외딴곳입니다.
2,꼭 청해야 할 것은 분별력입니다.
3.꼭 행해야 할 것은 자비행입니다.
주님은 매일 성전의 외딴곳에서 관상적 휴식 중에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분별의 지혜와 당신 자비심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멈추어 듣고 살피는 인생 피정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인의 인생은 그 자체가 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친히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성령에 의해 광야로 보내지시어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며 피정하셨습니다(마르 1,12-14). 그분께서는 세상에서 물러나 오직 하느님과 함께 지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공생활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 새벽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고(1,35), 나병환자를 고치신 다음 외딴곳에 머무르기도 하셨습니다(1,45). 오늘 복음에서는 분부대로 파견하였던 제자들이 돌아와 행하고 가르친 바를 보고드리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6,30-31). 예수님께서는 쉼을 가짐으로써 사명의식을 새롭게 하도록 제자들에게 피정 시간을 주신 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레째 되는 날 창조를 완성하시고 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쉼을 위해 창조하셨으며, 쉼을 통해 이레째 날을 축복하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있음 자체로’ 보기에 좋은 존재가 되게 하시고, 영원의 시간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이렇듯 창조의 완성은 쉼이며, 쉼으로써 모든 순간이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있는 축복이 됩니다. 피정은 그런 축복의 여백입니다.
우리는 인생 피정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멈춰야 하느님이 보이고 참 ‘나’를 알 수 있음을 잘 압니다. 인생은 그렇게 멈춰가는 피정임에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멈출 줄 모르고 바삐 움직입니다. 피정이 필요한 줄은 알면서도 시간이 날 때 행사 치르듯 거치는 과정쯤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피정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쉼이요, 멈추어 주님의 영을 호흡하는 카이로스의 연속이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 쉼인 피정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가장 순간으로 여겨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연주하시는 교향곡의 기본 선율이 창조와 쉼이듯 우리 인생도 사랑과 생명을 위한 내어줌과 하느님 안에서의 멈춤의 리듬을 타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일하는 중에 또는 잠들기 전에 멈추어 하느님의 창조의 영 안에 머물러 하느님과 자신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져보십시오. 고요 가운데 나의 생각과 마음과 몸짓을 멈추어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피정의 시간이 이어질 때 생명력을 회복하고 영에 눈을 떠 내가 누구이며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멈추어 피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품을 수 없기에 자기 뜻을 앞세우며, 보이는 것과 들리는 소리, 일시적인 현상과 세상의 유혹들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본받아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피정을 통해 본성을 회복하고 회개할 때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와 자유를 선포하는 행복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잠시 멈추어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이웃의 고통을 듣는 멈춤과 쉼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거룩함으로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