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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탈출기의 말씀 33,7-11; 34,5ㄴ-9.28>
그 무렵
7 모세는 천막을 챙겨 진영 밖으로 나가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것을 만남의 천막이라 불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영 밖에 있는 만남의 천막으로 갔다.
8 모세가 천막으로 갈 때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 서서,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다.
9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10 구름 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서 경배하였다.
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가 진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젊은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천막 안을 떠나지 않았다.
34,5 주님께서 모세와 함께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7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28 모세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 복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 라고 묻자, 그는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들일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 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주님!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 해도, 결코 협조하거나 방조하지 말게 하소서.
가라지를 뿌리 뽑을 수는 없을지라도, 번지는 것을 막고 선을 보호하게 하소서.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이 세상에 판을 쳐도,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내 안에 꿈틀거려도,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가라지에서 밀이 되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밀과 가라지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아서 다 자라고 나서 마지막 때에야 심판이 내려집니다.
지금은 두 자매가 똑같이 맷돌질한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가 똑같이 밭을 간다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밀이고 둘 중의 하나는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당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밀이고 한 사람은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게 밀과 가라지입니다.
내가 밀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개인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밀이었으면 올해도 밀이고, 작년에 가라지였으면 올해도 가라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작은 밀이었다면 올해는 더 밀이 될 것이고, 작년에 덜 가라지 같았다면 올해는 더 가라지 같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더 그리스도답게, 그렇지 않은 가라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더 상반되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가라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물론 밀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 볼 때, 올해 덜 죄를 짓는 사람은 밀이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에서 밀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령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만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있어도 가라지에서 밀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변해가는데 자신이 가라지처럼 변하는지, 밀처럼 변하는지 그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하느님을 똑같이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장.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범죄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절친했던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7살이 되어 아서 부스는 도박과 마약에 빠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급기야 남의 돈에 손을 대며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서 부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해에 민디 글레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였습니다.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32세에 취직준비를 시작한 아서 부스는 범죄자를 받아 주는 직장은 찾을 수 없었고 다시 마약에 중독되어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었고 아서는 얼마 안 가 또다시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같은 중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출발한 둘은 판사와 피고인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민디 글레이저는 말합니다.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때 정말 좋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도 자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거기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서 부스씨, 앞으로 당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슬픈 건 우리가 벌써 이만큼 늙었다는 거죠.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이후 아서는 보석금 4,800만 원의 판결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 부스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비교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교해야 할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의 삶을 비교하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형제임을 믿어야 합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와 아서 부스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우등생이 아니었다면 아서 부스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보며 오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함께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면 그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출발점이 다르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밀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라지가 밀이 될까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더는 그분의 모범과 멀어질 수가 없기에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선봉장이 되었던 영도자 모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의 횡포를 뒤로 하고 갈대 바다를 건너 탈출한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장면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나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지나며 노숙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나그네 신세였습니다.
찌는 듯한 불볕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굶주림과 갈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요즘 캠핑이나 차박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한 달, 일 년 계속된다면 다들 힘들어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며칠만 지나도 어서 빨리 안락하고 쾌적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날 것입니다.
큰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정신없던 모세의 귀에 슬슬 불평불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이런저런 민원이 접수되어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짜증나는 것이어서 화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어서 절망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찾아와서 대놓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 그냥 놔두지 않고 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생고생을 시키는가?
이집트에는 맛난 고기며 신선한 야채나 과일이며, 얼마나 먹을 것이 많았던가?
하루 삼시 세끼 맨날 똑같은 메뉴도 이제 신물이 난다고!
다양한 측면의 위협으로 인해 리더십이 흔들릴 만도 한데, 지도자로서 모세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틈만 나면 공동체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사악한 사람들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결코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 같았으면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내가 지금 왜 이 생고생을 하고 있지?“하면서 당장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백성을 잠깐 떠나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수시로 조언을 구했고, 지혜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변덕투성이인 백성들을 대신해서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강렬하고 간절했는데, 한번 주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밤낮으로 사십 일을 단식하며 기도 바치기도 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탈출기 34장 9절)
이런 모세의 모습을 어여삐 보신 주님께서는 흡족해하시면서 마치 절친에게 하듯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때그때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고, 항상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든든한 바위가 되어주셨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들, 손주 손녀들이 오래 전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는 문제로 마음고생이 많은 자매님들께 제가 단골로 드리는 제안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기도하라고 부탁드립니다.
주님과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자매님께서 그들 몫까지 대신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보시라고 권고해드립니다.
고달픈 광야 생활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무상의 은총>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바오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 6,8-9).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마태 13,43)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축복으로 가득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중한 경고와 질책의 말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말하는 입보다 말하는 귀를, 듣는 귀보다 듣는 입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콩을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고 합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말합니다.
원인과 결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절제와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해야 하며 또한 자기수행을 게을리하자 말아야 한다는 일깨움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경우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는 쇄신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물론 구원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합니다.
인간의 공로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무상의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 집니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
(성녀 벨라뎃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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