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모하드의 왕 무하히드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 왕태자인 알리가 순조롭게 왕위에 올랐다. 20년동안 평화정책을 펼친 무하히드와는 반대로, 알리는 20년동안 끊임없이 전쟁을 주장해왔던 대표적인 주전론자였다. 그런 그가 왕이 되자 주변국들, 특히 오랜 전쟁 상태에 있는 영국과 이탈리아는 극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보고하라!" 무하히드의 사후 새로운 국왕이 된 알리의 첫 외침이었다. 그 외침에 따라 한 사람이 문서철을 바리바리 싸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읽어내렸다.
"예! 먼저 국내 상황을 약식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 알모하드는 동쪽으로는 트리폴리와 사하라 사막을 경계로 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아끼텐과 툴루즈를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중해의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 동맹중인 국가는 없으며 교전중에 있는 국가는 영국과 이탈리아입니다."
여기서 잠깐 숨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문서를 읽어내렸다.
"군사현황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유럽쪽 국경에 4개 군단과 중동쪽 국경에 3개 군단, 그리고 수도 알제리아에 일명 '영주군단'으로 불리는 비전투 1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알리가 말을 끊고 질문했다.
"병사들의 상태는 어떤가? 당장 전쟁에 투입해도 괜찮은가?"
"예! 현재 병사들의 평균 연령은 25세로, 언제든 전장에 투입할 수 있도록 훈련과 무장이 완료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선왕께서 항상 직접 챙기신 분야이기 때문에 완벽에 가깝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좋아! 다음!"
"예! 장수들을 보면 9성의 알리바바 장군을 필두로 5성 장군이 두 명이고 4성 장군이 세 명, 그리고 3성 장군이 7명입니다. 장군층은 그리 탄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음.... 훈련장 하나 개설할 필요가 있겠군. 짐의 생각으로는 포르투갈이 적당할 것 같은데, 대신들의 생각은 어떻소?"
알리가 이렇게 대신들의 뜻을 묻자, 한 대신이 앞으로 나서며 의견을 내놓았다.
"포루투갈이 비록 반골의 성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이미 30년 넘게 반란 한번 일어난 적이 없는 지역입니다. 민심이 이렇게 전하를 지지하는 곳보다는, 새로운 점령지를 상대로 고려하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다른 대신이 앞으로 나서며 앞의 의견을 반박했다.
"아니됩니다, 전하. 자고로 공포와 살육에 관련된 일은 초반에만 크게 벌인 후 바로 끝내는 것이 정석입니다. 계속하면 그것에 반발하는 힘도 증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지역을 지속적으로 억압해야 하는 그런 계획은 득보다는 실이 많사옵니다. 또한 우리 알모하드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막강하기 그지 없습니다. 장군들의 기량이 떨어지는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두번째 대신의 의견에 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훈련장 문제는 보류하는 것이 좋겠구려. 좋소! 그럼, 계속 보고하라."
"예! 시설과 경제와 첩보현황을 한꺼번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철 생산지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공업과 방업이 완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지하드를 준비하고 있으며 현재는 총 50회의 지하드가 가능합니다. 또한 이탈리아 반도 주변을 제외한 모든 해역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이며, 그곳도 언제든 공략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신들이 전 지역에 파견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알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어내린 이 관료는 잠시 숨을 돌리면서, 알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리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으로는 국외 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유럽의 상황은 20년 전과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영국이 동원한 십자군도 벌써 10년 째 툴루즈을 들락날락하면서 간간이 약탈만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싸울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동유럽의 상황은, 몽골이 러시아를 멸망시키고 폴란드를 크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비잔틴도 공략할 계획이라는 첩보도 입수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없나?"
"예! 이상입니다!"
개략적인 현황 보고가 끝나자, 알리는 대신들에게 추상같은 어명을 내렸다.
"툴루즈을 비운다! 그곳의 군단에 철수 명령을 내리도록 하라! 십자군이 툴루즈를 점령하는 즉시 지하드를 선포하고 성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근처에 대기중인 함선들을 전진배치 시키고 그 간사한 무리들을 일소시키도록 하라! 2년 내에 이탈리아의 해역을 장악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 전하!"
알리가 대표적인 주전론자임을 잘 알고 있는 대신들은 알리의 이런 명령에 올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새로이 알모하드의 왕위에 오른 알리는, 왕좌에 앉기도 전에 국내외 현황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요구했었다. 그 결과가 오늘로 이어진 것이다.
"오늘부터 알모하드의 모든 체제는 전쟁수행을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알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알모하드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 알모하드 최악의 왕,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왕,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왕, 피와 공포와 악몽의 대왕, 꼬챙이 왕, 인간 백정, 데스노트, 히틀러의 전생 등등 무수한 별명을 얻으며 숱한 화제를 뿌린 알모하드의 새로운 왕 알리의 행보가 이제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파견된 십자군 병력 200을 지휘하고 있는 3성장군 프레드릭은 올해도 툴루즈를 향해 출정했다. 이번 출정도 저번처럼 민가 몇개 약탈하고 끝날 것이 확실했지만, 안 갈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아~~ 젠장~"
벌써 20번 가까이 지나간 그 길을 또 걸으면서, 프레드릭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10년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 십자군이 결성될 때, 성당기사단장과 기사대장들을 제치고 자신이 이 십자군을 지휘하게 되자, 보병인 상급검병대의 대장이 출세했다고 주변에서 엄청나게 부러워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릴 때 힘들여 글공부를 시킨 것이 이런 대박을 쳤다고 부모님들은 얼마나 자랑을 하셨으며, 아내와 자식들은 영주의 부인과 차기 영주의 꿈에 몇날의 밤을 설쳤던가.
성전에 참여하려고 앞다투어 나섰던 젊은이들의 열정어린 눈동자들도 떠올랐다. 당시는 알모하드의 해군이 이탈리아의 기습공격에 연전연패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툴루즈 공격을 위한 병력을 지원하기로 약속까지 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승리는 기정 사실로 보였었고, 이교도들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툴루즈에 발만 디뎌도 해방군을 맞이하는 민중들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왔던 시기였었다. 종교적 열정과 필승의 예감. 그래서 툴루즈 국경에 도달했을 때에는 병력이 무려 1000을 넘었었다.
아~ 그 위풍당당한 모습이란....
하지만 알모하드의 국경을 넘어 툴루즈에 이르면서부터 파국이 시작되었다.
영국과 이탈리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알모하드의 대응은 단호했다. 우선 툴루즈와 아끼텐에 병력이 증원되었다. 지금은 원래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초기에는 각각 3000의 병력이 두 지역에 배치될 정도로 알모하드는 살벌하게 대처했다. 또한 북유럽에 배치되어 있던 함대들이 귀환하여 이탈리아의 함대를 강하게 압박해 들어왔다.
결국 툴루즈를 넘어선 십자군들은 정면으로 대결할 엄두도 못낸채 후퇴하고 말았었다. 추가 병력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4성장군이 지휘하는 3배의 병력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200을 약간 넘는 수준의 병력밖에 남지 않았다. 1000의 병력이 200이 된 사연은 정말 말하자면 한도 없이 길다. 단지 현재 주둔지의 민심이 굉장히 흉흉하다는 사실만 알아두기 바란다.
이제는 가족들도 더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왕도 자신들을 잊어버린 듯, 더 이상의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현지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험악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떼강도로 전업한 성당기사단의 이야기도 가끔씩 들려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어도 알모하드의 경계태세는 예전과 변함없다. 아니, 더 강력한 무장을 갖춘 자들로 교체되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한숨밖에 안나왔다.
"에휴~~"
프레드릭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명도 없었다. 10년 동안 철벽같은 경계태세를 보였던 알모하드의 병사들이 정말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함정을 의심하여 정찰병들을 풀었지만 역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정보 하나가 들어왔다. 툴루즈의 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정말 황당하군."
"그 큰 성이 다 어디로 간거야?"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인지 병사들이 한마디씩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프레드릭도 병사들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지만, 이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쨋든 자신들은 툴루즈를 정복, 아니 해방시킨 것이다.
그래서 프레드릭은 검을 들고 목청껏 외쳤다.
"병사들이여~~ 기뻐하라! 우리는 해냈다!! 해냈다!!!"
프레드릭의 외침에 병사들은 처음에는 멍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프레드릭과 같이 외쳤다.
"와아아~~"
"우린 해냈다!!"
"Victory!!!"
그로부터 일년동안, 십자군들은 정말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조국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 부모님께, 오늘 재물조사를 실시하여 200플로린의 수입을 얻었습니다. 이제 곧 이곳의 영주가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어서 짐싸서 이사올 준비를 하십시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성을 지어 놓겠습니다. - 5월 20일
- 모즈구스 신부님께, 게다가 이들은 무슬림은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신성한 재물조사에 항거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참담하기 그지 없는 마음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영적인 사명감에 힘을 내어 편지를 씁니다. 신부님의 명성이 이곳 변방에까지 널리 퍼져 있고, 그 명성이 이 미천한 신의 종에게도 들려왔다는 것은 실로 신의 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들랜드에서의 영적인 과업을 정리하시는 대로, 이곳으로 와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당신의 신성한 포교가 이곳을 악에서 구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 7월 3일
- 나의 친구 리카르드여, 요즘들어 자꾸만 불안해지고 있는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게나. 우리들 200 가지고는 이곳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데, 하루 빨리 본국에서 대규모 주둔군을 보내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네. - 7월 29일
- 리카르도여, 하루 빨리 이곳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야 하는데, 병사들은 자꾸만 내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 없네. 이들은 자신이 정복자라도 되는 양, 차마 말못할 행동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네. 그리고 이곳의 주민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초빙한 모즈구스 신부님의 포교활동은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일세.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서 고문하고 죽이는 그 행태는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네. 살아서 개종을 시켜야지 죽여서 개종을 시키면 무슨 소용인지... 아무래도 조만간 반란이 일어날 것 같네. 친구여, 가족들에게 전해주게나. 내가 다시 연락을 주기 전까지 이곳으로 오지 말라고. - 9월 4일
- 사랑하는 나의 줄리에타, 하지만 걱정할 것 없소. 나와 함께하고 있는 병사들은 10년간의 싸움으로 다져진 정예병들이오. 급작스럽게 모은 알모하드의 병사들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소. 그리고 본국에서도 성전의 의지에 불타는 병사들을 대거 보내준다고 했소. 당신과의 결혼반지에 맹세하건데, 반드시 살아서 당신의 품안에 돌아가도록 하겠소. 사랑하오. - 10월 8일
"1만..."
프레드릭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됐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항구를 지키던 병사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 이곳에 진군하고 있는 알모하드의 병력이 1만이라는 것이?"
"예. 툴루즈 각지에 상륙한 알모하드군의 병력은 1만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 거침없이 움직였는데, 이미 퇴로가 차단된 상태입니다."
그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프레드릭은 옆의 병사에게 급히 물었다.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그 병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알모하드의 대병력에 질려 퇴각했다고 합니다."
프레드릭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런가... 그런 것이었나..."
프레드릭은 평소에 불안해 하던 사실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전신이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대규모의 주둔군이 몽땅 빠져나가고 성까지 철거된 모습을 보고, 예상은 했었다. 자신들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대로 물러서기에는 그동안 허비한 10년이 너무나 아까웠고, 이 위기를 넘기기만 하면 황금빛의 미래를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 1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다. 민심을 잡고 방비태세를 갖추고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 결실을 얻기에는 1년은 너무 짧았고, 가지고 있던 자산으로 승부를 걸기에는 1만은 너무 압도적이었다.
프레드릭은 자신의 미래가 산산이 부서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쨋든 출정준비를 하라. 퇴각로를 찾아야 한다!"
알모하드 지하드군을 지휘하게 된 알-무슈림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동정의 빛이 서리고 있었다. 대책을 강구하고 분주히 움직였겠지만, 저 영국 십자군은 결국 막다른 길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들이 갈수 있는 모든 길에는 각각 1천에 달하는 알모하드군이 가로막고 있었고, 그들의 손길을 피해 몰리다가 당도한 끝에는 자신이 이끄는 지하드군의 최정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됐지만, 저들이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프레드릭은 떨리는 손을 들어 반지에 입을 맞췄다. 벌써 10년동안 만나지 못한 아내 줄리에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명한 것처럼, 평생을 함께 하기로한 징표인 결혼반지도 선명한 황금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빛을 보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인 것 같았다.
"적들이 온다! 신의 전사들이여, 원진을 펼쳐라!"
프레드릭의 일갈에 영국의 십자군들은 떨리는 몸을 추스리면서 원형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가슴에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그리고 후들거리는 자신의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프레드릭은 목청을 다해 외쳤다.
"나와 함께 10년동안 고락을 함께 한 형제들이여! 오늘 우리는 중대한 신의 시험에 직면해 있다!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저 악의 무리들의 세력은 오늘 절정에 달해 있다! 그 앞에 선 우리는 오늘 폭풍앞의 등불처럼 꺼져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이 전투를 신이 보고 계신다! 저 조국의 동포들과 가족들이 보고 있다! 신 앞에, 그리고 그들 앞에 당당할 수 있도록, 한 조각의 용기를 모으자! 위대한 서양인이여!!!"
"와아아!!"
프레드릭의 외침에 병사들도 무기를 들고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에게 당면한 공포는 너무나 거대해서, 프레드릭의 외침에 동조하지 않는자들도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프레드릭에게 발악적으로 외쳤다.
"흥! 개똥밭에 굴러도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말도 몰라? 말씀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신과 나한테 아무것도 해준것 없는 동포들한테 잘 보이려고 죽는 것은 싫어! 나는 살고 싶어!"
그 병사의 말에 프레드릭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돌렸다.
"형제여! 신앙보다도 신념보다도 더 강한 삶의 욕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비루한 삶을 살더라도 그것을 더 원한다면, 떠나라! 떠나서 저들에게 항복하여 자비를 빌어라! 하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신을 등지고 얻은 삶 속에서 너는 지옥에 있는 것 같은 참혹한 비명을 질러댈 것이라고! 그리고 죽은 후에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면 지금 떠나서 저들에게 항복하라! 우리들은 너를 붙잡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비난보다 더 심한 폭언을 들은 병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면서 원래 대열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몇몇의 병사들도 굳은 얼굴을 한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신이시여, 이 전투를 지켜보소서!"
프레드릭과 마찬가지로 알-무슈림도 병사들에게 연설을 했다. 하지만 프레드릭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기다리던 때가 왔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악한 무리들을 단죄할 때가 왔다! 저들이 우리들의 성지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상기하라! 저들이 우리 이슬람의 아녀자와 아이들을 어떻게 죽였는지를 상기하라! 저들의 군화발에 짓밟힌 이 툴루즈의 형제들이 어떻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를 들어보라! 신께서 말씀하신다! 신을 섬긴다고 말로만 외치면서, 신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행동만 하는 저들의 오만을 단죄하라고! 오늘은 저들이 신의 분노가 정녕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와아아!!"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알모하드의 병사들이 무기를 두드리며 알-무슈림의 연설에 열광했다. 하지만 한 병사가 지나친 열기 때문이지 아니면 뭐에 씌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연설에 태클을 걸었다.
"뭐, 사람 사는데는 다 똑같은 것 아닌가요? 우리라고 해서 특별히 자비롭다거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도 신의 이름으로 무식한 짓 많이 저질렀는데, 특별히 잘난 것도 없이 너무 몰아세우지 맙시다."
분위기를 확 깨는 이 말에 알-무슈림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알-무슈림은 삿대질까지 해가며 즉각 반박에 나섰다.
"형제여! 똥과 된장이 비슷해 보인다고 어찌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십보 백보라고 하지만, 그 오십보의 차이가 어딘가! 우리가 언제 저들의 땅에 쳐들어가서 살육을 하고 약탈과 강간을 한 적이 있는가? 교리의 해석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싸운 적은 많지만, 언제 마녀사냥 같은 미친 짓거리를 한적이 있는가? 대답해보라! 형제여!"
얼굴까지 벌개진 알-무슈림의 외침에 그 상대는 기죽은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유럽에 쳐들어간 적이 없는 것은, 그쪽이 낙후되어 쳐들어가도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랬잖아요. 비잔틴에는 맨날 쳐들어가면서..."
병사의 이 말은 알-무슈림의 이어진 외침에 묻혀졌다.
"형제여! 적을 눈앞에 둔 지금 이런 말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적과 싸워야 할때! 자, 진군하라!"
"와아아!!"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지하드!"
알모하드군의 진군이 시작됐다. 병사들이 지하드를 외치면서 앞으로 걷기 시작했고, 알-무슈림도 지하드를 외치면서 조금전에 공방을 벌인 그 병사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약 스무걸음 걸었을 때, 알-무슈림은 상큼한 표정을 지으며 그 병사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이 개새끼! 오늘 밤에 내 막사로 나와!"
원진을 단단히 구축한 영국군은 알모하드군이 사방을 포위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것이리라. 빠져나갈 틈도 없이 포위되자, 영국의 십자군 병사들이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용기가 밑빠진 독의 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험! 험!"
알-무슈림이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가급적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뭐, 항복을 해도 저들을 살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왕의 어명에 따라, 저들은 최대한 고통을 겪다가 꼬챙이에 꽂혀서 처형된 후 국경에 일렬로 늘어서게 될 운명이었다.
말하자면, 저들은 본보기다. 알모하드의 적이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 각인시켜주기 위한.
그렇다고 해서, 그 계획을 저들이 알리는 없기에, 알-무슈림은 이렇게 앞으로 나와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프레드릭!! 항복하라!!
"몸값만 지불하면 풀어주겠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영어를 구사하는 유식한 알-무슈림의 외침에 영국의 병사들은 더욱 크게 동요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프레드릭을 바라보았다.
프레드릭은 고향을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의 가족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이 아닌, 자신이 항복한 후 주위로부터 경멸받고 따돌림받는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프레드릭도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각각의 시선들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외치고 있었다. 살고 싶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시선을 알모하드군에게 향하고는 검을 들어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신이시여, 오늘 당신의 종이 당신께 갑니다!"
그리고는 함성을 지르며 알모하드군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병사들도 절망과 발악을 담아 함성을 지르면서 알모하드군을 향해 달렸다.
"와아아!!"
십자군의 돌격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알-무슈림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것도 괜찮겠지. 창병대! 5열 횡대 밀집대형! 충격에 대비하라! 측후면 공격부대들은 예정대로 포위망을 굳히면서 전진하라! 이 싸움은 이긴 싸움이다! 방심했다가 어이없이 죽는 바보는 되지 마라!"
정면을 향해 창병대가 내민 창끝이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일어나 십자군을 위협했지만, 십자군의 돌격속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광기에 휩싸여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이야아!!!"
큰 외침과 함께 알모하드군의 코앞에 도달한 프레드릭은 검을 휘둘러 단번에 다섯개의 창대를 걷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알모하드군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프레드릭의 검끝이 닿은 곳은 알모하드 병사의 머리가 아닌, 그가 들어올린 방패였다. 프레드릭의 검술이 신기에 달해 있고 그 힘이 일격에 사람을 두조각 낼 정도이기는 하지만, 집단을 상대로 할 때에는 그 운용방법의 폭이 극단적으로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 또한 너무나 쉽게 간파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뛰어난 전사인 프레드릭도 일개 병사 한명을 죽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강한 일격을 방패로 받은 알모하드 병사의 몸이 뒤로 주춤거렸다. 하지만 낮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던터라 자세가 크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세를 바로잡고 있는 동안, 뒷열의 병사들이 창으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약간의 훈련만 받으면 가능한 기술이지만 전장에서의 위력은 컸다. 프레드릭은 삽시간에 열 군데를 공격당했다.
"이익!"
프레드릭은 맹렬히 검을 휘둘러 창을 쳐냈다. 하지만 하나의 공격을 막으면 다른 곳에서 공격이 들어오는데다, 한순간도 쉴 새 없이 연이어 공격이 들어오는 데에는 방법이 없었다. 프레드릭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여유를 찾은 프레드릭은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참담한 신음을 흘렸다. 함께 돌격했던 선두의 병사들이 모두 창에 꿰어 죽어 있었던 것이다. 역시 밀집창진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그리고 셀수도 없이 많은 창끝을 내밀고 있는 알모하드 창병대의 진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아..."
프레드릭은 나직이 탄식했다. 저런 밀집창진을 깨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정면을 피하고 측면이나 후방으로 돌아서 공격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물샐 틈없이 포위된 자신들이 무슨 방법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장렬하게 전사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저런 바보같은 자들을 봤나... 전사의 시대가 군인의 시대로 바뀐지 언제인데, 아직도 저런 방식을 고집하는 거야? 다굴에 장사가 있나? 무협과 전쟁을 구별못하는 놈들한테 한수 가르쳐 줘야겠군. 수업료는 목숨으로 받고. 명령을 전하라. 포위망을 좁히는 속도를 빠르게 하라."
알-무슈림이 툴툴거리며 십자군들을 비웃었다.
전황은 완전히 결판났다. 십자군의 맹렬한 공격은 알모하드 창병대의 창과 방패에 가로막혔고, 포위망이 좁혀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운신의 폭도 함께 좁아졌다. 동료끼리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최악인 상황에서 끊임없이 날아드는 공격의 파도를 맞으니, 십자군들은 하나 둘 쓰러지거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용기를 내라! 천국의 문이 가까워지고 있다!"
프레드릭이 목청껏 외치며 사기를 높이려고 노력했지만, 창에 꿰이는 병사들의 비명과 항복을 외치면서 자비를 바라는 병사들의 울음소리가 그의 외침을 짓눌러 버렸다. 검조차 제대로 휘두를 수 없을 정도로 대열이 압축된 것을 확인한 순간, 프레드릭은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단말의 함성을 지르며 프레드릭은 앞으로 돌격했다. 좌우 120도의 각도에서 찔러오는 20개의 창날을 걷어내며 적의 품안에 파고 들어간, 프레드릭은 한발을 힘차게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힘껏 검을 찔렀다.
"퍽!"
"컥!"
프레드릭의 검은 방패를 관통하고 그 뒤의 병사의 가슴을 뚫었다. 사태파악을 채 못한 얼굴로 주저 앉는 알모하드 병사. 그의 눈동자에는 최소 10개의 창에 꿰뚤린채 쓰러져가고 있는 프레드릭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1만대 200의 전투, 정확히는 900대 200의 전투는 각각 15대 150의 사상자를 내면서 종결됐다. 항복한 50명의 십자군들은 무장해제를 당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동료들과 함께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까지 썬텐을 하게 된다.
툴루즈전을 시작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할 알-무슈림은 수도 알제리아에 소환되어 툴루즈전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보고했다.
"잘했네. 비록 꼬챙이로 끝마무리를 하지 않았지만, 저 야만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기에는 충분하지. 다음에는 영국 전역을 일제히 공격할 것이니, 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
"예, 전하!"
알-무슈림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알모하드의 왕 알리는 말끝을 늘어뜨리며 알-무슈림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알-무슈림은 왼손의 중지에 반지 하나를 끼고 있었는데,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왕의 시선을 의식한 알-무슈림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는 그 반지가 예전에 십자군 대장인 프레드릭이 끼고 있던 반지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 반지는 뭔가?"
왕이 이렇게 묻자 알-무슈림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당혹해했다. 그는 급히 감정을 추스리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전하. 십자군 대장으로부터 얻은 전리품입니다."
"오오, 참으로 범상치 않은 뭔가가 느껴지는구려. 어디..."
알리는 자신도 모르게 알-무슈림의 반지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알-무슈림은 자신도 모르게, 정말 자신도 모르게 반지를 낀 왼손을 보호하듯이 오른손으로 감싸며 급히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얼굴을 험상궂게 찡그리면서 크게 위협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크아악!!"
"!!!" "!!!" "!!!" "!!!"
숨막힐 듯한 적막감이 대전을 휘감았다. 알리는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 그대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대신들도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당사자인 알-무슈림은 사태를 파악하고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마.. 마..."
알-무슈림은 덜덜덜 떨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없이 쪼그라지면서 애기와도 같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마이 프레셔스..."
왕궁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알-무슈림을 성토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알리는 지난번의 공을 참작하여 약간의 징계만 내린다. 하지만 그의 장미빛 인생길이 늪지대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1년후의 군대 재편성 결과 생긴 12개 군단장의 이름에 그는 없었다.
ps1. 요즘 스토리 연재란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네요. 빨리 활성화가 돼야 할텐데... ps2. 얼마전에 RTW를 구했습니다. 오프닝하고 튕깁니다. 당분간은 MTW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ㅠㅠ ps3. 앞으로의 연재속도는... 쿨럭!! -_-;; |
첫댓글 ㅋㅋ 마이 프레셔스... 음 긴 글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들어가있는 유머때문에 질리지가 않는군요.. 좋은연재 부탁드립니다,
간만에 짬내어 들어왔는데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제~발 자주 올려 주세요.^_^
정말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_^ RTW 하다가 MTW 로 돌아가고 싶을정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