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전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과,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한다. 전통적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로 옮겨 지낸다.
말씀의 초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축복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빵을 먹고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시어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신다(복음).
제1독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4,18-20
그 무렵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1,23-26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속가
<21절부터 시작하여 짧게 할 수도 있다.>
1. 찬양하라 시온이여 목자시며 인도자신 구세주를 찬양하라.
2.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3. 생명주는 천상양식 모두함께 기념하며 오늘특히 찬송하라.
4. 거룩하온 만찬때에 열두제자 받아모신 그빵임이 틀림없다.
5. 우렁차고 유쾌하게 기쁜노래 함께불러 용약하며 찬양하라.
6. 성대하다 이날축일 성체성사 제정하심 기념하는 날이로다.
7. 새임금님 베푼잔치 새파스카 새법으로 낡은예식 끝내도다.
8. 새것와서 옛것쫓고 예표가고 진리오니 어둠대신 빛이온다.
9. 그리스도 명하시니 만찬때에 하신대로 기념하며 거행한다.
10. 거룩하신 말씀따라 빵과술을 축성하여 구원위해 봉헌한다.
11. 모든교우 믿는교리 빵이변해 성체되고 술이변해 성혈된다.
12. 물질세계 넘어서니 감각으로 알수없고 믿음으로 확신한다.
13. 빵과술의 형상안에 표징들로 드러나는 놀랄신비 감춰있네.
14. 살은음식 피는음료 두가지의 형상안에 그리스도 온전하다.
15. 나뉨없고 갈림없어 온전하신 주예수님 모든이가 모시도다.
16. 한사람도 천사람도 같은주님 모시어도 무궁무진 끝이없네.
17. 선인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달라 삶과죽음 갈라진다.
18. 악인죽고 선인사니 함께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
19. 나뉜성체 조각마다 온전하게 주예수님 계시옴을 의심마라.
20. 겉모습은 쪼개져도 가리키는 실체만은 손상없이 그대로다.
21. 천사의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음식 개에게는 주지마라.
22. 이사악과 파스카양 선조들이 먹은만나 이성사의 예표로다.
23. 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24. 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복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1ㄴ-17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양식은 공동체를 만들고 음식은 외로움을 만든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이 살과 피는 탈출기의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모세처럼 광야에서 헤매는 백성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십니다. 이 빵을 먹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체성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밝혀집니다. 먹는 것은 이것과 직결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102회에 9년째 구토하는 금쪽이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금쪽이는 14세 외동아들입니다. 머리가 좋은 아이였지만 구토증세를 달고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울렁거리고 메스껍고 복통이 나며 이내 구역질을 합니다. 응급실에 가서 링겔을 맞아도 계속 구토가 나옵니다. 이 증상이 9년째 지속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금쪽이는 건강문제로 등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쪽이는 초등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중학교 복학은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건강과 학업이 동시에 걱정됩니다. 금쪽이는 제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사는 게 지옥 같다고 합니다.
금쪽이의 증상은 6살 때부터 장염을 앓은 후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병원을 전전하며 괜찮아지는가 싶었는데 11살쯤 다시 증상이 심해져 시골 학교로 전학을 하였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고 8번이나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금쪽이는 대인관계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을 할 때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상대가 말하는 단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가 구토를 하는 이유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빠가 글씨 연습을 하자며 앉히자 숨이 거칠어지고 트림이 나왔고 구토 전조 증상까지 보였습니다. 금쪽이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강요에 학교가 싫어졌습니다. 남들과 비교되는 게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공부 멈춤 선언’을 하라고 부모에게 말합니다. 일단 아이가 살아야 하니 그렇습니다. 부모가 주는 ‘밥’ 안에는 부모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부모는 밥을 주며 자기 뜻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이 버거울 때는 부모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뜻이 부담스러워 뜻을 거부하니 몸이 음식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몸과 직결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은 어떤 뜻이 들어있을까요? 공부를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 9,12)
황량한 곳은 말 그대로 하면 사막처럼 텅 빈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텅 빈 곳을 당신 성체와 성혈로 가득 찬 곳으로 변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하셨을까요?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4-17)
사막도 배불리 먹을 것이 있고 그 음식을 함께 먹을 공동체가 있다면 더는 황량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바뀝니다. 이를 위해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양식을 먹는 자녀들은 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향으로 양식을 내어줍니다. 한 부모의 양식을 나누어 먹는 것 때문에 형제들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이 잘못되었을 경우는 위 금쪽이처럼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사회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 가족의 지웅이는 동생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동생을 잘 보살핍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그러기를 바라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의 음식을 거부한다면 동생과의 사이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양식 안에는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음식은 사회성과 직결됩니다. 어쩌면 그 사회성이 양식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24회에도 식음을 전폐한 아이가 나옵니다. 음식을 먹으려고는 하지만 삼킬 수가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목에 꽉 찬 것 같다고 하며 음식을 넘기지 못합니다. 이 금쪽이도 수액으로 연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언제부터 그랬나 살펴보니 엄마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엄마가 직장을 나간다고 다 아이들이 식음을 전폐할까요? 엄마가 일을 나가는 것이 아이에게 그만큼 커다란 충격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자 금쪽이는 사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아이가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로부터 양식을 충분히 먹지 못하면 결국엔 동생과의 관계도 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고, 또 동생과도 원만해지려면 아이는 음식이 아닌 양식을 더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토하며 양식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식은 부모의 사랑이고 부모의 사랑은 곧 형제간의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성체를 영하며 성당에서 형제들과의 친교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부모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형제간의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절로 한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 형제간의 친교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미사 할 때 형제간의 친교로 이어지지 않는 성체는 진정한 양식이 아니고 음식일 뿐입니다. 음식을 먹기 때문에 친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미사만 하고 집에 돌아가고 친교 공동체, 봉사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성체성사를 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무리가 형성되지 않는 성체성사는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냉담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냉담은 성체를 영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 성체를 영하면서도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이 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하느님 자녀들끼리 서로 친교를 맺는 형제 공동체는 만들어져야 합니다. 양식은 곧 친교 공동체를 지향함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코넬 대학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인간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즉,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가는지를 본 것입니다. 결론은 길어봐야 30개월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두근거리는 감정을 가져야만 사랑이 있는 것일까요?
어느 영화에서 “나를 보면 아직도 심장이 뛰어?”라고 묻는 부인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연애 4년에 결혼 3년이야. 아직도 심장이 뛰면 그건 심장병 같은데?”
사랑은 처음에 분명히 떨리고 설렙니다. 그 단계를 거치면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지만, 늘 숨 쉬고 있어서 익숙해지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마냥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과의 사랑 관계가 익숙해집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합니다. 예전의 기쁨을 또 설렘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사랑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만약 설렘이 없어졌다면 지금 익숙해지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 주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일회적 사건으로 당신 사랑을 끝내지 않고, 성체와 성혈을 주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입니다.
미사 때마다 이루어지는 그 사랑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 주님을 모실 때 느꼈던 설렘과 기쁨도 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공기와 같이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꼭 필요한 우리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영적 양식은 이렇게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은 계속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셨던 사랑을 나의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기만 하는 사랑을 넘어서 주는 사랑이 되어야,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잘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걸 보진 못한다(공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