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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0만 양병설은 꽤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 말들이 많은 편이지요. 개인적으로 10만양병설에 대해 생각한 것은 있었으나 크게 관심은 없었는데 오항녕-이덕일 논쟁을 접한 후 우연히 집에서 10만 양병설과 관련되어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하면서 한번 써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작년부터 계획하던 것입니다만 사정상 지금 와서야 올리게 됬네요. 내공이 얕긴 하나 한번 끄적여보겠습니다.
-과연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을까? 이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난립하고 있다.-
<오항녕-이덕일 논쟁>
2009년 5월 한겨레는 이덕일의 글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이글루스 등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모두 무시되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덕일은 한겨레에서 글을 연재하면서 10만양병설을 비판했다. 이덕일은 십만양병설이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하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율곡전서 안에 있는 김장생이 지은 이이의 행장을 보고 썼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율곡의 행장에서 유성룡이 후회하면서 '이 문성(文成)은 진실로 성인이다'라고 했는데 이이가 문성의 시호를 받은 것은 인조 2년. 즉 유성룡이 사망한 지 17년 후라며 이를 근거로 10만 양병설이 김장생 등 서인들의 조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 이외에도 처음에는 연월미상이던게 송시열의 율곡 연보에서 임진왜란 10년 전이라고 나오는 등 후대로 갈수록 연월이 더 정확해지는 이상현상이 발생한 것과 군역을 피해 백성들이 도망친다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했다고 이이가 주장하는 부분을 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이덕일의 전형적인 '서인, 노론은 악의 축.' 주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연재 당시 이덕일은 '반박 환영'의 입장을 밝혔지만 아무래도 진짜로 반박문이 투고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이 부분에 대해 당시 이글루스에 쓰여진 글들 중 하나에서는 반박문을 보냈는데 한겨레에서 씹었다는 식의 글이 있었습니다만)
- 이덕일은 반박 환영이라고는 했지만 실제 반박이 올거라고 생각치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아주 강력한 반박이 오게 되는데-
그런데 반박문을 투고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오항녕 교수였습니다.
- 무명의 오항녕 교수는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이덕일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오항녕 교수는 이덕일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10만 양병설 관련 주장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오항녕 교수는 신도비문과 사계집에는 해당 부분이 이 문정(文靖)으로 나와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한 후 1814년판 율곡전서에는 이문성이라고 나와있으나 1749년판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으로 나와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이이가 황해감사 시절 군적을 잘 정비한 것을 들어 10만 양병설을 옹호하였습니다.
* 이 문정은 송나라의 명신 이항을 지칭하는 말로 선견지명이 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항녕 교수는 유성룡의 후회하면서 한 말은 '이이는 참으로 이항 같이 선견지명이 있는 위인이구나'라고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덕일은 바로 반격했습니다만 군적 정비와 10만 양병설의 연관성에 대한 지적을 제외하고는 그닥 논리 등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엉뚱한 서지학자 운운 했다가 바로 오항녕 교수에게 '자신의 논거가 무너진 것도 모른다'는 비판을 들었습니다. 이 논쟁은 이렇게 일단락됬습니다. 다만 오항녕 교수는 이때의 논쟁을 자신의 저서인 '조선의 힘'에 그대로 실어버려서 이덕일에게 또 한 방 먹였습니다.
* 여담으로 한국고전번역원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의 신승운 교수는 율곡전서의 형태 서지에서 이문성과 이문정 문제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에 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이 형태 서지가 언제 올라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것이 이 논쟁 이전에 올라왔다면 이는 이덕일이 자료 확인을 제대로 안 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상식적인 의문들>
일단 이 논쟁 자체는 오항녕 교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만 그렇다고 이것이 10만 양병설의 승리라고 보긴 무리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무리가 있거든요. 일단 여기서 10만양병설과 관련되어 생각해볼만한 2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1. 10만 양병이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군대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듭니다. 많은 돈을 잡아먹는 고로 전근대국가 예산의 상당수는 이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순수한 소비집단일뿐 그 자체로 소득이 나오지 않습니다. 재정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터지면 국고가 부족해지는데 이는 군대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지는 데 반해 수입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과는 시스템이 다른 유럽쪽의 이야기지만 16세기 후반 상비군을 운용하는 유럽 국가들은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정도밖에 없었습니다.(스페인 20만, 프랑스 8만, 네덜란드 2만) 조선의 경우 인구가 천만명정도인 고로 역시 인구가 비슷한 스페인처럼 10만이 넘는 군대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스페인이 저 정도의 군대를 운용하고 있던 것은 워낙 많은 곳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조선은 그렇게 재정이 넉넉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조선은 백성들이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이념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세금을 마구 거두는 것은 욕 먹기 딱 좋은 행위였습니다. 연구가들에 의하면 당시 조선의 세율이 생산량의 10~20% 정도였을 거로 보던데 이 정도로는 10만 군대를 창설하기도, 유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경장을 외치며 민생 안정을 중시하던 이이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이가 순수한 소비 집단인 군대를 10만이나 늘리자는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입니다.
2. 10만이나 양병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단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시점은 1580년대로 보입니다. 일단 이덕일 등의 말을 빌리자면 1583년이군요. 이 때 조선이 잘 알고 있었을지도 의문이지만 한 번 주변 지역들의 정세를 살펴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명은 조선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고로 조선을 침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진족은 아직 분열되있었으며 누르하치 역시 건주여진에 속한 자신의 부족들 중 한 부족의 수장 자리에 막 오른 상태였습니다. 물론 조선은 간혹가다 여진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만 여진족 공격에 필요한 병력은 많아야 3~4만이면 충분했습니다. 10년 후 임진왜란을 일으킬 일본은 노부나가가 죽은 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오미지역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호죠, 다테가 건재하며 쵸소카베, 시마즈가 각자 자신이 위치한 시코쿠, 큐슈를 막 통일하려고 하는 찰나였습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일본의 상황을 이이가 알았을지도 의문이지만 적어도 당장 일본의 위협이 가시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가 10년 후를 예상하고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게 뻔한 10만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주장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제 3의 자료>
오항녕-이덕일 논쟁에서는 나름 많은 자료들이 나왔습니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율곡전서 및 그 속에 있는 김장생의 행장,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집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항녕 교수도, 이덕일도 모두 언급하지 않은 다른 서적에서 10만 양병설과 관련되어 뜻밖의 기록이 실려있었습니다. 그 서적은 바로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입니다.
어우야담 인륜 편의 덕의 부분에 이 10만 양병설에 대한 부분이 실려있습니다. 여기에 의하면 니탕개의 난이 진압된 후 이이가 "예로부터 나라에서 한번 군대를 쓰면 전쟁이 그치질 않습니다. 나라가 백년 평안하면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비로소 군대를 썼으니, 이후로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미리 팔도의 정예병 10만을 선발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할 것을 청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오항녕-이덕일 논쟁에서 중점이 된 유성룡의 후회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세에 나는 소인의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다. 평소에 숙헌이 10만 군사로 대비할 것을 청했는데, 내가 사리에 어두운 짓이라 여겼으니, 지금 크게 후회된다. 숙헌은 높은 식견이 있었다. 우리 무리는 부끄러워 죽겠다. 애석하구나. 그때 내가 경연 자리에 참여하여 그 말에 찬성하지 않았음이여!"
숙헌은 이이의 자입니다. 그리고 어우야담은 율곡전서(161)보다는 늦지만 적어도 1620년에는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보다는 명백히 빨리 완성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북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인조반정 후 역모 혐의로 아들과 함께 사형당한 인물입니다. 즉 서인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성혼의 문인이기는 했으나 파문당했다고 합니다.)
이 제 3의 자료는 이덕일이나 오항녕 교수 모두의 의견을 반박할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이의 자인 숙헌이 언급됬다는 것 자체가 두 사람 모두에게는 그닥 좋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덕일부터 언급하자면 어우야담은 이덕일의 주장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어우야담에는 월까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니탕개의 난을 언급함으로써 언제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어우야담에서는 이문성이나 이문정이 아닌 숙헌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보기도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유몽인이 서인에 의해 참수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서인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인물의 저서에서 숙헌이란 글자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내용의 기록이 나왔으니까요.
오항녕 교수는 이덕일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이 어우야담으로 말미암아 주장의 손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우야담은 야담집입니다. 그런 율곡전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야담집에서 숙헌이란 글자로 유성룡의 후회가 등장했다는 것은 곧 10만 양병설 자체가 원래 야담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율곡전서에 나온 기록은 제자들이 야담으로 돌아다니던 것을 이율곡을 높이기 위해 집어넣었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특히 행장이란 것이 고인의 좋은 행적 위주로 넣는 사사로운 기록이라 과장이나 실제 확실하지 않은 소문도 넣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더군다나 율곡전서가 편찬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로 선조실록의 기록 부실이 잘 말해주듯이 임란 이전 선조때의 문헌 자료가 조선시대 답지 않게 부실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더욱 확실해질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10만 양병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단순한 개인의 망상일수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율곡이 병조판서로 재직하였고 평소 경장을 외친 만큼 국방 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유성룡이 국방 문제에 대한 이이의 견해에 예산 등의 사유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만 양병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람들은(유성룡도 포함해서) 이이가 말했던 국방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생각하며 후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도 부실해진 상황에서 기억이 옅어지고 왜곡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이이가 10만명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했었지'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야담으로 퍼지고 퍼지면서 이이의 제자들은 율곡전서를 편찬하며 행장으로 선생님의 좋은 업적이라 하여 그 야담을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는 조작이나 왜곡이 아니고 그들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선생님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었다고 기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몽인은 야담으로 퍼진 약간 다른 이야기를 수집하여 적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우야담의 기록과 율곡전서가 내용이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어우야담이 야담집이라는 겁니다. 즉 사료적 가치가 낮은 편입니다. 더군다나 유몽인이 사형당한 후 어우야담은 편집되지 못한채 전승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본들이 존재하고 서로간의 차이도 있습니다. 특히 제가 참고한 것은 만종재본으로 유몽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편차와 수록 순서로 재편집된데다가 원본에서 많이 변개된 도남본을 따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일단 제가 가진 책에 의하면 원본에 가까운 청패본과 대부분의 이야기가 동일한 성격을 띄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다른 판본의 어우야담을 확인하지 못한 고로 이 부분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일단 역자 현혜경씨에 의하면 자신의 견문에 입각하여 기술했고 사실에 입각하거나 사실지향적인 서술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근본이 야담집이니)
<여담: 율곡 이이가 주장한 국방 개혁은 어떤 것일까?>
일단 위에서 저는 이율곡이 국방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국방 문제에 대해 나름 인식이 있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이가 구상한 국방 개혁은 어떤 것인지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당시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한 고로 어쩔 수 없이 김장생이 쓴 행장을 위주로 참고하자면 이이는 1583년에 여섯 조목을 아뢰었는데 이 중에는 군마의 비치, 군민의 양성, 변방 방비의 강화 등이 있었습니다. 군민 양성은 민생 안정과도 연관이 있긴 하지만 국방과 관계되었다고도 볼 수 있고 변방 방비, 군마 비치는 확실히 국방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오항녕 교수는 이이가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군적을 정리했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이이는 당시 200년 가까운 평화에 젖어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진 국방 문제를 정비하고자 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진 군마의 문제나 군적의 문제를 재정비하고 이를 토대로 변방의 방어를 새롭게 하고 군대를 다시 정비하려던 것입니다. 이는 10만 양병과는 거리가 있지만 재정비 위주이니만큼 민생을 안정시키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국방 개혁입니다. 이이가 하려던 국방 개혁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감히 한 번 추측해봅니다.
첫댓글 전공자이신가요? 깔끔한 정리와 식견 에 감탄하고 갑니다.
음 그럴듯 하네요
10만 솔직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걍 그런갑다했는 데 몇년전에 뻥구라임을 알았죠
헌데 조선전반의 경세기조를 돌이켜보면 세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기만 한다면 10만이 그렇게 과한 수치도 아니라서... 10만이라해봤자 잡색군이나 속오군, 지방번병 등등 차포다때고 나면 중앙의 위(병영)에는 한 병영하나당 한5천명 증강할까 말까 아닐까요. 수군까지 계상하면 더욱더 나락일테구요.
오히려 번병이나 속오군, 잡색군, 수군따위를 포함해서 1만양병설이라던가 하여간 더 낮은 수치라면 그거야 말로 말장난으로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닌가요? 전 오히려 10만이야 말로 당대 현실에서 국방개혁론을 들고나오는데에 있어서 최소한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만.
조선 조세제도는 그 시대의 한계인데 이걸 바꾸는거 자체가 좀 무리일 터이고, 게다가 오히려 꼼꼼하게 호구를 조사하여 세금을 걷는다는거 자체가 당시 기준으론 학정인 즉 세제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건 애초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지 싶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문란해진 체제를 정비한다, 라는 취지에서 일단 규정상의 군제라도 제대로 돌아가도록 시도해보는거라면야 가능하겠지만 그거도 별로 효과를 보긴 어렵지 싶네염.
저도 마냥 '이이->10만 양설'로 알고 있었는데 잘 읽고 갑니다. 정말 깔끔하게 글 잘쓰시네요;
확실히 군대를 크게 만드는 건...의미없는 일이죠; '정복 전쟁'을 하려고 들지 않는 이상..혹은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나..
근데 침략이나 대외적인 공격은 솔직히 여진족이랑 왜구 정도뿐이였고.(마이너 세력) 대국인 중국(명)은 우호적이니 패스고..
그건 그렇고 만약 '왜'(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조선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특히 '지리적인 크기를'..
제가 알기로는 조선이 왜 국의 국토가 얼마나 되는 지도 모르고 있던걸로 압니다..(실제 몇 몇 유명 고지도등을
보면 일본이 몇 분의 1 사이즈로 나온 곳도 더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