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8-07 주일오전예배
‘마리아의 헌신’
성경/ 요12:1-8
인사
할렐루야! 오늘 예배에 함께 하신 여러분을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우리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오늘은 8월 첫 주일예배입니다. 우리 교회 달력에 있는 8월의 주제 말씀은 “마리아의 길-헌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달동안 살면서 내가 주님을 위해,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마르다, 나사로, 마리아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 받으시기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그동안 자주 찾았던 나사로집이 있는 베다니에 방문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있는 자리가, 내가 있는 직장이, 내가 속한 공동체가 예수 믿는 나로 인하여 특별해 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 기좌리가, 보개면이 기좌리교회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베다니를 다시 찾으신 예수님을 위해 식사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나사로의 집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도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 보면 식사자리가 마련된 곳은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면 베다니에 들르셔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있는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시몬의 집이었을까 짐작해보면 시몬의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다가 예수님이 낫게 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언제 한번이라도 예수님께 식사 한끼라도 대접해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베다니 마을에 오시니까 자기가 꼭 대접해 드리겠다고 부탁을 한 것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몬의 집에 모여서 같이 잔치를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여러 번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대접한 경험이 있었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 집으로 가서 같이 잔치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일행이 도착하고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손님 대접에 분주했고 나사로는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으로서 식사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정황을 오늘 본문 2절에 소개합니다. “(요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세 오누이 중에 마리아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비상한 헌신을 드린 마리아
3절 말씀입니다.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 등장하는 단어들을 한번 되새겨 보시기바랍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이라는 단어들이 주는 느낌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리가가 지금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극히 값이 비싼 것입니다. 최고급 명품입니다. 질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얼마나 주님께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었습니다. 여자가 머리털로 다른 사람의 발을 닦는 것은 보통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노예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고귀함을 지극히 비싼 향유를 한 근이나 아낌없이 쏟아 부었을 뿐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노예보다 더 낮추어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음으로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고귀함을 표현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 그가 누린 감격의 깊이와 주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진실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와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마리아가 쏟아 부은 향유의 향기가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향기 속에는 마리아의 순전하고 진실한 믿음과 감사의 향기로움이 함께 배어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의 향기로움이 어떠한가를 잘 나타냈습니다.
이전에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눈물과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던 죄 많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2년 상반기에 있었던 사건이니까 지금 이 사건으로부터 약 1년 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것그 사건을 보면 이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게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 시몬이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은혜를 많이 깨달은 자는 그 만큼 많이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말이나 행동, 시간이든 재물이든, 무슨 봉사든 간에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인가가 잘 드러납니다. 안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분노한 가룟 유다
그런데 베다니 바리아가 예수님에게 값진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보고 분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려 했던 마리아를 비난합니다. “(요 12:4-5)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여기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가 얼마나 값비싼 것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에는 삼백데나리온 이상에 팔아라고 합니다. “(막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당시 한 데나리온은 성인남자가 하루 일하며 받는 일당입니다. 그러니까 300일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 휴일을 생각하면 1년 동안 일해서 번 돈을 한 번에 예수님께 부어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가룟유다만 마리아를 비난한 것처럼 나오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다른 제자들도 이 의견에 동조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값비싼 것을 한꺼번에 부어드리는 것은 누가 보아도 너무 과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이렇게 행동을 했을까요?
마리아를 위한 예수님의 변호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 12:7-8)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의 행동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 행동에는 제자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깊은 뜻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가 그처럼 감격하게 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다소 막연하게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후에는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고 승천하실 일까지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의 시역에 있어서 중차대한 일들이고 예수님이 지상사역을 대표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이 행동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참으로 범상치 않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단순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을 넘어서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음을 담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빠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소생하게 됨에서 예수님께서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일에 근거와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미리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인지 모르지만 얼마 있지 않아 예수님에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오랜만에 예루살렘으로 오셨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 아니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기로 한 것입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한다면 이런 식으로 미리 장례를 준비한다는 심정으로 한 것입니다. 아주 비상한 시기에 아주 비상한 헌신이었습니다. 항상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때에 맞게 헌신해야 할 것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감격과 마리아의 헌신
예수님은 이러한 마리아의 헌신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십자가의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경험하는 자마다 이러한 마리아의 심정이 떠올려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마리아는 이렇게 표현했구나” 꼭 이런 방식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나의 재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재능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나의 젊은 날을 주께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주님을 위해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복음의 은혜를 입은 자의 믿음과 사랑과 헌신의 향기로움이 주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모인 곳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러한 마리아의 감사와 믿음과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헌신의 이유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헌신과 감사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행동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와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가룟 유다는 주님과는 영적으로 관계 없는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요한은 유다가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자주 돈을 훔쳐간 사실을 언급합니다.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즉 유다의 행동이 우발적이기 보다 평소에 돈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습관의 결과임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내가 드려야할 것도 안 드리면서 누구 더한 감사를 표현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비난하고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 할 때가있습니다. 비난하지 말고 자기가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 헌신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던 의사가 갑자기 병원을 그만두고 빈민촌에 들어가 빈민들을 돌봅니다. 차라리 그 뛰어난 의술실력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후원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됩니다.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헌신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우리는 과연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그 감사를 드러내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재물, 시간, 내가 늘 관심 쏟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면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을 증명합니다. 얼마나 감사하는가가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인 우리의 바른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헌신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죽은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해야 할 헌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싶은데 일단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나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다고 합니다. 대학 들어가서는 취업하면 잘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결혼하고 애를 낳고 하면서 생활이 좀 안정되면, 애들이 다 크면 하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결국 제대로 신앙생활 못하고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하기가 쉽습니다. 오늘 드릴 헌신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게 있는 향유옥합